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0
새로운 마왕 (2)
주문도 영창도 없었다.
단지 주먹을 휘둘렀을 뿐이다.
그런데 눈앞에 거대한 크레이터가 생겼고 움푹 파인 크레이터 안에는 흉측하게 박살 난 해골병사들이 있었다.
씨익.
헨리가 웃었다.
그런 다음 무차별적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쾅쾅쾅쾅!
쉴 새 없이, 마치 보이지 않는 유성이 낙하하듯, 금역에는 수많은 크레이터들이 생겨났다.
헨리는 그러한 행위를 놀이 정도로 여기며 즐겁게 주먹을 휘둘렀다.
그리고 마침내, 얼마 지나지 않아 주위에 멀쩡하게 서 있는 해골병사는 단 한 구도 없었다.
“어때?”
위세를 자랑하듯, 헨리가 뿌듯한 표정으로 두 마족에게 물었다.
입을 다무는 두 마족.
헨리의 무력을 온몸으로 겪어 본 이들이었기에 웬만큼 강한 줄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구경꾼의 입장에서 그 힘을 방관하고 있노라니, 더더욱 놀라울 따름이었다.
뿌듯한 표정을 지어 보인 헨리는 다시 등을 돌리며 말했다.
“뭐 해, 얼른 안 움직이고?”
“아, 알겠다!”
황급히 따라붙는 가니스엘.
가니스엘이 움직이는 걸 보고 난 후에야 가가는 몇 번의 심호흡 끝에 금역 안에 발을 들여놓았다.
한 사람은 느긋한 걸음걸이로, 두 마족은 조심스럽게 금역 안을 걸어갔다.
라니아가 어디 있는지 모르는 게 이유이기도 했지만, 해골병사들 따위로 손님 대접이 끝날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헨리는 일부러 느긋하게 걸었다.
어차피 덤벼들 놈들이라면, 라니아에게 차기 마왕의 힘을 충분히 보여 주는 것 또한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접대는 계속됐다.
마물의 숲에서조차 본 적이 없는 온갖 마물들이 떼거지로 덤벼들었다.
개중에는 반인반마의 켄타로우스 무리도 있었고, 리치의 정점에 달한 아크리치도 있었다.
데스나이트가 군단을 이루어 공격해 오기도 했고, 브릴린테만큼이나 거대한, 초대형 마물들도 더러 보였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헨리는 손쉽게 놈들을 처리했다.
주먹을 휘둘러서 크레이터를 만들고 주먹을 꽉 쥐어 적들을 찌그러뜨렸다.
이따금씩 쇼맨십이 필요할 것 같아 검을 휘둘러 주기도 하고, 초광역의 범위 마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한 시간 정도 걸었을까?
세 사람은 마침내 금역에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인공 건축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저게 신전인가?’
마신의 대리자라고 했으니 저 건축물이 아마도 신전일 것이다.
물론 눈앞의 건축물은 전혀 신전처럼 생기지 않았다.
신전보단 오히려 제단에 가까운 형태.
제단은 벽 하나 없이 기둥 몇 개 와 널찍한 바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제단을 지키는 파수꾼들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헨리는 겁 없이 성큼성큼 제단 안에 발을 들였다.
‘잘못 찾아왔나?’
여기까지 오는 동안 피 한 방울 손에 묻히지 않고 왔으니, 갑자기 제단이 등장했다고 해서 굳이 겁먹을 이유가 없었다.
사도라고 불리는 놈들도 모두 단칼에 죽어 나갔으니까.
헨리는 여전히 제단 바깥에서 서성이는 두 마족을 제쳐 두고 천천히 제단 내부를 살폈다.
그때였다.
-귀한 손님이 찾아오셨군요.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
헨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목소리의 주인공은 보이지 않았다.
-여깁니다.
뒤를 돌아보니 함께 온 가니스엘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가가는 멀쩡히 서 있었다.
그런데 가가의 상태가 좀 이상했다.
‘빙의?’
가가의 눈빛이 흐리멍텅하게 죽어 있었다.
꼭 귀신에 씐 것처럼 말이다.
그 순간 겁 많던 가가가 선뜻 제단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그러더니 헨리 앞으로 다가와 꾸벅 고개를 숙인 후 말했다.
-마신님이 아닌 다른 신께서 이곳에 방문하신 건 마계가 탄생한 이래로 처음 있는 일이군요.
“역시 알아볼 줄 알았다. 근데 마신의 대리자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이런 식으로 손님을 맞이하나?”
-죄송합니다. 제가 가진 육체가 없어 이렇게 남의 육체를 빌리지 않으면 타인과 대화를 나누지 못해서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라니아에게 헨리가 불만을 표했다.
그러자 라니아는 곧장 자신의 무례를 사과했다.
그 모습에 헨리 또한 가볍게 용서를 받아 주었다.
헨리가 말했다.
“좋아. 그럼 쓸데없는 잡설은 집어치우고 본론이나 한번 이야기해 보자고. 넌 내가 왜 여기에 온 것 같냐?”
-마법의 신님께서 무슨 연유로 이곳을 방문하셨는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들어드릴 수가 없습니다.
