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8
불편한 재회 (3)
하이랜더.
원래는 작은 왕국이었다는 곳.
동시에 아서스가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왕국인 곳.
아서스는 그러한 주장을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작위를 획득한 이후 이곳을 다스리게 되었다.
처음엔 아서스가 하이랜더 왕국의 후손이라는 사실 자체가 못 미더웠다.
이유는 간단했다.
먼저 하이랜더라는 지역에 대한 자료가 거의 없는 것이 첫 번째 이유였고, 두 번째는 아서스의 유일의 혈육이 모드레드뿐이라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미심쩍은 부분이 많았지만 다들 아서스의 출신 성분에 대해선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우선 헨리가 내각을 구성할 때 출신 성분이 아닌 능력을 본 게 가장 큰 이유였다.
아서스의 능력을 보았을 때 설사 그가 이곳의 후손이 아니더라도 큰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가 아니더라도 모두가 아서스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인 가장 큰 이유는 다름 아닌 ‘외모’ 때문이었다.
큼직한 키와 더불어 여자인지 남자인지 분되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외모.
더불어 찰랑거리는 은발과 모든 행동에 있어 기품이 넘치는 그를 보고 어느 누가 감히 천출이라고 생각하겠는가?
게다가 모드레드 또한 아서스와 비슷한 외모를 가지고 있으니 다들 몰락 왕국의 후손이겠거니 하고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이젠 모든 것을 의심해 봐야겠지.’
과거라면 믿어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아서스가 어떤 인간인지 헨리는 그의 인간성의 밑바닥을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아서스의 외모가 어떻든 간에 모든 것을 의심해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헨리가 땅바닥에 손을 붙이며 말했다.
“인간.”
우웅!
언령이었다.
헨리의 의지를 전달받은 마력들이 헨리의 기억 속에 각인된 추적 마법으로 즉시 치환됐다.
추적 마법은 바닥에 희미하게 빛나는 빛의 줄기들을 만들어 냈다.
만들어진 빛의 줄기들이 뻗어 나가다가 다시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뒤, 헨리의 눈앞에 수십 가닥에 해당하는 빛의 줄기들이 마구잡이로 생겨나기 시작했다.
‘정보가 희박할 땐 결국 탐문 수사 뿐이지.’
예정된 미래였다면 훗날 아서스는 린드버그로 직접 헨리를 찾아오게 된다.
헨리가 내각을 구성하기 위한 인재 등용문을 열었다는 사실을 대륙 전역에 걸쳐 뿌렸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서스가 진짜 하이랜더 가문의 사람일지라도, 두 눈으로 직접 그 관계의 증명을 보지 않는 이상 헨리는 아서스의 출신 성분을 믿을 수가 없었다.
헨리의 시선이 수십 갈래로 뻗어진 빛줄기로 옮겨 갔다.
아서스와 하이랜더에 대한 정보가 없으니 일일이 사람들을 만나 주먹구구식 탐문 수사를 펼칠 생각이었다.
그래서 헨리는 우선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부터 조사해 보기로 했다.
‘여기인가?’
근처에 마을은 없다.
이곳이 과거엔 왕국이었을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왕국의 흔적이라고는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폐허뿐이었으니까.
헨리는 뻗어 나갔던 수십 갈래의 빛줄기들 중 가장 가까이에 위치한 빛줄기 앞에 섰다.
그 끝엔 커다란 나무와 돌무더기들이 몰려 있었다.
헨리는 손가락을 튕겨 그것들을 들어 올렸다.
‘후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거목과 돌무더기들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그리고 그것들이 있던 자리에는 살점이 썩어 가고 있는 어느 이름 모를 시체 한 구가 놓여 있었다.
“쯧.”
아무래도 살아 있는 인간이 아닌 모든 인간들을 명령의 대상으로 인식한 듯했다.
마법이 실패했다는 뜻이다.
헨리는 들어 올린 것들을 다시 제자리에 두었다.
그런 다음 마법을 수정해 다시 시전했다.
줄기가 수십 가닥에서 몇 가닥으로 줄어들었다.
헨리는 줄어든 줄기를 보고 다시 짧게 혀를 찼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줄기를 찾아 이동했다.
‘음?’
헨리는 빛줄기를 쫓던 중 무언가 이상함을 발견했다.
가장 가까이에 있던 줄기가 하나인 줄로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 수십 가닥이 엉켜 한 줄기처럼 보였던 것이다.
‘호오?’
흥미로움에 줄기를 추적했다.
줄기의 끝에 거의 다 다다랐다.
그런데 발이 아니라 눈으로 줄기를 쫓아 보니 이번에도 웬 돌무더기에서 줄기가 끝났다.
‘또?’
돌무더기.
좀 전에 보았던 시체 생각이 났다.
그런데 이번에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확실하게 대상을 설정해서 마법을 사용했다.
‘최소 12개.’
보이는 줄기의 개수였다.
헨리는 의아한 마음이 들었지만 우선은 조사해 보기로 했다.
