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서클 마법사의 환생-380화 (380/522)

# 380

결초보은 (1)

헨리는 자신의 연구실에서 마법을 통해 모두 지켜보았다.

잠깐 사이에 벌어진 공동 속의 참혹한 비극 전부를 말이다.

사선 끝에 선 아서스의 최후의 발악.

그리고 그 발악 끝에 죽은 노예 사냥꾼들.

여기까진 그래도 어찌 이해할 수가 있었다.

여태껏 당한 게 있었으니까.

하지만 마지막에 다른 아인족들을 죽이고 피를 마시는 행위는, 헨리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위였다.

하지만 또 어찌 보면 그들에게 어울리는 행동 같기도 했다.

헨리는 피로에 지쳐 쓰러진 두 용아족을 한심한 눈초리로 내려다보았다.

지하 공동에 피가 낭자했다.

아서스와 모드레드가 못다 마신 피가 고여 웅덩이를 이루고 있었다.

그 피 냄새가 헨리의 코를 찔렀다.

헨리는 시선을 옮겨 죄 없이 죽어 나간 다른 아인족들을 보았다.

‘여기서 탈출한 다음 내가 인재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지원했던 게로군.’

아서스의 행보를 쭉 지켜보았으니 다음 행보가 얼추 예상됐다.

하지만 아서스는 예정되었던 미래와는 달리 다시는 빛을 보지 못할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헨리가 아서스와 모드레드의 목숨을 거둘 생각이었으니까.

헨리가 칼을 꺼내 들었다.

그런 다음 기절한 아서스와 모드레드의 심장에 칼날을 박아 넣었다.

두 용아족의 몸이 가늘게 떨리다가 멈추었다.

헨리는 두 용아족의 죽음을 한 번 더 확인한 뒤에야 공동에 불을 질렀다.

‘다음 생이 있다면 그땐 부디 행복한 인생을 살아라.’

곧이어 불길이 치솟았다.

헨리는 아서스의 시체가 재가 된 것을 확인한 후에야 자리를 떴다.

불쌍하고 기구한 인생이긴 했어도 헨리 입장에선 어쩔 수 없는 처사였다.

이로써 아서스는 역사 속에서 완전히 이름을 지우게 됐다.

* * *

하이랜더를 벗어난 헨리가 도착한 곳은 한참 공사가 진행 중인 어느 도시였다.

도시에 아직 이름은 붙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도시에는 벌써부터 활기가 넘쳤고 마법사들의 도움으로 이미 도시다운 건물들도 제법 즐비해 있었다.

‘세인트 홀이라…….’

이름이 붙여지지 않은 도시의 이름은 미래에 세인트 홀이라고 불리는 신성국이 된다.

합리적인 처사에 의해 평화교가 제국의 국교가 된 후 황제에게 하사받은 이름이기도 하다.

헨리로서는 아쉬울 따름이다.

헨리는 어떻게든 평화교가 국교가 되는 것을 막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결국 헨리는 평화교를 국교로 지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을 거부할 명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세인트 홀에 도착한 헨리는 세인트 홀에서도 가장 크고 화려한 건물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헨리가 도착하자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나타나 헨리에게 인사를 올렸다.

“여신님의 축복을! 대마법사님 오셨습니까?”

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의 정체는 평화교의 하급 사제들이었다.

그들은 평화교 소속의 사제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보통의 인부들과 함께 못다 지은 건물 공사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이에 헨리 또한 살갑게 대꾸했다.

“교황청 공사도 막바지에 이른 모양이로군요.”

“물론입니다. 이게 다 황제 폐하의 은총이 아니겠습니까?”

“하하, 여신님을 모시는 분들이 황제의 축복이라니요? 그 친구가 한 게 뭐가 있다고…….”

예의상 던진 말이었지만 젊은 사제들이 깔깔 웃었다.

황제를 ‘그 친구’라고 부르는 헨리의 격의 없는 태도 때문이었다.

헨리가 물었다.

“교주님은요?”

“지금쯤 기도원에 계실 겁니다.”

“기도원이라…… 교주님답네요.”

“그럼요. 다른 분도 아니고 교주님이신걸요.”

교주의 이름은 로스 보르기아.

아직은 교황으로 임명되지 않아 교주라고 불리는 것이다.

로스는 정치인처럼 이미지 관리가 아주 탁월한 인물이었다.

그도 그럴 게 로스의 배신이 세상에 드러나기 전까지 그는 세상에 둘도 없는 성자라고 불렸으니까.

헨리가 기도원에 들어서자 색유리에 투과되며 형형색색을 띄게 된 햇빛을 받으며 기도하는 로스가 보였다.

헨리에겐 그저 역겨운 모습이었지만 남들이 보기에 그 모습은 감히 거룩해 보이기까지 할 만한 광경이었다.

헨리가 인기척을 내자 그제서야 로스가 뒤를 돌아보았다.

“아! 대마법사님 오셨습니까?”

헨리를 발견한 로스가 활짝 웃으며 헨리를 살갑게 맞아 주었다, 인자하기 그지없는 거룩한 성자의 얼굴로.

