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5화
확실했다.
착각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클레버를 신으로 만든 건 자신이고 신이 된 클레버를 마신의 자리에 앉힌 것도 자신이었으니까.
그때, 불현듯 조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곳에 가게 되면 네가 잘 아는 익숙한 기운을 추적해 보도록 해. 그럼 모든 걸 알게 될 테니까.”
익숙한 기운.
그게 설마 신력이었을 줄이야.
‘칼리번의 학살자에 이어 이 힘…… 클레버야, 확실해.’
이로써 헨리는 조커가 모시는 존재가 클레버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어비스에 있느라 돌아오지 못한 거였어.’
도망치거나 숨은 게 아니었다.
애초에 의심하지도 않았지만 막상 그 사정을 알게 되니 입이 썼다.
‘그동안 홀로 분투하고 있었겠구나.’
탑에서 호위호식하며 살았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직접 겪어 보고 어비스가 어떤 곳인지 잘 알았으니까.
그런데 참 이상했다.
클레버와 헤어진 지 어느덧 수천 년.
그런데 녀석은 자신이 어비스에 입탑한 걸 어떻게 알았을까?
어비스에 입탑했을 때, 헨리조차도 클레버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는데 말이다.
‘자세한 건 직접 만나 물어보면 알게 되겠지.’
그러니 지금은 녀석의 부하로 추정되는 조커의 조언대로 움직여야 할 때.
헨리는 라의 눈을 이용해 클레버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으로 이동했다.
‘이쯤인가.’
헨리가 도착한 곳.
그곳에는 태산 같은 거대한 바위산이 하나 있었다.
얼마간 바위산을 응시하던 헨리는 눈살을 좁히며 오른손 검지를 들었다.
그리고 하늘 위로 뻗은 다음 반으로 가르듯 아래로 내리그었다.
그러자……
저걱!
마치 날카로운 칼로 잘라 내듯, 거대한 태산이 반으로 갈라져 버렸다.
하지만 태산은 완전히 갈라지지 않았다.
정확히는 태산은 갈라졌되 그 안에 든 것만 멀쩡했다.
‘석상?’
태산 안에 왠 거대한 석상이 두 팔을 모은 채 웅크리고 있다.
그때였다.
[ <초대형 파수꾼>을 발견하셨습니다. ]
[ <초대형 파수꾼>을 깨우시겠습니까? ]
어비스 아카이브가 저 녀석이 누군인지 알려 주었다.
초대형 파수꾼.
그게 바로 놈의 이름이었다.
‘초대형 파수꾼이라…….’
이름이 참 단촐하다.
그래서일까?
놈은 증명의 관을 지키는 수호자가 아닌 작은 파수꾼과 같은 하찮은 졸개일 거라는 예감이 강하게 든다.
허나 지금은 그런 것보다 클레버가 우선이었다.
헨리는 라의 눈을 이용해 클레버의 기운을 추적해 나갔다.
그런데 클레버의 기운이 초대형 파수꾼 내부에서 느껴졌다.
그에 헨리는 다시 한번 손을 들었다.
그런 다음 아까와 마찬가지로 마력을 벼려 하나의 크고 거대한 무형검을 만들어 초대형 파수꾼에게 내질렀다.
그러자……
[ <초대형 파수꾼>이 깨어납니다. ]
녀석이 깨어났다.
그와 동시에, 잠에서 깨어난 놈이 놀라운 반사 신경으로 팔을 들어 헨리의 무형검을 막았다.
투쾅!
묵직한 소리.
그 소리에 헨리가 옅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다른 놈들과는 좀 다른 모양이로군.’
그래.
그래야 초대형이라는 이름값을 하지.
이윽고 초대형 파수꾼이 남은 손으로 헨리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콰아앙!!
굉음.
그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엄청난 속도였다.
마치 베테랑 복서의 잽 같은 그런 속도였다.
허나 녀석의 주먹이 헨리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헨리에겐 항상 무형의 마력 실드가 둘러져 있었으니까.
허나 확실히 놀라웠다.
그도 그럴 게 여지껏 상대해 온 녀석들 중 이 녀석의 공격이 가장 강력했기에.
‘하지만 그게 전부지.’
허나 그게 전부였다.
그럼에도 놈은 여전히 종말보다, 관리자보다 약했다.
헨리는 검지를 들어 이번에는 세로가 아닌 가로로 빠르게 그었다.
