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8
신 (1)
침몰하는 배에 들어오는 바닷물처럼, 헨리의 뇌는 여섯 번째 과거의 기억 속에 푹 잠겼다.
고통스러웠다.
기억을 주입받는 과정이 고통스러운 게 아니라 물밀듯이 밀려드는 기억들 때문에 고통스러웠다.
천사장들의 요구에 의해 헨리 스스로 직접 잘라 내는 팔과 다리.
그 과정에서 그들에게 받는 씻어 낼 수 없는 모멸감과 수치.
마지막으로 천마대전을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천신 앞에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비정한 현실들까지.
이것이 바로 천신이 헨리에게 주는 선물이었다.
“대체 왜……!”
황금빛으로 일렁이던 동공이 타들어 갈 것만 같았다.
타들어 갈 듯한 동공에 주입받은 기억들이 꿈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래서인지 헨리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주룩 흘렀다.
오랜 시간에 걸쳐 나누어 느꼈던 격한 감정들을 단숨에 받아들인 탓이다.
온몸에 힘이 빠졌다.
그 증거로 헨리는 손에 쥐고 있던 검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헨리가 서 있는 곳이 바닥이 아닌 천공이니 헨리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검은 조그마한 유성처럼 끝없이 아래로 추락했다.
좌절에 빠진 헨리를 비르투스가 아무 말 않고 가만히 지켜보았다.
벌써 일곱 번이나 시간이 반복되었지만 비르투스는 여전히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다만 천신이 그렇다고 하니 그런 줄 아는 것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헨리와는 달리 비르투스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대신 천신의 말마따나 이번에는 헨리가 어떤 선택을 할지 잘 지켜보라고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역천의 리라를 헨리에게 넘겨주어선 안 된다는 당부와 함께.
손에 쥔 리라에 힘이 더욱 들어갔다.
고개 숙인 헨리의 얼굴로부터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마침내 고개 숙였던 불완전한 신이 고개를 들었다.
“결국, 결국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단 얘기지……?”
헨리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눈물에는 여러 가지 감정들이 뒤섞여 있었다.
분노와 허탈함, 모멸감 등.
그러나 그중에서도 가장 견디기 힘든 건 결국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다시 현세로 돌아가야 한다는 절망감이었다.
돌아가면 또다시 끝이 보이지 않는 실험을 반복해야만 한다.
천신과의 만남을 통해 신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 깨달았다.
그렇기에 더는 야누스의 힘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헨리의 친우, 골든 잭슨이 마왕에게 걸렸던 것보다 훨씬 더 끔찍하고 지독한 저주였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수록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헨리는 얼마동안 눈물이 제멋대로 흐르게끔 그냥 두었다.
헨리는 평소 눈물에 대해 야박했다.
눈물은 약자들이나 흘리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은 평생 눈물을 흘리지 않을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결국 흘리고 말았다.
그래서인지 평생 동안 흘리지 못했던 눈물이 지금 모두 뿜어져 나오는 것만 같았다.
수천 명에 달하는 천군들이 모두 헨리를 바라보았다.
부끄러움은 없었다.
그래서 헨리는 그들의 시선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폭발하듯 튀어나온 감정들이 모두 잦아들 때까지 눈물을 흘렸다.
흐르는 눈물이 헨리의 상념을 적셨다.
기분 같아선 이 모든 것들을 때려치우고 될 대로 되라고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애초부터 이 모든 것들은 헨리의 욕심에서 비롯된 일이기 때문.
또한 이제 와서 포기하기에 자존심이 너무 상했다.
여태껏 헨리는 실패를 모르고 살아왔으니까.
물론 개인적인 자존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헨리는 인간계에서 가장 많은 신도를 가진 인간계 최고의 신이다.
그런 신인 헨리가, 신도이자 왕국민들의 목소리를 외면할 순 없다.
하나 방법이 없었다.
현세의 시간은 지금도 모래시계처럼 빠르게 흘러가고 있고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맹신자들은 끝없이 아사하고 있다.
그럼에도 헨리는 그들 모두가 아사할 때까지 치료법을 만들 수 있을 거란 확신을 하지 못했다.
헨리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천계의 하늘 중심에 걸려 있는 둥글고 거대한 태양.
저 태양이 곧 천신을 뜻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천신은 지금 좌절하는 헨리의 모습 또한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자니 화가 났다.
하지만 치솟는 화를 해소할 방법이 없었다.
