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9
불편한 재회 (4)
며칠이 지났다.
헨리는 그때 결심한 대로 지하 공동을 항상 볼 수 있는 마법진을 그려 두고 일상으로 복귀했다.
그동안 아서스가 겁탈당한 횟수는 헤아릴 수가 없다.
겁탈당한 횟수가 두 자릿수를 넘어갈 땐 측은지심이 들 법도 했지만 헨리는 끝끝내 모른 척했다.
아서스가 저지른 악행들을 생각하면 두 자릿수가 아니라 세 자릿수도 부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헨리는 일상으로 복귀해 못다 지은 궁궐을 짓고 제국 건국에 온 힘을 쏟았다.
그것이 당연했다.
아서스의 과거는 단순한 호기심에 지나지 않았지만, 제국은 앞으로 헨리가 다시 운영해 나갈 헨리의 운명 공동체였으니까.
더군다나 헨리에겐 두 번째 제국이었으므로 과거의 제국보다 훨씬 더 잘 만들고 싶은 욕심이 컸다.
그 결과, 과거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린드버그는 제국 수도로써의 면모를 갖추어 나갈 수 있었다.
황궁 옆에 세워진 마탑.
마탑의 꼭대기에는, 과거의 마탑이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역시 헨리의 개인 연구실이 지어졌다.
연구실 내부 벽면에 갖가지 메모들이 적혀 있었다.
메모 전부가 제국 건국에 필요한 것들이다.
벽면을 가득 메운 메모를 지켜보던 헨리가 말했다.
“귀찮아 죽겠네, 이거.”
말 그대로였다.
건국 자체는 이미 한 번 해 본 일이라 그다지 어렵지 않게 일을 진행할 수 있다.
과거에도 성공적으로 제국을 건국해 냈으니까.
문제는 귀찮음이었다.
할 일이 많았다. 많아도 너무 많았다.
옛날엔 혼자서 이 많은 일들을 다 어떻게 처리했나 싶을 정도로 말이다.
물론 귀찮다고 해서 남에게 미루거나 그러진 않을 것이다.
이것은 온전히 헨리가 선택한 일이었으니까.
헨리는 앞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를 어쩐다…….’
건국 선포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대륙 곳곳에서 주민들이 수도로 입성하고 있었다.
그들을 관리할 치안국이나 세무국 등 생활에 필요한 국가 시설들도 차근차근 설비되어 가고 있었다.
내각 구성 또한 물론이다.
내각은 이미 크게 몇 가지 갈래로 나누어 요직에 동료들을 앉혔다.
하지만 아직 한 가지, 어쩌면 제일 중요한 문제가 될 수도 있는 ‘국교’ 문제를 아직 처리하지 못했다.
“국교라…….”
헨리의 입에서 국교라는 단어가 흘러나왔다.
국교.
나라가 지정한 공식적인 종교.
헨리는 과거에 세웠던 모리스 왕국에선 따로 국교를 지정하지 않았다.
아서스와의 싸움에서 다른 종교의 도움을 크게 받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그때는 이미 남은 인류의 대다수가 헨리를 신격화해서 믿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다른 종교가 비집고 들어올 자리가 없었다.
하지만 다시 세워질 제국은 사정이 좀 달랐다.
과거의 제국은 로스 보르기아 1세가 이끄는 평화교를 국교로 지정했다.
종교 대전에서 승리해 여러 종교들 중 세력이 가장 컸고 마왕 토벌군에도 참여했으니 당연한 처사였다.
하지만 헨리는 평화교의 미래를 안다.
평화교를 이끄는 로스 보르기아 1세는 훗날 욕심에 눈이 멀어 아서스의 편에 서게 된다.
물론 아서스라는 싹을 잘라 낼 테니 그럴 일은 없을 테지만 종교인이란 작자가 기회주의에 편승하는 꼴을 보았으니 있던 정도 다 떨어져 버렸다.
‘어쩌지?’
명분은 평화교에 있었지만 도무지 마음이 기울지 않는다.
게다가 이 시기에는 아직 성녀가 발견되기 훨씬 전의 일이었다.
그러니 로스를 대신할 인재도 없다.
한참을 고민해도 마땅한 답이 서질 않자 헨리는 잠시 결정을 미뤄 두기로 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음?’
국교에 대한 문제를 미뤄 두려던 찰나, 아서스 감시용으로 설치해 두었던 마법진에서 반응이 왔다.
‘또 겁탈이냐?’
요 며칠간 같은 일상의 반복이었기에 이번에도 같은 상황이려니 했다.
하지만 같은 상황이려니 해도 혹시 모를 변수 때문에 확인을 빼먹을 순 없었다.
헨리는 즉시 눈을 감고 설치해 둔 마법이 보여 주는 영상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평소와 좀 달랐다.
‘새로운 얼굴이 보이네?’
며칠간의 감시를 통해 헨리는 사냥꾼들의 수와 그들의 이름 등에 대해 알게 됐다.
그런데 지금 보이는 얼굴은 전혀 못 보던 인물이다.
흥미로웠다.
