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1
새로운 마왕 (3)
몹시 고통스러웠다.
물론 8서클의 경지를 이루기 위해 마셨던 블랙 티어만큼의 고통은 아니었다.
하지만 뇌와 심장이 집중적으로 조여 오면서 이건 이것 나름대로 고역이었다.
식은땀이 턱 끝을 타고 흘렀다.
몸은 뜨거운데 공기가 서늘하여 전신에서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헨리는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고통이라면 지긋지긋하다.
하지만 심장에서 느껴지는 새로운 파동으로 인해 묘하게 미소가 지어졌다.
‘설마?’
익숙한 파동, 그래서 묘한 기대감을 갖게 된다.
고통과 기대가 어우러지자 어느덧 고통이 반갑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헨리는 고꾸라졌던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무릎을 꿇고, 허리를 편 뒤, 천천히 바닥에 앉았다.
그런 다음 가부좌를 틀었다.
정신을 집중하는 자세에는 가부좌만한 것이 없다.
헨리는 허리를 곧게 펴고 묵은 숨을 토해 냈다.
식은땀은 여전히 비 오듯이 흘렀다.
현기증 때문에 시야가 아찔해져 그냥 눈을 감기로 했다.
눈을 감자 세상이 어둠으로 뒤덮였다.
두렵지는 않다, 그 어둠은 헨리가 만든 작은 세상이었으니까.
헨리는 자신이 만든 세상 속에서 심장에서 자라나는 새로운 고리의 존재를 확인했다.
그리고 존재의 확인을 끝마쳤을 때 입가에 미소를 걸 수밖에 없었다.
‘역시!’
예상이 맞았다.
심장 위에 그려지는 새로운 고리.
그것은 아홉 번째 고리였다.
확실했다.
착각 같은 게 아니었다.
그것은 갓 태어난 새끼 강아지처럼 옅게 진동하고 있었다.
불완전하다는 증거였다.
이에 헨리는 천천히 전신의 마력을 순환시켰다.
그리고 여과지에 마력을 걸러 내듯 걸러 낸 마력들 중 가장 순수하고 맑은 것들만 한데 모아 아홉 번째 고리에 부어 주었다.
어쩌면 지루하고 긴 작업이 될 수도 있었다.
아니, 지루하고 긴 작업이 아니라 어린 짐승을 보살피듯 사랑과 정성을 들여 오랫동안 보듬어 주어야 했다.
그러나 그런 건 아무런 상관이 없는 문제였다.
도리어 환영이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헨리가 세상에서 가장 유능한 보모였으니까.
반나절이 지났다.
흐르는 땀의 속도가 줄어드는 듯하더니 이내 전신에서 피어오르던 수증기가 멎었다.
다시 반나절이 지났다.
땀을 흘리는 속도가 현저히 느려졌다.
아니, 이젠 거의 땀을 흘리지 않았다.
또 반나절이 지났다.
헨리는 이제 두통을 느끼지 않았다.
현기증도 일지 않았다.
다시 반나절이 지났을 땐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좋은 컨디션으로 회복했다.
그리고 다시 반나절이 지났을 때, 헨리는 그제야 입꼬리를 슬며시 올릴 수 있었다.
아홉 번째 고리의 떨림이 완전히 진정되었기 때문이다.
고리의 떨림이 멈춘 순간, 헨리는 새롭게 만들어진 고리에 천천히 마력을 불어넣었다.
헨리의 마력이 빈 고리에 들어차자 아홉 번째 고리가 천천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안정적인 회전이었다.
회전의 속도는 곧 다른 여덟 개의 고리와 조화를 이루며 완전히 헨리의 것이 되었다.
고리의 안정화에 성공하자 헨리는 천천히 눈을 떴다.
인간계와 시간 축이 다른 마계는 여전히 변한 게 없었다.
라니아도 보이지 않았으며, 가가와 가니스엘은 여전히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헨리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의 하루 동안 가부좌를 틀고 있어서 그런지 온 관절이 부득거리며 비명을 질러 댔다.
기분 좋은 뻐근함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헨리가 독소 가득한 마계의 공기를 힘껏 폐부로 끌어당겼다.
독소가 가득했지만 헨리에겐 그저 상쾌한 공기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런 식으로 내 꿈을 이루게 될 줄이야.”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웃음이 났다.
다른 일도 아니고 무려 아홉 번째 서클이 생성됐다.
꿈에 그리던 9서클의 경지, 그 꿈을 이런 식으로 손쉽게 이뤄낼 줄은 몰랐다.
