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5
천마대전 (3)
광풍이 멎으며 주위 풍경이 바뀌었다.
새파란 하늘, 고동색 대지.
처음 천계에 왔을 때 보았던 풍경이다.
풍경 속에는 파란 하늘을 가득 메울 만큼 많은 수의 천족들이 있었다.
그들은 천군(天軍)이었다.
천군(天軍).
천군은 천계를 지키는 군대다.
위급 상황 시엔 너 나 할 것 없이 모든 계급들이 하나의 군대로 편성되지만 그들 중 단연코 최고의 정예부대는 6계급의 능천사들이었다.
그들은 마족과 싸우기 위해 선택받은 존재들로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사뭇 고결해 보이기까지 한 무구들로 무장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들을 지휘하는 천군의 총 지휘권자인 능천사장 포슬라.
그가 잔뜩 긴장한 얼굴을 하고서 비르투스와 함께 진을 치고 있었다.
그들 앞에 선 헨리가 말했다.
“제대로 찾아왔네.”
아르헤스는 의를 지킨 어느 대천사와는 달리 정말로 비르투스가 있는 곳과 연결된 날개깃을 주었다.
헨리가 만족의 미소를 지었다.
고구마를 캐러 왔더니 그 옆에 늙은 호박 하나가 덩굴째로 엮여 있었기 때문이다.
헨리를 본 포슬라가 말했다.
“이 더러운 마신의 개 같은 놈.”
다짜고짜 내뱉는 욕설.
기선제압 같은 게 아닌 순수한 분노였다.
시시바바를 통해 8계급과 7계급의 구역이 초토화된 것을 비롯해 관련 천사들이 모두 죽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천계는 현재, 천계 역사상 유래 없는 비상사태를 맞이하게 되었다.
거친 인사말을 받은 헨리가 중얼거렸다.
“마신의 개라……?”
곱씹을수록 쓴맛이 났다.
아니 쓰다기보다는 덜 익은 감을 먹은 것처럼 떫었다.
그래서 한껏 인상을 찌푸렸다.
“누가 누구 보고 개라는 거야?”
천신이 아니었다면 자신에게 감히 말도 못 붙여 봤을 놈이 이제 와서 배짱이라니?
가증스럽기 그지없었다.
헨리가 말했다.
“비르투스.”
외침과 함께 헨리의 시선이 비르투스에게로 꽂혔다.
그러나 비르투스는 곁에서 긴장하고 있는 포슬라와는 달리 덤덤해 보였다.
비르투스가 대꾸했다.
“저 말씀이십니까?”
“그래 너. 그땐 몰랐는데 그나마 네가 제일 양반이더라.”
“네?”
“너는 살려 주겠다는 소리야.”
하고 싶은 말은 이게 전부다.
말을 마친 헨리가 콜소드를 소환했다.
우두커니 서 있던 헨리가 손에 칼을 쥐자마자 전군이 전투준비 태세에 돌입했다.
그것을 본 헨리가 가볍게 웃었다.
“그래, 나는 휘두를 테니 너희들은 어디 한번 잘 막아 봐라.”
헨리는 뽑아 든 검을 오른손으로 잡았다.
이제 헨리에게 남은 손은 하나뿐이다.
물론 마력으로 빚은 왼손이 있긴 했지만 진짜라고 생각되는 것은 오른쪽뿐이다.
그래서 오른손으로 검을 잡았다.
검을 쥔 헨리가 상체를 살짝 숙인 후 안쪽으로 검을 당겼다.
씨익.
헨리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리고 입꼬리를 올리자마자 횡으로 검을 휘둘렀다.
부웅!
바람 소리가 횡축을 갈랐다.
“으아아악!”
검이 휘둘린 직후, 가장 앞에 있던 능천사 몇 명이 비명을 내지르며 방패를 치켜들었다.
그러나.
“……?”
검을 휘두른 직후, 얼마간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방패를 치켜든 능천사들이 방패를 내리며 전방을 살폈다.
