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3
천마대전 (1)
천마대전.
천계와 마계 사이에 일어난 전쟁을 뜻하는 말.
그러나 단어의 존재 여부와는 달리, 차원의 역사 속에 천마대전이 일어났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천계와 마계는 기본적으로 서로 대립했지만, 천계가 먼저 마계를 침공한 적이 없고, 마계는 천계의 진출에 성공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차원 역사상 단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었던 천마대전이 시작된 것이다.
-키아아아아!
그레텔이 소환한 본 드래곤이 높게 울부짖었다.
본 드래곤이 높게 울부짖자 그 뒤를 따라 본 와이번들이 울부짖었다.
그레텔의 언데드 군단이 천계에 강림한 것이다.
쿵! 쿵! 쿵!
그뿐만이 아니었다.
브릴린테의 형상으로 소환된 클레버는 헨리의 명령을 받아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나도!”
클레버가 날뛰기 시작하자 그것을 본 기가탄도 곧바로 거대화를 시전했다.
날뛰는 두 거인.
아군에겐 한없이 든든한 방패처럼 느껴졌지만 적들에겐 잔혹한 악몽처럼 비춰질 것이다.
헨리는 이어서 추가로 더 많은 차원 문을 개방했다.
연결된 좌표는 당연히 마계!
이제부터 소환되어 들어올 마족과 마물 들은, 가니스엘의 마왕군이든 아니든 간에 닥치는 대로 천계를 파괴할 것이다.
덕분에 천계에는 유래없이 많은 수의 마계 차원 문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키아아아아!
-시아아아아!
-카르릉!
마물 특유의 섬뜩한 음성이 천계 곳곳에 빗발쳤다.
그러나 헨리에게 있어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저들의 목소리가 사기를 끌어 올리는 군가처럼 들렸다.
헨리는 이어서 앙겔루스의 개인 공간을 허물어뜨렸다.
그러자 공간 너머에 주둔해 있던 사정을 모르는 대천사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들에게 재앙이 도래했다.
파괴가 시작되고 무차별적인 살육이 이루어졌다.
살려 달라는 비명과 고통에 찬 신음이 종말의 진혼곡처럼 울려 퍼졌다.
헨리는 아비규환 속에서 죽어 나가는 천사들을 보며 그 사이를 거닐었다.
마치 천계를 부수러 온 절대자처럼 말이다.
그런 헨리의 곁에 그레텔이 붙었다.
헨리 곁에 붙은 그레텔이 물었다.
“위대한 존재시여.”
“말해.”
“현 마왕군의 기세로 미루어 보건데 천계의 함락은 금방 이루어질 듯싶습니다.”
“그런데?”
“하나 천계를 완전히 함락시키기 위해선 마지막 관문이 남아 있는데, 그것만큼은 저희들의 힘으로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마지막 관문?”
마계에 마왕이 있다면 천계에는 대천사장이 있다.
그런데 그 대천사장을 좀 전에 가니스엘이 죽였다.
그런데도 마지막 관문이 남아 있다니?
헨리가 의아함을 표했다.
“대천사장은 좀 전에 죽은 걸로 아는데…… 마지막 관문이 뭔데?”
“바로 천신입니다.”
멈칫.
그레텔의 입에서 뜻밖의 존재가 언급됐다.
그래서 헨리의 발걸음도 잠시 멈추어 섰다.
그러나 이내 발걸음을 옮기며 시치미를 떼며 되물었다.
“천신이 왜 문제가 되지?”
천신은 분명히 막강한 존재가 맞다. 신이니까.
하지만 천마대전을 좌지우지할 만큼 중요한 인물은 아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어느 세상이든 신이 현세에 직접 개입하는 건 신들 사이에서도 불문율로 정해져 있었으니까.
그래서 되물은 것이다.
그레텔이 답했다.
“위대한 존재께선, 혹시 천계의 삼신기에 대해 아십니까?”
“천계의 삼신기?”
삼신기가 무엇인진 안다.
마계에도 삼신기가 존재했고, 그 삼신기를 모아 가진 자가 바로 가니스엘이었으니까.
그러나 천계의 삼신기가 무엇인진 모른다.
“천계의 삼신기에는 성위의 갑옷과 단죄의 칼, 그리고 역천의 리라가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것들은 문제가 되지 않으나…… 역천의 리라에는 신비한 힘이 한 가지 있습니다.”
역천의 리라.
리라라는 단어를 듣고 나니 한 가지 떠오르는 물건이 있다.
바로 비르투스가 가지고 있는 성물.
그러나 비르투스가 가진 성물에 대한 정보는 이미 가니스엘에게 들었다.
하지만 헨리는 모르는 척 끝까지 그레텔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듣기로는 천신이 가진 힘은 시간에 대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시간의 힘이 담긴 유일한 신기가 바로 역천의 리라라는 성물인데……. 그 성물은 평소엔 가진 힘이 미약하나 천계를 위협하는 위급 상황이 생기면 딱 한 번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고 합니다.”
“엄청난 힘?”
“그렇습니다.”
