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9
신 (2)
부활의 기분을 충분히 만끽한 헨리가 비르투스에게 말했다.
“뭐 해? 당장 머리 숙이지 않고서.”
“어, 어떻게……!”
비르투스가 침음을 삼킨다.
불완전했던 신이 완전한 한 명의 신이 되는 과정을 눈앞에서 똑똑히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헨리는 비르투스의 감정 따윈 조금도 헤아려 주고 싶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본인의 감정뿐.
“말귀를 못 알아듣네.”
“……!”
헨리는 같은 말을 두 번 하는 걸 몹시 싫어한다.
그래서 불쾌함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내비쳤다.
그러자 비르투스를 포함한 수천의 천군이 일시에 무릎을 꿇었다.
‘이, 이럴 수가……!’
전신을 짓누르는 엄청난 압박감.
마법 따위가 아니었다.
완전한 한 명의 신이 된 헨리가 내뿜는, 오직 신만이 내뿜을 수 있는 ‘절대적인 위엄’이었다.
천군 중 몇몇은 압박감을 견디지 못해 아래로 추락했다.
그러나 그까짓 조무래기 병사 따위가 신경 쓰일 리가 없다.
헨리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마치 땅을 밟듯, 위엄이 넘치는 발걸음으로 허공에 무릎 꿇은 비르투스 앞에 섰다.
헨리가 코앞에 서자 비르투스는 금방이라도 몸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천신은 천족들 앞에서 기운을 많이 절제해 주었다.
천족은 자신의 충실한 종들이었으니.
하지만 헨리는 그러지 않았다.
아니, 그럴 필요가 없었다.
오직 복수를 위해 죽음을 택한 헨리는, 한 명의 완전한 신이기 전에 복수의 화신이기도 했으니까.
몸을 덜덜 떠는 비르투스에게 헨리가 물었다.
“이제야 분위기 파악이 좀 되는가 보네.”
천사장들.
가진 이름과 지위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위선적인 녀석들이었다.
물론 비르투스는 그중에서도 그나마 낫다.
하지만 그중에서 나을 뿐이지 헨리 눈에는 도긴개긴이었다.
비르투스가 손을 덜덜 떨며 리라를 움켜쥐려 했다.
지금의 헨리라면 역천의 리라가 가진 진짜 힘을 알고 있을 테니까.
그 모습을 본 헨리가 눈살을 찌푸렸다.
가소로웠다.
그리고 안타까웠다.
헨리의 존재감만으로도 몸을 덜덜 떨고 있으면서, 어떻게든 천신의 명에 따라 리라를 부수려는 그 행동이 안타까웠다.
그래서 발을 들어 비르투스의 손등을 짓밟았다.
“크아악!”
분명히 허공 위에서 짓밟는 손이었으나 비르투스는 바닥 위에 깔린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그래서 비명처럼 신음을 내뱉었다.
잘근잘근.
헨리는 말없이 비르투스의 손등을 짓밟았다.
힘은 조절하지 않았다.
그래서 손등을 짓밟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손등에서 우드득 소리가 내며 어스러졌다.
그 참담한 고통에 비르투스가 눈물을 흘렸다.
비르투스의 어스러진 손가락 끝에 못다 쥔 리라가 걸려 있다.
헨리는 주인의 손아귀를 벗어난 리라를 주워 들었다.
“아, 안 돼…….”
천신의 충실한 종이, 못다 수행한 명령에 비탄하며 침음을 삼켰다.
리라를 손에 쥔 헨리가 입가에 미소를 걸었다.
그리고.
빠각!
단숨에 리라를 부러뜨렸다.
헨리는 부러뜨린 리라를 바닥으로 던졌다.
부러진 리라가 아래로 추락한다.
그 광경을 본 비르투스의 얼굴에 다시 한번 경악이 떠올랐다.
“왜냐고 묻고 싶지?”
비르투스가 묻고 싶었던 말, 헨리가 대신했다.
비르투스는 그저 눈동자를 끌어 올려 헨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입가에 미소가 히죽 걸린 헨리의 얼굴이 보였다.
분명히 웃고 있는 낯짝이었지만 코앞에서 올려다보고 있는 비르투스는 느낄 수 있었다.
그 웃음 속에 감춰진 차가움을 말이다.
헨리의 말이 이어졌다.
“리라, 필요하긴 했지……. 내가 죽기 전까지는 말이야. 근데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어.”
헨리의 입가에 걸렸던 미소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초승달처럼 휘었던 눈매가 점점 매섭게 가로로 찢어져 갔다.
“시간의 힘. 이젠 너희들에게 구걸할 생각이 없거든. 그러니 네가 모시는 천신도 더 이상 내겐 쓸모가 없어.”
“아, 안됩니다! 마법의 신이시여! 부디 선택을 재고해 주십시오!”
쓸모가 사라졌다는 말.
그리고 모멸 섞인 기억까지 되찾았으니 헨리의 선택은 뻔했다.
천신의 죽음.
