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서클 마법사의 환생-358화 (358/522)

# 358

천계 (3)

‘다른 선택이라고?’

헨리는 분명히 연달아 놀랐지만 애써 놀란 티를 내지 않으려고 입술을 씹었다.

그런 다음 천족 남자가 한 말을 곱씹었다.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저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천족 남자가 고개를 숙이고 예를 갖추며 인사했다.

“인사드립니다, 제 이름은 비르투스, 천계의 5계급에 해당하는 역천사장입니다.”

5계급, 그리고 역천사장.

전부 처음 듣는 단어였다.

천사라는 단어가 들어간 합성어는 가니스엘의 전 직책이었던 대천사장이 전부였으니까.

헨리가 조용히 눈알을 굴리자 역천사 비르투스가 말했다.

“모르시는 게 당연할 거라고 생각됩니다. 천계에 발을 들인 존재 중에 인간, 혹은 신이라곤 천계 역사상 헨리 님께서 처음이시니까요.”

비르투스는 헨리가 얼마나 특별한 방문자인지에 대해서 제법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설명했다.

그러나 그러한 미소가 오히려 헨리를 굴욕적으로 만들었다.

“……그런 건 궁금하지 않다. 그보다 좀 전에 다른 선택을 해 달라고 했던 말, 그게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로입니다. 횟수로는 이번이 여섯 번째가 되겠군요. 헨리 님께선 이미 다섯 번이나 같은 선택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천신님께선 여섯 번째 기회를 헨리 님께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다섯 번…… 이라고?”

“그렇습니다.”

이게 무슨 소린지 헨리는 한참이나 저 말을 곱씹은 뒤에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비르투스의 말은, 이제 겨우 천계에 발을 붙인 헨리가 벌써 다섯 번이나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저놈은 이제 여섯 번째로 날 막아서고 있는 거고?’

이해가 되지 않았다.

헨리의 기억 속에 그런 기억이 없는데 대체 무슨 수로 다섯 번을 반복하고 여섯 번째 도전을 한단 말인가?

그 순간, 헨리의 머릿속에 몇 가지 정보가 조립되었다.

그리고 새카맣게 잊고 있던 사실 한 가지를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번쩍 떠올렸다.

“제기랄……!”

잊고 있었던 사실을 떠올린 헨리는 그 즉시 차원 문을 개방시켰다.

그리고 작별인사도 없이 허겁지겁 차원 문으로 몸을 던져 넣었다.

차원 문이 닫혔다.

이 중에서 차원의 힘을 다룰 줄 아는 이가 없었으므로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던 그 어떤 천사도 헨리를 추적하지 못했다.

아니, 처음부터 추적할 생각이 없었다.

사라진 헨리를 보며 비르투스가 비릿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드디어 깨달으셨군요.”

띠리링-!

리라의 아름다운 현 소리가 하늘 멀리 잔잔하게 울려 퍼졌다.

* * *

허겁지겁 차원 문을 열고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마계였다.

헨리는 마계에 몸을 던져 넣자마자 크게 호흡했다.

독한 마계의 공기가 폐부를 찔렀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드는 듯했다.

얼마 뒤, 겨우 가슴을 진정시킨 헨리는 도착한 마계의 여느 바윗덩이를 의자삼아 그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천신, 이 새끼가 감히……!”

갑작스레 천신을 욕하는 이유.

이유는 간단했다.

좀 전에 비르투스 앞에서 깨달은 사실 때문이었다.

다섯 번의 반복과 여섯 번째 도전.

그리고 이번에는 다른 선택을 해 달라는 비르투스의 말.

헨리의 기억 속에는 전혀 없던 일을 비르투스는 익숙하다는 듯이 지껄였다.

그 말은 곧 헨리만 모르는 모종의 사건이 숱하게 반복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헨리는 그 모종의 일을 벌이게 한 힘으로 천신이 가진 ‘시간의 힘’을 떠올렸다.

‘분명해. 놈은 시간을 되감았다.’

시간의 힘은 오직 천신만이 다룰 수 있는 고유한 힘이니, 시간을 되감은 건 역천사장 비르투스가 아닌 천신의 짓이 분명했다.

그리고 비르투스가 했던 말을 되씹어 보건데 비르투스 또한 좀 전에 그러한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비르투스 또한 헨리와 함께 시간이 되감겨졌단 이야기일 테고, 헨리에게 아는 체를 해 보였던 건 단순히 천신의 명을 받은 게 전부라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헨리는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분노와 허무, 그리고 수치스러움이 동시에 밀려왔다.