“엄청난 힘, 엄청난 힘……. 설마, 그 엄청난 힘이란 게……?”
리라가 가진 힘.
가니스엘에게 들었다.
그리고 딱 한 번 발동되는 엄청난 힘이라는 말에 헨리는 자연스럽게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예, 시간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힘이 주어진다고 합니다.”
그레텔의 대답을 들은 헨리는 순간 자리에서 굳었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시간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힘이라니?’
동공이 흔들렸다.
여태껏 시간의 힘을 한 번 빌리기 위해 이 난리를 쳤는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엄청난 정보를 들어 버렸다.
그러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머릿속에 수많은 욕심과 선택지들이 뒤엉키며 파도가 되어 휘몰아쳤다.
헨리가 석고상처럼 굳은 표정을 하고 있자 그레텔이 헛기침을 했다.
“흠흠.”
“……아, 그래.”
급히 굳은 표정을 수습했다.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걸 왜 나한테 말해 주는 거지?’
현재 그레텔의 신분은 마왕의 부관이자 마왕군의 이인자.
그런고로 이런 중대한 사안은 가니스엘에게 보고했어야 맞다.
물론 가니스엘은 천계 출신이니 만큼 역천의 리라에 대해 이미 알고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헨리에게 이러한 사실을 알리는 이유가 궁금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역천의 리라가 가진 숨겨진 힘은 어찌 보면 천마대전을 좌지우지할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될 수도 있었으니까.
헨리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설마 가니스엘을 마왕으로 인정하지 못해서?’
그럴 수도 있었다.
사실 마계의 삼신기를 갖춘 가니스엘보다 그레텔이 더 강력한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일전에 헨리의 제안을 수락했을 때, 그레텔은 가니스엘에게 전혀 반감이 없어 보였다.
이유를 종잡을 수 없자 헨리는 그냥 그레텔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왜 나에게 알려 주는 거지? 너의 직속 상관은 가니스엘이잖나?”
“하하, 오해하진 말아 주십시오. 저는 그저 마왕님과 더불어 위대한 존재께도 이 사실을 알려 드리고 싶었던 것뿐이니까요.”
“그럼 혹시 가니스엘의 대처 능력을 믿지 못하는 건가?”
“아뇨,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저는 확실하게 대처하고 싶어서 헨리 님께 이 사실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오히려 확실하게 대처하고 싶어서 리라의 힘을 밝혔다.
헨리는 그레텔의 눈빛에서 진심을 보았다.
그레텔의 진심을 본 헨리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그렡네에 대해 오해하고 있음을.
그런데 그 순간, 리라가 가진 숨겨진 힘에 정신이 팔려 가장 중요한 사실을 놓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헨리가 고개를 돌려 그레텔에게 물었다.
“그런데 말이야.”
“예?”
“넌 그 사실을 대체 어떻게 아는 거지?”
생각해 보니 이상했다.
가니스엘은 천계 출신이니 알 수도 있다지만 그레텔은 천계 땅을 한 번도 밟아 보지 못한 마족이었다.
그런 그레텔이 기밀에 가까운 리라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게 좀 이상했다.
헨리가 다시금 의심의 눈초리로 그레텔에게 묻자 그레텔이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키며 물었다.
“마신님께 들었습니다.”
“마신한테서?”
“그렇습니다.”
“어째서?”
“어째서라니요?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네가 마신의 점지를 받은 강력한 마왕 후보였다는 사실은 안다. 하지만 말 그대로 후보였을 뿐이지, 진짜 마왕은 아니었잖아? 그런 상황에서 마신이 그런 비밀을 너에게 알려 줬다고?”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그러나 그레텔은 당황하는 기색없이 부드럽게 대꾸했다.
“그 전까지만 해도 마신님께선 제가 새로운 마왕이 될 줄로만 알고 계셨으니까요.”
“쉽게 설명해.”
“헨리 님께선 왜 마왕 후보라는 임시 기간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임시 기간?”
“그렇습니다. 순리대로라면 모든 서열권의 마족을 쓰러뜨린 자는 즉시 새로운 마왕이 되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마신님께선 마왕이 그리 쉽게 탄생하지 않도록 꼼꼼하게 설계하셨지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마신님께선 자신이 원하는 마족을 마왕으로 앉히고 싶어 하셨거든요.”
“그래서?”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원래 마신님께서 계획하신 대로라면 저는 진즉에 봉인에서 풀려나 새로운 마왕이 되어 인간계를 침공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모종의 이유로 그 시기가 늦춰졌고 브릴린테가 새로운 마왕 후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신님께선 그 사실을 별로 탐탁지 않아 하셨습니다.”
“탐탁지 않아 했다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위대한 존재께서 브릴린테를 처리해 주셨고 브릴린테만큼이나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던 가니스엘 님의 힘도 꺾어 주셨지 않습니까? 덕분에 마신님의 바람대로 제가 새로운 마왕 후보가 될 수 있었습니다.”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마신은 오래 전부터 그레텔을 새로운 마왕으로 내정해 두고 있었다.
