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7
천계 (2)
브릴린테를 집어삼킨 마계 유일의 하급 마물 미믹이 헨리의 부름을 받고 천계에 강림했다.
클레버는 주인의 진한 짜증을 느꼈다.
그래서 헨리의 충실한 권속으로서 그 어느 때보다 든든하고 우람한 모습으로 강림해 발밑의 구렁이들을 짓밟았다.
쿠웅!
거대한 덩치.
그 덩치는 가히 브릴린테나 기가탄에 견줄 만큼 거대한 덩치였다.
아니, 자세히 보면 견준다는 표현은 옳지 않았다.
그 모습은 전 마왕 후보 ‘브릴린테’의 모습과 똑같았으니까.
그것은 클레버가 가진 특기 중에 하나였다.
집어삼킨 것을 완벽하게 재현해 내는 것.
클레버는 그 뛰어난 능력으로 천계에 전 마왕 후보 브릴린테를 재림시킨 것이다.
“이 썩을 놈들이.”
헨리는 클레버의 오른쪽 어깨 위로 위치를 옮겼다.
엘라곤은 헨리를 오른쪽 어깨 위에 내려준 후 자유로이 허공을 유영했다.
헨리가 욕설을 내뱉었다.
그리고 내뱉은 욕설만큼이나 짜증을 담아 클레버에게 명령했다.
“다 죽여 버려.”
-예, 마스터.
듬직한 권속의 대답이 머릿속에 울렸다.
그리고 대답이 울린 직후, 클레버의 큼지막한 발바닥이 정의의 철퇴가 되어 사정없이 구렁이들을 짓이겨 놓았다.
쿵! 쿵! 쿵! 쿵!
클레버가 거대한 발을 놀리자, 그 발 구르기에 천계가 뒤흔들렸다.
헨리의 짜증은 하늘을 찔렀다.
헨리는 들썩이는 클레버의 어깨에 앉은 채 시선을 옮겨 여전히 맹렬하게 불타오르는 화염의 바퀴들을 보았다.
‘저것들은 또 뭐야?’
자세히 보니 단순한 바퀴가 아니었다.
불타는 바퀴의 네 방향에 자그마한 날개가 퍼덕이고 있었다.
퍼덕이는 날개는 바퀴를 더욱 더 빠르게 회전시켜 가속도를 붙여 주었다.
바퀴들이 엘라곤을 뒤쫓았다.
“엘라곤!”
-큐큐!
“죽여 버려.”
하릴없이 도망치는 엘라곤에게 헨리가 단호하게 턱짓해 보였다.
바퀴에 날개가 달려 있든, 날개에 바퀴가 달려 있든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중요한 건 저놈들이 먼저 헨리를 공격했다는 것이었다.
명령을 받은 엘라곤이 그제야 입안 가득 푸른 냉기를 품기 시작했다.
-큐우우우!
엘라곤은 네 가지 속성이 어우러진 보기 드문 최상급 정령이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속성은 단연코 본연의 속성인 물이었다.
그리고 후에 얻은 얼음 속성은 물과 상성이 좋으니 얼음 속성 또한 물 속성과의 시너지를 이루어 그 힘이 더욱 강해졌다.
마침내 엘라곤의 입에 거대한 에너지가 응축되었다.
화염의 수레바퀴를 피해 자유로이 허공을 유영하던 엘라곤은 발사 준비를 마치자마자 곧바로 고개를 틀어 입을 쫙 벌려 보였다.
콰과과과과과-!
폭포수 같은 아이스 브레스가 엘라곤의 입으로부터 뿜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폭음이 들렸다.
수십 개에 달하는 화염의 바퀴가 엘라곤의 아이스 브레스와 맞닿자 극심한 온도 차로 인해 거대한 폭발을 일으킨 탓이었다.
폭발은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허공에선 흙먼지 대신 자욱한 수증기가 일었고, 구렁이가 넘치던 아래쪽에선 사정없이 핏물이 튀겼다.
