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2화
넓은 대리석 식탁 위.
배달 음식과 초록빛 술병들이 널브러져 있다. 그리고 쓰레기 틈 사이로 재하도 섞여 있었다.
“으어으어음…….”
쓰레기 사이에 뒤엉킨 재하가 뜻 모를 말들을 중얼거린다.
그 광경을 본 헨리가 혀를 찼다.
“쯧쯧, 술이 세기는…….”
둘이서 술을 꽤 많이 마셨다.
보통 사람이라면 혀를 내두를 만큼.
허나 재하가 아무리 술을 잘 먹어도 신에게 대적할 바는 못 되었다.
헨리가 빈 잔에 소맥을 황금비율로 탄 다음 와인잔처럼 들어 올렸다.
“그래도 달큰하니 맛은 있구나.”
가우스의 독주들과 비교하면 소맥은 술이 아니라 음료였다.
그래서 마력으로 취기를 걷어 낼 필요조차 없었다.
헨리가 쏟아지는 달빛을 벗 삼아 입술에 술잔을 기울인다.
“흠.”
헨리의 시선이 저 멀리 지평선에 걸쳐져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지평선에 걸린 어비스를 향해 있었다.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다.
헨리는 다 마신 술잔을 조용히 내려놓은 후 쓰러져 잠든 재하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그런 다음 마력을 한번 순환시키자 폭주기관차 같던 재하의 코골이가 멎어들었다.
취기를 걷어 낸 덕이었다.
“다녀오마.”
인사말을 남긴 헨리가 손에 그려진 황금 열쇠에 에테르를 주입하기 시작했다.
후우웅-
열린 창문 사이로 밤바람이 스며든다.
*검게 물들었던 주변은 이내 곧 에메랄드 빛으로 천천히 밝아졌고 주변을 둘러본 헨리는 눈살을 슬쩍 찌푸렸다.
반가울 순 없다.
따지고 보면 이곳은 가우스 입장에선 만악의 근원에 해당했으니.
게다가 이 기운.
형용할 수 없는 이 이상한 기운들은 마치 젖은 습지처럼 피부를 감싸 안아 더더욱 불쾌함을 야기했다.
이윽고 시야가 완전히 바로 섰을 때, 헨리는 웬 정체 모를 남자와 마주할 수 있었다.
그는 말쑥한 정장과 더불어 우스꽝스런 광대 가면을 착용하고 있었는데 흰 장갑이 묘하게 어울리는 그가 한손을 들어 올리며 인사했다.
“안녕?”
살갑기 그지없는 인사.
허나 헨리는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표정을 굳힌 채 물었다.
“넌 누구지?”
“조커, 그리고 당신의 조력자.”
“뭐?”
“시간이 없으니 본론만 말할게. 이제 곧 진짜 관리자가 네 앞에 나타날 거야. 그 관리자는 너의 어비스 입장을 저지할 테지만 네가 받은 명령은 그게 아니지 않느냐고 반박해. 그럼 너를 탑에 입장시켜 줄 거야.”
이건 또 무슨 말일까?
자신을 조커라고 소개한 남자는 느닷없이 헨리에게 조언을 시작했다.
그에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내가 그 말을 들어야 할 이유는?”
“그래야 탑에 들어 올 수 있으니까.”
“난 널 처음 보는데 다짜고짜 그런 말을 하면 내가 믿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믿든 안 믿든 그건 네 자유야. 하지만 내 말대로 해서 만약 탑에 입장하게 된다면 그때는 우리가 너의 조력자라는 사실을 알아줬으면 좋겠네.”
“그냥 원하는 걸 말하지 그래?”
“원하는 거?”
그 말에 조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우린 너와 같은 처지에 놓인 자들이야, 그래서 돕는 것뿐.”
“같은 처지?”
“그래. 이를테면 어비스에 의해 살던 세상이 멸망된, 혹은 멸망되기 직전의 그런 처지들.”
“……!”
“이 정도면 근거로 충분하겠지? 아무튼 그래도 관리자가 억지를 부리면 그때부턴 대충 둘러대도록 해. 윗분들의 말을 거역할 셈이냐고. 그럼 웬만해선 해결 될 거야.”
말을 잇던 남자는 손목에 찬 시계를 한번 살피더니 조언을 마무리 짓기 시작했다.
“넌 아마 자격 미달로 반층에 입탑하게 될 거야. 너 같은 플레이어들이 자격 미달이라는 것 자체가 웃기긴 하지만 룰이 그런 걸 어쩌겠어? 아무튼 그곳에 가게 되면 네가 잘 아는 익숙한 기운을 추적해 보도록 해. 그럼 모든 걸 알게 될 테니까.”
“익숙한 기운?”
“내가 전달할 수 있는 건 이 정도가 전부야. 나머지는 오롯이 너 하기에 달려 있지. 아참, 그리고…….”