천마대전을 일으켰고 복수의 화신인 가니스엘이 마신의 삼신기까지 갖추어 천신에게 덤볐다.
그러나 기가탄과 그레텔을 포함해 그 누구도 천신을 옷자락 한 올조차 건드리지 못했다.
뿜어진 화가 갈 곳 잃은 배처럼 방황하자 무력감이 배가되었다.
간만에 느끼는 무력감이었다.
정말로 이대로 방법이 없는 것일까?
천신은 왜 자신을 믿어 주지 않는 것일까?
헨리의 생각은 대체 왜 천신이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지에 대해까지 가지를 뻗어 갔다.
천신이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 이유.
천신의 말에 의하면, 헨리와 같은 생각을 가진 자들이 천신에게 같은 도움을 청한 적이 있어서라고 했다.
형평성.
말인즉슨, 그 빌어먹을 형평성 때문에 거절당한 것이었다.
‘형평성이라…….’
형평성이란 말이 입안에서 맴돈다.
형평성.
천신은 대법관이 아니다.
세상은 공평하지 않고 필요와 욕심에 따라 굴러가는 법이다.
그것이 순리니까.
그런데도 천신은 형평성을 운운했다.
그리고 그러한 형평성을 이유로 내세울 수 있는 까닭은 천신이 가진 시간의 힘이 모두가 탐내는 막대한 권력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우스웠다.
신들의 왕은 천신의 무엇을 보고 그러한 힘을 천신에게 주었을까?
그리고 왜 같은 신들끼리 돕지 못하게 했을까?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돕지 못하게 했다고?’
헨리는 순간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신들의 왕은 천신에게 신끼리 서로 돕지 말라는 말을 한 적이 없다.
단순히 현세에 개입하지 말라고 했을 뿐이지.
하지만 헨리가 그렇게 생각한, 아니 착각한 까닭은 고지식할 정도로 딱딱한 천신의 철학 때문이었다.
‘형평성과 철학…….’
그랬다.
형평성을 운운하는 것은 단순히 천신의 개인적인 철학일 뿐이지, 신들의 왕이 내린 지시가 아니었다.
물론 이 또한 추측이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헨리는 한 번 더 화가 났다.
결국 개인의 개똥 같은 철학 때문에 같은 신이 곤경에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모른 체한다는 게 아닌가?
심지어 경어를 쓰며 예우를 갖추었던 헨리를 하대해 가면서까지 말이다.
“하!”
헨리는 헛웃음이 터져 나오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결국 천신은 딱 그 짝이었다.
자신을 도와주지도 않을 거면서 희망 고문이나 하고 꼰대 같은 잔소리나 찍찍 내뱉는 놈!
최악이었다.
절박함이 사라진 후 차분하게 머릿속이 정리되자, 헨리가 도달한 결론은 건방진 천신에 대한 앙갚음뿐이었다.
‘그래. 그런 놈의 도움 따위, 이젠 필요 없다.’
결론을 내린 헨리는 더 이상 천신에게 머리를 조아리지 않기로 했다.
욕심을 버리기로 한 것이다.
물론 욕심을 버렸다고 해서 맹신자들에 대한 치유까지 포기한 것은 아니다.
단지 시간의 힘으로 해결하려는 방법을 포기한 것뿐이었다.
욕심을 버리자 머릿속이 한결 가볍다.
처음부터 머리를 조아리고 굽실거리는 행위 자체가 헨리와 맞지 않았다.
가벼워진 머릿속은 곧 천신에 대한 복수심으로 가득 찼다.
물론 평범한 방법으로는 천신의 옷자락 하나 건드릴 수 없다.
무슨 일이 생겨도 걸핏하면 시간을 되감을 테니까.
그렇기 때문에 헨리는 더 많은 정보가 필요했다.
한정된 정보로 완전한 신을 상대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순간, 제법 괜찮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씨익.
헨리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하늘 중심에 걸린 태양을 우러러 보며 말했다.
“네 뜻대로 해 주마, 천신.”
외침과 함께 헨리가 한 손을 들어올렸다.
“착검.”
바닥으로 추락했던 헨리의 성검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늠름하게 소환됐다.
그 모습을 본 비르투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헨리, 당신은 또……!”
오래도록 슬퍼하기에 그 사이에 무언가 깨달음을 얻었을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슬픔 끝에 손에 쥔 것이 검이라는 사실에 가슴이 아팠다.
검을 들었다는 것은 또다시 같은 선택을 되풀이한다는 이야기일 테니까.
