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서클 마법사의 환생-395화 (395/522)

# 395

외전 (4)

어두운 밤.

책상에는 빈 술병이 어질러져 있고, 그 앞엔 술과 함께 먹던 과일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술잔은 하나였다.

술잔에는 아직 마시지 않은 술이 가득 담겨 있었다.

맑은 술 위로 창문을 넘어 들어온 달빛이 비쳤다.

술잔의 주인은 로스 교황이었다.

로스는 벌써 몇 병이나 술을 비웠지만 답답한 마음이 가시질 않았다.

잠도 오지 않았다.

이유는 가슴이 콱 막힌 것처럼 걱정이 가득 들어차서였다.

“빌어먹을……!”

로스의 입에서 나직이 욕설이 흘러나왔다.

로스의 표정이 좋지 않다.

낮에는 그 누구보다도 인자한 모습으로 신도들을 축복하는 성황이지만, 밤만 되면 하루 종일 응축해 두었던 불안감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이런 생활이 벌써 몇 년째다.

로스가 이런 증상에 시달리는 이유는 간단하다.

헨리가 네프람 교단에 대해 경고했던 날, 로거를 보내 교단의 완전한 제거를 명령했지만 로거가 도착했을 땐 이미 교단 전체가 사라진 뒤였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불안에 시달렸다.

성기사 전체를 풀어 교단을 추적해 보기도 했지만 대륙 그 어디에서도 교단을 찾을 수가 없었다.

물론 헨리에겐 거짓으로 보고를 올렸다.

만에 하나 네프람 교단을 놓쳤다는 사실이 헨리의 귀에 들어가면 그땐 정말로 끝이었으니까.

로스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로스는 헨리에게 직접 거짓 보고를 올리던 날, 불신의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던 헨리의 두 눈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뱀 같은 새끼!’

헨리는 뱀처럼 날카로운 눈동자로 교황을 꿰뚫어 보았다.

교황의 보고를 믿는 척 하면서도 왠지 불신하는 그런 눈빛으로 말이다.

물론 결과적으로 교황의 거짓 보고를 믿어 주긴 했다.

그러니 별 탈 없이 지금까지 제국 국교의 교황으로써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이고.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대륙 제일의 대마법사였다.

동시에 헨리가 경고했던 사안은 황제의 명예까지 걸린 일.

혹시라도 나중에 네프람 교단이 모습을 드러낸다면, 그때는 평화교의 멸교가 확정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난 처형당하겠지.’

아니, 어쩌면 북부의 킬라이브에 갇혀 의탑의 실험체로 쓰일지도 모른다.

그 때문에 교황은 매일을 악몽 속에 살았다.

스스로 벌여 놓은 아주 작은 욕심 하나 때문에…….

“후, 제기랄…….”

교황은 꽤나 만취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은 손에 쥔 술잔의 술을 단숨에 입안에 털어 넣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오늘 밤도 잠을 이루지 못할 테니까.

입안에 술을 털어 넣은 직후, 교황이 정신을 잃으며 책상 위로 고꾸라졌다.

쿵!

* * *

그날 밤, 교황은 꿈을 꿨다.

보통 술을 마시면 어둠 속에 몸을 뉘이듯 아무런 꿈도 꾸지 않고 자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런데 오늘은 특이하게도 꿈을 꾸게 되었다.

꿈속의 교황은 주변이 새하얀 천으로 둘러싸인 어느 이름 모를 장소에 있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곳이다.

하지만 넓게 펼쳐진 흰 천 자락들 때문에 왠지 모를 거룩함이 느껴졌다.

그 순간, 교황에게 빛이 들었다.

‘빛?’

햇빛과 비슷했지만 그것보단 좀 더 거룩하고 따스한, 말로는 함부로 형언할 수 없는 그런 촉감의 빛이었다.

교황은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들고 눈부시게 떨어지는 빛을 보았다.

그때였다.

-로스 보르기아.

동굴처럼 메아리치듯 머릿속에 낯선 음성이 울렸다.

하지만 분명히 난생처음 들어 보는 음성임에도 불구하고 교황은 왠지 모를 친숙함을 느꼈다.

그 목소리가 교황을 불렀다.

“누, 누구……!”

잔뜩 당황한 교황이 주눅 든 목소리로 대꾸를 했다.

과거의 그였다면 그 누구보다도 위풍당당했을 테지만 지난 몇 년간의 불안이 그를 잔뜩 웅크리게 한 것이다.

그 순간, 정체불명의 목소리가 또 한 번 머릿속을 울렸다.

-나는 아이린입니다.

“……예?”

잘못 들은 게 아니다.

정말이었다.

여성으로 추정되는 목소리는 분명히 스스로를 평화교의 여신, 아이린이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교황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 여신님? 정말로 여신님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여신은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그리고 여신의 대답을 들은 로스는 그제서야 무릎을 꿇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아아, 신이시여! 어찌 미천하기 짝이 없는 저에게 직접 강림하시어……!”

여신의 강림.

이것이 꿈인지 생시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꿈이나마 여신이 직접 자신에게 강림해 목소리를 들려주고 있다는 것이다.

