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1
헨리 모리스 (2)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헨리의 기억력은 정확했다.
삼거리 교역소를 따라 쭉 걸음을 옮기니 어느 지점쯤에 익숙한 팻말 하나가 보였다.
팻말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이곳부터는 한스 모리스 준남작님의 영지입니다.
‘정확히 찾아왔군.’
한스 모리스 준남작.
어쩌면 현재의 헨리가 있을 수 있게 근본적인 도움을 주었던 남자의 이름.
헨리는 지금 한스 모리스 준남작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어귀를 지나 영지에 들어서자 익숙한 전경이 펼쳐졌다.
헨리가 모리스 영지에 발을 들이자 영지민들의 시선이 헨리에게로 몰렸다.
헨리의 화려한 복장 때문이었다.
‘누구지?’
헨리가 입고 있는 것이 황실 특유의 제복인 것은 안다.
하지만 헨리가 전 대륙적으로 유명하다곤 해도 이곳 모리스 영지는 대륙 동쪽 끝자락에 위치한 산촌 중의 산촌이기에 헨리의 얼굴을 모르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헨리의 복장이 황실의 것이기에 다들 어깨를 움츠리고 고개를 숙였다.
헨리는 그들 사이를 거닐며 모리스 성으로 이동했다.
이제 와서 보니 성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조그마한 성이었다.
하지만 헨리에겐 아무 상관이 없는 문제다.
헨리는 문 앞에 도착해 고개를 들어 성벽 위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근무를 서고 있는 병사가 한 명도 없었다.
그것을 본 헨리가 흘흘 웃었다.
“그래, 여긴 원래 이런 곳이었지.”
기분이 나쁜 게 아니다.
비록 고작해야 몇 달이긴 했지만 그동안 여기 머물면서 보고 느꼈던 추억을 회상하는 것이었다.
‘이거, 일부러 화려한 복장을 입고 왔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로브나 한 장 걸치고 올걸 그랬어.’
헨리가 화려한 복장을 걸친 이유.
이유는 간단했다.
영지 초입부터 천천히 영지민들의 시선을 끌어 마지막에 준남작을 만났을 때 그의 위상을 드높여 주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성 앞에 도착할 때까지 준남작을 비롯해 준남작의 고용인이나 경비대원 한 명을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김이 새 버렸다.
김이 샌 나머지 헨리는 그냥 자신만의 방식으로 일을 진행키로 했다.
딱!
헨리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굳게 닫혀 있던 성문이 굵직한 소리를 내며 시원하게 개방되었다.
헨리가 열린 성문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성 안으로 들어서자 열린 성문을 놀란 눈초리로 바라보는 시녀가 있었다.
시녀가 헨리에게 물었다.
“누, 누구십니까?”
낯선 방문객이 멋대로 성문을 열고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시녀는 선뜻 화를 내지 못했다.
헨리의 고귀한 옷차림 때문이었다.
헨리가 물었다.
“황궁에서 왔습니다.”
“화, 황궁이요?”
“예.”
“아, 아이고! 제가 감히 귀인을 몰라 뵙고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소인을 용서해 주십시오, 나으리!”
황궁이란 말에 시녀가 바닥에 바짝 엎드렸다.
하지만 몰라볼 만도 했다.
평생을 산촌에서 살았던 그녀였기에 그녀는 황궁의 제복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시녀가 바닥에 바짝 엎드리자 헨리가 가볍게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일어나세요. 전 단지 한스 모리스 준남작을 만나러 온 것뿐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준남작이 있는 곳으로 안내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환생한 직후, 과거에 시종을 걷어차던 때와는 달리 헨리는 깍듯이 예를 차렸다.
마음가짐이 달라진 것도 이유라면 이유겠지만 은인을 만나러 와서까지 신분을 앞세워 거드름을 피우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소식을 들은 한스 준남작이 서둘러 헨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활동적인 옷차림을 보건데 아마도 바깥에서 업무를 보고 있던 모양이었다.
뒤늦게 나타난 한스 준남작이 헨리를 보자마자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로 얼른 허리를 굽혔다.
“대, 대마법사님이 아니십니까! 위대하신 대마법사님을 뵙습니다!”
한스는 헨리의 얼굴을 안다.
한스는 골든이 이끄는 군대에 소속돼 통일 전쟁에 참여한 이력이 있었으니까.
준남작이란 작위도 그때의 활약을 인정받아 무공 훈장과 함께 받은 것이었다.
또한 한스는 평소 헨리를 존경해 왔다.
그래서 준남작의 지위와 오직 귀족만이 가질 수 있는 성씨를 정할 때 헨리의 성씨를 따라한 것이다.
한스의 얼굴이 공포에 질려 하얗게 변했다.
혹시라도 헨리와 같은 성씨를 쓴 게 들통 나 뒤늦게 치도곤이라도 먹을 줄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스 입장에선 충분히 오해할 만한 일이었다.