곧 수증기가 걷혔다.
그 즈음에 지축을 뒤흔들던 클레버의 발길질도 멈추었다.
파사삭!
수레바퀴였던 것들이 새카만 숯덩이가 되어 허공에서 바스러졌다.
바스러진 재는 바람에 흩날려 사라졌다.
아래쪽에선 피비린내가 가득했다.
헨리는 즉시 엘라곤을 역소환시킨 후 클레버의 몸집 또한 작게 줄였다.
‘대체 뭐야?’
무턱대고 선제공격이라니?
이래서야 마계와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왠지 모르게 기가 찼다.
헨리는 천계 특유의 선량하고 고결한 이미지를 생각하고 이곳에 발을 들였다.
그런데 막상 겪어본 천계의 첫 인상은 고결이나 선량은커녕, 마계와 다를 바 없는 행태를 보였다.
헨리는 앞으로도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다면 더 이상 천계에 대한 쓸데없는 환상 따윈 갖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그 순간, 헨리의 머리로 화살이 날아들었다.
그 서슬 퍼런 살기에 헨리는 본능적으로 매직 실드를 전개했다.
티딩!
매직 실드에 부딪힌 화살촉이 매가리 없는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바닥에 떨어진 화살은 구름처럼 새하얗게 기화되었다.
헨리는 시선을 돌려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살폈다.
그곳에는 자신의 몸집만한 활을 든 ‘아이’들이 새하얀 날개를 달고 퍼덕이고 있었다.
‘애?’
아이라고 하기엔 작았고 아기라고 하기엔 조금 컸다.
기껏해야 두세 살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 아기들이 제 몸집만 한 활을 들고 헨리를 조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수가 한두 명이 아니었다.
‘큐피드?’
어디서 읽어 본 적이 있다.
사랑의 신으로 알려진 큐피드는 아기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제 몸집만 한 활을 들고 다닌다고.
그런데 눈앞의 저 아이들은 결코 사랑 따윌 전도하려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대체 뭐야?’
구렁이 떼에 이어 불붙은 바퀴도 모자라 이젠 나는 아기들이 활을 들고 나타났다.
헨리는 천계에 대한 환상이 무너지다 못해 이젠 괴이함까지 느껴졌다.
헨리가 놀라는 사이, 큐피드들이 활시위를 당겼다.
“클레버.”
-예, 마스터.
직접 죽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직접 검을 휘둘러 큐피드들의 목을 떨어뜨리기엔 아기라는 겉모습이 주는 양심의 가책이 어마어마했다.
그래서 클레버를 시켰다.
클레버는 금방 외형을 변형시켰다.
마계에서 흔하게 보던 데스나이트의 모습으로.
외형 변형을 마친 클레버가 공중으로 도약했다.
철컥!
검 집에서 검을 뽑는 클레버.
뽑아 든 검은 두 자루였다, 그것도 시미터 형태의.
서걱!
뽑아든 두 자루의 시미터로 클레버는 능숙하게 십여 명의 큐피드들을 도륙했다.
큐피드들의 목이 잘리며 잘린 목구멍으로부터 분수 같은 핏물이 뿜어졌다.
능숙한 쌍검술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클레버가 구사하는 쌍검술은 베네딕의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클레버의 쌍검술에 감탄하기도 전에 헨리는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띠리링-!
어디선가 들려오는 리라 소리.
그 맑고 청아한 소리가 귓전에 들릴 때쯤, 눈앞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츄아아아아!
큐피드의 목구멍에서 솟구치던 핏물들이 갑작스레 역류하기 시작한 것이다.
역류.
그것은 역류라기보단 정확히 말하자면 쏟은 물이 다시 컵 속으로 들어가는 듯한 모양새였다.
그러나 역류하는 것은 비단 핏물뿐만이 아니었다.
핏물이 뿜어지기 전에 가장 먼저 잘려 나갔던 큐피드의 머리들이, 목구멍 속으로 역류하는 핏물을 따라 되감아 올라가고 있었다.