로스 보르기아의 종교 인생에 있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감동에 북받친 로스가 흐느껴 울었다.

단순히 여신의 목소리를 들은 사실만으로 그동안 시달려 온 불안함을 말끔히 치유받는 기분이었다.

눈물을 쏟아 내던 교황은 점점 더 감정이 격해졌다.

마치 어린아이가 어머니에게 투정을 하듯, 교황은 무릎을 꿇고 아이린에게 한탄 섞인 석고대죄를 했다.

“죄송합니다, 여신님. 제가, 이 미천한 제가 감히 여신님의 이름에 먹칠을……!”

석고대죄를 시작한 교황은 슬픔을 쏟아 낼수록 격앙되었던 감정들이 점점 더 무너져 감을 느꼈다.

본인은 고해성사라고 생각하고 시작한 석고대죄였지만, 실상은 울분을 내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감정이 격앙되든 무너지든 교황에겐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교황은 그저, 그동안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비밀을 남에게 털어놓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교황의 고해성사를 한참이나 듣던 아이린은 교황에게 무어라 말을 전했다.

그리고 여신의 말을 들은 교황은 여신이 한 말에 큰 충격을 받았다.

“헉!”

술에 취해 잠든 잠을 단번에 깨울 정도로 말이다.

“꿈……?”

정신을 차려 보니 눈앞에 과일과 술잔이 어질러져 있다.

달빛이 쏟아지는 걸 보니 아직도 새벽이었다.

그러나 여신이 자신에게 했던 말은 현실에서 육성으로 들은 것처럼 생생했다.

로스가 중얼거렸다.

“성녀라니……!”

꿈속에서 여신이 로스에게 한 말.

그것은 성녀의 탄생에 대한 것이었다.

* * *

날이 밝았다.

새벽에 잠에서 깬 로스는 날이 밝을 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꿈속에서 들은 여신의 말 때문이었다.

‘성녀라니…….’

로스는 골을 싸맸다.

이것이 과연 자신의 무의식이 만들어 낸 꿈결의 환상일지 아니면, 진짜 여신의 계시인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이 됐든 성녀의 탄생은 분명히 엄청난 사건임에 분명했다.

‘뭐가 됐든 확인해 봐야 해.’

성녀의 탄생은 종교 내에서도 아주 중요한 사건이다.

그래서 날이 밝자마자 로스는 은밀히 로거를 호출했다.

호출을 받은 로거가 사뭇 긴장한 표정으로 로스 앞에 섰다.

로스가 말했다.

“로거.”

“예, 교황님.”

“간밤에 여신님께서 내게 계시를 내리셨다.”

“여, 여신님께서요?”

“그래, 여신님께선 그분의 뜻을 이을 성녀의 탄생을 내게 고하셨지.”

“……!”

로거의 눈이 커다랗게 확장되었다.

여신이 계시를 내렸다는 것도 모자라 그 내용이 다름 아닌 성녀의 탄생이라니?

이것이 정말 사실이라면 지금 당장 신도들에게 알려 축제라도 벌여야 했기 때문이다.

로거가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축하드립니다, 교황님! 드디어 저희 평화교에도 성녀가 탄생하는군요!”

로거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로거가 한 말마따나, 평화교에선 여태껏 성녀가 탄생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성녀는 로스가 꾼 꿈처럼 신의 계시로 탄생하는 존재.

교단의 우두머리인 교황과는 그 고귀함부터가 다른 존재였다.

그러니 분명히 축하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로거가 신이 나서 떠벌릴수록 로스의 표정은 더더욱 어두워져만 갔다.

“그렇지. 기뻐해야 할 일이지…….”

로스의 안색이 어두워지는 이유.

이유는 간단했다.

좀 전에 언급한 것처럼 교단의 우두머리가 되면 자연스럽게 획득할 수 있는 지위인 교황과는 달리, 성녀는 오직 신의 계시로만 탄생하는 고귀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 말인즉슨, 경우에 따라 교황보다 성녀가 더 높은 존재가 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물론 평소의 교황이라면 성녀의 탄생에 기뻐했을 것이다.

성녀가 아무리 탄생하기 힘든 존재라고는 하나 이미 교단 내에 기반을 다져둔 교황의 힘을 이길 순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런 상황에서 성녀가 탄생한다면 자연스럽게 평화교의 위상도 드높아질 것이고, 교황의 힘 또한 막강해질 게 분명했다.

하지만 교황은 지금 ‘네프람 교단의 실종’이라는 불안 요소를 떠안고 있는 상태였다.

다시 말해 실종된 줄로만 알았던 네프람 교단이 모습을 드러내면 언제든지 목이 잘릴지도 모르는 신세란 뜻.

그렇게 되면 교황이라는 지위와 목숨은 물론이고 평화교의 존속마저도 위험해진다.

하지만 성녀를 받아들인 상태에서 네프람 교단이 나타난다면 그땐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

성녀는 교황을 대신할 만한 존재임과 동시에 헨리의 경고를 받은 후에 나타난 존재다.

그런 상태에서 만약 네프람 교단이 모습을 드러내면 성녀는 당연히 죄가 없으므로 아무런 해를 입지 않는다.

