2부. 25화
9존 2층의 핵심.
그것은 삼천 마리에 이르는 웜즈를 모두 해치우는 것.
이곳에 우두머리는 없다.
마치 개미 군집을 연상케 하는 삼천 마리의 웜즈가 곧 스테이지의 주인이고 핵심이며 다음 층계로 향할 수 있는 트리거였다.
‘적어도 보통의 플레이어들에게라면 그렇겠지.’
하지만 헨리에겐 달랐다.
이곳 삼천 마리에 이르는 웜즈들은 헨리에게 있어 단순히 해치워야만 하는 존재들이 아니었다.
헨리는 금방이라도 터져 나갈 것 같은 굴속의 웜즈들에게 손을 뻗었다.
그런 다음 다섯 손가락을 천천히 오므리기 시작했고.
“끼기기긱?”
“끼리리릭?”
“끼익?”
압사당하기 직전의 웜즈들이 돌연 한쪽 방향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마치 세탁기 속에 돌아가는 빨래처럼.
그래서일까?
웜즈들은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이건 단순한 회전이 아님을. 손가락을 반쯤 오므린 헨리가 밸브 잠그듯 손을 비틀기 시작했다.
“끼아아아아!!”
뿌드드드득!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
동시에 웜즈들은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비명은 오래 가지 못했고 삼천 마리의 웜즈들은 이전 단계의 플레이어들처럼 몸이 비틀려 터져 나갔다.
푸부부붓!
헨리가 쳐놓은 얇은 얼음막에 웜즈들의 피가 뿌려진다. 아니 뿌려지다 못 해 고였다. 삼천이란 숫자는 절대 적은 수가 아니었으니까.
“으…….”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강이 됐다.
웜즈의 최후를 지켜보던 렌은 결국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때였다.
[ <하층로 : 9존 2층>을 클리어 하셨습니다. ]
[ 스테이지 클리어 기여도를 측정합니다. ]
[ 측정 완료. ]
[ 최고 기여자는 <헨리 모리스>님입니다.]
[ 축하드립니다! <헨리 모리스>님에게 스테이지 최고 보상을 지급합니다. ]
[ <웜즈의 원념>을 획득하셨습니다. ]
[ 모든 스탯이 5 상승합니다. ]
[ 5,000 어비스 포인트를 획득하셨습니다. ]
눈앞에 떠오르는 아카이브의 알림들.
9존 2층이 클리어 됐다.
허나 렌이 가져 갈 수 있는 건 이번에도 아무것도 없었다. 탑은 무임승차에 엄격하니까.
이윽고 벽면에 3층으로 향하는 문이 생겨나자 렌이 약간은 질린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난 대체 어떤 사람이랑 다니고 있는 거지?’
1층서부터 느끼고 있던 사실이긴 했지만 아무리 이계인이라도 이렇게 강해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그렇기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강한데 탑은 대체 왜 들어온 건지 말이다.
해답을 얻기 위해 렌이 물었다.
“헨리 씨.”
“말해라.”
“대체 정체가 뭐예요?”
“마법사.”
“네?”
그 말에 헨리는 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냈다. 차원상인 허멀트가 준 명함이었다. 그것을 찢자 두 사람 앞에 허멀트가 다시 나타났다.
“반갑습니다. 허멀트입니다. 우리 고객님, 헤어진 지 얼마 안 됐는데 벌써 또 저를 찾아주셨네요?”
허멀트는 괜히 반가운 척 아양을 떨었다. 허나 살갑게 구는 허멀트와는 달리 헨리는 용건만 뱉었다.
“필요한 게 있다.”
“네네, 그러시겠죠. 이번에는 뭐가 필요하세요?”
“생령환이 필요하다.”
“…네?”
“없나?”
헨리의 물음에 허멀트는 이번에도 표정을 굳혀 보였다.
대체 생령환은 어떻게 안 거지?
딱 이 표정이었다.
허나 그게 전부였다.
헨리가 생령환에 대해 어떻게 알았든 자신은 상인으로써 본분만 다 하면 될뿐.
왜 그런 말도 있지 않은가.
너무 많이 알면 다친다고.
그렇기에 파리처럼 두 손을 비비며 방긋 웃었다.
왜냐면 생령환은 이전 층에서 거래했던 것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비싼 것이었으니까.
“당연히 있습죠. 근데 가격은 아시죠?”
“대금은 저것들로 치르지.”
헨리는 말과 함께 허멀트 뒤에 푹 고여 있는 것들을 가리켰다. 헨리가 좀 전에 비틀어 학살한 웜즈 시체들이었다.