그 모습은 흡사 폭포를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를 연상케 했다.
헨리가 눈을 찌푸렸다.
이제 보니 연어는커녕 그 모습 자체가 괴이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헨리가 역겨워 하든 말든 되감겨 올라간 큐피드들의 머리가 잘린 목구멍에 착 달라붙었다.
희번덕거리던 큐피드들의 새하얀 흰자에 다시금 새까만 초점이 돌아왔다.
일격에 목이 잘려 죽은 큐피드들이 다시 부활한 것이다.
‘이게 무슨!’
무언가 잘못됨을 느꼈다.
그러나 그 순간, 리라 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띠리링-!
맑고 청아한 리라 소리.
리라 소리가 다시금 울려 퍼지자 다시 부활한 큐피드들의 전신에 푸른 기운이 밀집되며 그들을 고양시켰다.
‘각성? 아니 저 모습은 꼭……!’
죽음에서 부활한 큐피드들이 리라 소리를 듣고 고양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마치 성녀 아이리네가 병사들에게 사용했던 수호 성법을 떠올리게 했다.
놀라기도 잠시, 큐피드들의 화살들이 헨리와 클레버를 향해 발사됐다.
그리고.
콰아앙-! 쾅! 콰아아앙-!
어마무시한 폭음이 연쇄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타깃은 오직 하나.
헨리였다.
“…….”
천계의 바닥은 색깔만 고동색을 띨 뿐인 듯했다.
흙먼지도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새카만 연기가 피어올랐다.
피어오르는 잿빛 연기 위로 큐피드들의 날갯짓 소리만 들려왔다.
큐피드들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그 증거로 큐피드들의 활에는 새로운 화살들이 장전되어 있었으니까.
모두의 화살촉이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연기더미로 향했다.
그 순간, 잿빛 연기 사이로 광명이 터져 나왔다.
“……!”
그것이 단순한 빛이 아님을 감지한 큐피드들이 황급히 날개를 퍼덕였지만, 이 세상에 빛을 피할 수 있는 존재는 몇 되지 않았다.
광명은 잿빛 연기 사이를 뚫고 폭풍처럼 주위를 덮쳤다.
그 크기가 굉장히 거대하여 만약 하늘의 새가 이 광경을 보았다면 태양이 아래로 떨어진 게 아닐까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곧 광명이 멎었다.
멎어 든 광명 사이로 인영이 드러났다.
헨리였다.
헨리는 무미건조한 표정을 바탕으로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화가 단단히 났다는 증거였다.
그래서 신력을 담아 이 일대를 통째로 날려 버렸다.
광명이 완전히 멎어들자 그제야 빛에 가려져 있던 주위의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헨리의 주변.
그곳은 이미 황무지가 되어 있을 뿐만이 아니라 헨리가 딛고 있는 바닥을 제외한 모든 것들이 둥글게 파여 있었다.
거대한 크레이터.
헨리가 쏘아 보낸 파괴 광선의 여파였다.
‘큐피드에 리라 소리, 그리고 부활에 성법까지……. 이놈들이 정말 내가 상상하던 그 천족이라고?’
정황이 그랬다.
모든 것들이 들어맞는 것은 아니었지만 헨리가 평소 듣고 상상해 오던 이미지들이 조금이나마 얼추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뭐라 대화를 나눌 새도 없이 공격이 퍼부어지니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됐다.
띠리링-!
그런데 그 순간, 또다시 리라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런……!”
분명히 감미로워야 할 리라 소리였음에도 불구하고 헨리는 리라 소리를 듣자마자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신경을 곤두세우자마자 사방을 경계했다.
그러나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헨리는 공중으로 비상했다.
“착검.”
클레버는 진즉에 역소환시켰다.
전투가 급박해질수록 권속의 도움보단 혼자서 움직이는 편이 훨씬 더 편했으니까.
검을 뽑아 든 헨리는 높이 날아올랐다.
