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1
천계 (6)
눈부시게 환한 미소로 오른 다리를 요구하는 아르헤스.
그녀는 진심이었다.
그리고 헨리는 그런 그녀의 얼굴을 한동안 말없이 쳐다보았다.
헨리의 시선을 느낀 아르헤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싫어?”
너무 뻔뻔해서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헨리의 내면에 충돌이 일기 시작했다.
아르헤스의 태도가 너무 당당한 나머지 왠지 모르게 이번 요구로 끝나지 않을 것만 같다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헨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아르헤스의 두 눈을 보았다.
그것이 통했던 것일까?
헨리의 시선이 의미하는 바를 느낀 아르헤스가 배를 잡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푸흡! 지금 의심하는 거야? 설마 내가 다리만 홀랑 받아먹고 입 닦을까 봐?”
헨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이번에도 그저 아르헤스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자 아르헤스가 터뜨린 웃음 때문에 흘린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아아, 걱정하지 마. 난 한 번 뱉은 말은 꼭 지키니까. 난 오른쪽 다리 한 짝이면 돼. 천신님께 맹세할게.”
천신을 섬기는 자의 입에서 천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했다.
저 정도 맹세라면 믿어도 되겠지.
헨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가니스엘이 말했던 천족의 위선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 이제야 좀 알 것만 같았다.
헨리는 한숨을 내쉰 후 조그마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착검.”
손 안에 황금빛 이채가 결집되며 한 자루의 검이 소환되었다.
아르헤스가 헨리의 검을 보며 감탄했다.
“좋은 검이네.”
이해할 수 없는 여자였다.
저 여자는 헨리가 신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어떻게 저리 건방질 수 있는 걸까?
아니면 이번 기회가 아니면 언제 또 신을 희롱할 수 있을지 몰라 단순히 현재를 즐기는 것일까?
기분 나쁜 추측들이 머릿속을 가득 헤집어 놓았다.
하지만 이젠 아무렴 상관없다.
태도가 마음에 안 들기는 하나, 다리 한 짝이면 일곱 번째 천사장의 승인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헨리는 소환한 콜소드를 손에 바로 쥐었다.
콜소드의 운명도 어찌 보면 참 기구했다.
주인을 위해 만들어진 칼이 아이러니하게도 주인을 베게 되다니.
콜소드를 만들어 준 불카누스가 보았다면 통곡할 노릇이 분명했다.
헨리는 칼날에 마력을 실어 포슬라에게 그랬던 것처럼 단숨에 오른쪽 다리를 잘라 냈다.
서걱!
허벅지는 팔뚝보다 두꺼워서 고통이 배가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완벽하게 다리를 절삭해 냈으나 아르헤스의 즐거움을 위한 피는 단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헨리의 오른쪽 다리가 바지 원단과 함께 힘없이 잘려 나갔다.
눈앞에 부츠가 신겨진 헨리의 발이 떨어졌다.
육체적 고통이야 참을 수 있었지만 생전 본 적도 없는 천사들에게 능욕당하는 기분이란, 아무리 합당한 의미를 부여해도 씻을 수 없이 더러웠다.
헨리는 분노로 이글거리는 입술을 잘근 깨물고서 상처를 치유했다.
그리고 왼쪽 팔뚝에 그랬던 것처럼 오른쪽 다리에도 암녹색 에너지를 결집시켜 다리의 형태를 빚어냈다.
“우와아!”
헨리가 손수 다리를 잘라 내자 그 광경을 본 아르헤스가 두 손을 모아 있는 힘껏 감탄했다.
그녀의 표정은 얼핏 보면 황홀해 보이기까지 했다.
무엇이 저토록 그녀를 황홀하게 만들었을까?
아마도 자신의 명령 한 번에 스스로 다리를 자르는 신을 보며 말 못 할 희열감을 느꼈겠지.
헨리는 그런 생각을 곱씹으며 잘린 다리를 아공간 속으로 던져 넣었다.