헨리가 쌓인 돌무더기를 향해 눈짓했다.
그러자 먼지가 와르르 쏟아지며 돌무더기가 허공으로 들려 올라갔다.
들려 올라간 돌무더기 사이로 지하로 향하는 입구가 보였다.
‘이건 또 뭐야?’
시체가 아니었다.
그곳엔 지하로 향하는 계단이 있었다.
줄기는 그곳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헨리는 다른 방향으로 뻗어 나간 줄기들을 보았다.
그 줄기들은 지하가 아닌 다른 방향으로 뻗쳐 있었다.
하지만 지하로 향하는 줄기들의 개수가 훨씬 더 많았다.
그럼 고민할 이유가 없다.
헨리는 자연스럽게 지하 계단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라이트.”
어두컴컴한 지하 계단 내부.
불빛을 밝히자 제법 정돈된 길이 나왔다.
계단은 짧았다.
짧은 계단을 지나자 널따란 공동이 나왔고 헨리는 빛의 영역을 공동 전체로 확장시켰다.
“음?”
라이트의 빛이 공동 내부를 비추자 헨리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빛이 그 안에 감추어져 있던 사람들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사람이었다, 그것도 살아 있는 사람.
그들은 킬라이브에서 보았던 죄수들처럼 좁디좁은 감옥 속에 한 명씩 갇혀 있었다.
짐승들이나 찰 법한 입마개와 많은 수의 구속갑들을 찬 채로 말이다.
문득 헨리의 머릿속에 한 가지 사실이 스쳐 지나갔다.
‘건국 초기에 노예 사냥꾼들이 성행했다더니……. 설마?’
골든의 정복 전쟁으로 대륙의 질서가 무간지옥처럼 되었을 때, 사람은 제법 괜찮은 상품이었다.
살아 있든 죽어 있든, 사람은 여러모로 쓸모가 많았으니까.
물론 제국이 건국되고 나선 거의 척결되었다곤 하지만…….
‘아직은 건국 이전이니까.’
헨리는 한숨을 내쉬며 쇠창살 앞으로 다가갔다.
‘철저하게도 봉해 놨군.’
입마개와 수갑뿐만이 아니었다.
자세히 살펴보면 기본 수갑 이외에도 눈가리개나 귀마개, 그리고 엄지와 엄지를 묶는 가락 수갑까지 아주 철저하게 봉해 놓았다.
‘보통 노예들이 아닌가?’
그렇다 보니 합리적인 의심까지 들었다.
혹시 이들은 사냥된 노예가 아닌 다른 존재들이 아닐까 하는.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꼼꼼하게 구속해 놓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방 안의 사람들을 구경하던 중 헨리는 어느 방 앞에서 멈춰 섰다.
헨리의 동공이 확장됐다.
“……어?”
너무 놀란 나머지 육성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수감자들이 차고 있는 귀마개 탓에 헨리의 목소리를 들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헨리는 놀란 눈초리로 시선이 닿은 수감자를 한층 더 자세하게 살펴보았다.
맞는 것 같다. 아니, 확실했다.
눈앞의 수감자는 아무리 살펴봐도 아서스였다.
‘아서스가 노예였다고?’
금시초문이었다.
아서스는 분명히 하이랜더 왕국의 후손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는데?
헨리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직 미처 확인하지 못한 수감자들까지 모두 확인해 보았다.
‘있어.’
그리고 발견할 수 있었다.
머리색은 좀 바뀌었지만 아서스와 같은 혈통이라고 알려진 모드레드 하이랜더가.
그 역시 전신에 구속갑을 차고 아서스처럼 감옥 한쪽에 방치되어 있었다.
‘이게 대체……?’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헨리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한참의 고민 끝에 결정을 내렸다.
‘좋아, 그럼 일단 이렇게 해 보자.’
딱!
결심을 마친 헨리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곧 공동 전체를 밝히던 빛이 순식간에 암전되었다.
* * *
“쯧, 오늘도 허탕이네.”
“내일까지만 더 찾아보고 없으면 다른 곳으로 옮기자고.”
“대체 어떤 놈이 이곳에 아인이 있다고 한 거야?”
세 명의 대화 소리였다.
세 사람은 익숙하게 지하 계단으로 통하는 문을 열고 지하 공동에 어둠을 밝혔다.
어둠을 밝히자 세 사람의 얼굴이 드러났다.
각각 ‘킨, 렌, 듄’이란 이름을 가진 자들이었다.
킨이 말했다.
“영양제 가져와.”
킨의 명령에 렌은 등에 지고 있던 가방에서 자신이 만든 특제 영양제를 한 통 꺼내 킨에게 내밀었다.
킨은 그것을 받아 든 다음 감옥 안에 갇혀 있는 수감자들의 마스크를 벗기고 한 알씩 먹였다.
킨이 영양제를 먹이며 말했다.
“제길, 아무리 영양제를 먹여도 대소변 냄새까진 어떻게 할 수가 없네.”