그러나 높이 날아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간헐적인 패턴으로 리라 소리가 들려왔다.
띠리링-!
이마에 힘줄이 솟았다.
주위에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자꾸만 리라 소리가 들려오니 짜증이 났기 때문이다.
급기야 화를 참지 못한 헨리가 소리를 질렀다.
“어디냐! 자꾸 숨어서 리라질만 하지 말고 지금 당장 모습을 보여라!”
메아리는 없었다.
헨리의 목소리를 반사시켜 줄 산맥이 천계에는 없었으니까.
그러나 잠깐의 침묵 끝에 아우성에 대한 대꾸가 돌아왔다.
“여깁니다.”
리라 소리가 아닌 육성에, 헨리는 번개같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그곳에는 분명히 허공에 비상할 때까지만 해도 본 적이 없던 수백 수천 명에 달하는 천족들이 각자의 무기를 빼 든 채 날개를 퍼덕이고 있었다.
띠리링-!
다시 리라 소리가 들렸다.
헨리는 수천에 이르는 천족 사이로 리라를 튕기는 어느 천족 남성 한 명을 볼 수 있었다.
띠리링-!
헨리의 시선이 리라에 닿자, 천족 남자는 앙코르를 하듯 한 번 더 현을 튕겼다.
그런 다음 튕기던 리라를 내린 후 천천히 헨리에게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불완전한 신이시여.”
인사를 건넨 천족 남자는 인간과 똑 닮은 외형을 가졌다.
그러나 인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인간은 절대로 가질 수 없는 날개를 가졌다는 것이고 사제의 의복처럼 새하얀 천 자락을 몸에 반만 걸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마 하는 행동으로 짐작컨대 저놈이 지휘관쯤으로 보였다.
그리고 헨리는, 저 여유 만만한 태도를 통해 실로 오래간만에 굴욕이란 걸 맛본 듯 했다.
짜증이 솟구쳤다.
농락당했다는 사실은 언제든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래서 말보다 검을 먼저 치켜들었다.
그런데 헨리가 검을 치켜 들자 천족 남자가 웃으면서 말했다.
“이제 그만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불완전한 신이시여.”
“그만? 난 아직 제대로 시작한 적이 없는데 그만하라니, 이상한 말을 하는구나, 네놈은.”
헨리가 매섭게 쏘아붙였다.
그러나 헨리의 퉁명스러운 대꾸에도 불구하고 천족 남자는 미소를 잃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아닙니다. 당신의 이름은 헨리 모리스. 당신은 당신이 사는 세상의 문제 때문에 이곳까지 온 최초의 마법의 신이 아닙니까?”
“……!”
천족 남자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그 말을 들은 헨리는 소름이 쫙 돋았다.
대체 어떻게 그 사실을 아는 걸까?
일전에 라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같은 신이라 할지라도 다른 신의 머릿속은 함부로 들여다볼 수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눈앞의 저 천족 남자는 헨리에 대해서 대체 어떻게 아는 것일까?
헨리의 동공이 확장되며 머릿속에 온갖 가설들이 세워졌다.
그러나 헨리의 당황하는 모습을 본 천족 남자가 말했다.
“놀라실 필요 없습니다. 저 또한 좀 전에 그 사실을 알게 되었거든요.”
“……그게 무슨 말이지?”
“제가 당신에 대해 아는 건 당신의 생각을 간파해서가 아닙니다. 당신은 이미 몇 번이나 당신의 정체를 우리에게 발설해 주었습니다.”
“내가…… 직접 너희들에게 내 정체를 발설했다고?”
“그렇습니다.”
앞뒤가 맞지 않는 말.
헨리가 눈썹을 찡그리자 천족 남자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는 보지 못했지만…… 천신님께선 다 보고 계셨거든요.”
헨리는 천족 남자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러나 시선 끝에 보이는 건 여전히 하늘의 중심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천계의 하나뿐인 태양이었다.
천족 남자가 손을 모으며 말했다.
“이번에는 부디 다른 선택을 해 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