그런 다음 새롭게 돋아난 암녹색 다리와 남은 왼쪽 다리로 대지를 지탱하며 똑바로 섰다.
헨리가 말했다.
“이걸로 됐겠지?”
분노에 색깔이 있다면 헨리의 색깔은 독기를 닮은 보라색에 가까울 것이다.
그보다 분노가 더 짙어지면 검정색이 될 것이고.
그러니 현재 헨리의 기분은 딱 보라색이었다.
헨리의 물음에 아르헤스가 큼지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럼 그럼!”
대답을 마친 그녀는 비르투스와 포슬라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날개에서 깃털 하나를 떼어 주었다.
그녀는 세 쌍의 날개를 비단처럼 감고 있었는데 아마 계급이 하나씩 오를 때마다 날개가 2개씩 늘어나는 듯했다.
‘가니스엘이 8개였지, 아마…….’
헨리는 차가운 표정으로 그녀의 깃털을 받았다.
그리고 헨리가 그녀의 깃털을 받아 든 직후, 아르헤스가 말했다.
“이제 한 명 남았네?”
아르헤스는 마치 훈련 중인 강아지를 지켜보는 듯한 얼굴을 하며 헨리를 귀엽게 여겼다.
헨리는 그에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깃털에 신력을 불어넣으며 아르헤스의 얼굴을 머릿속에 똑똑히 각인시켰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저 빌어먹을 여자를 포함해 계급별로 천사장들을 모아 싹 다 얼굴을 후려갈겨 주겠다고 다짐하며 말이다.
깃털에 신력을 주입하자 이번에는 광풍 대신 광명이 번쩍였다.
이제 남은 천사장은 단 한 명.
그 한 명이 헨리에게 어떤 치욕을 줄진 모르겠지만 헨리는 이번에도 잘 참아 내겠노라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광명이 번쩍였고 시야가 바뀌었다.
연녹색으로 가득했던 하늘은 어느새 석양이 물들인 듯한 노란빛으로 바뀌어 있었다.
광명이 잦아들고 눈을 뜨자 그곳에는 고동색 바닥이 아닌 초목을 연상케 하는 녹색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천계에선 처음 보는 들판이었다.
헨리는 그 들판의 어느 지점에 서 있었다.
헨리는 주위를 둘러보았고 뒤편에 나무가 자연스럽게 자라나 만들어진 듯한, 제법 특별하게 생긴 의자 위에 앉은 누군가를 볼 수 있었다.
“여.”
의자 위에 앉은 존재는 날개를 네 쌍이나 가지고 있었다.
네 쌍의 날개.
가니스엘과 같은 날개 수를 가졌으니 아마도 저 녀석이 8계급의 대천사장일 것이다.
헨리는 자신에게 손을 들어 인사하는 대천사장을 보며 그의 이름을 뇌까렸다.
“대천사장 앙겔루스…….”
가니스엘이 추방당한 직후 대천사 서열 2위였던 앙겔루스는 자연스럽게 다음 대천사장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대천사장이란 말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제 막 약관의 나이를 지난 듯한 앳된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앙겔루스가 다리를 꼬고 앉아 거만하게 등을 젖혔다.
인사를 하던 손은 여전히 허공에 멈춰 있었다.
헨리가 말없이 앙겔루스 앞에 서자 앙겔루스는 그제야 손을 내렸다.
그러나 헨리가 인사를 받아 주지 않아 불만족스러웠던지 입술을 빼쭉 내밀었다.
앙겔루스가 말했다.
“반가워. 내 이름은 앙겔루스야. 아시다시피 8계급 대천사장을 맡고 있지.”
앙겔루스는 인사와 함께 악수를 청했다.
그런데 헨리는 앙겔루스가 내민 손을 보고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앙겔루스가 내민 손이 오른손이 아닌 왼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았다.
이것이 분명한 조롱임을 알았지만 한 번만 더 인내하면 천신을 만날 수 있으니까.