그 모습을 본 헨리가 말했다.
“자식들, 쫄기는.”
“……!”
말 그대로였다.
헨리는 단순한 횡 베기를 했을 뿐이었다.
능천사들은 그것에 기겁했던 것뿐이고.
“이, 이런!”
검을 들어 올렸던 포슬라 또한 뒤늦게 검을 내리며 욕설을 내뱉었다.
제아무리 포슬라가 천신의 성물을 가진 능천사장이라고는 하나 상대는 신.
당연히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위협 아닌 위협에 농락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능천사들이 뒤늦게 소리를 지르며 돌진해 오기 시작했다.
“멍청하긴.”
그때였다.
쿠구구구구!
헨리가 검을 내린 직후, 지축이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지진이었다.
헨리 뒤로 대지가 갈라지며 용암이 뿜어졌다.
“……!”
뿜어지는 용암을 보며 능천사들의 입이 쩌억 벌어졌다.
단순한 횡 베기인 줄로만 알았던 행동이 실은 시간차를 둔 마법이었던 것이다.
“잘 가라.”
짧은 작별 인사.
헨리 한 사람을 막기 위해 저만한 군대를 모아 왔으니 그 정성에 대해 답례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에 걸맞은 화려한 답례를 준비했다.
뿜어진 용암은 파도처럼 전방을 향해 덮쳐졌다.
곁에 있기만 해도 진한 화상을 일으킬 것 같은 끓어오르는 용암이 배고픈 아귀처럼 천군을 집어삼켰다.
곳곳에 비명이 울려 퍼지고 탄내가 났다.
헨리는 검을 쥔 채 뒷짐을 졌다.
그런 다음 자신을 피해 뿜어지는 용암의 해일 사이로 용암에 휩쓸려 죽어 가는 천사들을 보았다.
죄책감은 없었다.
대천사장 앙겔루스를 죽일 때부터 그런 건 진즉에 집어치웠으니까.
헨리의 시선이 죽은 천사들을 훑고 있을 때였다.
지옥의 아수라장 속에서 헨리의 시선이 한 군데에 멈춰 섰다.
은빛으로 빛나는 거대한 구.
마치 절벽을 부수지 못하는 파도처럼, 용암은 그 은빛의 구를 어찌하지 못해 파도처럼 옆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은빛의 구로부터 강력한 신력이 느껴졌다.
덕분에 헨리는 당당하게 용암과 맞서 싸우는 저것이 본능적으로 천신의 힘임을 알 수 있었다.
“삼신기인가?”
물론 천신이 직접 개입했을 리는 없다.
또한 8계급의 대천사장도 막지 못한 헨리의 공격을 비르투스나 포슬라 같은 일개 천사장들이 막아 낼 수 있을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천신의 힘이 깃든 성물, 삼신기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재밌네.’
흥미를 느낀 헨리가 손을 들어 올려 주먹을 쥐었다.
그러자 급물살처럼 흐르던 용암이 멎었고 주먹을 아래로 내리자 용암 전부가 대지 아래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용암이 사라진 대지 곳곳에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 모습은 마치 아직 식사를 덜 마친 지옥의 아귀가 쩝쩝 입맛을 다시는 듯했다.
주위엔 중심의 은빛의 구를 제외하곤 아무것도 없었다.
불어닥친 용암이 천군 전체를 집어삼켰으니까.
헨리가 용암의 파도를 거둔 직후, 은빛의 구 또한 그제야 장막을 허물기 시작했다.
허물어지는 장막 사이로 대피에 성공한 천군의 일부와 포슬라, 그리고 비르투스가 보였다.
포슬라의 갑옷이 빛나고 있었다.
‘저거로군.’
헨리의 기억이 맞는다면 저것의 이름은 아마 성위의 갑옷일 것이다.
성위의 갑옷.
천신의 삼신기 중 하나.
포슬라는 성갑의 도움으로 운 좋게 목숨을 연명할 수 있었다.