그리고 죄 없는 성녀가 이끄는 평화교 또한 무사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처벌을 받는 것은 오직 교황 한 사람만이 될 것이다.

주동자를 처벌하는 것.

평화교를 국교로 둔 제국 입장에선 그 방법이 최선일 테니까.

‘절대 안 될 소리지! 이 평화교를 제국의 국교로 만들기 위해 내가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데!’

상념에 젖어든 교황의 눈동자에 광기가 물들었다.

그 광기는 재물에 욕심이 없어야 할 청렴한 교황의 인품과는 전혀 다른, 소유욕에 기반한 추악한 광기였다.

‘내가 죽으면 평화교도 같이 사라져야 한다. 절대로 남에게 유산처럼 넘겨주고 싶지 않아!’

교황의 욕심이 꿈틀거렸다.

그 모습은 꿈속에서 여신에게 석고대죄를 올리던 그 교황이 절대로 아니었다.

교황이 말했다.

“……그러니 자네는 그 누구도 모르게 은밀히 내가 말해준 곳으로 가서 성녀의 진위를 확인해 보게.”

“알겠습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로스는 꿈속에서 여신이 자신에게 일러 주었던 장소를 똑똑히 기억했다.

그래서 그곳으로 로거를 보내 일단은 진위 여부부터 확인키로 했다.

‘처리는 그 다음에 해도 늦지 않으니까.’

로거가 방을 나간 후, 교황이 큰 결심에 찬 눈빛을 띠었다.

* * *

밀레안 마을.

평화의 여신, 아이린이 언급한 곳이다.

로거는 임무가 임무이니만큼 다른 성기사를 동반하지 않고 은밀하게 밀레안 마을에 도착했다.

그리고 교황이 말해 준 곳을 찾아갔다.

그곳은 마을의 탁아소였다.

마을 사람 전부가 생계를 위해 일하러 나가면 마을 아이들 전부가 탁아소에 모여 공부도 하고 놀기도 했다.

성녀는 탁아소에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녀의 부모가 일을 하기 위해 탁아소에 그녀를 맡긴 것이 아니다.

그녀를 키우기가 힘들어 탁아소에 그녀를 맡긴 후 도망쳐 버린 것이다.

그러니 성녀는 부모가 버린 자식인 셈이었다.

하지만 탁아소에서 일하는 보모는 그녀를 내치지 않았다.

되레 탁아소 소장과 협의 끝에 탁아소에서 맡아 그녀를 기르기로 했다.

로거가 탁아소 마당에서 뛰노는 성녀를 발견하고 눈빛을 반짝였다.

‘정말이었어!’

로스 교황이 말해 준 대로 정말로 밀레안 마을 탁아소에는 계시 속의 성녀가 있었다.

증거도 충분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로거는 그녀가 가진 진한 신력을 먼발치에서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으니까.

잔뜩 흥분한 로거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어서 빨리 교황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존엄하신 성녀님을 모셔 오고 싶었다.

‘드디어 우리 교단에도 이런 날이 오는구나!’

흥분한 로거가 서둘러 마을을 떠났다.

그런데 로거가 사라진 후, 로거가 있던 자리에 낯선 그림자가 드리웠다.

“정말인가 보네.”

낯선 그림자.

그림자의 정체는 헨리였다.

헨리는 로거가 있던 자리에 서서 먼발치에 보이는 탁아소 마당에서 뛰노는 어린 성녀, 아이리네를 보았다.

성녀가 밀레안 마을 탁아소에서 발견되었다는 건 유명한 일화다.

그래서 훗날, 밀레안 마을은 성녀를 배출한 마을이라며 평생 면세 혜택을 받게 되고, 성녀를 거두었던 탁아소 소장과 보모는 큰돈을 포상금으로 받았다.

하지만 성녀가 발견된 시점은 지금이 아닌 성녀가 꽤 자란 이후의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은 여신의 계시라며 정확히 밀레안 마을을 짚어 냈다.

‘확실히 비람의 말대로야. 술 취해서 잠든 놈이 환술에 더 걸리기 쉽다더니, 교황씩이나 되는 놈이 하급 환술에 걸리기나 하고…….’

교황이 여신의 계시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

그 이유는 바로 헨리가 비람에게 배운 환술을 술 취해 잠든 교황에게 사용했기 때문이다.

효과는 발군이었다.

오랜 시간 불안에 시달리던 교황은 술기운과 함께 손쉽게 환술에 허덕였고, 그 결과 로거를 이곳으로 보냈다.

모든 건 헨리의 계획대로였던 것이다.

밀레안 마을 탁아소에 성녀가 있다는 건 진즉부터 알고 있었다.

워낙에 유명한 일화였으니까.

하지만 신력을 잃은 헨리가 그녀가 가진 신력까지 확인하는 건 다소 무리가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로거 같은 고위 신관의 확실한 검증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방금 막 그 궁금증이 풀렸다.

‘슬슬 움직여 볼까?’

아이리네로부터 성녀의 자질이 확인됐다.

그럼 준비는 얼추 끝난 셈이다.

확인을 마친 헨리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자리에 헨리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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