헨리가 에너지 덩어리로 결집된 암녹색 손을 내밀어 앙겔루스의 손을 잡았다.
파짓.
앙겔루스가 헨리의 손을 붙잡자 맞잡은 손에서 옅은 스파크가 튀었다.
앙겔루스가 잡은 손이 맨살이 아닌 에너지 덩어리였기 때문이다.
헨리의 손을 붙잡은 앙겔루스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간다.
“아아, 이거였어?”
헨리의 손을 맞잡은 앙겔루스가 헨리의 손을 보더니 알은체를 했다.
분명히 팔을 잘라 낸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역시 천계의 소문 속도는 어마어마하게 빨랐다.
그때였다.
“이얏!”
파지짓!
악수를 거두기 위해 손을 빼려던 찰나, 앙겔루스가 헨리의 손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강렬한 스파크가 튀었다.
그리고 헨리의 왼손에 앙켈루스가 힘껏 거머쥔 손자국이 그대로 새겨졌다.
일그러진 헨리의 손.
그것을 본 앙겔루스가 말했다.
“아아, 미안 미안. 궁금했거든. 마법사가 만든 손은 어떤 느낌인가 해서. 근데 뭐 별거 없네.”
안하무인에 가까운 태도에 헨리는 순간 머리가 띵해졌다.
아까부터 분노는 끓어오르는데 달리 표출할 구멍이 없어 뇌가 찐득하게 달궈진 것이다.
헨리의 눈밑 살이 파르르 떨렸다.
사실 손 따위야 좀 일그러지든 말든 아무 상관이 없다.
어차피 에너지의 결집체이니 헨리가 마력만 불어넣으면 얼마든지 재생시킬 수 있는 것이니까.
하지만 천족이란 작자가, 그것도 모든 천사들을 아우르는 대천사장씩이나 되는 천족이 헨리에게 이런 무례를 보인다는 게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헨리가 일그러진 손을 뻗은 채로 그 자리 그대로 굳자 그 모습을 본 앙겔루스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왜 그래? 장난 한번 친 거 가지고 너무 정색하지 말라고.”
가관이었다.
하지만 헨리의 이성이 끊임없이 헨리의 분노를 다독였다.
참아야 한다고.
이제 정말 고지가 코앞이라고.
그래서 가까스로 한 번 더 참을 수 있었다.
헨리가 달궈진 숨을 토해 내며 손을 내렸다.
앙겔루스가 헨리의 그런 선택을 보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앙겔루스가 말했다.
“어디 보자, 왼팔에 오른 다리에…… 녀석들, 필요한 건 다 가지고 갔네.”
앙겔루스는 마치 죽은 짐승의 고기를 나누는 백정처럼 말했다.
그러나 그 정돈 참을 수 있었다.
좀 전의 무례가 준 충격이 어마어마했으니까.
분노를 삼킨 헨리가 앙겔루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내 사정은 알고 있겠지?”
“알다마다. 천신님을 만나게 해 달라는 거잖아?”
“원하는 바를 말해라.”
“원하는 바? 이것 참…… 누가 보면 꼭 내가 상인인 줄 알겠네.”
그때였다, 빙글거리던 앙겔루스의 태도가 바뀐 것은.
나름대로 분노를 절제하긴 했지만 헨리의 입에선 고운 어투가 나올 순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최대한 절제해서 속히 본론으로 넘어가려 했다.
하지만 그게 앙겔루스의 심기를 건드렸던 것일까?
빙글거리던 앙겔루스가 시정잡배의 그것처럼 몹시 건들거리기 시작했다.
“응? 꼭 누가 보면 내가 상인인 줄 알겠어. 누가 그러든? 원하는 바를 해결해 주면 날름 허락해 준다고. 포슬라? 아르헤스? 것도 아니면 비르투스?”
건들거림은 곧 비아냥거림으로 변했다.
