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5화
“…헉!!”
재하는 마치 악몽이라도 꾼 것처럼 두 눈을 번쩍 떴다.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이것은 진정한 공포 앞에서 반응하는 본능적인 화학 작용.
눈을 뜬 재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찰나처럼 짧은 순간이었으나 그사이에 전해진 충격은 몹시 강렬한 것이었으므로……
헨리가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우리는 그것들을 종말이라 불렀다. 그리고 놈들이 사용하던 힘을 쫓아 지구에 온 것이고. 재하야, 너는 종말에 대해서 아느냐?”
말로 전해 듣는 것과 그가 겪은 기억을 공유받는다는 건 공감적인 부분에 있어 엄청난 차이였다.
그렇기에 아직도 가슴이 떨렸다.
재하는 잠시 눈을 감고 종말에 대한 기억을 찾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불현듯 종말에 대한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어비스 갓.”
“어비스 갓?”
“예, 아무래도 제 기억이 맞다면 스승님께서 종말이라 부르시는 놈들은 어비스 갓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근거는?”
“스승님의 기억 속에서 본 종말들은 모두 다 검은색 기운을 다루던데 그게 만약 에테르가 맞다면 놈들은 어비스에 기거하는 탑의 신들일 확률이 높아요.”
“계속해 보거라.”
“모든 플레이어들은 각성 후 반드시 교육소에 입소해 게이트나 어비스에 대해 배워야 하는데 그때 배웠습니다. 어비스에는 에테르의 극의를 깨우친 존재들이 있는데 그들은 탑 내에서 어비스 갓이라 불린다는 걸요.”
“어비스 갓…… 신의 이름을 아무데나 갖다 붙이는군.”
“그만큼 강하다는 뜻이니까요.”
“그래서, 지구에선 놈들을 죽인 전례는 있고?”
그 물음에 재하가 고개를 내저었다.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도전은 해 봤고?”
“옛날에 칸이라는 세계 랭킹 1위의 헌터가 딱 한 번 그놈들과 마주친 적이 있었습니다. 근데 세계 최강자라 불리던 칸조차도 놈들에게 쪽도 못 쓰고 탑 밖으로 내던져졌습니다.”
“죽었나?”
“운 좋게 살긴 했어요. 근데 무슨 병에 걸렸는지 일주일도 채 안 돼서 온몸이 썩어 들어가며 죽었습니다. 그때 칸이 유언처럼 말했어요. 어비스에는 신이라는 이름을 가진 괴물들이 득실거린다고.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그들과 마주쳐선 안 된다고 말이에요.”
“신이라…….”
재하의 설명에 헨리는 지구에서 불리는 종말들의 이름을 가만히 곱씹었다.
그러다 미간을 찌푸렸다.
신.
어찌 보면 맞는 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게 자신도 신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놈들의 몸에 기스조차 내지 못했으니.
재하가 설명을 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어비스 갓들은 절대 탑 밖으로 내려오지 않는다는 거예요.”
“하지만 가우스에선 놈들이 판을 쳤는데?”
“그건…… 저도 잘 모르겠네요.”
재하가 머쓱함에 목소리를 줄이자 헨리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질문을 이어 나갔다.
“어쨌든 놈들을 만나려면 어비스로 가야 한다는 거군.”
“그렇긴 한데 스승님은 못 가실 걸요?”
“왜지?”
“어비스는 플레이어만 출입이 가능한데 스승님은 플레이어가 아니잖아요.”
“그게 중요한가?”
“중요하죠?”
“그건 해 봐야 알 일이지.”
그 말과 함께 헨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세요?”
“직접 확인해 보고 오마.”
“예? 지금요?”
“그래. 네 말에 의하면 어비스는 세상 어디서든지 보인다고 했으니 보이는 그대로 탑을 쫓아가면 언젠간 도착하지 않겠느냐?”
“예?”
“다녀오마.”
말을 마친 헨리는 주신에게 받은 공간의 권능을 이용해 순식간에 하늘 위로 떠올랐다.
과연.
재하의 말마따나 차원탑 어비스는 신기루처럼 저 멀리 지평선에 걸쳐져 있었다.
목표점을 굳힌 헨리가 공간의 권능을 부리기 시작했다.
훙! 훙! 훙!
마치 블링크를 사용하듯 헨리는 쉴 틈 없이 공간의 권능을 발휘했다.
그런데 아무리 공간의 권능을 사용해도 어비스는 좀처럼 좁혀지지가 않았다.