헨리의 선택을 듣게 된 비르투스는 어스러진 손이 뭉개지든 말든 필사적으로 헨리에게 매달렸다.
지금의 헨리라면 정말로 그렇게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손끝이 끊어질 듯이 아팠다.
그러나 이까짓 육체의 고통 따위보다 헨리의 성정을 막는 게 더 시급했다.
허나 헨리의 반응은 냉담했다.
“쯧.”
헨리는 비르투스의 손등을 짓밟던 발을 들어 올려 비르투스의 머리를 있는 힘껏 내리찍었다.
콰드득!
그러자 목뼈가 부러졌다.
목을 지탱하고 있던 것이 뼈가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허무하리만치 말이다.
명을 다한 비르투스의 시체가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그러나 헨리가 죽었을 때처럼 비르투스의 시체를 받으려는 이는 보이지 않았다.
아니,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천군은 여전히 헨리의 위압감에 무릎을 꿇고 있었으니까.
헨리가 고개를 들어 하늘에 걸린 태양을 바라보았다.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독기 어린 두 눈빛으로 진한 경고의 안광을 내뿜었다.
안광을 내뿜던 헨리는 이내 곧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런 다음 단숨에 사방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샤악!
휘두른 검은 채찍처럼 길게 늘어나는 듯했다.
늘어난 검으로부터 뱀의 울음소리 같은 것이 들리는 듯했다.
그러나 검을 휘두른 직후,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던 그 순간.
푸슈슉!
무릎 꿇은 천군 전체의 목이 날카로운 단면에 베인 것처럼 깔끔하게 떨어져 아래로 추락했다.
핏물이 뿜어졌다.
검을 거둔 헨리가 말했다.
“기대하는 게 좋을 거야, 천신.”
헨리의 복수는 이제 막 시작이었다.
* * *
헨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걸음을 한 번 옮길 때마다 주위의 풍경이 바뀌었다.
바뀐 풍경 속에는 다양한 천사들이 있었다.
포슬라와 아르헤스, 그리고 앙겔루스까지.
헨리는 걸음을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검을 한 번씩 휘둘렀다.
그럴 때마다 수천에 달하는 천족들의 목이 바닥에 떨어졌다.
피가 뿜어졌고 뿜어진 피가 소나기를 내리게 했다.
비가 모여 연못을 만들었고 연못이 범람하여 강을 이루었다.
천계에 피바람이 불었다.
그 누구도 헨리를 막을 수 없었다.
여섯 번째 도전에서 헨리가 일으킨 것이 마계를 동반한 태풍이었다면, 이것은 순전히 신의 분노로 만들어진 재앙이었다.
마침내 헨리의 손에 앙겔루스의 머리채가 붙잡혔다.
헨리는 구역 하나를 넘을 때마다 천사장들의 머리를 전리품 삼아 들고 왔다.
덕분에 앙겔루스는 포슬라와 아르헤스의 머리를 보고 기겁을 했다.
그러나 이젠 앙겔루스의 머리까지 보기 좋게 수확되었다.
헨리가 앙겔루스의 머리채를 붙잡은 뒤 하늘에 걸린 태양을 향해 흔들어 보였다.
그럴 때마다 헨리는 침략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 기분이 결코 나쁘지만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상쾌하고 시원했다.
이것이 여태껏 헨리가 취해 온 방식이었으니까.
콰직!
헨리는 자신을 감시하러 온 시시바바들을 발로 짓밟아 터뜨렸다.
어차피 이렇게 짓밟아 터뜨려도 헨리의 소식은 이미 천신에게 전해졌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랑곳 하지 않고 죽은 천사장들의 머리를 엮어 어깨에 짊어졌다.
천사장들의 피가 헨리의 옷깃을 따라 흘렀다.
그것이 마치 신성한 노동의 땀처럼 느껴졌다.
천사장들의 머리를 어깨에 짊어진 헨리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한 걸음을 다시 옮기자 주변의 풍경이 바뀌었다.
새하얀 대리석이 인상적인 천신의 신전이었다.
곳곳에는 새하얀 구름들이 장식처럼 걸려 있었고 신전의 중심에는 폭포수가 흐르고 있었다.
“데자뷰도 이런 데자뷰가 없군.”
여섯 번째 도전을 헨리는 전혀 기억하지 못했지만 천신에게 그때의 기억을 선물로 받았다.
하지만 직접 겪은 것이 아니기에 마치 긴 꿈을 꾼 것만 같았다.
천신의 연못 앞에 도착한 헨리는 어깨에 짊어진 천사장들의 수급을 연못 안으로 던져 넣었다.
풍덩!
맑디맑은 연못이 천사장들의 피로 인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픽 웃음이 나왔다.
천족들에게 신성하게 여겨지던 연못이 천족의 피로 더러워졌으니까.
연못 위에 천사장들의 머리가 두둥실 떠올랐다.
헨리가 이곳, 천신의 신전까지 천사장들의 수급을 가져온 까닭은 간단했다.
단순히 천신을 조롱하기 위해서였다.
