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0
천계 (5)
포슬라.
그는 6계급의 능천사들을 이끄는 능천사들의 수장으로 모든 천족들 중 가장 호전적인 성격을 가졌다.
덧붙여 능천사의 역할은 혹시라도 천계가 위험에 빠졌을 때 가장 먼저 투입되는 인간들의 군인과도 같은 존재들이었다.
그러니 능천사장인 포슬라는 어찌 보면 천계 군의 최고 사령관쯤 되는 자였다.
헨리는 포슬라와 눈을 마주쳤다.
다른 천족들에 비해 압도적인 덩치와 근육, 그리고 다른 능천사들과 구분되는 갑옷을 입은 그는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오금을 저리게 할 정도의 힘을 가졌다.
하지만 헨리에겐 통하지 않는 위압감이었다.
‘시시바바에게 들었을 테니 저 녀석도 사정은 대충 알겠지.’
모를 리가 없었다.
천계에 시시바바가 없어지지 않는 이상 이곳에 비밀이란 있을 수가 없으니까.
헨리가 말없이 포슬라와 시선을 맞추자 이내 포슬라가 운좌(雲座)에서 일어나 두 쌍의 날개를 펼쳐 헨리가 있는 곳으로 내려왔다.
헨리와는 압도적인 신장 차였다.
그 압도적인 신장 차로 인해, 본의 아니게 포슬라가 헨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마법의 신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분명히 공손한 말투였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결코 공손하지 않았다.
포슬라는 딱 최소한의 격식만을 차렸다.
그것은 불완전한 신인 헨리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였다.
헨리는 비르투스에게 느꼈던 것만큼의 불쾌함을 느꼈지만 이번에도 굳이 내색하진 않았다.
대신 무미건조함에서 약간의 온도를 더한 미소로 포슬라에게 말했다.
“그대가 포슬라인가?”
“그렇습니다.”
“만나서 반갑군. 난 비르투스에게 소개를 받아 그대를 만나러 왔네.”
건방지긴 했지만 헨리도 격식을 갖추어 주었다.
이에 포슬라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헨리가 격식을 차린 것을 보고 기선 제압에 성공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헨리는 이번에도 그러한 입꼬리를 못 본 체했다.
포슬라가 말했다.
“소식은 이미 들었습니다. 천신님을 만나뵙고 싶어 하신다지요?”
“천신님께 긴히 부탁드릴 일이 있거든.”
“그렇습니까? 하지만 저는 그 부탁이 무엇인지는 여쭙지 않겠습니다. 분명히 사적인 사정일 테지요. 하지만.”
포슬라가 뒷말을 붙이며 두 눈에 힘을 주었다.
“어떤 사정을 가지셨든 간에 천신님은 저조차도 함부로 만나뵐 수 없는 분. 그렇기 때문에 저는 허락해 드리기가 좀 그렇습니다.”
“좀 그렇다니?”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헨리 님의 저의도 모르는 상태에서 선뜻 제 선에서 허락을 한다면 윗분들께서 심히 노여워하실 것 같거든요.”
말도 안 되는 핑계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저 말도 안 되는 핑계마저 장단에 응해 주어야만 했다.
헨리는 여전히 두 눈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짧게 한숨을 내쉰 후 포슬라에게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그대의 허락을 받을 수 있지?”
“간단합니다.”
헨리의 물음에 포슬라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리고 연달아서 허리춤에 찬 거대한 검을 뽑아 들었다.
검을 뽑아 든 포슬라를 보며 헨리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포슬라의 검끝은 헨리가 아닌 자신을 향했다.
포슬라가 자신의 검 날을 잡아 손잡이가 헨리를 향하도록 한 뒤 검을 내밀었다.
그리고 못 다한 이야기를 마저 이었다.
“제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도록, 그리고 윗분들께 보고를 드리고 차후에 문제가 생겨도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도록 헨리 님의 간절한 의지를 증명해 주십시오.”
포슬라는 헨리에게 의지의 증명을 요구했다.
하지만 포슬라는 아직 헨리에게 검을 내민 것에 대한 이유를 밝히지 않았다.
헨리는 의지의 증명이라는 말을 곱씹으며 검을 받아 들었다.
거대한 검이었다.
크기로만 따지면 양손을 써도 그 무게가 상당한 그레이트소드였다.
물론 포슬라에겐 단순한 롱소드 정도로 여겨지는 검이었다.
헨리는 그러한 검을 한 손으로 받아 든 후 포슬라처럼 롱소드를 쥐듯 검을 쥐었다.