공기를 들이마시던 헨리는 다시금 눈을 감았다.
지금까진 갑자기 생성된 아홉 번째 고리 때문에 정신이 없었지만 헨리가 마신에게 받은 것은 아홉 번째 고리가 아니었다.
바로 헨리를 인간계로 다시 귀환시켜 줄 차원을 다루는 힘이었다.
헨리는 눈을 감고 해일처럼 휘몰아치던 정보들을 떠올렸다.
봇물 터지듯이 흘러 들어온 정보들이었지만, 서클을 정리하면서 과부화를 일으켰던 머릿속도 어느덧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하자 새로이 전달받은 차원에 관한 지식들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이건…….’
하나같이 신어로 전송된 차원에 관한 지식들.
읽는 데는 무리가 없다, 헨리 또한 신이었으니까.
그러나 차원에 관한 지식을 읽으면서 헨리는 왜 아홉 번째 서클이 생겨났는지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어려웠다.
차원을 다루는 마법은 어렵고 난해하였으며, 하물며 신어로 이루어져 있었다.
물론 헨리가 곧바로 응용할 수 있게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긴 했지만, 도저히 한낱 인간의 두뇌로는 떠올리지도 못할 지식들이 가득했다.
그래서 헨리에게 아홉 번째 서클이 생성된 것이다.
강제로 주입받은 지식들이긴 했지만 어찌 됐든 정신을 전율케 할 만한 깨달음을 얻었으니까.
그러니 헨리가 9서클이 된 것은 고도 지식의 습득에 의한 자연스러운 진화인 셈이었다.
‘차원에 대한 지식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 내 몸 스스로가 진화를 선택한 셈이로군.’
육체의 주도권은 자신에게 있었으나 이럴 때 보면 무의식이 참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능동적으로 진화를 이루어 준 본능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헨리는 다시 차원의 지식들에게 집중했다.
여느 귀중한 고서를 읽듯이, 헨리는 천천히 주입받은 지식들을 탐독했다.
그렇게 선 채로 다시 한나절이 흘렀다.
그만큼 주입받은 지식의 양이 방대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헨리는 지루한 줄도 모르고 지식의 탐방에 빠져들었다.
다시 한나절이 지났다.
그때쯤 돼서 기절했던 가니스엘이 깨어났다.
“으음……!”
가니스엘은 어느 순간 정신을 잃었는데 그때가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서 깨질 듯한 머리를 부여잡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눈앞에는 헨리가 선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의아한 광경에, 가니스엘이 말했다.
“지금 뭐 하는…….”
“쉿.”
가니스엘이 말을 걸자 헨리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한쪽 검지를 들어 올려 입술에 갖다 붙였다.
그 모습을 본 가니스엘이 입을 다물었다.
이해할 수 없는 태도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정신이 좀 더 또렷해지자 가니스엘은 헨리에게서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가니스엘이 눈을 비볐다.
그리고 다시 한번 헨리를 보았다.
그런데 그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헨리의 존재감이 정신을 잃기 전에 보았을 때보다 한층 더 거대하고 뚜렷해져 있었다.
‘이게 무슨……?’
자신이 기절한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저 인간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성장을 이뤄 냈던 것일까?
궁금함에 질문들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가니스엘은 쉬이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아니, 이젠 말을 붙이기가 선뜻 어려워졌다.
이젠 아예 인간이라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높은 격을 지닌 존재.
그것이 헨리로부터 느껴지는, 불편하지만 고귀한 기운이었다.
그래서 기다리기로 했다.
헨리가 무엇을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감히 말조차 붙이기 힘든 존재가 무엇을 하든 그 일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윽고 다시 한나절이 지났다.
그동안 가니스엘은 고개 한번 돌리지 않고 헨리를 지켜보았다.
헨리는 처음에 봤던 그 자세 그대로 눈을 감은 채 서 있었다.
미동조차 없는 움직임.
그러나 가니스엘은 지루할 틈이 없었다.
조금씩이긴 했지만 눈앞의 남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거대한 존재감을 내뿜었기 때문이다.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는 성장.
힘을 추구하는 가니스엘에겐 좋은 볼거리였다.
그리고 다시 한나절이 지났다.
하루가 꼬박 지나고 난 후에야 헨리는 눈을 떴다.
눈을 뜬 헨리는 왠진 모르겠지만 한껏 고양되어 보였다.
