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1
신 (4)
헨리의 선전포고에 신계에 유래 없는 기운이 뭉치기 시작했다.
압도적인 위압감.
수십의 신들이 뭉쳐 만들어 낸 기운의 결집체였다.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들의 분노를 피부로 느끼면서도 헨리는 오싹하기보단 오히려 기대가 되었다.
얼마나 강한 놈들일까?
헨리가 신이 되면서 깨달은 정보들 중에는 각 신에 대한 간략한 정보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정보를 헤집어 봐도 이제 막 신이 된 헨리보다 강한 신력을 가진 신은 없었다.
하물며 마계 전체를 관장하는 마신일지라도 말이다.
‘천신은 좀 의외였지만 말이야.’
천신이 가진 신력은 헨리가 가진 신력과 비슷했다.
사실 천신만큼은 헨리보다 신력이 많을 줄로만 알았다.
그도 그럴 게 천계에 사는 모든 천족들은 천신의 충실한 개였으니까.
하지만 천신이 가진 신력은 헨리가 가진 신력보다 낮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대륙의 3할밖에 남지 않았더라도 대륙민들의 수가 천계에 사는 천족들보다 월등히 많았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헨리는 더더욱 기세등등해졌다.
헨리가 말했다.
“자, 누구부터 덤빌래?”
헨리의 손에는 콜소드가, 헨리의 전신에는 콜아머가 걸쳐져 있다.
모두들 헨리의 전용 무구로 시작하여 이제는 어엿한 성물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헨리가 완전한 신이 되었을 때 콜소드와 콜아머 또한 그에 걸맞은 격을 갖추게 됐다.
헨리의 칼끝이 신력을 머금어 황금빛으로 번쩍였다.
세상에서 가장 위협적인 황금빛이었다.
헨리가 검을 들어 올리고 본격적으로 위압감을 뿜어내자 전쟁의 신 월밋을 포함한 모두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뿜어내는 분노와는 달리 그 누구도 먼저 선뜻 나서는 이가 없었다.
눈앞의 신들 모두 죽음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헨리가 말했다.
“겁쟁이 같은 놈들.”
선뜻 나서는 이 하나 없이 주저하는 모양새를 보고 있자니 김이 팍 샜다.
기세만 보면 당장이라도 헨리의 사지를 찢어 놓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가증스러웠다.
천신의 죽음에는 그토록 분노하더니 정작 그 누구도 먼저 징벌에 나서려 하지 않는다.
헨리는 신들을 보며 천사장들에게서 느꼈던 것과 비슷한 종류의 위선을 느꼈다.
결국 그놈이 그놈이란 얘기였다.
김이 샌 헨리가 와락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비켜, 이 겁쟁이들아.”
헨리의 짜증에 신들이 길을 텄다.
이럴 거면 처음부터 무리지어 오지나 말든가.
하지만 그 심정이 아주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신의 죽음에는 다음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
이들은 이미 신이라는 막강한 권력을 맛본 데다가 죽음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겁을 내는 것이다.
하지만 헨리는 다르다.
헨리는 두 번의 죽음을 겪었다.
또한 애초부터 죽음을 등에 지고 일을 벌였기 때문에 언제 죽어도 상관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만큼 헨리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모든 일들에 목숨을 걸 만큼 절박하게 행동했다.
헨리가 중얼거렸다.
“뒈지면 뒈지는 거지, 쯧!”
헨리가 뽑아 든 검을 어깨에 걸친 채 걸음을 옮겼다.
헨리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신들이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나 그들의 인상은 여전히 금방이라도 헨리를 죽일 듯이 매섭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헨리는 저게 허울뿐인 위협이라는 것을 알기에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아니, 관심 자체를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으으, 더 이상은 못 참아!”
등 뒤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운 기운.
명백한 살의였다.
살의가 헨리의 요추 근처까지 파고들었을 때 헨리가 크게 발을 굴렸다.
콰앙!
울려 퍼지는 굉음.
거세게 땅을 걷어차자 헨리의 발 아래로 커다란 균열이 거미줄처럼 번졌다.
동시에 헨리를 중심으로 근처의 공기가 진동했다.
공기가 진동하자 요추 언저리에서 느껴지던 살의가 와해되었다.
헨리는 뒤를 돌아보았다.
뒤를 돌아 시선을 옮기자 그곳에는 진동하는 공기에 갇힌 화살 한 대가 보였다.
진동 속에 갇힌 화살을 헨리가 여유롭게 집어 들며 말했다.
“기습이라…….”
우스웠다.
기껏 한다는 게 고작해야 등 뒤에서 기습이라니.
신의 품격이라곤 절대로 생각되지 않는 행동이었다.
화살을 집어든 헨리의 시선이 화살 건너편으로 옮겨졌다.
화살 너머에는 각궁을 들고 있는 어린 소년이 보였다.
소년은 목동과 바람의 신으로 알려진 ‘닐바르’란 이름을 가진 신이었다.