헨리는 그 모습이 더욱 가식으로 보여서 더 역겨운 느낌이 들었다.

‘저런 얼굴을 가진 놈이 배신이라…….’

살갑게 헨리를 맞이하는 로스에게 헨리가 말했다.

“그냥 지나가던 차에 인사차 들렀습니다. 혹시 지금, 시간 괜찮으십니까?”

“물론입니다! 대마법사님의 부탁이시라면 없는 시간도 만들어야지요!”

굽실거리는 태도가 전혀 종교인답지 않게 느껴졌다.

두 사람은 곧 티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을 수 있었다.

접대를 위해 내온 차를 한 잔 마시며 헨리는 로스의 얼굴을 힐긋 바라보았다.

로스의 얼굴에 행복이 가득했다.

그도 그럴 게 오랜 세월을 ‘교주’로 불렸던 그가 드디어 ‘교황’이라는 종교 권력의 정점에 앉을 수 있다는 사실을 로스 보르기아 스스로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시기쯤의 제국에 대한 로스의 충성도는 아서스에게 배신했을 때만큼이나 두터웠다.

차를 한두 모금 정도 더 마시던 헨리가 말했다.

“바깥의 공사가 순조롭던데 교민들의 입국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저희 평화교 신도들 중에서도 가장 믿음이 신실한 분들을 최우선으로 두어 편안히 도시에 정착할 수 있게 여러모로 신경 쓰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신성국 세인트 홀은 제국이 건국되면서 만들어진 첫 번째 특수국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곳을 통치하게 되는 로스는 신성국의 수장으로서 세인트 홀의 주민들에게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게 된다.

그렇다 보니 평화교에 믿음이 두터운 신자들을 우선시할 수밖에.

헨리가 말했다.

“그 부분이야 교주님께서 힘써 주실 문제이니 별다른 걱정이야 들지 않습니다만……. 다름이 아니라 제가 재밌는 이야기를 들어서요.”

“재밌는…… 이야기요?”

재밌는 이야기란 말에 로스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순수한 미소는 아닐 것이다.

불안감을 감추려는 가면 같은 미소였다.

아주 미세한 차이였지만 로스만큼이나 오래 살아온 헨리가 그 차이를 모를 리가 없다.

“예, 다름이 아니고 종교 대전에 관한 이야긴데…….”

종교 대전.

로스의 표정이 굳는다.

대륙 신앙의 패권을 두고 다툰 종교 전쟁은 결국 평화교가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는 대외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다.

헨리 또한 수십 년이 지난 미래에서나 알게 된 사실이었으니까.

“어디서…… 어떤 이야기를 들으신 겁니까?”

로스가 묻는다.

물음에서 불안함이 묻어났다.

분명히 입단속을 철저히 했는데 어떻게 헨리의 귀에 종교 대전에 대한 정보가 들어가게 됐을지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게 보였다.

하지만 당장 떠오르는 사실이 없다.

그래서 불안한 것이다.

아무리 종교인들 사이에서 일어난 다툼이라 해도 자신들의 이득을 두고 다툰 패권 싸움이었기 때문에 그 모양새가 좋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헨리가 말했다.

“글쎄요……. 출처가 뭐가 그리 중요하겠습니까마는, 중요한 건 그 안에 든 알맹이라고 생각합니다.”

“하하…….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이렇게 저를 겁주시는 건지 저는 도통 모르겠군요.”

헨리의 물음에 다소 불쾌함을 느꼈는지 그 인자하던 로스의 입에서 드디어 꺼끌꺼끌한 대답이 나왔다.

헨리는 그 태도가 몹시 가소롭게 느껴졌다.

어차피 로스의 기분 따윈 헨리에겐 조금도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헨리가 로스를 찾아온 이유는 어쩔 수 없이 교황으로 내정될 로스의 뒷덜미를 움켜쥔 다음 필요한 것들을 취하기 위함이었다.

헨리가 말했다.

“겁이라니요. 교주님께서 떳떳하시다면 아무 문제가 없는 일입니다. 그럼 잡설은 생략하고……. 지금부터 ‘네프람 교단’에 대한 이야기를 한번 나눠 볼까요?”

“……!”

교황의 눈동자가 토끼처럼 동그랗게 변했다.

기껏해야 종교 대전에서 일어난 물리적인 폭력 사태에 대한 시비나, 그에 준하는 문제 정도일 줄 알았다.

그런데 네프람 교단이라니?

네프람 교단은 그가 예상하는 범위를 훌쩍 뛰어 넘는 아주 중대한 문제였다.

게다가 네프람 교단에 관한 건은 교단 내에서도 아는 이가 거의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교황의 얼굴에 복잡한 심경이 스쳐 지나갔다.

헨리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당황스러워하는 교황의 태도를 보며 두 손을 모아 입을 가린 후 옅게 미소를 지었다.

헨리는 마음을 가다듬어 표정 관리를 해 낸 다음 손을 내렸다.

하지만 눈가에는 아직 미소에 대한 즐거운 여운이 가득 남아 있었다.

헨리가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왜 그러셨습니까?”

“……무엇을요?”

“교주님.”

무의미한 말싸움을 하고 싶지 않다.