헨리는 정신을 집중해 저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니까 여기 있는 놈들이 다 아인이란 거지?
-그렇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녀석은 바로 이놈입니다.
킨은 자신만만하게 아서스를 보여 주었다.
영양제를 먹지 않는다는 이유로 걸핏하면 겁탈해 놓고 그런 놈을 손님에게 내놓다니, 뻔뻔해도 유분수란 말이 떠올랐다.
-이놈이 바로 그 유명한 용아족의 후손입니다.
-용아족?
-예! 드래곤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불리는 용아족의 먼 후손입니다. 보십시오! 아름답지 않습니까? 이놈은 심지어 인간보다 진한 마력과 특별한 능력, 그리고 늙지 않는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킨이 자신 있게 아서스가 가진 가치에 대해 설명했다.
손님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진다.
그리고 그것은 헨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용아족이라고?”
용아족.
킨의 말대로 용과 인간 사이에 태어난 하프 드래곤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인간과 번식한 끝에 생겨난 드래곤의 힘이 아주 미약하게 남아 있는 이종족이었다.
그러나 용아족이 실존한다는 말은 들어 보았지만 그 존재가 몹시 희귀하여 헨리조차도 실제로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아서스가 용아족이라니?
그게 사실이라면 확실히 놀라운 발견이었다.
손님이 킨에게 물었다.
-흐음, 외모와 마력은 잘 알겠는데……. 특별한 능력이란 건 뭐지?
-음, 쉽게 설명드리자면 용아족 특유의 이능력 같은 건데……. 마법은 아니지만 무형의 힘으로 공격과 방어를 할 수 있습니다.
-호오, 공격과 방어를?
-그렇습니다!
-그럼 안 볼 수가 없겠군. 어디 한번 보여 줘 보게.
-지, 지금 말씀이십니까?
-당연하지. 혹시 자네가 거짓말이라도 하는 거면 어떡하나? 그리고 그에 대한 대응 수단도 알려 줘야 내가 마음 놓고 아인들을 구매할 게 아닌가?
-음, 맞는 말씀이십니다.
손님의 합리적인 의심에 킨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냥 돈만 많은 고객은 아닌 듯했다.
손님의 요구에, 킨은 렌과 듄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렌과 듄이 서둘러 아서스의 능력을 선보일 준비를 했다.
아서스의 몸에 채워진 수많은 구속갑들이 하나둘씩 해제됐다.
그럴 때마다 안색이 거무죽죽한 아서스의 얼굴이 조금씩 드러났다.
하지만 그래도 아름답다.
시들지 않는 미모는 용아족이 가진 능력 중 하나였으니까.
그것을 본 헨리가 중얼거렸다.
“저게 며칠간 영양제로 연명하면서 겁탈만 당한 얼굴이라니……. 참 불공평하네.”
아서스가 잘생긴 건 알고 있었지만 새삼스럽게 다시 깨닫는 계기가 됐다.
구속구와 구속갑들이 하나둘씩 풀리더니 이내 곧 손목과 발목을 제외한 모든 구속구들이 해제됐다.
안대가 벗겨진 아서스의 눈에 독기가 잔뜩 어려 있다.
하지만 입에는 여전히 마스크가 채워져 있었다.
혹여나 쓸데없는 말을 할까 봐서였다.
마스크가 씌워진 아서스에게, 킨이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분이 앞으로 네 주인님 되실 분이시다. 그러니 지금 당장 네가 가진 능력을 보여 봐. 만약 말을 듣지 않으면…….
말과 함께 아서스의 엉덩이를 손가락을 쿡 찌르는 킨.
킨이 말했다.
-알지?
입꼬리를 올리며 웃는 그 미소에 헨리마저 소름이 쭈뼛 돋았다.
실제로 전신에 닭살이 돋은 아서스는 킨의 말을 듣자마자 더욱 더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킨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런 눈빛 따위 조금도 무섭지 않다는 듯, 킨이 태연자약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손님 뒤에 선 렌과 듄도 마찬가지였다.
잠깐의 공백.
얼마 뒤, 아서스의 은빛 머릿결이 물속에 출렁이는 해초처럼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오오, 이제 시작합니다.
아서스의 머릿결이 출렁이기 시작하자 킨이 자신 있는 목소리로 고객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그런데 그 순간, 킨의 목에 강렬한 압박이 가해지며 킨의 몸뚱이가 허공으로 들려 올라갔다.
-켁켁! 야, 야!
킨의 안색이 파래지며 쇳소리 같은 신음이 흘렀다.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렌이 황급히 소리쳤다.
-마흐바!
파지지짓!
렌이 명령어를 외친 순간, 아서스의 몸에 푸른 스파크가 튀었다.
그와 동시에 허공에 들려 올라갔던 킨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켁켁! 이 개자식이!
분에 못이긴 킨이 아서스를 짓밟기 시작했다.
그러나 듄이 쏜살같이 달라붙어 킨을 말렸다.
-킨! 진정해! 손님께서 보고 계시잖아!
그러나 듄의 말림에도 불구하고 킨은 몇 대 더 발 차기를 내지른 후에야 화를 가라앉혔다.