가니스엘은 그런 헨리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기다림 끝에 헨리가 말했다.
“시간이 좀 걸렸네.”
“지루하진 않았다.”
“그럼 다행이고. 그럼 이제 슬슬 움직여 볼까?”
“움직이다니, 어디로 말인가?”
“약속했잖아? 너의 복수를 이뤄 주겠다고.”
“……!”
많은 일들이 정신없이 벌어져 잠시 잊고 있었다.
자신이 헨리와 동행했던 이유.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 부분에 대해선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약속할 당시만 해도 헨리의 두 눈에서 진심을 엿보긴 했다.
하지만 헨리 정도 되는 실력자가 이만한 힘을 이루고 나서도 자신을 신경 써 줄지 미지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헨리는 가니스엘과의 약속을 잊지 않았다.
가니스엘이 놀란 눈초리로 헨리를 바라보자 헨리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놀라긴.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거다. 그리고 네가 기절한 사이에 내 문제가 모두 해결됐거든.”
“문제가 해결됐다고? 그럼 마계의 새로운 마왕이 바로……?”
“아…… 말이 그렇게 되나? 새로운 마왕 임명 건에 대해선 들은 게 없는데……. 뭐, 아무튼 마신에게 차원을 다루는 권능을 부여받았으니 내 문제는 일단 해결됐어. 근데 생각해 보니 네 말마따나 마왕 자리가 공석이긴 하네.”
처음에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하지만 문제 해결의 과정이 바뀌었을 뿐이지, 헨리가 궁극적으로 손에 넣고자 하는 것들은 모두 손에 넣었다.
이를 테면 헨리는 이제 인간계로 넘어갈 수 있는 힘을 손에 넣었고, 마계의 틈 또한 닫을 수 있게 됐다.
또한 차원재해의 원리도 알게 되었으니 차원재해를 통해 마물들이 인간계로 넘어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헨리에게 있어 마왕 자리는 계륵이 된 셈.
헨리는 잠깐 동안 고민했다.
그리고 고민 끝에 가니스엘에게 말했다.
“마왕 자리, 너한테 넘겨줄까?”
“나한테 말인가?”
“나한텐 쓸모없게 됐거든. 그리고 너, 천계에 복수를 끝내고 나면 딱히 할 일도 없잖아?”
맞는 말이었다.
원님 덕에 나팔 분다고, 피의 복수는 헨리가 해 줄 것이고 그로 인해 실추된 명예는 가니스엘이 챙길 테니까.
허나 실추된 명예를 되찾았다고 해서 다시 천계에 눌러앉아 살 생각은 없었다.
가니스엘의 가치관은 답답한 천계보단 마계가 더 어울렸다.
가니스엘도 그렇게 느끼고 있었고.
하나 문제는 당장 마왕이 되도 그 자리를 지킬 만한 힘이 가니스엘에게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가니스엘은 선뜻 대답을 내놓기가 어려웠다.
가니스엘의 표정을 본 헨리가 말했다.
“이것들 때문이지?”
헨리가 아공간으로부터 자신이 잘랐던 날개 여섯 짝을 꺼내 가니스엘에게 내밀었다.
그러나 잘린 날개를 다시 돌려받았다고 한들, 말처럼 쉽게 다시 붙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헨리가 말했다.
“날개가 문제가 된다면 내가 다시 붙여 주도록 하지. 하지만 그래도 힘을 되찾지 못한다면 힘을 되찾을 때까지 내 힘을 빌려줄게.”
후한 처사였다.
그러나 헨리의 호의가 계속될수록 가니스엘은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왜?
마계로 추방당한 이후 타인에게 처음 받아 보는 호의였다.
가니스엘이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헨리가 말했다.
“그렇게까지 고마워할 필요 없어. 그냥 정보에 대한 대가라고 생각해. 누가 됐든 나를 여기까지 데려와 줬더라면 굳이 네가 아니었어도 그에 맞는 합당한 대가를 지불했을 거야.”
간단한 논리였다.
그리고 이 정도 호의는 헨리에게 있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가니스엘은 달랐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 보는 호의에, 천계 시절이 떠올라 조금이지만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 때문인지 자신의 날개를 자른 것에 대한 미움도 눈 녹듯이 사라졌다.
가니스엘이 말했다.
“고맙다,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다.”
“그 말, 절대로 잊으면 안 된다?”
한결 부드러워진 가니스엘의 목소리에 헨리는 미소를 미소로 답했다.
새로운 마왕을 친구로 두게 되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