헨리의 시선이 성갑을 찬 포슬라에서 리라를 쥔 비르투스에게로 옮겨졌다.
비르투스의 얼굴에 사뭇 긴장이 어려 있다.
다행이었다.
만약 비르투스의 얼굴에 끝까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면 그건 그것대로 불안했을 테니까.
덕분에 헨리는 긴장한 비르투스의 얼굴을 보며 한 가지 가설을 세울 수 있었다.
어쩌면 천신은 역천의 리라가 가진 진짜 힘을 비르투스에게 알려 주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말이다.
헨리의 입꼬리가 가로로 길게 찢어졌다.
천계의 총력이라고도 볼 수 있는 천군의 위세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것은 용암의 홍수에서 살아남은 피라미 같은 잔 병력뿐이었다.
남은 잔 병력은 떨고 있었다.
그 가련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웃음이 픽 나온다.
헨리가 검을 쥔 손을 들어 올렸다.
그에 맞춰 남은 천군들도 황급히 무구를 들어 올렸다.
그러나 방어 태세를 갖춘 천군들과는 달리 헨리는 들어 올린 검을 역소환시켰다.
검이 빛을 뿌리며 허공으로 사라졌다.
검을 역소환시킨 헨리가 말했다.
“내가 당한 게 얼만데, 그냥 끝내는 건 말이 안 되지.”
검을 역소환시킨 헨리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우웅!
헨리의 등 뒤로 수많은 검은 구멍들이 생겨났다.
“구멍……?”
구멍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생겨난 구멍으로 남은 천군의 이목이 쏠렸다.
구멍은 마치 심연의 그것처럼 왠지 모르게 기분을 나쁘게 했다.
불길한 느낌.
그리고 대부분의 불길한 느낌은 거짓말처럼 딱 맞아떨어지가 마련.
-키아아아아!
구멍의 저편에서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다름 아닌 그레텔의 본 드래곤 군단이었다.
“……!”
본 드래곤의 텅 빈 해골 속에서 암녹색 안광이 번뜩였다.
그것은 천계의 종말을 알리는 절망의 신호탄이었다.
암녹색 불빛을 본 천군의 얼굴이 잿빛이 됐다.
생겨난 구멍으로부터 본 드래곤들이 쏟아져 나오고 본 와이번들도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그것은 헨리가 만들어 낸 수많은 차원 문들 중에 중간급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이었다.
또 다른 구멍으로부터 커다란 굉음이 들려왔다.
쿵! 쿵!
지축을 뒤흔들 듯한 굉음.
그것은 하나가 아니었다.
소리는 네 번씩 규칙적으로 울렸다.
소리의 근원지는 다름 아닌 ‘가장 큰 구멍’이었다.
첫 번째 가장 큰 구멍에서 붉은빛이 번뜩였고 곧이어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야, 여기 다 모여 있었네.”
목소리의 정체는 다름 아닌 적색거인족을 대표하는 천재, 기가탄이었다.
기가탄은 돋아난 네 개의 팔들 중 두 개로 벌어진 구멍을 붙잡고 나머지 하나론 턱을 쓰다듬었다.
그에겐 피비린내가 진동을 했다.
얼핏 보면 시뻘건 몸체 때문에 천족들의 피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차갑게 식어 거무죽죽하게 말라붙은 핏물들이 점처럼 기가탄의 몸 곳곳에 묻어 있었다.
쿵! 쿵!
이어서 또 다른 굉음이 울렸다.
그러나 기가탄과는 달리 그 굉음의 주인은 한없이 조용했다.
새카만 두 손이 구멍으로부터 뻗어져 나왔고 곧 얼굴을 포함한 전신이 나타났다.
클레버였다.
차원 문을 통과한 클레버가 헨리를 발견하자마자 예를 갖추며 말했다.
-명령을 완수했습니다, 마스터.
“잘했어, 이제 대기해.”
-예.