앙겔루스는 굳은 듯이 서 있는 헨리 앞에서 고개를 요리조리 돌리며 비아냥거렸다.
마치 꼬투리를 하나 더 잡고 싶어서 안달 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헨리는 말을 아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입을 열면 오히려 앙겔루스의 화만 부추길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앙겔루스의 지저분한 성격은 헨리가 생각했던 것을 훨씬 초월했다.
“응? 입 닫고 있으면 다야? 너, 천신님한테 가서도 이런 식으로 행동할 생각이었던 모양이지? 아아, 그런 거라면 아주 큰 착각을 한 거야. 난 너 같은 놈을 천신님께 보낼 생각이 없거든.”
앙겔루스는 진심으로 이죽거렸다.
어서 빨리 헨리가 폭발하기라도 바라는 것처럼 말이다.
앙겔루스의 이죽거림이 계속 되었다.
결국 앙겔루스의 이죽거림을 보다 못 한 헨리가 입을 열었다.
“……내가 잠시 흥분한 모양이군. 내 진심으로 사과할 테니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주게.”
입을 연 헨리가 한 선택은 사과였다.
헨리는 결국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천신과의 만남을 코앞에 두고 이까짓 이죽거림 한 번을 참지 못해 화를 쏟아낸다면, 여태껏 쌓아 온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질 테니까.
그러나 헨리의 사과는 앙겔루스에게 잡기 좋은 꼬투리였다.
“사과? 에이, 말뿐인 사과를 어떻게 믿어? 것도 천신님을 영접하려는 놈이. 당연히 난 못 믿지.”
“그럼, 내가 무얼 해야 그대의 화가 풀리겠는가?”
“내 화? 내 화라……. 좋아. 그럼 이렇게 하자. 네 손으로 네 귀를 직접 뜯어낸다면 내가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줄게.”
앙겔루스는 다시 빙글거리는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와 함께 내뱉은 말은 참혹했다.
헨리는 낮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주저하지 않았다.
찌어억!
섬뜩한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헨리는 앙겔루스가 요구 조건을 내걸자마자 단숨에 자신의 귀를 뜯어냈다.
피는 흐르지 않았다.
전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덧붙여 헨리가 단숨에 귀를 뜯어 버린 이유는 간단했다.
귀를 뜯는 것에 주저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앙겔루스의 즐거움이 될 테니까.
헨리는 앙겔루스에게 조금의 즐거움도 제공하고 싶지 않았다.
귀를 뜯어낸 헨리는 뜯어낸 귀를 아공간 속에 던져 넣었다.
그런 다음 독기 어린 눈빛으로 앙겔루스를 쳐다보며 말했다.
“이제 화가 풀렸는가?”
순간 앙겔루스의 얼굴이 굳었다.
원했던 그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굳은 얼굴은 다시 유하게 풀어졌다.
앙겔루스가 말했다.
“응, 아주 훌륭해. 그럼 이제 다시 협상을 시작해 볼까?”
“……고맙군. 그럼 내가 어떻게 하면 천신님을 만날 수 있는지 방법을 알려 주겠나?”
이번에 헨리는 단어 선택에 최대한 신경을 썼다.
천사의 모습을 가장한 악마가 미쳐 날뛰지 못하도록 말이다.
그러자 앙겔루스가 말했다.
“좋아. 귀를 단숨에 뜯어낼 정도로 진한 너의 진심은 좀 전에 잘 확인했어. 그래서 말인데, 나도 너의 의지를 확인하고 싶어서 말이야.”
그놈의 의지.
진절머리가 났다.
그러나 헨리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대꾸했다.
“그래서?”
“난 너의 목을 원해.”
“……뭐?”
“네가 들은 게 맞아. 팔과 다리는 이미 한 짝씩 버렸잖아. 난 남이 탐내던 것에는 흥미가 없거든. 그래서 말인데 난 네가 내게 너의 목을 줬으면 좋겠어.”
요구를 마친 앙겔루스가 악마처럼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