“그래도 조금만 참자고. 길어 봤자 일주일이야. 일주일 뒤엔 이놈들 전부를 팔아치울 수 있으니까. 그때까지만 참으면 돼.”
“알고 있어. 일주일 뒤엔 이 지긋지긋한 생활도 끝이다.”
그들은 자기들만 알 수 있는 말들을 주고받으며 떠들어 댔다.
이윽고 아서스의 차례가 되었다.
킨이 아서스의 마스크를 벗기고 입 안에 영양제를 넣어 주었다.
그러나 아서스는 받아먹은 영양제를 씹는 듯하더니 이내 곧 퉤하고 뱉어냈다.
그 모습을 본 킨의 눈밑이 파르르 떨렸다.
“이거 또 지랄이네?”
“킨! 참아! 절대로 때리면 안 돼! 알지, 그놈이 제일 비싼 거?”
“알아! 아는데……! 알긴 아는데! 후, 이 빌어먹을 놈이……!”
킨은 아서스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하지만 이내 분노를 삭였다.
렌의 말대로 아서스는 자신들이 포획한 상품들 중 가장 비싼 종에 해당했으니까.
킨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 네가 이렇게 배짱을 부리겠다면 어쩔 수 없지. 이번에도 그걸 하는 수밖에.”
킨은 전략을 바꾸기로 했다.
주먹으로 화풀이를 할 수 없다면 다른 방식으로 고통을 주면 됐으니까.
킨은 아서스의 입에 다시 마스크를 채웠다.
그런 다음 자신의 바지를 내렸다.
불길함을 감지한 아서스가 발버둥 쳤다.
그러나 전신이 구속된 아서스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다 네가 자초한 일이다.”
킨은 익숙한 모양새로 아서스를 겁탈하기 시작했다.
아서스는 입을 틀어막고 있는 마스크 때문에 비명을 내지를 수도 없었다.
발버둥도 칠 수가 없었다.
구속갑이 전신을 옥죄고 있었기에.
겁탈은 오랫동안 계속됐다.
아서스의 체력이 다해 아서스가 지쳐 쓰러질 때까지 말이다.
그렇게 한참 뒤, 마침내 아서스가 체력적으로 무너졌을 때, 킨은 그제서야 아서스의 입에 영양제와 물을 쏟아 넣었다.
“진작 그럴 것이지. 이 녀석, 사실 즐기고 있는 거 아냐?”
“크큭, 그럴지도 모르지.”
“야 그래도 깨끗이 써라. 혹시라도 상품에 하자가 있다는 걸 들키면 그땐 우리도 감당 못 해.”
“쓸데없는 걱정이야. 이놈이 과연 자기 입으로 남자한테 겁탈당했다는 걸 말이나 할 수 있겠어?”
“하긴, 나 같아도 말 못 하겠다.”
“자, 자, 배식 끝났으면 다시 나가자고. 난 이런 곳에서 배를 채우고 싶지 않으니까.”
세 사람은 왁자지껄 떠들며 다시 공동을 벗어났다.
빛이 사라졌고 공동은 다시 어둠에 잠겼다.
그리고 얼마 뒤, 다시 공동이 밝아지며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헨리였다.
헨리는 공동의 주인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마법으로 존재감을 완전히 지웠던 것이다.
그런 다음 처음에 다른 방향으로 뻗어져 있던 빛줄기가 그들 세 사람의 것임을 확인한 뒤 조용히 기척을 감추고 정보를 수집했다.
아서스가 몇 차례나 겁탈당하는 그 순간까지도 말이다.
아서스는 바닥에 처박혀 가늘게 몸을 떨고 있었다. 여전히 구속구와 구속갑에 채워진 채로.
‘아인이라.’
아인(?人).
인간이 아닌 모든 이형 인간을 일컫는 말로 보통은 이종과의 교배를 통해 탄생한 인간을 일컫는다.
보기 드물긴 했지만 아인은 확실히 존재했다.
하지만 현재에 와선 대부분이 이종의 피가 희미하게 섞인 쿼터 블러드가 대부분이었다.
‘흐음, 이를 어쩐다?’
당연한 말이었지만 아서스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없다.
헨리는 아서스의 과거가 궁금했던 거지, 아서스를 찾아 도와주거나 갱생시키고자 하는 마음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서스가 겁탈당하고 있을 때도 잠자코 지켜보기만 했다.
헨리는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서스의 출신 성분을 알게 된 것까진 좋았으나, 아직 어떤 경로로 이곳을 탈출해서 자신에게 오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헨리는 결론을 내렸다.
‘좀 더 지켜보지, 뭐.’
헨리가 굳이 나서지 않아도 아서스는 반드시 스스로 탈출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의 역사가 그랬으니까.
그리고 헨리는 그렇게 탈출한 아서스가 어떤 경로로 자신에게 오게 됐을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그래서 한동안은 모른 척 아서스를 지켜보기로 했다.
아니, 모른 척이 아니라 감시를 달아 두기로 했다.
방금 전에 자리를 떠난 세 사람이 기다리는 ‘손님들’이 누구인지도 궁금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