그러자.
서걱!
초대형 파수꾼의 목이 순식간에 참수되어 바닥에 떨어졌다.
쿵!
참수된 초대형 파수꾼의 목이 바닥에 떨어진 순간이었다.
[ <초대형 파수꾼>을 쓰러뜨리셨습니다. ]
단촐한 메시지.
그리고.
파스스스……
참수된 목과 더불어 거대하기 그지없는 초대형 파수꾼의 육신이 먼지가 되어 스러 사라졌고.
‘저기 있군.’
스러진 놈의 육체로부터 클레버가 남긴 흔적으로 추정되는 것이 옅은 빛을 내뿜으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헨리는 고도를 낮춰 클레버의 흔적 앞에 섰다.
그것은 주먹만 한 크기로 맑은 얼음 구슬처럼 한없이 투명했다.
허나 그 테두리는 에메랄드 빛으로 빛났다.
앞뒤가 맞지 않는 말처럼 들리겠지만 사실이었다.
테두리에서 은은하게 뿜어지는 이것은 오직 가우스의 신들만이 볼 수 있는 특유의 신력이었으니까.
‘일부러 숨겨 둔 거군.’
실체를 투명하게 만든 건 외부로부터 위장하기 위함이겠지.
제법 세심한 디테일이 돋보였다.
헨리는 그것에게 자신의 마력을 투여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빠각!
그것은 마치 캡슐 장난감처럼 반으로 쪼개졌고 헨리는 그 안에서 주먹보다 조금 더 작은 반지함 하나를 얻을 수 있었다.
반지함은 쉽게 열렸다.
안에는 묵색 반지가 들어 있었다.
묵색 반지를 집어 든 헨리가 중얼거렸다.
“클레버 이 녀석…….”
반지에서 느껴지는 진하디 진한 클레버의 기운.
헨리는 이게 무엇인지 단숨에 알아챘다.
이것은 클레버였다.
정확히는 클레버의 일부.
클레버는 언젠가 이것을 발견할 헨리를 위해 자신의 일부를 이곳에 남겨 둔 것이다.
그리고 봉인되어 있었다.
정말 혹시라도 누군가 이것을 발견하게 된다면 평범한 반지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어차피 나 말곤 이 반지의 비밀을 아무도 모를 테지만.’
반지에 걸린 봉인식.
너무나도 익숙했다.
당연했다.
이건 헨리가 클레버에게 알려준 것이었으니까.
그렇기에 헨리는 눈짓 몇 번으로 반지에 걸린 봉인식을 해금할 수 있었다.
이윽고 봉인식이 해금되자.
화아아아아……
반지로부터 묵빛 안개가 흘러져 내리기 시작했다.
흘러져 내린 묵빛 안개가 순식간에 헨리의 팔을 휘감는다.
그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헨리의 전신을 휘감기 시작했다.
마치 뱀처럼 움직이는 그것은, 일종의 함정이었는데 헨리가 아닌 다른 존재가 이것을 열 경우를 대비해 준비해 둔 것이었다.
허나 반지를 손에 넣은 건 진짜배기 헨리였고 뱀처럼 휘감기던 안개는 독성 가득한 기운들을 덜어 내고 새하얗게 뭉쳐졌다.
그러더니 이내 곧 헨리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헨리의 눈앞에 강림한 클레버가 예를 갖춰 헨리에게 고개를 숙였다.
- 클레버입니다, 주인님.
“…….”
그 인사에 헨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것은 클레버가 미리 만들어 둔 자신의 허상에 불과했으니까.
클레버의 말이 이어졌다.
- 많이 놀라셨죠? 저는 주인님께서 언젠간 저를 찾아 어비스까지 오실 줄 알고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였다.
종말에 대한 건을 해결하기 위해 가우스를 떠난 지 어언 수천 년.
클레버는 종말의 근원지가 어비스임을 알게 됐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비스에 투신했다.
허나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 여전히 종말을 해결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다른 준비를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언젠가 자신을 찾으러 이곳까지 와줄 헨리를 위한 준비를.
클레버는 헨리가 자신을 찾으러 어비스에 올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헨리에게 차원을 넘나드는 공간의 권능이 있는 건 둘째 치고.
자신이 아는 헨리라면 자신에게 처한 문제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리란 걸 알았으니까.
그리고 그 오래된 계획은 오늘이 되어서야 비로소 멋지게 성공할 수 있었다.
