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9
천계 (4)
막혀 있던 무언가가 완전히 뻥 뚫린 기분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숨구멍 정도는 트인 기분이었다.
헨리는 우선 시원하게 호흡했다.
시원한 호흡은 답답했던 가슴을 가라앉혀 주었고 뜨거웠던 머리 또한 차분하게 식혀 주었다.
머리가 식고 나자 잠시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차분하게 생각 정리를 하고 싶어서였다.
그래서 잠시 인간계로 장소를 옮겼다.
-그어어어…….
인간계의 어느 산맥.
분명히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와 본 곳이었는데 이곳마저 맹신자들이 활보하고 있었다.
퀭한 눈매와 초점 없는 눈동자로 근처를 서성이고 있는 맹신자들.
맹신자들이 나타난 지 이제 1년이 좀 되지 않았다.
그 사이에 맹신자들의 수는 급격하게 줄어 가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기근.
인간이나 동물, 심지어는 마물까지…… 허기를 채울 수 있는 것이라면 닥치는 대로 잡아먹던 맹신자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먹이의 부족으로 서로를 잡아먹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들을 사냥할 때처럼 무자비하게 서로를 잡아먹진 않았다.
맹신자들은 최소한의 허기만을 위한 식사를 했다.
마치 어떻게든 목숨을 연명시키기 위해서처럼 말이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드라칸이 맹신자들을 만들 때 어떤 원리와 법칙들을 집어넣어 놓았는지 알 길이 없었으니까.
헨리는 그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젠 정말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대로 계속해서 시간을 낭비한다면 맹신자들을 원래대로 되돌려서 대륙을 되찾는 게 아니라, 맹신자들이 아사해서 자연스럽게 대륙을 되찾을 마당이었다.
물론 관점만 달리 하면 후자도 꽤나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다.
하지만 헨리의 귀에는 지금도 들렸다.
아서스의 욕심으로 인해 하루아침에 사랑하는 이들을 잃을 수밖에 없었던, 한때는 피난민이었던 모리스 왕국민들의 애타는 기도 소리를 말이다.
‘신도가 많다고 마냥 좋은 것도 아니네.’
아서스를 쓰러뜨릴 때만 하더라도 신도 수가 많은 게 최고였다.
신도의 양은 곧 신력의 양과 비례하니까.
하지만 아서스를 쓰러뜨리고 평화의 시대가 도래한 지금, 헨리는 신이라기보다는 시민들의 민원을 처리하는 공무원에 가까운 존재가 되었다.
물론 귀를 막고 모른 체해도 될 일이긴 했다.
헨리는 이미 복수를 이루었고 전보다 더 진보된 힘을 얻었으니까.
하지만 헨리는 아서스 같은 놈이 아니었다.
헨리는 과거에 제국을 세웠을 때부터 골든과 마찬가지로 백성들을 지극히 사랑했다.
그렇기 때문에 마탑에 생활 마법의 발전을 지시했던 것이고.
“쯧.”
겨우 식은 머리였는데 맹신자들을 보고 있자니 다시금 두통이 이는 듯했다.
헨리는 답답한 마음에 혀를 차며 걸터앉아 있던 바위 위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햇살이 따사롭다.
그러나 이제는 내리쬐는 햇살도 곱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천신…….’
헨리의 입안에 천신이라는 단어가 맴돌았다.
일단은 가니스엘과 의기투합해 계획을 변경시키긴 했다.
하지만 변경시킨 계획 속에 담긴 가니스엘의 전략은, 사실 따지고 보면 승리가 확실하게 약속된 방법은 아니었다.
단지 변수를 일으킬 확률이 높은 차선책 정도.
헨리는 5계급 역천사장 비르투스가 했던 말을 곱씹어 보았다.
‘다른 선택이라……?’
다른 선택.
천신은 헨리에게 무슨 선택을 원하기에 한 번 더 기회를 주어 여섯 번이나 도전하게 한 것일까?
‘설마 내가 다섯 번 전부 다 힘으로 해결하려 했던 걸까?’
신력이라는 막강한 힘을 손에 넣고 난 직후, 그런 식으로 처리해 온 적이 많았으니 천계라고 해서 별반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비르투스의 말에 의하면 헨리는 첫 번째 도전 이후, 스스로 정체를 발설해 가면서까지 다른 행동을 하려 했음을 유추해 볼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천신은 대체 헨리에게 어떤 기대를 품고 있는 것일까?
