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2
천계 (7)
“…….”
악마처럼 웃어 재끼는 앙겔루스 앞에서, 헨리의 안색은 점점 더 어두워져만 갔다.
앙겔루스는 그런 헨리의 어두운 안색을 즐겼다.
극명하게 대비되는 두 얼굴.
헨리는 생각했다.
‘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많은 선택지가 떠올랐고 그 선택에 따른 수만 가지 미래가 눈앞에 그려졌다.
덧붙여 이젠 분노를 넘어서 허탈하기까지 했다.
헨리는 단지 천신을 만나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은 게 전부였다.
그런데 그 자그마한 소망이, 이들에겐 그렇게까지 들어주기 어려운 일인 걸까?
헨리는 앙겔루스가 쳐다보든 말든 상념에 빠지기 시작했다.
난 대체 다섯 번의 실패에서 어떤 선택을 한 것일까?
어떤 선택을 어느 때에 대체 어떻게 했기에 또 실패하고 말았던 것일까?
지난 다섯 번의 난 어떤 선택으로 어디까지 도달했을까?
혹시 이것도 천신이 자신에게 내리는 시험의 일부인 것일까?
그렇다면 납득이 됐다.
천신이 가진 시간의 힘은, 어쩌면 헨리의 목숨 따위로도 채울 수 없는 아주 값진 것일 테니까.
생각의 파도가 헨리의 숨구멍을 조였다가 트였다.
그럴 때마다 헨리는 정말로 물속에 잠긴 것처럼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난…….’
그러나 쉬이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아니 결정을 내릴 수 없다기보다는 천사의 탈을 쓴 저 악마를 믿을 수가 없었다.
설사 이것이 천신의 시험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헨리의 마른 입술이 쩍쩍 걸라지는 소리를 내며 조금씩 벌어졌다.
앙겔루스는 벌어지는 헨리의 입술을 주시했다.
앙겔루스의 눈이 초승달처럼 웃고 있었다.
헨리가 어떤 선택을 내릴지 몹시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헨리가 말했다.
“난…….”
늘어지는 대답 소리.
헨리가 답했다.
“협상은 여기까지다.”
“뭐?”
서걱!
대답과 함께 날카로운 절삭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검은 없었다.
예리하게 빛나는 것은 헨리의 손날이었다.
헨리의 손날이 전방을 갈랐다.
촤악!
가른 손날로부터 핏물이 튀었다.
튄 핏물이 녹색 들판을 적셨다.
“너, 너……!”
떨리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앙겔루스였다.
앙겔루스는 목소리만큼 떨리는 동공으로 헨리를 바라보았다.
한손으로는 자꾸만 터져 나오는 핏물을 틀어막기 위해 목을 부여잡았다.
헨리는 앙겔루스의 목을 단숨에 베지 않았다.
놈의 목을 단숨에 베어 내기엔 그동안 천사장들에게 받아 온 조롱과 모멸감이 헨리의 자비심을 무자비하게 씹어 삼켰기 때문이다.
헨리가 앙겔루스를 향해 앞으로 한 발자국 다가섰다.
고통에 어깨를 들썩이던 대천사장이 화들짝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러나 헨리는 놈이 쓰러지든 말든 개의치 않았다.
대신 여덟 개나 되는 놈의 날개 중 두 짝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날개를 붙잡힌 앙겔루스가 기겁을 했다.
“아, 안 돼……! 안 돼, 잠깐만!”
“돼.”
“끄아아아악!”
헨리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내젓는 앙겔루스의 날개를 있는 힘껏 잡아 뜯었다.
날개를 잡아 뜯자 육신에 박혀 있던 날개의 뿌리가 훤하게 드러나며 핏물이 무지개를 그렸다.
깃털이 휘날렸다.
헨리는 양손에 거머쥔 앙겔루스의 날개에 불을 붙였다.
날개가 타들어 가며 탄내가 났다.
그러나 이어서 날개가 붙어 있던 날개 근육이 불타며 맛있는 냄새가 났다.
앙겔루스가 날개가 뜯겨 나간 자리를 부여잡으며 고통에 찬 신음을 내뱉었다.
“쯧!”
헨리가 혀를 찼다.
이딴 놈이 대천사장이라니.
이런 놈이 대체 어떻게 가니스엘을 밀어내고 대천사장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헨리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앙겔루스의 발버둥을 무시한 채 계속해서 날개를 잡아 뜯었다.
“끄아아아아!”
이곳은 8계급 대천사장, 앙겔루스만을 위한 공간.
아무리 앙겔루스가 비명을 질러도 앙겔루스가 문을 열어 주지 않으면 그 어떤 천족도 출입할 수가 없다.
그러니 이곳에 존재할 수 있는 건 오롯이 헨리와 앙겔루스뿐이었다.
앙겔루스는 늠름한 대천사장에서 고양이 앞의 참새가 되었다.
한 장, 두 장, 세 장…….