그런 다음 쓰러진 아서스의 머리끄덩이를 붙잡아 올린 다음 귀에 대고 쏘아붙였다.
-넌 이따가 보자.
다시 아서스를 내동댕이치는 킨.
그 광경을 본 손님이 물었다.
-방금 뭐지?
-후…… 보신 그대로입니다. 용아족이 반항을 시도했지만 몸에 차고 있는 특별한 구속갑으로 고통을 주어 놈의 행동을 제어한 거죠.
-구속이 풀릴 위험은?
-절대 없습니다.
렌이 서둘러 구속갑의 안전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손님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들의 대화를 듣던 아서스는 분노로 머리가 뜨거워졌다.
하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입술을 깨무는 게 고작이었다.
분했다.
분했고 화가 났고 떨리는 분노에 몸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눈에선 피눈물이 흐르는 것 같았다.
놈들에게 포획당한 이후, 지금이 바로 가장 많은 구속갑이 풀린 때인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깨문 입술을 더더욱 세게 깨물었다.
분노 때문에 살이 뜯겨져 나가 피가 흘렀지만 아서스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죽이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아서 저놈들을 찢어 죽여 버리고 싶었다.
분노로 손끝이 떨렸다.
화가 절정에 치달았다.
역겨움과 억울함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 와 입 밖으로 게워질 것만 같았다.
그리고 바로 그때였다.
쩌적-!
무엇인가가 갈라지는 소리.
분노는 여전했다.
하지만 뜨거운 분노만큼이나 전신의 감각 또한 선명했다.
쩌적-!
소리가 다시 한번 울렸다.
구속갑을 끊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그리고 그 순간!
쩌저적- 콰앙!
손목과 발목을 감싸고 있던 구속갑이 폭발하듯 사방으로 튕겨져 나갔다.
“뭐야!”
아서스에게 찬 구속갑이 저만치 날아가자마자 빠르게 상황파악을 마친 킨이 쏜살같이 몸을 날렸다.
하지만 악의에 찬 아서스의 행동이 더 빨랐다.
-컥! 커어억!
아서스의 두 눈에 독기가 흘렀다.
아서스는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한 앙상한 다리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눈에는 실핏줄이 터져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입술은 너무 세게 물어뜯어 살결이 너덜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정신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또렷했다.
용아족이 가진 이능력은 마력과 상관없이 정신력에 의해 좌우된다.
그렇기 때문에 분노로 머리가 뜨거워진 지금, 아서스는 현재 아서스 평생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되었다.
-죽어!
아서스의 목에서 쇳소리 같은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아서스 앞에 핏물들이 튀었다.
콰드득!
섬뜩한 소리가 공동을 맴돌더니 곧이어 네 덩이의 핏물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어지럽게 터져 나갔다.
해낸 것이다.
아서스의 살고자 하는 강렬한 의지가, 절대로 풀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구속갑을 뜯어내고 눈앞의 원수들을 처단해 준 것이다.
아서스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머리가 터져 죽은 네 구의 시체들을 보고 있자니 기쁨에 소스라쳐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아서스는 끝까지 정신머리를 붙잡았다.
정신머리를 붙잡고 다른 용아족, 모드레드의 구속갑을 풀고 붙잡힌 다른 아인족들의 구속갑들을 풀어 주었다.
“감사, 감사합니다……!”
아서스에 의해 갑작스레 자유를 되찾게 된 아인족들이 눈물을 흘리며 아서스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러나 아서스가, 모드레드를 제외한 다른 아인족을 풀어준 것에는 단순한 정의감 때문이 아니었다.
“너도! 너도 죽어!”
콰드득!
또다시 섬뜩한 소리가 울렸다.
동시에 풀려난 아인족들의 머리가 폭발했다.
아서스는 죽은 아인족으로부터 새어나온 핏물을 두 손으로 받쳐 허겁지겁 마셨다.
아인족들의 피에 녹아 있는 소량의 마나라도 섭취하기 위해서였다.
더러운 인간의 것은 먹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가까이에 있는 다른 아인족들의 피를 노린 것이다.
일방적인 살육이 벌어졌다.
다 마시지도 못할 피였지만, 아서스는 그동안 억눌러 온 분노를 표출하기 위해 닥치는 대로 아인족들을 죽였다.
그 덕분에 공동에 갇혀 있던 모든 아인족들이 몰살당했다.
물론 모드레드는 살려 두었다.
그는 아서스와 같은 용아족이었으니까.
아서스 덕분에 풀려난 모드레드가 허겁지겁 아인족들의 피를 마신다.
털썩!
자리에 주저앉는 아서스.
눈앞이 희미하다.
오랫동안 성고문에 시달려 왔다.
게다가 방금 전에 일평생 가장 많은 힘을 사용한 탓에 체력이 뒷받침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모드레드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얼마간 푹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것이 바로 설 것이라 믿었다.
그래서 마음 놓고 기절할 수 있는 것이다.
쓰러진 두 용아족의 시야가 희미해졌다.
입가에는 광기 어린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쯧쯧, 그럼 그렇지.”
희미해져 가는 의식 사이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헨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