칼을 집어든 헨리가 검 끝을 돌려 비르투스를 겨누었다.
비르투스는 검 끝이 자신을 향하자 긴장된 표정으로 손에 쥔 리라를 꼭 붙잡았다.
헨리가 말했다.
“그까짓 리라, 이젠 필요 없다.”
“……예?”
“잘 봐라. 내가 너희들의 신에게 어떤 식으로 맞서는지를.”
서걱!
검이 휘둘렸다.
핏물이 튀었다.
핏물이 튀면서 무엇인가가 앞으로 떨어졌다.
그것은 머리였다.
검은 머리칼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의기양양하게 미소를 짓고 있던, 바로 최초의 마법의 신.
헨리 모리스의 머리가 말이다.
“……!”
헨리는 소환한 검으로 스스로의 목을 베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비르투스의 동공이 확장되고 헨리를 향해 창칼을 겨누고 있던 천군 또한 동요했다.
“어떻게!”
너무 놀란 나머지, 비르투스는 균형을 잃고 떨어지려는 헨리의 시체를 받으려고 했다.
그래서 날았다.
날개를 퍼덕여 허공에서 중심을 잃은 신의 시체를 향해 몸을 내던졌다.
그러나 그 순간.
피이잉-!
비르투스가 헨리를 향해 몸을 내던진 그 순간, 죽은 헨리의 육체로부터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눈부신 엄청난 광휘가 번쩍였다.
“큭!”
광휘는 단순한 빛이 아니었다.
광휘는 뜨거웠다.
그러나 모든 것을 태워 버릴 만큼의 열기를 가지고 있진 않았다.
비르투스를 포함한 광휘를 목격한 모두가 등을 돌리거나 방패를 들었다.
몇 초가 지났다.
모두가 광휘의 온도에 익숙해질 때쯤 팔을 들어 올려 얼굴을 가렸던 천군 몇 명이 슬그머니 팔을 내렸다.
그리고 내린 팔 너머로 광휘의 중심에 있는 것을 목도했다.
“……!”
광휘의 중심을 목도한 이들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일부는 너무 놀란 나머지 벙어리처럼 말을 더듬었다.
“어, 어……!”
빛이 잦아들었다.
빛이 잦아들면서 등을 돌렸던 이들 또한 하나둘씩 다시 등을 돌렸다.
그리고 다 함께 보았다.
멎어든 광휘의 중심에 나타난 엄청난 위압감을 가진 존재를.
“설마……!”
비르투스의 입에서 감탄 섞인 비탄이 흘러나왔다.
전신이 오싹해질 정도의 이 위압감.
비르투스는 태어나서 이러한 위압감을 몇 번 느껴 본 적이 없다.
하나 그때는 다름 아닌 천신을 만났을 때였다.
그렇기 때문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빛이 완전히 멎었다.
멎은 빛 사이로 익숙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헨리였다.
“괜찮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바닥으로 추락할 듯 했던 머리가, 어느새 다시 헨리의 어깨 위에 붙어 있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헨리의 모습에서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헨리는 여전히 같은 의복을 입고 있었고, 여전히 기품이 넘쳤다.
그러나 달라진 점이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역시.”
낯선 정보들.
그리고 익숙하지만 새롭게 느껴지는 공기.
헨리는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죽음으로써 보다 완벽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
그리고 헨리는 스스로 목을 베는 행위를 통해 그 과정을 멋지게 완성해 냈다.
죽음을 통해 마무리되는 완전함.
헨리는 이제 불완전한 신 따위가 아닌 한 명의 완전한 ‘신’이 되었다.
“이로써 두 번째인가?”
좀 전의 헨리는 스스로 목을 벰으로써 잠깐이나마 죽음을 경험했다.
이로써 헨리는 두 번이나 다시 살아난 셈이다.
마냥 낯설지만은 않은 이 기분에 헨리가 기분 좋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꼼지락대던 손가락을 멈추고 목을 휘휘 저으며 근육을 풀었다.
상쾌했다.
머릿속엔 몰랐던 정보들이 가득했다.
신이 되면 제한받던 정보들을 저절로 알 수 있게 된다던 라의 말이 맞았다.
헨리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전혀 알지 못했던 신에 대한 비밀들을 머릿속에 모조리 각인받았다.
씨익.
떠오른 비밀들 중에 흥미로운 사실들이 보인다.
완전한 신이 된 헨리는 이제야 비로소 새로운 청사진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헨리의 새로운 계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