앙겔루스의 날개가 끝없이 뜯겨 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대천사장의 여덟 날개가 모두 뜯기고 나니 앙겔루스는 대천사장이 아닌 한낱 인간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 되었다.
앙겔루스가 병든 조류의 그것처럼 바닥에서 꿈틀거렸다.
볼썽사나운 신음을 흘려 가면서 말이다.
그러나 헨리의 시선은 여전히 싸늘했다.
“끄흐으으윽……!”
앙겔루스의 등짝에 여덟 줄기의 피가 흘렀다.
그러나 앙겔루스는 죽지 않기 위해 여전히 목에서 쏟아져 나오는 핏물을 틀어막고 있었다.
헨리의 싸늘한 시선이 비수가 되어 앙겔루스의 등짝에 꽂혔다.
이 정도로 분이 풀리진 않았지만 그래도 약간이나마 화가 덜어졌다.
“후우…….”
헨리는 오랫동안 묵혀 왔던 숨을 뜨겁게 내뱉었다.
화가 뿜어지는 듯했다.
한숨을 내쉰 헨리가 말했다.
“이게 너희가 말하는 의지의 증명이라는 것이냐?”
“으흐흐흑……!”
“말해.”
“끄아아악!”
고통엔 신음하는 앙겔루스에게 헨리는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앙겔루스는 쏟아지는 핏물과 불로 지지는 듯한 등짝의 고통에 신음을 내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그런 엄살 따위, 헨리가 받았던 모멸감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그래서 대답을 재촉하기 위해 앙겔루스를 밟았다.
헨리의 군홧발에 밟힌 앙겔루스가 신생아 같은 울음을 터뜨렸다.
“한심한 놈.”
몇 번이나 앙겔루스를 더 밟아 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신음뿐이었다.
헨리가 혀를 찼다.
그런 다음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노을빛을 닮은 하늘의 중심에는 여전히 둥글고 거대한 하나의 태양이 굳건하게 중심을 지키고 있었다.
헨리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외쳤다.
“천신! 이게 네놈이 원하는 의지의 증명이더냐!”
하급자가 저지른 잘못이 수습되지 않으면 그 책임은 하급자를 담당하는 상급자에게 돌아간다.
이제 더 이상 자세를 낮추고 굽실거리는 건 못 하겠다.
아니, 할 수가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과거의 내가 무슨 잘못된 선택을 했든 간에 어쨌든 확실한 것 한 가지는 이번 여섯 번째 기회 또한 물 건너갔다는 것.
적어도 헨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다시 시간이 되돌려지든 말든, 그동안 받아 온 수모만큼은 톡톡히 갚아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같은 신이라는 놈이! 비겁하게 이딴 장난질이나 하고! 당당하게 모습을 보여라, 천신!”
분노를 토해 낼수록 억제해 두었던 것들이 활화산처럼 폭발했다.
그러나 하늘에 걸쳐 있는 태양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럴 줄 알았지.”
예상은 했다.
이런다고 강림할 놈이었다면 진즉에 강림했겠지.
헨리는 시선을 돌려 여전히 고통에 떨고 있는 앙겔루스를 바라보았다.
참 하잘것없고 볼품도 없다.
저런 볼품없는 놈에게 그런 치욕을 당했다고 생각하니 다시금 뒷목이 시큰해졌다.
헨리가 말했다.
“원님 덕에 나팔을 불고 싶었겠지.”
“……!”
“하지만 착각하지 마라. 나는 신이다, 네놈 따위가 어찌할 수 없는.”
충고는 이 정도면 충분했다.
말을 마친 헨리는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들었다.
호출지였다.
그러나 평범한 호출지가 아니었다.
그 호출지는 가니스엘에게 주었던 것과 같은 호출지였다.
헨리가 말했다.
“좋은 걸 보여 주마.”
부욱!
말과 함께, 헨리는 호출지를 단숨에 찢었다. 그러자.
슈아아아아!
앙겔루스만의 독자적인 공간에 이곳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색을 가진 문이 개방됐다.
차원 문이었다.
차원 문은 보랏빛이었고 보랏빛 문 건너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대인가?”
“그래, 나다. 가니스엘.”
“……!”
가니스엘.
금기어처럼 불리는 이름이 헨리의 입에서 튀어나오자 신음을 흘리던 앙겔루스의 동공이 보름달처럼 커졌다.
쿠오오오-!
열린 차원 문으로부터 기이한 바람 소리가 불어닥쳤다.
그리고 그 문 속으로부터 천계의 것과는 문양 자체가 다른, 척 보기에도 흉물스러워 보이는 부츠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디뎌졌다.
미약하게 떨던 앙겔루스의 어깨가 사시나무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부츠, 각반, 벨트, 플레이트 메일.
보랏빛 이채를 품은 하반신이 발끝부터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마계의 삼신기를 착용한 전대천사장, 가니스엘이 회색빛 날개를 펼치며 자신의 고향, 천계로 완전히 발을 디디는 데에 성공했다.