아무리 골머리를 싸매도 천신의 속을 도통 유추할 수가 없었다.
‘대화나 한번 제대로 나눠 봤으면 좋겠는데.’
헨리의 바람은 별다를 게 없었다.
거절당해도 좋으니 우선은 천신을 만나 제대로 된 이야기를 나눠 보는 게 가장 큰 소망이었다.
애초에 헨리는 시간의 힘을 약탈하려 하는 게 아니라 부탁하려 한 것이니까.
‘…….’
한참의 생각 끝에 헨리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니스엘은 말 그대로 최후의 보루다.
먹히지 않으면 군대를 동원해서라도 천신 앞에 서야 했으니까.
하지만 벌써부터 군대를 동원하기엔 섣부르다고 생각했다.
‘그래, 한 번만 더 시도해 보자.’
가니스엘에게 천계에 대해 들을 것들은 대부분이나마 얼추 들었다.
물론 그 사실들을 들었다고 해서 딱히 달라질 건 없었다.
그래도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부딪히는 것보단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
헨리는 가슴 깊게 쌓인 묵은 숨을 토해 냈다.
그런 다음 차분하게 머릿속을 정리한 다음 차원 문을 열었다.
좌표는 당연히 천계.
열린 차원 문 속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주변 풍경이 한순간에 바뀌었다.
-시시바바, 시시바바…….
헨리가 등장하자 곳곳에 숨어 있던 시시바바들이 헨리를 주시했다.
그리고 헨리의 등장을 천계 전역에 알렸다.
헨리 또한 가니스엘에게 시시바바에 대해 들었다.
그래서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고 가만히 자리에서 기다렸다.
시시바바들이 헨리의 방문 소식을 전했으니 곧 헨리를 맞이할 사신이 등장할 거라 생각하며 말이다.
예상은 들어맞았다.
그러나 반만 들어맞았다.
헨리를 맞이하러 누군가 등장하기는 했으나 그들은 다름 아닌 일전에 헨리를 공격했던 뱀과 불꽃 수레바퀴들이었다.
그들의 이름은 요르간과 헤르헤르.
계급으로 따지면 가장 말단에 속하는 1,2 계급의 상품천사들이었다.
“또 너네냐?”
헨리는 천천히 수를 불려 나가는 요르간과 헤르헤르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비르투스를 만나기 위해선 저들을 또 베어야 하는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헨리는 솔직히 말해서 저들을 베고 싶지 않았다.
지금 헨리는 순수하게 대화를 나누러 온 상태.
그렇기 때문에 저들과 괜한 불화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요르간과 헤르헤르에게 헨리의 사정은 알 바가 아니었다.
-시아아아아!
거대한 몸집을 자랑하는 요르간들이 거대한 아가리를 들이밀며 헨리에게 돌진해 왔다.
헨리는 신력을 두른 매직 실드를 전개했다.
두른 매직 실드는 순수하게 방어만을 위해 두른 것이었으므로 공격을 되받아치는 반격의 주문 따윈 조금도 걸려 있지 않았다.
헨리가 만든 조그마한 황금빛 구에 수십 수백 마리의 요르간과 헤르헤르들이 달려들었다.
무자비한 총공세였다.
하지만 헨리는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고 참을성 있게 다른 사신을 기다렸다.
한 시간이 경과했다.
이정도면 시시바바들에 의해 헨리의 소식이 천계 전역에 퍼지다 못해 생중계가 되고 있으리라.
헨리가 지루한 시선으로 눈앞에 아가리를 들이밀고 있는 요르간을 바라보았다.
날카로운 독니를 비롯해 온갖 사술들이 매직 실드를 때렸지만, 그래 봤자 하급 천족의 패악질에 지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다시 한 시간이 지난 뒤, 헨리는 마침내 반가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대단하군요.”
비르투스였다.
처음엔 비르투스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실드 외벽에 요르간과 헤르헤르들이 워낙에 겹겹이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르투스가 등장하자 거짓말처럼 요르간과 헤르헤르들이 실드에서 물러나며 길을 터 주었다.
터 준 길의 끝에 비르투스가 자신의 리라를 들고 헨리를 향해 미소짓고 있었다.
비르투스가 말했다.
“어서오십시오, 헨리 님. 이렇게 빨리 다시 찾아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빨리도 나타나는군.”
“하하, 뒤늦게 소식을 접해서 그렇습니다. 그건 그렇고……. 제가 늦게 도착한 새에 상품천사들이 무례를 저질렀군요.”