남자의 신형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 조커가 말했다.
“내가 모시는 분께서 말씀하시길, 자신을 칼리번의 학살자라고 하면 알아들을 거라고 하더군. 물론 난 그게 무슨 뜻인진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기회가 되면 또 만나자, 그럼 안녕!”
그 말과 함께 조커의 신형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
“…….”
헨리는 두 눈이 커진 채 선 채로 굳어 버렸다.
‘칼리번의…… 학살자라고?’
칼리번의 학살자.
익숙하기 그지없는 단어들의 조합.
만약 그가 말한 학살자가 자신이 아는 그것이 맞다면, 칼리번의 학살자는 아마도……
‘클레버가 분명하다.’
왜냐하면 칼리번은 헨리가 두 번째 삶에서 복무했던 요새의 이름이고.
그곳에는 한때, 블랙이란 이름으로 악명을 떨치던 공포의 학살자, 클레버가 있었으니까.
‘이후엔 내 권속이 되었고 말이지.’
그보다 더 이후엔 신이 되었다.
그것도 가우스에 단 하나뿐인 마신이.
헨리가 고개를 들어 새카만 천장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클레버 녀석, 설마 어비스에 있었던 건가?’
종말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오라고 공간의 권능을 부여해 준 지가 어언 수천 년.
허나 클레버는 끝끝내 돌아오지 않았고 기다리다 못한 헨리가 직접 나섰다.
그런데 갑자기 끊겼던 권속의 소식을 접하게 될 줄이야.
‘만약 조커의 말대로 칼리번의 학살자가 정말 클레버가 맞다면 조커의 조언은 신뢰할 만해.’
그것도 굉장히 말이다.
그 순간, 주변 풍광이 다시 바뀌기 시작했다.
에메랄드 빛으로 물들어 있던 공간이 희멀겋게 말이다.
희멀겋게 변한 공간 사이에서 잿빛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고 그 사이로부터 툴툴거리는 불평 소리가 들려왔다.
“젠장. 또 이러네.”
불평 소리를 내뱉는 존재.
그는 조커와 마찬가지로 말쑥한 정장 차림에 가면을 쓰고 있었다.
허나 조커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는 붉은 빛이 도는 정장과 더불어 그것과 어울리는 빨간 면장갑, 그리고 광대가 아닌 분홍색 털을 띤 기괴한 표정의 토끼 가면을 쓰고 있다는 것.
불평과 함께 등장한 그가 먼지에 묻은 옷을 탈탈 털어 내며 그제서야 아는 체를 해 보였다.
“흠흠,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어비스의 관리자들 중 하나인 광묘라고 합니다.”
사내는 자신을 광묘라고 소개했다.
풀이하자면 미친 토끼.
확실히 토끼 가면의 표정을 보면 그 이름이 딱 어울려 보이긴 했다.
헨리가 되물었다.
“광묘?”
“예, 뭐. 제 이명입니다. 아무튼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만나서 반갑습니다. 근데 만나자마자 이별하게 생겼군요.”
“이별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지?”
그 물음에 광묘가 푸르스름한 시스템 창을 띄워 서류처럼 살피더니 설명을 시작했다.
“확인해 보니 당신, 규격 외 입장자더라고. 그래서 당신이 아무리 황금 열쇠를 가지고 있다고 한들 당신은 탑의 규칙에 따라 입탑하지 못해.”
“그런 규칙 따윈 난 못 들었는데?”
“당연히 못 들었겠지. 1층의 튜토리얼 플레이어가 어떻게 본층의 룰을 알겠어? 아무튼 당신은 입장 불가야. 그렇게 알고 돌아가도록 해.”
광묘는 단호했다.
그때, 헨리는 불현듯 조커가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그래서 그가 조언해 준 대로 말을 옮기기 시작했다.
“네가 받은 명령은 그게 아닐 텐데?”
“…뭐?”
“말 그대로다. 넌 지금 명령대로 행동하지 않고 있어. 왜 그러는 거지? 설마 명령을 거역하는 건가?”
“거역? 거역이라…….”
그 순간.
화화화화화화!!
별안간 광묘의 몸에서 미친 듯한 에테르 파장이 뿜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힘의 크기는 놀랍게도……
‘종말!’
가우스를 멸망시켰던 종말의 것과 흡사…… 아니, 확실히 그 이상이었다.
그래서일까?
광묘가 에테르 파장을 내뿜자마자 헨리는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마력을 사출시키기 시작했다.
희멀건 백색 공간에 두 종류의 힘이 파도친다.
헨리가 내뿜는 힘의 파장에 광묘가 흥미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허나 헨리는 그 오만한 표정에 조금도 기죽지 않고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다시 한번 묻지. 이대로 정말 윗분들의 말을 거역할 셈인 건가?”