놀림에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도 있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헨리의 눈가에 남아 있던 미소의 여운이 확실하게 사라졌다.

헨리가 칼처럼 말했다.

“곧 세워질 제국에…… 저는 그 어떤 흠집도 내고 싶지 않습니다. 현재의 제국을 세우기까지 저희가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잘 아실 텐데요?”

로스의 눈가가 파르르 떨린다.

물론 시기상으로도 로스 보르기아가 네프람 교단의 뒤를 봐주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기간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

헨리에게 덜미를 잡혔다는 게 중요할 뿐이지.

헨리가 말했다.

“지금 이곳에는 저희 둘뿐입니다.”

둘뿐이라는 말.

그 말에 눈밑 살이 파르르 떨리던 로스가 허겁지겁 헨리 앞에 무릎을 꿇었다.

“죄, 죄송합니다! 저, 저는 그저!”

“그저 뭐요? 함께 마왕 토벌에도 참여하셨으면서도 마왕 강림에 힘쓰는 네프람 교단의 뒤를 봐주다니……. 왜 그러셨습니까?”

“아, 아닙니다! 단순한 동정심이었습니다! 단순한 동정심에 살려 둔 것뿐입니다!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동정심이요?”

“예! 그, 그렇습니다! 제가 모시는 여신님이 사랑과 평화의 여신님이 아니십니까! 그래서 평등과 자애를 실천하려는 마음에 그만……!”

억지다.

억지고 말도 안 되는 이유다.

이에 헨리는 가만히 검지를 들어 입술에 갖다 붙였다.

로스의 얼굴에 당혹감이 잔뜩 어렸지만 헨리의 제스처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헨리는 웃었다.

애초에 로스의 목덜미를 움켜쥘 생각이긴 했다.

하지만 움켜쥘 뿐이지 목을 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어지러운 민심을 결집시키기엔 종교만한 것이 없다.

거기에다가 로스처럼 모든 교인들의 지지를 받는 성자는 현자보다 더 탄생하기가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헨리는 로스의 목을 칠 생각이 없었다.

새로운 성자를 물색하는 것보다 자신의 말을 잘 듣는 성자가 더 편했으니까.

“좋습니다. 그럼 삼 일 후에 다시 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때 동안 네프람 교단은…….”

“채, 책임지고 처리하겠습니다!”

“말귀가 밝아서 좋네요.”

말을 마친 헨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다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빠져나갔다.

헨리가 빠져나간 직후, 로스가 무너지듯 자리에 주저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진땀을 뺐다.

대체 어디서 이야기가 새어 나간 건진 모르겠지만 어찌 됐든 한 번 더 기회를 받은 것 같아 마음이 놓였기 때문이다.

로스는 애써 가슴을 진정시킨 후 곧장 로거를 호출했다.

“로거!”

종교 전쟁에서, 그리고 대륙 통일에서 평화교의 위엄을 드높인 위대한 성기사, 로거.

그가 로스 교주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부르셨습니까, 교주님.”

“지금 당장 네프람 교단을 말살시키게. 아무도 모르게 움직여야 할 것이야!”

“알겠습니다.”

명령을 받은 로스가 믿음직스러운 표정으로 방을 빠져나갔다.

* * *

동부의 끝자락 어딘가.

로스와 대화를 끝낸 직후, 헨리가 곧바로 발걸음을 옮긴 곳이다.

헨리가 이곳을 찾은 이유는 간단했다.

이곳 어디쯤에 네프람 교단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없애선 안 될 일이지.’

헨리는 로스에게 곧 세워질 제국에 흠을 내기 싫으니 알아서 교단을 처리하라고 말했다.

하지만 헨리는 네프람 교단을 말살시킬 생각이 없었다.

네프람 교단은 메시아를 필두로 마신과 교섭해 새로운 마왕의 탄생을 준비하는 집단.

반대로 이야기하면 네프람 교단을 통해 얼마든지 마왕의 탄생을 예측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동부 산맥에 도착하자 익숙한 우물이 보였다.

우물을 발견한 헨리는 네프람 교단을 발견했을 당시를 떠올렸다.

‘이번에는 좀 까다롭겠는데.’

우물 아래 지하.

언데드가 득실대고 마력이 결집되지 않는 곳.

그곳에 네프람 교단의 본거지가 있었다.

과거에는 검술과 클레버를 통해 손쉽게 교단을 헤집었지만 지금은 사정이 그렇지 못했다.

하지만 숨겨진 함정들이 어떤 것들인지 알기에 다른 방식으로 교단을 뒤집을 생각이었다.

우물 앞에 선 헨리가 위즈덤을 꺼내 들었다.

그런 다음 얼마간의 주문 끝에 나직이 명령어를 내뱉었다.

“기가 리버스 그래비티.”

쿠구구구구-!

초고위급의 역중력 마법.

지축이 흔들렸다.

헨리는 하나둘씩 허공으로 떠오르는 초목들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 아래에 교단이 있는 것을 뻔히 아는데 굳이 아래로 기어 들어가 고생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둠으로 뒤덮였던 지하 공동이 줄기 식물처럼 허공으로 뽑혀 나오며 그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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