“무례?”
비르투스는 분명히 시시바바를 통해 헨리가 방문했음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상품천사들이 헨리를 공격하고 있다는 사실도.
그러나 뻔뻔스럽게도 비르투스는 모른 척 시치미를 뗐다.
그래서인지 비르투스의 웃는 낯짝이 역겹게 느껴졌다.
‘모른 척을 하시겠다?’
그 의도가 괘씸하다.
하지만 흥분할 생각은 없다.
지금 헨리는 부탁하러 온 입장.
그러니 최대한 저자세를 유지하며 저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로 했으니까.
그 뻔뻔한 대답에, 헨리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 무례를 용서해 주었다.
“그건 괜찮으니 얼른 본론을 이야기하고 싶은데.”
“본론이라…… 알겠습니다. 그럼 이번엔 다른 선택을 기대해 봐도 좋을까요?”
“그 전에 묻고 싶은 게 있다.”
“편하게 물어보시지요.”
“……대체 다른 선택이란 게 뭐지? 난 과거에 내가 무슨 선택을 했는지 전혀 모르잖아.”
“하하, 그건 저도 알려 드리고 싶지만 천신님께서 발설을 금하신지라……. 그냥 생각해 오신 대로 자유롭게 행동하시면 됩니다.”
“생각해 온 것…… 좋다, 비르투스. 난 천계를 다스리는 천신님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다. 그러니 지금 날 천신님께 데려다 줬음 한다.”
“천신님과의 면담이라…… 그건 좀 힘들겠는데요?”
“뭐?”
“그건 제 선에서 어찌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서요. 아실진 모르겠지만 저희 천족들에겐 아홉 가지 계급이 있는데 그중에서…….”
“너희들에게 9가지 계급이 있다는 건 잘 안다. 그리고 넌 중간급에 해당하는 5계급이란 것도 전에 들어서 잘 알고 있고. 그럼 네 소관이 아니라면 난 누구에게 이런 부탁을 해야 하지?”
“흠흠, 아신다니 더 설명드릴 필요가 없겠군요. 그럼 우선은 제 상관이신 6계급의 능천사장님을 만나 보시겠어요? 저야 뭐 선택지가 없지만, 천신님을 만나 뵈려면 6천사장님부터 8천사장님들의 허가가 필요하거든요.”
“6계급의 천사장이라면…… 포슬라를 말하는 건가?”
“잘 알고 계시는군요. 그 정보의 출처가 어디인지 궁금하긴 하지만…… 저는 더 이상 호기심을 갖지 않고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잠깐!”
헨리는 물러나려는 비르투스를 급히 잡아 세웠다.
비르투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왜 그러시죠?”
“포슬라가 어디 있는지는 알려 주고 가야 될 것 아니냐?”
“아아, 그렇군요! 하마터면 깜빡할 뻔했어요!”
‘저놈이……!’
헨리는 비르투스의 능글거리는 낯짝에 시원하게 주먹 한 방을 갈겨 넣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호호 웃던 비르투스는 곧 자신의 날개에서 깃털 하나를 뽑아 헨리에게 날려 보내 주었다.
헨리의 손 위로 안착하는 비르투스의 날개깃.
헨리의 손바닥 위에 안착한 날개깃을 본 비르투스가 말했다.
“제 날개깃에 신력을 주입하시면 포슬라 님이 계시는 곳으로 길을 안내해 줄 겁니다. 그럼 안녕히…….”
설명을 끝으로 비르투스는 자릴 떠났다.
그리고 비르투스가 떠남과 동시에 요르간과 헤르헤르들도 모두 흥이 식은 것 마냥 자취를 감추었다.
혼자 남게 된 헨리.
그러나 이 정도면 제법 장족의 발전이라고 생각했다.
‘잘하고 있는 거겠지.’
여전히 새로운 선택이라는 것에 대해 감을 잡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야 천신을 만날 수 있는 자그마한 길이 보였다.
헨리는 비르투스에게서 받은 깃털에 신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휘이이잉!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천계에 강렬한 바람이 불었다.
불어닥친 돌풍에 헨리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든 순간.
“음?”
헨리의 눈앞에 수천에 이르는 천사들이 각자 무기를 손에 들고서 날개를 퍼덕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구름으로 빚은 의자에 두 쌍의 날개를 가진 천사 한 명이 거만한 표정으로 헨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6계급 능천사장, 포슬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