천사장들의 수급이 폭포수에 휘말려 연못 가장자리로 밀려나자, 그제야 연못 중심에 물거품이 일기 시작했다.
천신이었다.
헨리는 천신이 나타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손가락을 튕겨 의자를 만들었다.
물론 만들어진 의자는 헨리의 것뿐이었다.
헨리가 의자에 앉아 모리스 왕국의 국왕처럼 한껏 허리를 젖혀 등을 기댔다.
그런 다음 오만한 눈빛으로 천신과 눈을 마주쳤다.
헨리와 시선을 섞는 천신.
그의 머리 위에 얹어져 있는 황금빛 월계관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천신은 헨리와 얼마간 말없이 시선을 교환하더니 이내 곧 연못 밖으로 걸어 나왔다.
헨리 앞에 선 천신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훌륭하군.”
첫마디는 칭찬이었다.
그러나 헨리는 대답을 아꼈다.
천신의 말이 이어졌다.
“훌륭해. 내 조언 덕분인가? 이렇게 빨리 인간이길 포기할 줄은 몰랐어.”
두 번째 말에서, 헨리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분명히 분노할 줄로만 알았던 천신이, 분노는커녕 오히려 헨리를 진심으로 칭찬하고 있었으니까.
헨리의 미간이 좁혀졌다.
좁혀진 헨리의 미간을 본 천신이 말했다.
“왜 그러지? 설마, 천사장 머리 몇 개 좀 베었다고 내가 화라도 낼 줄 알았나?”
천신은 진심이었다.
천신은 분노하지 않았다.
복수의 화신이 되어 천계를 헤집어 놓았던 헨리의 행태를 천신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되레 자신의 선물을 계기로 신이 된 헨리의 선택을 존중하며 그 기개를 칭찬했다.
천신이 웃었다.
“끌끌, 착각도 유분수지. 너는 내가 누구라 생각하는 것이냐? 나는 천신이다. 이까짓 천계쯤은 내게 있어 단순한 피조물에 불과해.”
“……하!”
생각지도 못한 천신의 반응에 헨리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어이가 없었다.
보통 놈이 아닌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정도로 미친놈일 줄은 몰랐다.
헨리의 머릿속에 몇 가지 단어가 떠올랐다.
지독하고 위선적이고 독선적인…… 그런 종류의 단어들.
그러나 헨리가 보아 온 대부분의 신들이 그러했다.
그래서 그의 성정에 대해 손가락질할 생각은 없었다.
헨리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렇겠지. 네 말대로 천계는 한낱 네가 만든 장난감에 불과해. 너는 천계를 관장하는 신이고 마음만 먹는다면 이까짓 천계쯤은 언제든지 다시 만들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헨리의 손끝에 콜소드가 소환되었다.
이제 콜소드는 헨리를 대표하는 완연한 성물이 되었다.
콜소드의 칼끝이 황금빛으로 번쩍였다.
“모든 천사장들이 죽고 모든 구역들이 황폐화된 지금, 지금 같은 상황에서 네가 죽는다면 천계는 이제 어떻게 될까?”
“끌끌, 재밌는 소릴 하는구나. 네가 나를 죽인다니 그저 가소롭구나. 너는 지금 나와의 말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그저 아무 말이나 내뱉는 중이잖아?”
“내가 지금 아무 말이나 내뱉는다고 생각하나 보지?”
헨리는 살기를 끌어 올렸다.
끌어 올린 살기는 위협 따위가 아닌 진심이었다.
천신 또한 헨리의 살기를 느꼈다.
그래서 킬킬 웃던 입꼬리를 내리고 표정을 굳혔다.
헨리가 검지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잠시 잊었나 본데, 난 지금 반인반신이 아니라 한 명의 완전한 신이거든. 그런 상황에서 네가 아는 사실을 내가 모를 것 같아?”
“……네놈, 설마!”
“그래. 난 더 이상 네가 가진 시간의 힘 따윈 필요하지 않아. 시간의 힘은 너만 갖고 있는 게 아니니까.”
“네놈! 기껏 신이 될 수 있게 도와주었더니 그게 무슨 망발이더냐!”
“망발? 왜? 아무리 너라도 이런 상황까진 예측하지 못했나 보지?”
“머, 멈추어라!”
천신의 말이 떨렸다.
천신이 아는 것을 헨리가 모를 리가 없다는 말.
그것은 헨리가 신이 되며 저절로 깨달은 신의 비밀들을 뜻했다.
헨리는 그렇게 터득한 정보들 중에 한 가지 사실에 흥미를 느꼈다.
헨리가 말했다.
“왜? 밑천이 드러나니까 이제야 좀 겁이 나나 보지? 시간의 힘은 너만 갖고 있는 게 아냐. 모든 신들의 왕. 주신도 가지고 있지.”
“그만!”
“이제 그만 죽어라.”
서걱!
헨리의 검이 황금빛 궤적을 그렸다.
그리고 그 순간, 사시사철 태양빛으로 빛나던 천계에 최초의 어둠이 도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