허멀트는 처음에 그게 뭔지 몰랐다. 허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들이 자신이 아는 그것들이라는 걸 깨닫고 두 눈이 커졌다.
“어, 어?”
“방금 죽은 신선한 시체다. 피가 굳지도 않았고 심장도 모두 온전하지. 물론 수작업으로 뽑아내야겠지만 말이야.”
커진 두 눈에 이어 허멀트는 조용히 입을 벌렸다.
세상에, 그러고 보니 여긴 웜즈들이 나오는 곳이었지?
처음에 웜즈를 알아보지 못한 이유는 이곳에선 못 보던 구조물인 얼음굴이 있었기 때문이다.
허나 붉은 피에 잠겨 있는 것들이 모두 웜즈라는 걸 알게 됐을 때 허멀트는 헨리의 능력에 또다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신선한 웜즈들의 피와 심장은 항상 수요가 있지.”
헨리가 자신의 말에 쐐기를 박았다.
모든 걸 알고 있으니 괜히 수작 부리지 말란 뜻.
그 말에 허멀트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젠…… 아니 앞으로도 헨리를 상대로 바가지 같은 걸 씌울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니까.
“당연히 그래얍죠. 그럼 거래를 진행토록 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허멀트는 품에서 가죽 주머니 하나를 꺼내 유리창처럼 얇은 얼음막에 주머니의 주둥이를 붙였다.
그러자 붙인 주둥이 속으로 창 너머의 것들이 청소기처럼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심지어 속도도 몹시 빨랐다.
사체 전부가 주머니 속으로 사라지는데 걸린 시간은 겨우 몇십 초 남짓.
이윽고 사체 수거를 마친 허멀트가 주머니를 떼서 주머니 표면에 적힌 글자를 보았다.
“흠, 딱 삼천 마리 분이군요.”
그건 단순한 아공간 주머니가 아니었다. 저울과 수를 세는 기능도 겸한 상인이라면 필수적으로 가지고 있어야 할 특별한 아공간 주머니였다.
수량 확인을 마친 허멀트가 헨리에게 ‘생령환’이라 불리는 동그란 환약 한 알을 주었다.
[ <생령환>을 획득했습니다. ]
물건을 받은 헨리는 생령환의 옵션을 확인하고 인벤토리에 넣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허멀트가 헨리 앞에 다가와 헤실헤실 웃으며 명함 한 장과 포션 몇 병을 함께 내밀었다.
“다음에 또 이용해 주십사 하고.”
헨리는 그것을 받아 넣었다.
그런 다음 다른 것을 요구했다.
“검 한 자루가 필요한데.”
“검이요?”
“옵션 붙은 건 필요 없다. 대신 튼튼했으면 좋겠군. 쉽게 부서지지 않는.”
“아, 칼이라면 저한테 널린 게 칼이죠. 근데 이건 혹시 거래인지……?”
“그렇다면 우리 인연은 여기까지겠지.”
헨리의 단호함에 허멀트가 비지니스 미소를 지었다.
“하하,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당연히 농담입니다! 검 한 자루쯤이야 서비스로 당연히 드릴 수 있죠! 그래서, 길이는 어느 정도?”
“적당한 거면 된다.”
“무게도 상관 안 하시나요?”
“튼튼하기만 하면 된다.”
“그래요?”
헨리의 요구에 허멀트는 눈을 잠시 좁히더니 가방 안에서 수수해 보이는 대검 한 자루를 꺼냈다.
헨리의 요구대로 보통의 칼들보단 강성이 훨씬 좋은, 굉장히 튼튼한 검이었다.
‘하지만 무게가 장난 아니지.’
어지간한 스탯으론 이 검을 휘두르기는커녕 들지도 못하리라.
허멀트가 웃으며 검을 건넸다.
“이건 어떠십니까?”
“흠.”
헨리는 그것을 받아 몇 번 정도 휘둘렀다. 그러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인벤토리에 넣었다.
“다음에도 이용하도록 하지.”
태연하기 그지없는 모습.
그 모습에 허멀트가 질렸다는 듯 고개를 살짝 내저은 후 다시 문을 열고 사라졌다.
다음 층계로 넘어가기 전 헨리가 렌에게 물었다.
“계속 따라올 테냐?”
“네? 아, 네, 뭐 그래야죠?”
“흠.”
헨리는 무어라 말하려다 이내 관두었다. 그리곤 발걸음을 움직였다.
“같이 가요!”
헨리가 다음 층계로 가는 문을 향해 발을 내딛는다.