이런 오지 중의 오지에, 헨리 같은 대마법사가 반쪽짜리 귀족을 직접 찾아올 만한 일은 극히 드물었기 때문이다.
헨리가 말했다.
“그대가 한스 준남작인가?”
“예, 예! 그렇습니다. 대마법사님.”
“오는 길에 영지를 둘러봤는데 제법 잘 가꾸어 놓았더군. 혹시 그대의 작품인가?”
“예? 아, 예, 예……! 일단 제가 지시하고 주기적으로 점검하고 있긴 합니다.”
“그렇군.”
헨리는 한스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가볍게 칭찬부터 시작했다.
하지만 헨리의 칭찬은 아무래도 별 효과가 없는 듯 보였다.
그래서 주제를 바꾸기로 했다.
헨리가 물었다.
“그나저나 한스 모리스라……. 그대는 통일 전쟁에 참여했던 참전 용사의 자격으로 준남작의 지위를 받은 걸로 알고 있는데 혹시 ‘모리스’라는 성씨를 사용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그, 그건……!”
한스의 얼굴에 드디어 올 게 왔구나 하는 표정이 드러났다.
물론 헨리는 순수한 호기심에 물어본 것뿐이다.
헨리의 시선이 한스를 훑었다.
단순히 대답을 기다리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한스에게 헨리의 눈빛은 당장이라도 잠겨 죽을 만큼 어마어마한 파도와도 같았다.
헨리가 질문한 지 몇 초 뒤, 양심의 가책을 느낀 한스는 결국 바닥에 무릎을 꿇고 바짝 엎드려 빌기 시작했다.
“주, 죽여 주십시오, 대마법사님!”
“……응?”
갑작스러운 사죄에 헨리는 몹시 당황스러웠다.
* * *
얼마 후, 두 사람은 겨우 오해를 풀었다.
한스는 모리스라는 성을 등록한 것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헨리는 그 사연을 듣더니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요, 용서해 주시는 겁니까?”
“용서하고 말고 할 게 뭐가 있나? 날 존경하는 뜻에서 모리스라는 성을 사용했다는데. 그리고 자네는 참전 용사가 아니던가? 자부심을 가지게, 모리스는 고작해야 한낱 성씨일 뿐이야. 그리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도 되네.”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대마법사님……!”
한스는 그제야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오해를 푼 두 사람은 장소를 옮겨 본격적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헨리가 한스를 찾아온 이유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다.
헨리가 말했다.
“혹시 자네에게 아들 한 명이 있지 않은가?”
“아, 아들 말씀이십니까?”
아들 이야기에 한스는 다시 당황했다.
헨리는 눈에 띄게 당황하는 한스를 보며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한스의 아들 이름이 다름 아닌 자신과 같은 헨리 모리스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른 척 시치미를 뗐다.
“그렇네만?”
“그, 그게…… 저…… 한 명이 이, 있긴 합니다만…….”
“이름이 뭔가?”
“저, 그, 그게…….”
“설마 ‘헨리 모리스’는 아니겠지?”
헨리의 물음에 한스의 얼굴이 다시금 사색이 됐다.
그 표정을 보는 헨리는 몹시 즐거웠다.
하지만 한스는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았다.
마음 같아선 좀 더 한스를 놀리고 싶었지만, 그러다가 한스가 졸도라도 해 버리면 곤란하기에 이쯤에서 그만 놀리기로 했다.
“괜찮네, 편하게 말해 보게.”
“……대마법사님의 말씀대로입니다. 대마법사님을 너무 존경한 나머지 그만, 제 아들놈의 이름도 마법사님과 똑같이 지었습니다.”
“크큭, 재밌는 아버지일세.”
“아, 아닙니다! 죽을죄를 졌습니다, 대마법사님!”
“그놈의 죽을죄는 무슨, 목숨을 그리 가볍게 여기지 마시게.”
“가, 감사합니다, 대마법사님!”
헨리는 한스에게 아들을 보여줄 것을 요청했다.
헨리의 요청에, 한스는 곧 아들의 옷들 중 가장 좋은 옷을 입혀 대마법사 앞에 자신의 아들을 세웠다.
이제 겨우 예닐곱 살은 되었을까? 한스의 아들, 어린 헨리가 똘망똘망한 눈빛으로 헨리를 올려다보았다.
어린 헨리가 헨리에게 인사했다.
“위대하신 대마법사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목소리에 총기가 있다.
듣자하니 아이의 엄마는 일찍이 병으로 죽었다고 했다.
‘아쉽군. 일찍 알았더라면 진즉에 손을 써 줬을 텐데.’
헨리는 더 꼼꼼히 살피지 못한 자신의 실수라고 생각하고 속으로 두 사람에게 미안해졌다.
헨리가 말했다.
“총명해 보이는 아이로군. 아이 엄마가 죽었으면 지금은 혼자서 키우고 있나?”