- 더 길고 자세하게 설명해 드리고 싶지만 관리자가 눈치채기 전에 이만 말을 줄이겠습니다. 대신 제가 주인님을 위해 준비해 둔 정보들을 받아 주십시오. 주인님께서 어비스를 오르시는 동안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럼 다시 만나 뵐 때까지 부디 건강하시길.
그 말을 끝으로 클레버의 신형이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금 새하얀 안개가 뿜어지더니 헨리의 전신에 흡수되기 시작했다.
화아아악!!
헨리의 전신에 급속도로 스며드는 것.
그것은 아까 말한대로 클레버가 헨리를 위해 그동안 정리해 둔 탑의 정보들이었다.
방대하기 그지없는 정보들.
허나 재하처럼 고통에 몸부림 치진 않았다.
재하는 평범한 사람에 불과한 반면, 헨리는 가우스 역사상 최고의 천재이자 절대자였으니까.
이윽고 클레버가 준비한 정보들이 모두 머릿속에 모두 스며든 직후였다.
“…….”
헨리는 얼마간 아무런 말도 잇지 못 했다.
클레버가 자신을 위해 준비해 준 정보들.
그것은 클레버의 기억들이었다.
덕분에 그동안 클레버가 어떤 일들을 겪게 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미련한 녀석.’
입 안이 썼다.
클레버가 전해 준 기억 속에는 가우스를 벗어난 직후부터 이러한 준비를 하기까지의 모든 과정들이 담겨 있었으니까.
참으로 거칠고 힘든 삶이었다.
그렇기에 클레버의 노력이 참으로 갸륵하고 고마웠다.
헨리가 천천히 눈을 뜨며 생각했다.
‘고맙다, 클레버. 네가 날 믿고 기다려 준 만큼 내 반드시 네가 있는 곳으로 가마.’
클레버의 기억에 따르면 클레버는 현재 탑의 중층이라 불리는 곳에 있었는데, 여러 가지 이유로 클레버는 현재 아래로 내려오지 못 하는 상황.
허나 상관없다.
클레버가 못 오면 자신이 가면 됐으니까.
생각을 마친 헨리가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런 다음 광활하기 그지없는 붉은 빛깔의 대지를 바라보았다.
클레버가 남겨준 기억 덕분에 어떻게 하면 증명의 관에서 나갈 수 있는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라의 눈.”
화악!
두 눈에 금채가 뿜어지며 또다시 머리 위로 라의 문장이 떠오른다.
라의 눈은 모든 것을 관조할 수 있는 힘이 있다.
허나 그렇기에 목표물을 제대로 특정하고 사용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기운이 뒤엉켜 감지되니까.
이번에 헨리가 특정한 힘은 에테르.
그러자 얼마 뒤, 발 아래 붉은 암석지대 전체가 에메랄드 빛으로 희미하게 빛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기 있었군.’
그것은 얼핏 보면 지역 전체가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허나 좀 더 멀리서 보면 그것은 특정한 모양을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연했다.
헨리의 기감에 감지된 에테르들은 어떠한 지역이 아닌 하나의 개체에서 발현되는 힘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힘의 주인은 다름 아닌……
“여기서 또 만나게 되는구나, 종말이여.”
다름 아닌 종말이었다.
정확히는 어비스 갓이라 불리는 놈.
헨리가 한손을 들어 올려 손아귀에 마력을 응집시키기 시작했다.
에메랄드 빛으로 응집되던 마력은 이내 곧 거대한 소용돌이를 그리며 회오리쳤다.
발 아래 잠들어 있는 놈은 가우스에서 봤던 종말이 맞았다.
허나 가우스에서 본 종말과 완전히 같은 놈은 아니었다.
녀석은 가우스에서 마지막으로 본 놈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힘이 약했으니까.
쿠구구구구구!
회오리처던 소용돌이에서 푸르스름한 스파크가 튄다.
그것은 세상을 찢어발길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소용돌이였는데, 과거 가우스를 침공한 종말들을 상대하기 위해 헨리가 개발한 극강의 살상 마법이었다.
10서클 그 이상의 경지.
마법 그 자체이자, 마법의 신을 넘어 천신으로 군림한 헨리가 자신의 손에 생성된 최강의 마법을 아래로 떨어뜨린다.
번쩍!
빌어먹을 종말 위에 헨리가 만든 천벌이 작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