*[ <하층로 : 9존 3층>에 입장하셨습니다. ]
[ 현재 위치는 <하층로 : 9존 3층>입니다. ]
빛이 반짝였고 시야에 색채가 채워졌다. 렌도 마찬가지였다.
세상이 다시 바로 섰을 때, 헨리와 렌은 왠 낯선 마을 한가운데 서 있었다.
복장은 기존에 입고 있던 복장이 아닌 중세 유럽풍의 떠돌이 용병들이나 입을 법한 옷이었고 허리춤에는 이 나간 검도 한 자루씩 채워져 있었다.
그때 두 사람의 눈앞에 아카이브의 새로운 알림들이 떠올랐다.
[ 스테이지 미션을 부여합니다. ]
[ 악을 찾아 섬멸하십시오. ]
“악?”
악이라.
어쩌면 이번 스테이지는 생각보다 빨리 클리어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렌은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게 악이라 함은 대부분 몬스터일 테고 헨리의 무력에 빗대어 봤을 때 이번 스테이지 또한 압도적인 실력 차로 클리어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에.
그때, 헨리가 첨언했다.
“나무를 보면 안 된다.”
“예?”
“숲을 봐야 한다.”
“……?”
갑자기?
그때였다.
“놈들! 놈들이 왔다!!”
누군가의 외침.
이름 모를 어느 마을 사람의 외침이었다. 그 외침을 기점으로 마을 사람들이 우르르 어디론가로 숨었다.
헨리도 렌을 데리고 몸을 숨겼다.
장소는 근처 건물 중 가장 높은 집.강자인 헨리가 지붕 위에 납작 엎드려 숨자 렌이 의아한 듯 목소리를 줄여 물었다.
“헨리 씨, 왜 숨으시는 거예요? 헨리 씨 정도라면 누가 와도 분명…….”
“쉿.”
헨리는 대답 대신 검지를 입술에 붙였다.
이윽고 ‘놈들’이라 칭해진 녀석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말을 타고 있었으며 어깨나 머리 정도에만 철붙이를 덧댄 가죽 갑옷들을 입고 있었다.
‘산적인가?’
산적처럼 보이진 않는다. 그러기엔 놈들의 복장이 통일성 있었으니까.
그때 헨리가 말했다.
“영주군이다.”
“영주군요?”
“그래. 영주가 부리는 사병들이지.”
영주라니?
심지어 생긴 것도 아시아 쪽은 아닌 게 정말 중세 유럽풍의…… 마치 판타지 세계에서나 볼 법한 그런 구성들이었다.
영주군의 리더…… 그러니까 군장쯤 되는 자가 외쳤다.
“빌어먹을 놈들, 그새 또 달아났어. 다들 흩어져서 내 앞에 끌고 와!”
“옛!!”
군장의 외침에 부하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런 다음 얼마 후, 곳곳에서 비명 소리가 들리는 듯하더니 아까 전에 숨은 마을 사람들 중 절반 정도가 영주군의 손에 잡혀 끌려나오게 되었다.
군장이 칼 대신 몽둥이 비슷한 걸 들고 마을 사람들 중 하나를 가리켰다.
이장이었다.
“말미를 줬더니 또 이딴 식으로 꽁무니를 내빼? 네들이 사람 새끼야?”
“하, 하지만 준비해 보려 해도 저흰 정말로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번에 난 홍수 때문에 저희도 흉년을 겪은지라……!”
“그래서 어쩌라는 거야!!”
분노한 군장은 결국 참지 못하고 몽둥이를 휘둘렀다. 허나 그 몽둥이는 이장에게 닿지 못했다.
“그만하세요.”
몽둥이를 잡은 자.
다름 아닌 렌이었다.
“노인을 상대로 뭐 하는 짓입니까?”
“넌 뭐냐? 못 보던 얼굴인데?”
“방랑용병입니다.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중요하지. 외지인 주제에 감히 영지 일에 끼어들려 하다니. 마지막으로 경고하마, 외지인이면 오지랖 말고 꺼져. 안 그럼 험한 꼴을 당하게 될 테니까.”
“하!”
그 말에 렌이 코웃음을 쳤다.
그런 다음 허리춤의 이 빠진 검을 뽑아 군장에게 들이밀며 외쳤다.
“안 봐도 뻔하네. 니들이 악의 근원이겠지. 헨리 씨! 얼른 나와 보세요! 얼른 이놈들을 처리하고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가자구요!”
그러나.
“헨리 씨?”
지붕 위에 있어야 할 헨리가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