헨리가 여섯 번째 도전을 하기 전까지, 천신은 헨리의 멍청한 되풀이를 보며 얼마나 비웃었을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래도 명색이 같은 신인데, 그 모습이 얼마나 한심해 보였을까?

헨리는 주먹을 꽉 쥐고 입술을 물어뜯었다.

헨리는 전혀 기억하지 못했지만 다섯 번이나 반복했다는 헨리의 같은 행동들이 어떤 행동이었을지 뻔히 예측되었기 때문이다.

‘확실해. 내 성격상 분명히 먼저 힘으로 굴복시키려 했을 거야.’

비르투스의 태도를 미루어 보건데 처음에는 분명히 그 건방진 태도를 고쳐주고자 했을 것이다.

예컨대 검을 휘두르거나 마법을 퍼부으며 날개 달린 녀석들은 모두 잿더미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하면 가니스엘에게 말했던 것처럼 곧장 윗대가리가 튀어나올 테니까.

하지만 천신은 그러한 헨리의 방식을 몇 번이나 보았을 것이고, 그때마다 시간을 되돌려 헨리가 다른 태도를 취할 때까지 기다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게 여섯 번째겠지.’

어쩌면 천신이 비르투스에게 명령을 전달하지 않았다면, 헨리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고 천신이 만든 시간의 쳇바퀴 속에 갇혀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천신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천신은 비르투스를 시켜 여섯 번째에 헨리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게 적당한 메시지를 전달케 했다.

완전히 천신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난 것이다.

헨리는 꽉 쥔 손에 힘을 풀고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마른세수를 했다.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몰랐는데…….’

솔직히 몰랐다.

시간의 힘을 가지고 있는 건 알았지만, 그 힘이 헨리의 목적에 방해가 될 줄은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헨리는 이 일을 너무 쉽게 생각했다는 걸, 아니 천신을 너무 만만하게 봤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문득 천족은 위선적이라는 가니스엘의 말이 떠올랐다.

그때만 해도 적당히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자고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왠지 모르게 납득이 갔다.

그리고 아직 천신을 만나보진 못했지만 이런 식으로 자신을 물 먹이는 걸 보니 분명히 좋은 녀석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이 길어졌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천신이 가지고 있는 시간의 힘은 거의 무적에 가까운 힘처럼 느껴졌다.

헨리에게 그랬던 것처럼 시간의 힘을 그렇게 사용하는 놈이라면 사실상 그 힘에 대한 파훼법은 없는 셈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천신 입장에서는 제아무리 강한 힘을 가진 놈이 나타나도 만약 놈과의 결투에서 패배할 것 같으면 시간을 되감으면 그만일 테니까.

그리고 자신이 패배한 요인을 찾아 분석한 다음, 다시 도전자와 맞서면 그만이었으니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수록 헨리는 눈앞에 거대한 벽과 마주선 것만 같았다.

‘시간의 힘에는 제약 같은 것도 없나?’

생각의 줄기는 급기야 ‘시간의 힘’이라는 힘 자체가 가지는 근본적인 영역에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마법에서도 시간과 관련된 자연 법칙을 찾지 못했는데 신의 영역에 속하는 시간의 힘을 지금 당장 무슨 수로 떠올릴 수 있겠는가?

답이 없는 막막함에 헨리는 짜증이 난 나머지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제기랄…….”

억울했다.

어떻게 붙잡은 맹신자 문제 해결에 대한 실마리인데 이런 식으로 허무하게 희망을 날리고 싶지 않았다.

더불어 막연히 파훼법이 없다고 생각되자 자연스레 시간의 힘이 가지는 제약 같은 것들을 생각하게 됐다.

그러나 헨리는 알고 있었다.

마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차원의 힘에도 제약이 없는데 시간의 힘이라고 다를까, 하는 사실을 말이다.

‘정말 방법이 없는 건가?’

이대로 설탑으로 돌아가 다시 언제 끝날지도 모를 영원의 실험을 지속시키고 싶진 않았다.

덧붙여 코앞에 정답이 있는데 돌아가기도 싫었다.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었다.

헨리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다음 엉덩이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무너진 마음을 다시금 붙잡았다.

‘아냐, 그래도 혹시 모르니 포기하기엔 아직 일러.’

