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7
불편한 재회 (2)
“아버지이!”
언덕 꼭대기에서부터 우당탕탕 뛰어오는 소년의 정체.
소년은 실버가 맞았다.
골든 잭슨의 유일한 외아들이자 골든이 세운 유라시아 제국의 두 번째 황제, ‘실버 잭슨 에드워드’.
실버의 말년은 비참했다.
국정을 돌보지 않고 술과 여자 같은 환락에만 빠져 살다 보니, 아서스에게 실권을 모두 내주고 종단에는 헨리에게 사형까지 명령했다.
더불어 자신의 아비가 세운 나라를 조금도 지켜 내지 못하고 파멸로 몰고 갔다.
그렇기에 과거에 놈이 저질렀던 죄는 한 번의 죽음으로는 부족할 만큼 막대한 것이었다.
“실버!”
지척까지 다가온 자신의 아들을, 골든이 말에서 내려 단숨에 들어 안아 주었다.
골든이 말했다.
“녀석, 이 아비를 마중하러 나온 게냐?”
“그렇습니다!”
“기특하구나! 그런데 마왕을 쓰러뜨렸다는 기별을 보낸 적이 없는데 내가 오늘 돌아오는 건 어찌 알았더냐?”
“언제 돌아오실지 몰라서 그냥 여기서 매일 기다렸습니다!”
“크하하하! 명쾌해서 좋구나!”
실버는 골든이 대륙을 제패하던 중에 낳은 아이로, 아내가 몸이 약해 일찍 죽었기에 더더욱 사랑으로 키운 아이다.
그렇기 때문에 실버는 골든뿐만 아니라 헨리를 포함한 모든 동료들을 아버지처럼 믿고 따랐다.
“야 실버! 네 아빠만 아버지고 우린 안 보이냐!”
“그래 인마! 얼른 와서 우리도 안아 줘!”
총명한 아이였다.
배움이 빨랐고 눈에는 생기가 감돌았으며 같이 있으면 사람을 미소 짓게 하는 그런 아이였다.
그래서 헨리도 실버를 유독 귀여워해 주었다.
실버가 아버지 품에서 내려오자마자 곧장 헨리에게로 다가왔다.
헨리 앞에 선 실버가 곧장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다녀오셨어요! 큰삼촌!”
큰삼촌.
모두가 실버에게 삼촌이었지만 오직 헨리만이 실버에게 큰삼촌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헨리는 실버에게 말과 글을 가르쳤을 뿐만이 아니라, 생활에 필요한 예절이나 지식들까지 모두 가르쳐 준 사제지간이기도 했으니까.
그러니 다른 삼촌들과는 그 권위가 남다를 수밖에.
헨리는 자신에게 허리 숙여 인사하는 실버를 얼마간 바라보았다.
잠깐의 어색함.
평소라면 골든처럼 자신을 단박에 안아 주셨을 텐데 오늘의 헨리는 뭔가 좀 이상했다.
그래서인지 실버는 평소와는 달리 얼마간 자신을 바라보는 그 짧은 공백이 참 어색하게 느껴졌다.
생각을 마친 헨리가 곧 말에서 내려 실버 앞에 섰다.
그런 다음.
딱!
“아얏!”
주먹으로 실버의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그 모습을 본 몇몇이 놀랐다.
평소의 헨리는 장난으로라도 절대 실버를 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꿀밤을 먹인 직후, 헨리가 말했다.
“이놈 자식, 안 본 사이에 머리 물렁해진 거 봐라. 너, 내가 시킨 공부는 제 때 제 때 한 거 맞냐?”
“그, 그게…… 티가 나요?”
“쯧쯧, 자기 아버지 닮아서 뺀질거리기나 하고…….”
“하하! 오자마자 애부터 잡는 거야, 헨리?”
심각한 일인 줄 알았는데 단순한 장난이란 사실을 알고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것이 헨리가 내린 최선의 결론이었다.
아직 실버는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다.
물론 헨리의 기억 속 실버에게는 괘씸함이 남아 있긴 했지만, 그것에 대한 분노들은 앞으로 실버를 가르치는 내내 소소하게 풀어도 괜찮을 것이다.
“헤헤.”
헨리의 기억 속에서, 실버는 국정을 도외시하고 약에 절은 채 환락에 빠져 살던 폭군이자 암군이었다.
그래서 헨리는 황궁의 가장 높은 곳에 그의 목을 효시했던 것이고.
하나 이번 생에서 실버는 헨리 밑에서 착실하게 왕도를 배워 골든을 잇는 차기 성군이 될 것이다.
아니, 그렇게 만들 생각이었다.
무능한 왕 때문에 주변 사람이 고통받는 건 한 번이면 족했기 때문이다.