대기 명령을 받은 클레버가 마왕군들 중 가장 압도적이고 거대한 위용을 내뿜으며 헨리 곁에 섰다.
이어서 다른 위압감을 가진 두 존재가 헨리 곁에 섰다.
헨리가 곁에 선 두 존재에게 말했다.
“어서 와.”
두 존재는 가니스엘과 그레텔이었다.
두 존재는 기가탄과는 달리 몸 어디에도 핏물이 튀지 않은 채 깔끔한 모습을 유지했다.
그때 건너편에서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어, 어떻게 네가!”
“음?”
당장이라도 숨넘어갈 듯한 목소리에 세 존재의 시선이 옮겨졌다.
시선이 닿은 곳에는 포슬라가 잔뜩 기겁을 한 얼굴로 가니스엘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에 가니스엘이 입꼬리를 올리며 대꾸했다.
“포슬라인가? 오랜만에 보는군.”
“네놈!”
쾅!
가니스엘의 대꾸를 들은 포슬라는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강하게 바닥을 찼다.
그러자 성위의 갑옷을 비롯한 단죄의 검까지 새하얗게 빛나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총력을 쏟아 낼 기세였다.
“반가운 것들을 갖고 있군.”
포슬라의 신기들은 금방이라도 신력을 뿜어낼 듯이 맹렬하게 발광했다.
하지만 정작 가니스엘의 반응은 담담했다.
되레 반가웠다.
그도 그럴 게, 저 두 가지 성물은 가니스엘이 대천사장이던 시절에 가지고 있던 것들이었으니까.
이에 가니스엘이 포슬라의 발광에 화답하기 위해 손에 쥐고 있던 마신의 성물, 릴샤웨인을 발광시켰다.
보랏빛으로 발광하는 릴샤웨인.
번쩍이는 칼날 속에, 릴샤웨인 안에 갇힌 영혼들이 울부짖으며 섬뜩한 소리들을 내뱉었다.
-끼아아아아!
악령의 울음을 닮은 그것과 함께, 가니스엘이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릴샤웨인으로부터 새하얀 무엇인가가 포슬라를 향해 뿜어졌다.
포슬라가 즉시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아니, 갖추려고 했다.
포슬라는 황급히 방어 태세를 갖추려고 했지만 방어 태세를 갖추기 직전, 자신에게로 쏘아지는 릴샤웨인의 검기를 보고선 하얗게 얼어붙고 말았다.
“어, 어억!”
외마디 비명.
포슬라가 검기인 줄 알고 정면에서 맞섰던 것.
그것은 다름 아닌 8계급의 구역에서 가니스엘이 거두었던 대천사장 앙겔루스의 영혼이었기 때문이다.
가니스엘이 검격에 앙겔루스의 영혼을 담았다.
릴샤웨인 속에서 강력한 악령으로 다시 태어난 앙겔루스는, 이제 가니스엘에게 절대 복종하는 무시무시한 사냥개가 되어 포슬라의 영혼에 달라붙었다.
“크허어억!”
생채기는 없었다.
하지만 숨이 막힐 듯이 고통스러웠고 내장이 타 버릴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릴샤웨인은 영혼을 먹는 검.
릴샤웨인에게 먹힌 영혼은, 평생 검주(劍主)를 위한 사냥개로 살아야만 했다.
쿵!
포슬라가 바닥에 쓰러졌다.
이번에도 생채기는 없었다.
대신 그의 입에는 게거품이 잔뜩 물려 있었고 두 눈에 검은자위가 사라져 있었다.
가니스엘이 새하얗게 늘어진 영혼의 잔해를 다시 검 속에 담았다.
곳곳에서 비명이 들렸고 용암 홍수에서 겨우 살아남은 천족들 또한 헨리가 불러들인 마왕군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참혹한 아비규환 속에서 헨리가 걸음을 옮겼다.
헨리의 걸음이 멈추어 섰다.
그리고 그 앞에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는 비르투스가 헨리를 응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