그러나 마계를 굴러가게 하는 힘의 질서가 계획의 걸림돌이 되었다.
그런데 때마침 헨리가 그 걸림돌을 치워 준 것이다.
그래서 즉시 그레텔의 봉인을 해제한 다음 새로운 마왕이 될 수 있도록 힘을 쏟았다.
물론 힘을 쏟는다는 게 마계에 직접 개입했다는 건 아니다.
단지 마왕 후보가 된 그레텔의 데뷔를 하루라도 빨리 앞당기고 그레텔이 해야 할 일들에 대해 가르쳤을 뿐이다.
그레텔은 그 과정에서 역천의 리라가 가진 힘에 대해 알게 되었다.
“저는 새로운 마왕으로 군림하기까지 불과 하루의 시간을 남겨 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마침 위대한 존재께서 가니스엘 님과 함께 등장하신 것이고요. 아, 그렇다고 해서 저 또한 억지로 왕좌를 포기한 것은 아닙니다. 저는 왕좌보다 위대한 존재께서 약속해 주신 것들이 더 흥미로웠을 뿐이니까요.”
그레텔로부터 자초지종을 전해 듣자 헨리는 그제야 석연찮은 모순들을 모두 납득할 수 있었다.
“그러니 제가 위대한 존재께 역천의 리라가 가진 진짜 힘에 대해 말씀드리는 건……. 순전히 저희 마계의 승리를 바라는 마음도 있지만, 제 욕심으로 왕좌를 포기한 만큼 마신님께 죄송스러운 마음 또한 가지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설명을 모두 들은 헨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제야 그레텔의 진짜 진심을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다행히 별다른 이유는 없군.’
요약하면 지극히 개인적인 사정일 뿐이라는 이야기였다.
헨리는 그것들이 별로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자마자 곧바로 관심을 껐다.
“끄아아악!”
그쯤에 8계급 구역의 대천사들이 대부분 죽어 나갔다.
끊임없이 살육이 자행됐고 고통에 찬 신음들이 쉴 새 없이 울려 퍼졌다.
그러나 헨리의 귀에는 그러한 것들이 일절 들어오지 않았다.
헨리의 의식은 생각지도 못하게 등장한 역천의 리라라는 물건에 몰려 있었다.
‘그럼 이제 마음 놓고 리라를 노리면 되는 건가?’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그리고 새로운 희망을 찾았으니 서둘러 그 힘을 손에 넣고 싶었다.
“끄으으윽……!”
헨리의 발치에 마물에게 공격당한 대천사 한 명이 중상을 입고 꿈틀거렸다.
상처를 보아하니 곧 생을 마감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생을 마감할 정도의 상처이긴 했으나 아직 말은 할 수 있을 것이다.
헨리는 죽어 가는 어느 이름 모를 대천사의 머리채를 움켜쥐고는 들어 올렸다.
그리고 대천사와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물었다.
“비르투스는 어디 있지?”
“모른……다.”
“대답해라. 지금 대답하지 않으면 천계에 존재하는 모든 천족들을 죽이겠다. 하지만 만약 비르투스가 있는 곳을 알려 준다면…….”
제안을 하던 헨리가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대천사의 귀에 속삭였다.
“비르투스만 죽이고 순순히 천계에서 물러나도록 하겠다.”
전체를 위해 소수를 희생할 것인가, 소수를 위해 전체를 희생할 것인가.
한낱 일개 대천사가 짊어지기엔 몹시 무거운 선택이었다.
제안을 한 헨리는 한없이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대천사는 헨리의 가증스러움에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대천사는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천마대전은 실제로 일어났고, 어쩌면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정말로 전쟁이 종식될 수도 있었으니까.
또한 그런 막중함을 뒤로하고 혀를 깨물고 죽는 등, 자살로 인해 이러한 선택의 책임을 회피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로인해 발생되는 변수의 책임 또한 회피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나저러나 대천사는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대천사가 눈물을 흘렸다.
대천사의 입이 오물거렸다.
대천사의 오물거리던 입술이 멈추고 난 직후, 헨리의 손에 대천사의 날개깃 한 개가 주어졌다.
날개깃을 받아 든 헨리가 선택을 내린 대천사를 칭찬했다.
“훌륭한 선택이야.”
헨리의 칭찬에, 대천사는 조그마한 위안을 얻었다.
하지만.
“그래도 동료를 팔아먹는 건 나쁜 짓이지.”
화르륵!
“끄아아아악!”
대천사의 몸에 불길이 치솟았다.
대천사의 살갗이 금방 녹아내렸고 대천사의 뼈가 유품처럼 바닥에 떨어졌다.
대천사는 비르투스 하나의 목숨 대신 천계 전체를 택했다.
헨리는 그의 현명함을 칭찬했지만 동료를 팔아먹은 것에 대한 죗값을 치르게 했다.
대천사의 깃털을 집어 든 헨리가 말했다.
“그럼 어디 한번 가 보실까, 천신의 성물을 찾으러.”
헨리의 신력을 주입받은 대천사의 날개깃이 강렬한 돌풍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