헨리는 실버를 자신의 말 앞에 태우고 다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젠 정말로 제국을 건국해야 할 때였으니까.
* * *
제국 건국.
사실 린드버그에는 이미 제국 건국을 위한 초석이 다져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골든과 헨리는 수도를 짓던 중에 마왕의 출현 소식을 들어 급히 출정했던 것이었으니까.
공사가 중단 된 궁궐을 바라보며 헨리는 생각했다.
‘이번에는 내 손으로 궁을 지을 수 있겠군.’
과거의 궁궐은 무슈의 장인들에게 제작을 맡겼다.
제아무리 헨리가 마법으로 건물을 뚝딱 지어 낼 순 있다곤 하지만 장인들이 하나하나 신경 써 가며 만든 것과는 디테일부터가 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젠 달랐다.
헨리는 장인들이 만든 황성의 완성된 모습을 본 유일한 사람이었다.
또한 완성된 황성 안을 몇십 년이나 들락거리며 안방처럼 거닐던 사람이다.
게다가 황궁이 지어질 무렵의 헨리는 고작해야 7서클이었지만, 현재의 헨리는 무려 8서클의 경지를 이룩했다.
이러한 조건들을 미루어 보았을 때 굳이 궁궐 건축을 장인들에게 맡길 필요가 없었다.
헨리는 초석만 겨우 다져진 궁터 앞에 섰다.
그 광경을 본 골든이 말했다.
“뭐해, 헨리?”
“뭐하긴, 황성을 지어야지.”
“황성을? 오늘은 쉬고 내일부터 다시 기술자들 불러다가 일을 시작하는 게 어때? 아직 여독도 안 풀렸잖아.”
“알고 있어. 근데 난 괜찮아.”
“뭐?”
“쉿.”
골든의 계속된 권유에도 헨리는 그저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만 취해 보였다.
그리고 한참이나 마법진을 그리더니 마침내 완성된 마법진으로부터 손을 떼며 말했다.
“라이징 그랜드 맨션.”
파짓- 파지짓-!
주문을 외우자 헨리의 마력에 반응한 마법진이 즉각 발동되기 시작했다.
푸른 스파크가 튀었다.
회귀하기 전의 헨리였다면 녹색 스파크가 튀었을 테지만 현재의 헨리는 평범한 마법사였으므로 푸른 스파크가 튀었다.
하지만 색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중요한 건 궁궐의 설계도면처럼 완벽하게 짜여진 헨리의 마법진과 황궁이 완성될 때까지 소모될 마력이, 헨리의 방대한 마나 하트에 있었으니까.
마법진이 발동되자 마법진으로부터 모래나 흙, 고목 줄기와 바위 같은 것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렇게 쏟아져 나온 것들은 호숫가에 풀어놓은 물고기들처럼 자유롭게 지상을 헤집어 놓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헤집어 놓는 게 아니었다.
헨리가 설정한 대로 황궁을 ‘건축’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광경을 본 골든이 짧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허, 이젠 궁까지 네가 지으려고?”
“할 수 있는 데까진 해야지. 다른 것도 아니고 우리가 살 나란데.”
“참, 이럴 때 보면 내가 아니라 네가 더 왕 같단 말이지. 헨리, 넌 아직도 왕관에 욕심이 없냐?”
“왕관?”
골든이 헨리에게 왕좌에 대해 묻는다.
과거의 헨리는 골든이 이런 물음을 던질 때마다 칼같이 거절했다.
자신은 고리타분한 왕 놀음 따윈 딱 질색이라고, 그럴 시간에 연구실에서 마법 연구나 하는 편이 훨씬 더 효율적이라고 말이다.
맞는 말이다.
벌인 일에 끝까지 책임지기 위해서 인생의 종국에 모리스 왕국이라는 자신의 성을 딴 왕국까지 만들어 보았지만 역시 왕좌는 자신과 맞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 생각은 지금도 여전히 변함이 없다.
헨리가 말했다.
“관심 없어. 대신 네 옆에서 네가 엇나가지 않게 잘 감시해 줄 테니까 불평이나 하지 말라고.”
“크큭, 거 나로서야 대환영이지.”
“아마 황궁이 다 완성되려면 꼬박 이틀은 걸릴 거야. 아무리 나라고 해도 이만한 크기의 왕궁을 짓는 데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리니까. 그동안 너는 병사들과 휴식을 취하도록 해.”
“그러는 넌? 넌 꼭 안 쉴 것처럼 말하네?”
“난 그동안 어딜 좀 다녀올 데가 있거든.”
“다녀올 곳?”
“그런 데가 있어.”
“그래, 뭐. 네가 그런 데가 있다면 있는 거겠지. 그래도 어딘진 모르겠지만 혼자 가기 불안하면 내가 같이 가 줄까?”