불가능과 포기.

아직 그 두 가지를 단언하기엔 이르다고 생각했다.

설사 정말로 파훼법이 없는 난공불락의 문제라 할지라도 지금 당장 마음만큼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헨리는 신이기 전에 아직 욕심을 버리지 못한 인간이었으니까.

‘우선은 가니스엘부터 만나봐야겠지.’

마음을 다잡은 헨리는 우선 가니스엘부터 다시 만나보기로 했다.

물론 마계를 떠날 때쯤만 하더라도 가니스엘에게 호언장담을 했지만 이제 와서 물불 가릴 처지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헨리는 즉시 좌표를 구해 가니스엘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가니스엘을 다시 만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가니스엘은 헨리가 일러 준 대로 보다 더 적법한 마왕의 자격을 갖추기 위해 그레텔에게 힘의 성장을 수학받고 있었다.

헨리는 즉시 가니스엘과 면담을 시작했다.

“……그렇군.”

헨리의 말을 들은 가니스엘의 표정이 어둡다.

그러나 동시에 헨리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헨리는 클레버에게 목이 잘려 죽었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다시금 부활한 큐피드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가니스엘이 말했다.

“아마 그대가 보았던 건 비르투스가 천신에게 하사받은 성물의 힘일 것이다.”

“성물?”

“그렇다. 오직 소수의 천사장들에게만 허락되는 천신의 성물들. 그것들은 모두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다.”

가니스엘은 큐피드들이 다시 부활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그 이유 속에 담긴 성물에 대한 이야기까지도.

헨리는 가니스엘로부터 천계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천계의 지형지물들을 시작해 헨리가 보지 못했던 것들, 그리고 천사들의 종류와 계급 같은 것들에 대해서 말이다.

설명을 듣던 끝에 헨리는 비르투스가 꽤나 높은 직급을 가진 천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5계급 역천사장이라…….”

“그는 5계급이니 중간직 정도에 해당한다. 그리고 천계에는 총 9계급의 천사들이 존재하는데 9계급은 오직 천신 한 명뿐이다.”

“그리고 네가 8계급의 대천사장이었고?”

“그렇다.”

천족에겐 총 9단계의 계급이 존재한다.

계급은 앞의 숫자가 클수록 더 높게 쳐주며 각 계급마다 천족을 부르는 호칭이 달랐다.

8계급이었던 가니스엘의 호칭은 대천사였으며, 동시에 그들을 호령하던 대천사장이었다.

헨리는 새삼 가니스엘이 천계에서 가지던 위세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가니스엘의 설명을 듣던 헨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해 보면 이런 천계의 문화나 듣고 있자고 여태껏 이 소동을 피운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헨리가 한숨을 내쉬며 근심하자 가니스엘이 그 모습을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가니스엘이 말했다.

“헨리, 그래서 내가 군대를 꾸리려 했던 것이다.”

“군대?”

“그렇다. 그대도 겪어봐서 알겠지만 단신으로는 절대로 천신을 이길 수 없다. 천신이 시간의 힘을 가지고 있는 이상, 그대가 천신에게 보여 줄 수 있는 경우의 수는 극히 적기 때문이다.”

“경우의 수가 적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다. 개인이 천신에게 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시간 되감기를 통해 모든 경우의 수를 파악당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군대가 있다면 다르다. 군대는 다수 중에서도 압도적인 다수다. 그렇기 때문에 압도적인 다수가 가지는 변수라면, 제아무리 천신이라도 그 많은 변수를 모두 감당하긴 힘들 것이다.”

이것이 가니스엘에게 군대가 필요한 이유였다.

“다수의 변수라…….”

가니스엘의 의견을 듣던 헨리는 다시 한번 자신이 성급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 보면 그 누구보다도 천신을 상대하기 위해 오랫동안 전략을 짰을 인물이 바로 가니스엘이었다.

그런데 헨리는 자신이 차원의 힘까지 섭렵한 신이라는 사실 하나만을 믿고 천신에게 도전하려 했다.

헨리는 그것이 얼마나 오만한 행동이었는지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그 부끄러움을 만회하기 위해 가니스엘에게 말했다.

“가니스엘.”

“왜 그런가?”

“내 생각이 짧았어. 그래서 말인데, 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 힘을 빌려주지 않겠어?”

“하하,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헨리와 가니스엘.

반신과 마왕 후보가 손을 맞잡았다.

천신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두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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