마치 신기루를 뒤쫓듯, 어비스는 한 폭의 풍경화처럼 헨리와 일정거리를 유지했다.
그렇게 한참을 탑과 추격전을 벌인 끝에 놀랍게도 헨리는 지구를 한 바퀴 돌아 다시 재하가 사는 원룸 건물 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쯧.”
애석하게도 재하의 말이 사실임을 확인한 헨리가 혀를 차며 다시 원룸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어? 다시 오셨네요?”
“다녀왔다.”
“예? 벌써요?”
“그래. 세상 한 바퀴를 돌고 왔는데도 안 되더구나.”
“……예?”
헨리의 말에 재하의 입이 벌어졌다.
왜냐하면 헨리가 집을 나선 지 아직 5분이 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농담이시죠?”
“내가 지금 농담하는 것처럼 보이느냐?”
살짝 날 선 대답.
헨리의 짜증에 재하가 바로 꼬리를 내렸다.
“아니요, 죄송합니다.”
“쯧, 결국 방법은 그 플레이어 시스템인지 뭔지를 이용하는 수밖에 없다는 거군.”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 플레이어 시스템이란 것은 어떻게 하면 손에 넣을 수 있느냐?”
“어…… 일단은 각성을 하셔야죠?”
“각성은 어떻게 하는 건데?”
“음…… 이게 보통은 랜덤으로 각성하는 거라서 지금 당장은 방법이 없을 것 같아요.”
“‘보통은’이라고 표현한 걸 보면 다른 방법도 있다는 말처럼 들리는데?”
“예, 뭐. 가끔 게이트에서 ‘각성의 돌’ 같은 게 드랍되긴 하는데 이게 워낙에 희귀하고 가격도 비싼지라 평범한 일반인들은 절대로 구매할 수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각성의 돌?”
“예.”
“어떻게 생겼는데?”
“어, 그러니까…….”
재하는 휴대폰을 조작해 인터넷에 있는 각성의 돌 이미지를 띄워 헨리에게 보여 주었다.
“이렇게 생겼어요.”
“평범한 돌처럼 생겼군.”
“생김새 보단 내용물이 중요하니까요.”
“그래서 이게 얼만데?”
“어…… 한화로 따지면 약 10억?”
“비싼 건가?”
“어마무시하게 비싸죠. 10억이면 경기도권 빌라를 하나 살 수 있는 돈인데요.”
“난 경기도도 빌라도 뭔지 모른다만.”
“그냥 엄청 비싼 금액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저 같은 서민은 평생 벌어 보지도 못할 그런 돈.”
과거에는 서울 아파트를 일이십 억에 살 수 있었던 때도 있었다고 한다.
허나 그건 아주 먼 옛날이야기.
이제 그 정도 금액으론 서울은커녕 수도권 근처 빌라도 겨우였다.
헨리가 말했다.
“난 시간이 별로 없다. 그래서, 지금 각성의 돌을 갖고 있는 사람이 누구지?”
“설마 뺏어 오시려구요?”
“대답이나 하거라.”
“저도 모르죠? 어, 아닌가? 잠시만요.”
헨리의 짜증에 재하는 다시 검색을 시작했다.
왜냐면 예나 지금이나 자랑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을 항상 존재했으니까.
재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인스타그램에서 각성의 돌을 자랑하는 어떤 젊은 남자의 사진을 찾아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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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minvly님 외 여러 명이 좋아합니다.
richguy_182
생일기념 각성의 돌 플렉스★
오늘 자정 펜타곤에서 각성 할 예정
...#생일 #생일기념 #각성 #나도헌터 #나도이제플레이어 #헌터 #플레이어 #플렉스 #각성의돌 #어비스 #차원탑 #랭커 #부모님찬스 #엄마아빠사랑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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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하가 보여 준 화면.
거기에는 웬 새파랗게 젊은 놈이 각성의 돌을 쥐고 셀카를 찍은 사진이 있었다.
사진을 본 헨리가 물었다.
“펜타곤이 어디지?”
“클럽 이름이요.”
“클럽?”
“그…… 젊은 사람들이 노는 무도회장 같은 곳인데…… 아무튼 밤에만 열어요.”
“밤? 흠, 확실히 무도회는 해가 져야 열리는 게 맞긴 하다만…….”
헨리는 잠시 턱을 어루만지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너무 늦어. 난 지금 당장 이 친구를 만나고 싶다.”