“불안하긴, 개뿔이나…….”
“크큭, 그렇겠지? 감히 어느 누가 대륙 최고의 마법사를 죽이려 들겠어?”
멈칫.
그 물음에 헨리는, ‘네 아들이 그러더라, 이 개자식아!’라고 쏘아 주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실제로 헨리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건 골든의 아들이었으니까.
모두가 헨리의 건축 마법에 정신이 팔려 있을 때, 헨리는 자신의 말, 제이드 위에 올랐다.
“제이드, 나랑 어딜 좀 다녀오자꾸나.”
푸르릉.
원조 제이드가 영리하게 대답했다.
잡종 시정마 나부랭이에서 명마 개조술로 만들어 낸 가짜 제이드 따위가 아닌, 헨리가 전장을 누빌 때부터 타고 다녔던 진짜 제이드였다.
헨리는 제이드 위에 올라탄 후 텔레포트 게이트를 열었다.
“가자.”
푸르릉.
헨리를 태운 제이드가 게이트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 * *
지금에 와서 돌이켜 생각해 보니 나라 하나를 건국하는 것 자체는 쉬웠던 것 같다.
무슈의 기술자들을 불러 수도를 만들면 됐고 각 지방의 유명 예술가들을 불러 혼을 불어넣었으면 됐으니까.
법률을 비롯한 국정 운영에 필요한 것들은 부하 마법사들과 골머리를 싸매면 항상 괜찮은 결과물들이 나왔다.
또한 대륙 원정을 돌면서 제국으로 이주를 약속한 이들을 제국민으로 받아 주면 됐고, 대륙을 완전히 제패했으니 국방 문제 또한 걱정할 게 없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내부에 있었다.
악의 씨앗인 줄도 모르고 방관할 수밖에 없었던 놈들.
바로 아서스를 따르던 중앙귀족 놈들이었다.
중앙귀족.
놈들은 개국공신들과는 달리 헨리가 제패한 지역에서 수주해온 인물들로, 제국이 건국되고 본격적인 내각 체제가 잡힐 때 등용되었던 인물들이다.
처음 그들을 등용했던 이유는 개국공신들로만 내각을 구성하면 식견이 좁아지고 편안함에 익숙해져 부패하기 쉽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놈들이 황실 부패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땐 이미 너무 많은 것들을 놓친 직후였으니 지금부터라도 모든 걸 바로 잡을 생각이었다.
‘아니, 바로 잡을 필요도 없다. 애초부터 외부 인사를 내각에 등용시키지만 않으면 돼.’
그렇기에 헨리는 이번 내각만큼은 최대한 자기가 아는 사람 내에서 청렴하고 성품이 올바른 자들로만 내각을 구성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내각을 구성하기 이전에 헨리는 여전히 지우지 못한 의문점이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아서스가 왜 그렇게까지 자신에게 지독하게 굴었는지에 대해서였다.
헨리는 끝끝내 아서스에게 그 이유를 듣지 못하고 아서스를 죽이고 말았다.
단순한 권력욕 때문이었을까?
……아닐 것이다.
아서스가 단순히 권력에만 욕심이 있었다면 애초부터 흑마법 같은 것에는 손도 대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헨리는 아서스의 모든 것이 궁금했다.
그래서 궁궐이 건축되는 이때에 시간을 내어 아서스에 대해 조사해 보려고 했다.
텔레포트 게이트가 도착한 곳은 미래의 하이랜더 지방이자 아서스가 영주로 군림하게 될 곳이었다.
이곳은 원래 작은 왕국이 있었다고 전해졌다.
하지만 헨리 일행이 이곳에 오기 훨씬 이전에 이곳은 이미 폐허가 되어 있었고, 이곳에 남아 있던 이들은 죽거나 다른 곳으로 떠난 뒤였다.
하지만 아서스는 남아 있었다.
적어도 아서스의 말로는 그랬다.
그래서 내각을 구성할 때 헨리가 아서스를 등용할 수 있었던 것이고.
하지만 그 일은 지금으로부터 몇십 일 뒤에나 벌어질 일.
‘영리하다고 생각했지. 내각 구성 상황을 어떻게 알았는지, 스스로 찾아와 지원한 거였으니까.’
말 그대로였다.
린드버그가 수도로써의 면모를 갖추어 나가고 황실이 제 기능을 수행해 나가려 할 때쯤에 아서스가 나타나 자신을 등용해 달라고 말한 것이었으니까.
아서스는 첫 만남에서부터 모든 것이 베일에 쌓인 인물이었다.
그래서 헨리는 지금부터 이곳을 기점으로 아서스의 모든 것들을 조사해 볼 생각이었다.
하나도 빠짐없이, 헨리 스스로가 완전히 납득할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