조커가 자신의 진짜 조력자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하지만 좀 전의 대화로 조커는 자신의 쓸모를 증명했다.
그렇다면 그의 말마따나 우선은 어비스에 입장하고 나서부터 시시비비를 가려도 늦지 않을 터.
헨리가 목소리에 힘을 주어 묻자, 그 물음에 광묘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와 동시에 폭발적이던 힘을 거두며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그럴 순 없지.”
그 싱거운 반응에, 헨리도 마력을 거두자 그제서야 광묘가 뒷짐을 지며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흐음, 참 알 수가 없단 말이야. 내 눈엔 그저 벌레처럼 보일 뿐인데…… 아무튼 축하해. 명령대로 탑에 입장시켜 줄 테니. 하지만 곧 후회하게 될 거야. 넌 본층이 아닌 반층에 입장하게 될 거니까.”
반층.
이번에도 조커의 말대로였다.
이윽고 말을 마친 광묘가 손가락을 튕겼고……
“그래도 작별 인사 정도는 하게 해 주마. 뭣하면 도망쳐도 되고. 그럼 잘 가라, 그리고 두 번 다시 보지 말자.”
헨리의 시야가 다시금 어두워졌다.
*“스승님?”
“…….”
“스승님?”
“……으음.”
익숙한 목소리에 의식이 선명해진다.
뒤늦게 정신 차린 헨리가 놀란 표정으로 상반신을 일으켰다.
“여긴…….”
“집입니다. 저도 전데 스승님도 꽤나 무리하셨나 보네요?”
“그게 무슨 말이냐?”
“술 취해서 쓰러져 주무시고 계시던 거 아니셨어요?”
“그게 무슨…….”
헨리의 반응에 재하가 무슨 일 있냐는 표정을 지어 보인다.
그에 헨리가 헛웃음을 틔었다.
‘작별 인사라는 게 이런 뜻이었군.’
왜 자신이 갑자기 탑 밖으로 내보내진 건지 이제야 이해가 됐다.
덕분에 헨리는 지금 자신이 해야 될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허나 그전에……
‘이 내가 의식을 잃을 줄이야.’
놀라웠다.
그도 그럴 게 헨리는 인간이었을 적에도 스스로 잠을 청했을 때 외엔 의식을 잃어 본 적이 없다.
하물며 신이 되고 나서부턴 더더욱이..
그런데 자그마치 수천 년 만에 의식을 잃은 것이다.
‘지구 차원으로 진입했을 때도, 랜덤 게이트를 드나들었을 때도 유지되었던 정신이거늘…….’
고작 어비스 한 번 다녀왔다고 정신을 잃었을 줄이야.
게다가 광묘라는 놈.
‘그 힘, 종말…… 아니, 그 이상이었다.’
반사적으로 힘을 꺼내긴 했지만 놈의 힘은 확실하게 느꼈다.
놈은 종말 그 이상의 힘을 지닌 놈이었다.
‘그럼 내가 고전했던 종말들은 어비스에선 아무것도 아닌 존재란 말인가?’
물론 아주 의미가 없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하늘 위에 하늘 있다고, 관리자란 놈이 그 정도면 관리자보다 더 강한 놈들도 존재할 터.
그 힘의 격차에 헨리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뜨며 말했다.
“제자야.”
“예, 스승님.”
“반층에 대해서 들어 본 적 있느냐?”
“반층이요?”
“그래.”
“그게 뭔데요?”
“모르는 게냐?”
“네. 혹시 어비스와 관련돼 있는 건가요?”
“그래.”
“어비스랑요? 음…….”
잠시 고민하는 재하.
고민하다 못해 휴대폰을 꺼내 검색도 해 본다.
허나 얼마 뒤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아뇨, 처음 들어 봐요. 검색해도 안 나오구요.”
“그래?”
“근데 그건 왜요?”
“어비스에서 만난 놈들이 그러더구나. 내가 반층에 가게 될 거라고.”
“……예?”
그 말에 재하의 표정이 굳어졌다.
“어비스라뇨? 방금 전까지 저랑 술 드시고 주무시고 계시던 거 아니셨어요?”
“어비스에 다녀오던 길이다. 그곳의 관리자와 대화를 마치자 정신을 잃은 것이고.”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무튼 제자야.”
“예?”
“반층에 대해 모른다는 게지?”
“예, 뭐…….”
“음.”
반층에 대한 정보가 적다.
그렇다면 현재로써 헨리가 해야 될 일은 더더욱이 하나뿐.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여 모든 준비를 끝내 놓고 간다.’
그도 그럴 게 헨리는 재하와 한 약속이 있었으니까.
“제자야.”
“예, 스승님.”
“잠시 이리 와 보거라.”
말을 마친 헨리가 손가락 하나를 들어 재하의 이마에 콕 찍었다.
그러자……
“으아아아아!!”
돌연, 재하가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고 몸부림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