닐바르는 주황색 곱슬머리에 녹색 눈동자를 가진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저것은 단순한 겉모습일 뿐, 알맹이는 헨리보다 훨씬 더 오랜 세월을 살았을 것이다.
닐바르가 각궁을 들고 손을 부들거렸다.
눈 밑이 파르르 떨리는 걸 보니 어지간히도 화를 참은 모양이다.
헨리가 말했다.
“보여 줄 건 이게 전부인가?”
“그렇다!”
“아쉽군.”
닐바르가 가진 신력은 평가할 가치도 없을 만큼 몹시 미미했다.
이에 헨리는 중지를 안쪽으로 말아 쥔 다음 엄지로 단단히 고정시켰다.
그런 다음 차가운 시선으로 닐바르를 보았다.
시선은 조준점이 되어 닐바르를 노렸다.
헨리가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팡!”
슈우욱-!
헨리가 손가락을 튕긴 순간, 닐바르의 각궁이 쏘아 보낸 화살보다 훨씬 더 날카로운 파공음이 들렸다.
그리고.
콰앙!
무지막지한 폭음과 함께 닐바르의 신형이 사정없이 날아가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각궁을 포함해 닐바르의 갈비뼈 몇 대가 부러졌다.
하지만 죽이진 않았다.
헨리가 말했다.
“비록 기습이긴 하나, 처음으로 용기를 낸 것에 대한 선물이다.”
말을 마친 헨리는 다시 등을 돌렸다.
헨리의 말대로 닐바르는 죽지 않았다.
대신 꽤 오랫동안 치료를 받아야 할 것이다.
닐바르가 튕겨져 나간 이후, 헨리의 주변 공기가 빠르게 가라앉았다.
고작해야 손가락 튕기기였다.
그런데도 닐바르가 저 꼴이 됐다.
저 꼴을 보고 나니 더더욱 나설 용기가 사라졌다.
게다가 처음으로 용기를 낸 대가로 목숨을 살려 주었다.
그렇다면 이다음에 덤빌 자의 운명은 보지 않아도 뻔했다.
헨리가 주저하는 신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신들.”
헨리는 저들에게 검을 쓰는 것조차 아까움을 느껴 콜소드를 역소환했다.
계단이 눈앞에 보인다.
헨리의 걸음에는 거침이 없었다.
이윽고 계단과 한 걸음의 간격을 눈앞에 두고 있을 때, 헨리가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신이라 불리는 놈들이 수십 명이나 운집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누구도 나서질 못했다.
헨리는 짧게 혀를 차고 다시 등을 돌렸다.
그리고 계단에 발을 디뎠다.
참방.
새하얀 계단.
그 계단에 첫 걸음을 내딛자 물장구 소리가 났다.
신기했다.
실제로도 헨리가 디딘 계단 위로 호숫가에서나 볼 법한 잔잔한 물결이 일었다.
헨리는 나머지 발 하나도 계단 위에 올렸다.
그 순간, 분홍빛으로 가득했던 주위 풍경이 새카맣게 변했다.
“음?”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검은색이 아닌 남색이었다.
새카만 밤하늘과는 달리 약간의 밝은 빛을 띠고 있는…….
뒤를 돌아보니 헨리가 디뎠던 바닥은 물론이고, 헨리를 노려보던 신들까지 사라져 있었다.
괜한 마음에 다시 한 걸음 뒤로 걸음을 물려 보았지만 풍경이 다시 변하거나 그러진 않았다.
‘날 부르는 건가?’
이 계단 끝에 주신이 있다는 건 안다.
하지만 계단에 오르면 풍경에 변화가 생길 거라는 건 몰랐다.
심지어 뒷걸음질을 쳐도 풍경이 변하지 않으니 돌아갈 방법이 없다.
이건 주신이 헨리를 초대했다는 뜻이다.
‘그래도 다행이군. 천신처럼 까다롭지가 않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주신 만큼은, 다른 신들과는 달리 정말 ‘신’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을 마친 헨리는 뒷걸음질 쳤던 걸음을 다시 앞으로 내디뎠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내디딤에 망설임은 없다.
앞으로 쭉 뻗어진 길 끝에 원하는 이를 만날 수 있으니 되레 발걸음이 가벼웠다.
헨리는 산보를 하듯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숨은 차지 않았다.
계단이 수천 개든 수만 개든, 이 정도 산보에 지칠 체력은 아니었다.
오히려 길디 긴 계단은 생각을 정리하기에 좋았다.
그래서 일부러 마법도 사용하지 않았다.
기껏 자신을 초대해 주었는데 마법으로 단박에 날아가면 그건 그것대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주신이라…….’
죽음을 통해 신이 되면서, 헨리는 철저히 비밀로 부쳐졌던 신들의 비밀에 대해 모두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중에 주신에 대한 정보는 극히 희박했다.
주신, 신들의 신, 신들의 왕.
그를 부르는 호칭은 많았다.
그러나 그의 이름에 대한 정보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래서 더더욱 궁금증이 일었다.