헨리가 검을 쥐자 포슬라가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저에게 헨리 님의 의지만 증명해 주신다면 저는 천신님을 만나는 것에 무조건적으로 찬성하는 바입니다.”
제안을 하는 포슬라의 목소리는 호쾌하기까지 했다.
헨리가 받아 든 검을 역수로 쥐어 바닥에 늘어뜨렸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어 포슬라에게 물었다.
“좋아. 그 의지의 증명이란 것, 기꺼이 해 주도록 하지. 하지만 궁금하군. 이런 흉물스러운 검까지 내게 내밀면서 대체 어떤 증명을 바라는 것이지?”
천신과의 면담을 그냥 허가해 줄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흉물스러운 검까지 내밀면서 무거운 분위기를 조성하다니, 그 저의가 참 궁금했다.
헨리의 직설적인 물음에 포슬라가 더더욱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헨리 님의 왼팔을 저에게 주십시오.”
“……뭐?”
“들으신 그대로입니다! 헨리 님의 왼팔을 저에게 주십시오! 헨리 님에게 어떤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천계까지 찾아와서 천신님을 만나야 할 만큼 긴박한 사정이라면 그만한 증명을…….”
“알겠다.”
포슬라는 흥분한 나머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았다.
헨리는 장황하게 늘어놓는 포슬라의 말이 듣기 싫었다.
그래서 그러겠다고 답했다.
그리고 그제야 포슬라가 칼을 건넨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헨리는 역수로 쥔 그레이트소드를 다시 바로 잡았다.
그것은 포슬라가 천신에게 하사받은 성물로, 보통의 천사들은 온 힘을 쥐어짜 내도 들기는커녕 옮기는 것조차 불가능한 성검이었다.
그러나 헨리는 그것을 깃털 다루듯이 쉬이 다루었다.
깃털처럼 가볍게 검을 다룬 헨리는 바로 쥔 검을 가지고 왼쪽 겨드랑이에 끼워 넣었다.
그리고.
서걱!
칼끝에 마력을 실어 단숨에 왼팔을 잘라 냈다.
핏물은 튀지 않았다.
스스로 팔을 자르는 것이니 핏물이 튀지 않도록 왼쪽 팔뚝에 마력을 응집시켜 두었기 때문이다.
툭!
그레이트소드에 떨어져 나간 팔이 매가리 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헨리는 마력으로 잘린 왼팔을 지혈했다.
그런 다음 오른손에 쥐고 있던 그레이트소드를 포슬라 앞에 던진 다음 떨어진 왼팔을 집어 들었다.
떨어져 나간 왼팔에도 피는 흐르지 않았다.
이놈들의 장단에 맞춰 주기 위해 자른 팔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놈들을 위해 단 한 방울의 피도 흘려 주기는 싫었기 때문이다.
집어 든 왼팔을 지휘봉 삼아 헨리가 포슬라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만하면 충분한가?”
팔뚝이 잘리고 상처가 지혈되는 동안 헨리는 그 흔한 신음 한 번 내지 않았다.
대신 처음에 포슬라와 눈을 마주쳤을 때처럼 끝까지 단호한 눈빛으로 포슬라의 시선에 응대했다.
그것을 본 포슬라의 눈빛이 옅게나마 흔들렸다.
하지만.
씨익.
포슬라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출 수 없었다.
포슬라는 올라간 입꼬리를 감추지 않은 채 흡족한 표정으로 헨리에게 말했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아주 의지가 확고하신 분이셨군요.”
“그럼 그대는 허락한 걸로 알겠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저 포슬라는 한 입으로 두 말 하지 않습니다.”
“믿도록 하지. 그럼 혹시 다음 천사장이 있는 곳으로 안내를 부탁해도 될까?”
“물론입니다.”
헨리의 요청에 포슬라는 기꺼이 응했다.
그러고는 비르투스가 그랬던 것처럼 똑같이 자신의 날개에서 깃털 하나를 뽑아 헨리에게 주었다.
비르투스와 똑같은 외형의 깃털이었다.
깃털이 날아와 헨리 앞에 멈춰 섰다.
그것을 본 포슬라가 말했다.
“아, 깃털을 집으시기엔 손이 하나 모자라시겠군요.”
포슬라가 노골적으로 헨리를 조롱했다.
하지만 헨리는 흥분하지 않았다
대신 두 눈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츠즈즈즛!
헨리의 왼팔에 암녹색으로 빛나는 마력이 결집되며 새로운 왼팔이 생겨났다.
마력으로 만들어진 제 3의 손이었다.