“진짜 뺏으시려구요?”
“빌릴 생각이다.”
“예? 아뇨, 스승님. 뭔갈 좀 잘못 알고 계신 것 같은데 각성의 돌은 소모성 아이템이라 한번 사용하면 두 번은 사용 못 해요.”
“그건 또 몰랐군.”
“그쵸?”
“하지만 이 친구가 깨어 있는 친구라면 이해해 줄 것으로 사료된다.”
“예?”
“그렇지 않느냐? 겨우 한 청춘의 생일을 장식하는 데 이런 돌을 쓰는 것보단 세상의 멸망을 막는 데 쓰이는 게 더 값질 테니까.”
헨리의 논리에 재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맞는 말이긴 했지만 애초에 이런 걸 자랑하는 사람들이 남의 세상 안위 따위를 신경 쓸 리가 없었으니까.
허나 헨리는 이미 심지를 굳힌 모양.
그렇기에 고집을 꺾을 도리가 없어 보였다.
“그래서 이 친구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그건 저도 모르죠?”
“찾거라.”
“예?”
“마법 배우고 싶다면서?”
“그건…….”
이것은 협박일까 부탁일까.
허나 뭐가 됐든 간에 재하는 반드시 마법을 배우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선 헨리에게 각성의 돌은 필수였다.
몇 초간의 고민 끝에 재하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지금 내게 조건을 내거는 게냐?”
“아뇨아뇨. 그런 게 아니라 혹시 모를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미리 말씀드리는 겁니다.”
“흠, 말해 보거라.”
“이번 일은 전적으로 제게 맡겨 주세요. 그럼 어떻게든 제가 저 돌을 확보해 오겠습니다.”
“음…… 오냐 그리하마.”
뭐가 됐든 범죄는 안 됐다.
애초에 남의 걸 훔치거나 빼앗는 것 자체가 해선 안 될 일이기도 했지만 사실 그것보다는 헨리가 어떤 식으로 튈지 예상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이 직접 나서기로 한 것.
헨리의 동의를 얻은 재하는 그제서야 마음을 놓고 이번에 수행해야 될 ‘각성의 돌 작전’에 대해 브리핑하기 시작했다.
*얼마 뒤.
인스타그램 아이디 ‘richguy_182’의 계정주인 ‘도민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 어?”
도민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이유.
다름 아닌, 현재 한국에서 최고로 핫한 인물, ‘2차 각성자 신재하’로부터 인스타그램의 개인 메시지, DM이 왔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면 알아서 온다고?”
“예. 무조건 옵니다.”
재하의 말에 헨리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휴대폰 문자나 채팅, 인스타그램 같은 sns에 대한 개념은 이해했다.
근데 일면식도 없는 인스타그램 속 남자가 왜 재하의 말대로 움직여 줄지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허나 얼마 뒤.
지이잉-
재하가 휴대폰에 뜬 낯선 번호를 보여 주며 말했다.
“왔네요.”
“이게 그놈 번호라고?”
“아마도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한번 확인해 보죠 뭐.”
전화는 영상통화였고 재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영상통화를 허락했다.
이윽고 휴대폰 화면에 재하의 얼굴이 뜬 순간.
- 와 씨발 대박!!
휴대폰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감탄사.
도민호의 목소리였다.
- 진짜 신재하예요?
“응.”
- 와, 팬이에요! 솔직히 긴가민가했는데 진짜 신재하였을 줄이야.
“인증해 줬으니까 됐지?”
- 예, 물론이죠! 오늘 무조건 형님을 파티에 초대할게요!
“아니, 난 개인적으로 널 만나고 싶다.”
- 개인적으로요?
“안 되나?”
- 되죠! 무조건 되죠! 안 될 게 뭐가 있겠어요!!
“메시지 주소 남겨라, 그럼.”
할 말을 마친 재하는 바로 통화를 종료했다.
이윽고 재하의 폰에 도민호의 집 주소가 적힌 문자가 도착했고 재하가 휴대폰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제 말이 맞죠?”
“어이가 없군.”
“저도 이 방법이 진짜로 통해서 좀 어이가 없긴 한데…… 뭐 다 믿는 구석이 있어서 그러는 거 아니겠어요? 아무튼 가시죠. 보니까 주소지가 강남이던데 가는 데 시간이 꽤 걸릴 거예요.”
“알겠다.”
두 사람은 서둘러 나갈 채비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