그는 대체 누구이며 어디에서 온 존재이기에 모든 차원을 관장하는 것일까?
긴 계단을 밟으며 주신에 대해 생각하고 있으니 문득 잊고 있었던 마법사 특유의 학구열이 불타올랐다.
‘……학구열은 무슨, 지금 내가 그런 거나 탐구할 땐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계단을 오르다 보니 갑자기 실소가 터졌다.
아주 잠깐 여유가 생겼다고 딴청이라니, 긴장이 느슨해진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헨리는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았다.
상념에 젖어 산보하듯 오르다 보니 어느새 끝이 지척이다.
계단 끝에는 조촐한 장식으로 이루어진 문 하나가 보였다.
헨리는 속도를 내서 계단 끝에 설치된 문 앞에 섰다.
금색으로 된 문고리를 잡고 돌리니 나무판자 특유의 소리가 났다.
끼이익-
문을 열자 그 안은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다.
헨리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문이 저절로 닫혔다.
허공을 더듬어 보았지만 문은 금세 사라졌다.
익숙한 현상이었다.
헨리가 외쳤다.
“라이트.”
파밧!
방안에 작은 태양이 떠올랐다.
떠오른 태양은 어둠으로 가득했던 방안을 비추어 주었다.
방 내부는 어느 나무꾼이 살법한 평범한 가정집이었다.
집에는 누가 쓰다 만 듯한 식기구와 생활용품들이 놓여 있었고, 중심에는 다용도로 쓰일 법한 커다란 나무 탁자가 있었다.
탁자에는 커다란 유리병이 코르크 마개로 막혀 있었다.
유리병 안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색 액체가 들어 있었다.
꽤나 낡은 형태를 가진 나머지 것들에 비해 검은 액체가 든 유리병만 유난히 돋보였다.
그 돋보임이 어색하게 느껴진 나머지 헨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대놓고 암시를 주는군.”
주신은 부끄럼을 타는 것일까?
계단 초입에서부터도 그렇고 직접적인 메시지 없이 모든 메시지를 간접적으로 표시하고 있었다.
만약 눈치가 둔한 자였다면 주신의 의도를 전혀 몰랐을 것이다.
그렇기에 헨리는 기꺼이 주신의 암시에 응해 주기로 했다.
헨리는 병을 집어 들었다.
한손으로 들리는 유리병은 생각보다 그 무게가 꽤나 무거웠다.
헨리는 그것을 들어 귀에 대고 흔들어 보았다.
유리병 속의 액체가 찰랑거리며 평범한 소리를 냈다.
그런데 그 순간, 헨리는 유리병 표면으로부터 아주 미약한 신력을 느낄 수 있었다.
‘역시.’
예상대로 유리병은 일종의 암시가 맞았다.
귀여운 암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헨리는 주저 없이 코르크 마개를 돌려 유리병을 열었다.
퐁!
시원한 소리가 났다.
그리고 그 순간.
-끼이이이이이이익!
유리병의 마개가 열린 순간, 유리병으로부터 귀청이 떨어져 나갈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유리병은 기괴한 비명을 내뱉으며 천둥처럼 진동했다.
헨리는 짐승처럼 발버둥 치는 유리병을 꼭 붙잡았다.
유리병으로부터 검은 안개가 쏟아져 나왔다.
안개가 쏟아져 나올수록 병 안에 든 액체가 줄어 갔다.
그러나 뿜어진 것은 안개가 아니었다.
안개인 줄로만 알았던 것은 한데 뭉쳐져 나무 바닥에 진득한 오물이 되었다.
마치 등유를 연상케 하는, 끈적거리는 액체 덩어리.
액체 덩어리는 점성이 짙었다.
점성 짙은 액체 덩어리는 곧 슬라임처럼 천천히 몸체를 부풀리며 무언가를 만들어 냈다.
손.
처음에 뻗혀 나온 것은 손이었다.
그리고 만들어진 손을 기점으로 팔뚝이 생성되고 어깨가 만들어지더니 이내 가슴과 목, 머리가 생겼다.
뭉뚱그려진 머리가 세밀하게 빚어졌다.
머리는 가장 먼저 길쭉한 주둥이를 만들어 냈다.
‘새?’
헨리는 긴장을 늦추지 않고 그것을 응시했다.
하지만 새의 부리라기엔 그 주둥이가 너무 뭉툭했다.
길어진 주둥이를 기점으로 날카로운 선이 뿜어졌고 두개골을 연상케 하는 곡선이 그려졌으며 그 위로 뾰족한 삼각형이 그려졌다.
그 모습은 마치…….
“개?”
개였다.
그리고 개의 얼굴과 사람의 몸을 함께 가진 존재를, 헨리는 과거에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헨리가 그것의 정체를 떠올릴 때쯤 완전하게 빚어진 개의 머리가 헨리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네노오오오오오옴!
고막을 뜯어 버릴 듯이 비명을 지르는 눈앞의 존재.
그놈은 다름 아닌, 샤하트라의 밤과 죽음을 관장하는 신, ‘야누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