마력으로 만든 왼팔을 올리며 헨리가 말했다.
“아니, 그렇지 않다.”
“……!”
헨리는 마력으로 빚어낸 왼팔로 깃털을 집어 들었다.
그 모습을 본 포슬라가 잠시 동공을 확장시켰다가 다시 좁혔다.
그리고 아까처럼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깍듯이 인사했다.
“그럼 건투를 빌겠습니다, 마법의 신이시여.”
“기도, 고맙게 받아들이지.”
헨리는 즉시 깃털에 신력을 주입해 장소를 이동했다.
* * *
풍경이 금세 바뀌었다.
풍경이 바뀌면서 아까 전에 느끼지 못했던 통증이 뒤늦게나마 밀려 왔다.
하지만 밀려오는 통증보다 끓어오르는 화를 참는 게 더 고통스러웠다.
헨리가 이를 부득 갈았다.
‘망할 놈들!’
척 보기에도 그냥 허락해 줄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포슬라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앞뒤가 꽉 막힌 게 아니었다.
놈들은 무슨 이유에선지 헨리에게 텃세를 부리고 있었다.
하지만 참았다.
다섯 번이나 반복된 과거에선 자신이 어떤 선택으로 실패라는 결과를 낳게 했는지 몰랐으니까.
그래도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적어도 여섯 번째인 지금만큼은 순조롭게 일을 풀어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헨리가 팔을 잘라 준 이유는 별다른 게 아니었다.
어차피 천신을 만나 시간의 힘을 얻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시간을 되감아 잘린 팔을 재생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뭐…… 운이 나쁘면 못 얻을 수도 있겠지만 말이야.’
물론 천신이 어떤 자인지 모르니, 시간의 힘을 얻는 것에 실패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헨리는 실패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오직 성공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또 확신하며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어 어떻게든 시간의 힘을 손에 넣겠다고 다짐했다.
마음을 다 잡으니 통증이 주는 듯했다.
헨리는 잘린 왼팔을 잠시간 무미건조하게 내려다보다가 그것을 아공간 속으로 집어넣었다.
기분이 묘했다.
‘다음 녀석은 멀쩡한 녀석이어야 할 텐데.’
사실 크게 기대는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기대를 걸어 보기로 했다.
풍경이 바뀐 직후, 헨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엔 아무것도 없었다.
대신 좀 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푸른빛으로 가득했던 하늘이 연녹색으로 빛나고 있다는 것이었다.
‘다른 하늘?’
헨리가 다음에 만나 볼 천사장은 7계급에 속하는 권천사였다.
권천사들의 역할은 천사를 믿는 자들에게 강림해 그자의 나라를 보호해 주는, 일종의 수호령 같은 존재들이었다.
헨리가 주위를 둘러보던 차였다.
“여기야.”
경어가 아닌 반말.
헨리는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틀었다.
그러자 그곳에는 머릿결이 은색으로 찰랑이는 반라의 여인이 구름 위에 누워 있었다.
여인을 본 헨리가 중얼거렸다.
“아르헤스…….”
“어머, 내 이름을 알아?”
아르헤스.
그녀가 바로 권천사들의 우두머리인 권천사장이었다.
주위에 수하들은 없었다.
이곳에는 오직 헨리와 아르헤스 둘뿐이었다.
헨리가 아르헤스의 이름을 부르자 아르헤스가 짐짓 놀란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그러나 헨리는 반문에 대해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사정을 설명했다.
“……천신님을 만나뵙기 위해 그대를 찾아 왔다. 아르헤스, 내가 천신님을 만날 수 있게 도와줄 수 있겠는가?”
아르헤스는 반말을 했지만 헨리는 격식을 차렸다.
신분만 놓고 봐도 헨리가 압도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었지만, 이 모든 불편을 감수하는 건 오직 천신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아르헤스가 헨리가 있는 곳까지 내려와 자세를 바꿔 허공에 걸터앉았다.
그녀의 시선이 헨리의 잘린 왼팔에 머물렀다.
헨리의 잘린 왼팔과 임시로 달아 놓은 마력 왼팔을 보고 아르헤스가 미소를 지었다.
분명히 아름다운 미소였지만 헨리는 어째서인지 그 미소가 섬뜩하게 느껴졌다.
아르헤스가 말했다.
“좋아, 그럼 난 오른다리.”
“……뭐?”
“못 들었어? 포슬라에겐 보였을 거 아냐, 너의 의지를. 그러니 난 오른 다리를 잘라서 증명해 보이라고.”
아르헤스는 진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