“일단은 그렇습니다.”
“‘일단은’이라면…… 혹시 재혼을 계획 중인 건가?”
“예, 아무래도 어미 없이 혼자 키우기엔 아이에겐 그리 좋을 것 같지가 않아서 말입니다.”
“그래?”
재혼.
헨리는 이 아이의 미래를 안다.
한스가 헨리를 위해 재혼하긴 했지만 재혼한 여자는 헨리를 홀대하고 자기 배에서 낳은 자식만 예뻐해 주었다.
그 결과, 헨리는 이도저도 아닌 무능력한 망나니가 되어 칼 한 자루, 마법 하나 제대로 쓸 줄 모르는 바보가 된다.
‘끔찍한 미래지.’
하지만 아무리 바보라도 자존심은 남아 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바로 흑마법.
헨리는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라도 지키기 위해 흑마법으로 재기를 노리지만, 그마저도 대마법사 헨리에게 육체를 빼앗겨 영혼조차 소실되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를 것이다.’
이번엔 다를 것이다.
한스가 재혼해 헨리가 다시 한번 불우한 유년기를 보내지 않도록.
그리고 그로 인해 인생이 망가지지 않도록 헨리가 미리 손을 쓸 것이다.
그것이 헨리가 한스 모리스 준남작을 만나러 온 이유였다.
헨리가 말했다.
“한스 준남작, 혹시 그대에게 제안을 한 가지 해도 되겠는가?”
“제안요? 어떤 제안을 말씀이십니까?”
제안이란 말에 한스의 얼굴에 긴장감이 돌기 시작했다.
“혹시 그대만 괜찮다면 내가 직접 그대의 아들을 거둬 내 제자로 길러 보고 싶은데……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예?”
헨리의 말을 들은 한스의 눈이 토끼눈처럼 동그랗게 변했다.
한스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자신의 아들을 직접 거둬 제자로 기른다니?
그것도 대륙 최고의 대마법사가?
분명히 잘못 들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마법사님? 제가 방금 무언가 잘못 들은 것 같은데 다, 다시 한번만 말씀해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너무 놀란 탓에 양해를 구하고 다시 한번 되물었다.
그러나 헨리의 대답은 전과 같았다.
“그대의 아들을 직접 거둬다가 내 수제자로 기르고 싶다고 말했네. 물론 자네의 아들은 황궁에서 생활할 것이며 나의 전폭적인 지원하에 훌륭하게 자랄 걸세.”
헨리는 부연설명을 덧붙여 좀 더 친절하게 말해 주었다.
이에 한스의 입이 떡하고 벌어졌다.
너무 놀란 나머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잠깐의 침묵.
헨리가 그 침묵을 깨며 말했다.
“……내키지 않으면 수락하지 않아도 되네. 내가 방금 살펴보니 자네 아들에게 마법사로서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것 같아 제안한 것이니까.”
“아, 아, 아닙니다!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저야말로 무한한 영광입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그리고 뒤늦게 깨달은 현실에 한스가 발을 동동 구르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런 한스를, 헨리는 가만히 미소 지은 채 바라보았다.
기쁨의 도가니였다.
한스의 열기는 좀처럼 식을 줄 몰랐다.
하지만 헨리는 그가 마음껏 기뻐할 수 있도록 인내심을 갖고 충분히 기다려 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한스의 열기가 조금 잦아들었을 때, 한스가 한껏 상기된 얼굴로 헨리에게 물었다.
“저…… 대마법사님, 감히 대마법사님께 질문 한 가지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편하게 물어보게.”
“전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곳은 어떻게 알고 오셨으며, 제 아들은 또 어떻게 알고 이런 제안을 주시는 건지……. 그러니까 제가 대마법사님께 여쭙고 싶은 말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어떻게 예의를 차려서 물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아 횡설수설했다.
이에 헨리가 말했다.
“괜찮네. 격식 차릴 것 없이 편하게 물어보게.”
“그, 그래도 되겠습니까?”
“물론일세.”
“감사합니다. 그럼 실례를 무릎 쓰고 여쭙도록 하겠습니다.”
한스가 심호흡을 한다.
그리고 심호흡 끝에 헨리에게 물었다.
“그…… 저희 부자에게…… 왜 이렇게까지 해 주시는 겁니까?”
한스로서는 그저 의아할 따름이다.
아무리 한스가 골든의 군대에 소속되어 있었다고는 해도, 골든의 군대에 소속된 병사는 최소 수만이었다.
말하자면 한스와 헨리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
이에 헨리가 옅은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자네 아들이 전생에 나라를 구했기 때문이네.”
“……예?”
한스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헨리는 나름대로 솔직하게 말한 것이었다.
비록 우연이긴 했지만 만약 헨리가 흑마술을 사용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자신의 육체를 내주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세상은, 정말로 멸망하고 말았을 테니까.
《8서클 마법사의 환생》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