“마, 말도 안 돼……!”
앙겔루스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천신에게 들었던 말들 중에 가니스엘이 나타난다는 말은 없었다.
이것은 예언에 없던 일이었으니까.
바닥에 엎어져 있던 앙겔루스가 눈앞의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두려워하며 겨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여전히 한손으로 목을 감싸 쥐고서 뒷걸음질을 쳤다.
천계로 완전히 강림한 가니스엘의 시선이 움직인다.
움직인 시선은 곧 뒷걸음질 치는 앙겔루스에게 닿았다.
가니스엘의 미간이 한없이 구겨졌다.
“앙겔루스…….”
가니스엘의 입에서 앙겔루스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앙겔루스의 눈동자가 눈에 띄게 진동했다.
모두가 칭송하고 천계의 방패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고결하고 위대한 천사, 가니스엘.
그러나 지금 눈앞에 있는 가니스엘은 더 이상 위대하지도 고결하지도 않았다.
그의 모습은 흡사 마계에서 태어나고 자란 악마이자, 분노의 화신 그 자체였다.
“아, 아니야……!”
털썩!
자리에 주저앉는 앙겔루스.
뒷걸음질 치던 다리에 오금이 풀린 탓이었다.
슬그렁.
앙겔루스의 이름을 읊조리던 가니스엘이 천천히 검을 뽑았다.
마계의 삼신기 중 하나인 ‘릴샤웨인’이라는 검이었다.
가니스엘은 그 짧은 시간 동안 많은 변화가 생긴 헨리의 안부를 묻기 전에 먼저 반갑기 짝이 없는 옛 동료의 안부부터 묻기로 했다.
가니스엘의 눈빛에 경멸이 일었다.
네 쌍의 날개가 뜯기고 볼품없는 모양새로 추락한 천사에게 보내기 딱 알맞은 눈빛이었다.
가니스엘이 검을 들었다.
“너는 죽어서도 천신의 보살핌을 받지 못할 것이다.”
“안돼에에에!”
좌아아악!
묵직한 릴샤웨인이 전방을 갈랐고 칼끝에 묵직한 촉감이 묻어났다.
바닥에 대천사장의 목이 떨어졌다.
푸슈슉!
천사의 피가 초록색 대지를 적셨다.
그 순간, 앙겔루스의 잘린 목으로부터 새하얀 무엇인가가 뽑혀 나와 릴샤웨인으로 흘러들어 갔다.
헨리가 물었다.
“그건 뭐냐?”
“릴샤웨인은 영혼을 먹는 검이다. 좀 전에 뽑혀져 나온 건 앙겔루스의 영혼이다.”
“아, 그래서 천신의 보살핌을 받지 못한다고 한 것이군.”
“그렇다.”
“그래…… 그건 그렇고, 가니스엘. 아무래도 때가 온 것 같다.”
“그대의 모습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군.”
가니스엘이 새롭게 돋아난 헨리의 암녹색 왼팔과 오른 다리를 보며 말했다.
자세한 사정은 묻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헨리가 얼마나 큰 고초를 겪었을지 알 수 있었으니까.
가니스엘이 감회가 새롭다는 듯한 투로 말했다.
“결국 다시 오게 되었군.”
“다시 돌아온 소감이 어때?”
“끔찍하다.”
“끔찍한 건 얼른 부숴 버려야지. 설마 고향에 대한 옛 정이라든가 그런 것 있어?”
“일절 없다.”
“잘됐네.”
추방당했던 탕아가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몇 년에 걸쳐 벼려 낸 날카로운 복수심과 함께 말이다.
그때였다.
“오오, 여기가 바로 천계로구나!”
“허허.”
차원 문은 여전히 열려 있었다.
그리고 열린 차원 문으로부터 낯익은 목소리들이 들려 왔다.
목소리의 주인공들은 다름 아닌 기가탄과 그레텔이었다.
차원 문에서 빼꼼 고개를 내민 기가탄이 천계로 폴짝 뛰어내렸다.
그 뒤를 이어 그레텔도 사뿐히 내려왔다.
그 모습을 본 가니스엘이 말했다.
“혼자 올 수도 있었지만 저들은 이제 나의 마왕군이기도 하니 일부러 함께 왔네.”
“잘했어.”
오히려 반가운 전력이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천계를 때려 부수려면 손이 하나라도 더 필요한 참이었으니까.
마계의 주요 인사들이 모두 천계에 도착하자 헨리가 읊조렸다.
“클레버.”
-예, 마스터.
쿠웅!
헨리는 마지막으로, 전 마왕 후보 브릴린테의 능력을 완전히 흡수한 클레버를 천계에 소환시켰다.
클레버가 소환되자 8계급 대천사의 땅이 뒤흔들렸다.
헨리가 말했다.
“천계와 마계 간의 전쟁, 지금부터 천마대전을 시작하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