“들어줄 수가 없다? 꼭 내 머릿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말하는군.”
-아닙니다. 제가 어찌 감히 신의 머릿속을 들여다 볼 수 있겠습니까? 저는 그저 마신님의 말씀을 전하는 한낱 대리자일 뿐. 지금 마법의 신님께 말씀드리는 것들은 모두가 마신님의 뜻입니다.
“핑계는……. 좋아, 그럼 이유가 뭐지? 내가 신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간결한 대답 속에서 헨리는 생략된 이유들이 보였다.
그래서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웃기지도 않군. 내가 아는 신은 내게 이런 말을 했지, 신이 현세에 자주 개입하면 현세에 큰 혼란이 올 거라고. 참 불공평하지 않아? 인간계는 이것저것 안 되는 제약들이 많은데, 마계에선 마신이 왕처럼 굴고 있잖아. 안 그래?”
헨리가 날카롭게 쏘아붙이자 라니아는 입을 닫고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어딜 쳐다보는지도 모를 흐리멍텅한 눈빛으로 침묵을 유지할 뿐.
이에 헨리가 가가의 죽은 눈동자를 쳐다보며 말했다.
“잘 들어. 난 어차피 죽으면 완전한 신이 될 몸이야. 죽음 이후의 삶이 정해진 마당에 내가 무서울 게 있을 것 같아? 사실 네놈이 하는 마왕 놀음 따윈 조금도 관심 없어. 근데 선은 지켜야지. 네놈의 그 같잖은 마왕 놀음 때문에 내가 사는 세상이 그동안 얼마나 오랫동안 시달렸는지 알기나 해?”
헨리의 시선은 라니아가 빙의한 가가를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헨리는 알고 있었다.
지금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자가 라니아일진 몰라도 마신도 분명히 듣고 있을 것이란 걸 말이다.
그래서 더더욱 거세게 말들을 퍼부었다.
어차피 마신이 들을 것을 알았기에.
또한 이번 기회를 통해 그동안 마계에 쌓여 있던 불만들을 있는 힘껏 토해 냈다.
“마왕인지, 나발인지 그런 쓸모없는 자리 따윈 조금도 관심 없어. 근데 이거 하난 꼭 알아 둬라. 네가 무슨 이유로 마왕 놀음 따윌 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원하는 바를 들어주지 않으면 두 번 다시 이 땅에 새로운 마왕은 없을 것이다. 덧붙여!”
헨리는 가가의 눈빛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것은 마신에 대한 경고였다.
“인간계에 열어 놓은 마계의 틈도 다시 원래대로 되돌려 놔라. 그러지 않으면 내가 죽어 신이 된 후에 어떻게든 네놈의 숨통을 끊어 버릴 테니까.”
끝으로 헨리는 시선을 거두었다.
하고 싶은 말들은 다했다.
그동안 쏟아 내고 싶었던 울분들은 물론이고, 지금 당장 헨리에게 필요한 것과 미처 해결하지 못한 마계의 틈 문제까지 모두 다 말이다.
-…….
침묵이 이어졌다.
그러나 헨리는 이 침묵조차도 자신을 무시하는 행위라고 여겼다.
“착검.”
그래서 가가의 목을 베어 소통의 창구를 없애려고 했다.
필요하다면 가니스엘의 목도 잘라 버릴 생각이었다.
그렇게 되면 라니아는 빙의의 대상이 사라져 마신의 말을 전달하지 못할 테고 더 이상 헨리를 막을 수 없게 된다.
그러니 이것은 으름장에 가까운 경고였다.
그런데 그때였다.
츠즈즈즛-
가가의 전신에 탁한 빛깔의 기운이 응집되기 시작했다.
마기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마기가 아니었다.
마기는 기름 같은 끈적끈적한 특유의 기분 나쁜 촉감이 있는데 눈앞에 응집되는 기운은 전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리어 산뜻했다.
그리고 헨리는 이러한 느낌이 꽤나 익숙했다.
‘신력.’
기운의 정체는 신력이었다.
빛깔이 탁한 걸로 보아 신력의 주인이 예상됐다.
이윽고 응집된 기운이 사람의 형태를 빚어내기 시작했다.
보랏빛 피부, 붉은 눈동자, 흰색의 긴 장발, 그리고 머리카락으로부터 이마를 드러낼 수밖에 없게끔 솟아난 큼지막한 두 개의 뿔.
마족들 중에서도 저런 외모는 본 적이 없었다.
헨리는 빚어지는 외형으로부터 본능적으로 그가 마신임을 알았다.
이에 헨리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올라갔다.
마신의 강림.
경고에 대한 답변이 올 것이란 건 예상했다.
하지만 마신이 직접 강림할 줄은 몰랐다.
곧 응집된 기운이 물리적인 형태를 띠며 마계로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눈을 뜨는 마신.
그 모습을 본 헨리가 말했다.
“친절하기도 하셔라. 이렇게 직접 강림해 줄 줄은 전혀 몰랐는데?”
약간의 비아냥이 섞인 인사였다.
이에 마신이 말했다.
-끈질기군.
마신의 첫마디였다.
그는 마계에 강림하자마자 헨리에게 독설을 퍼부었다.
이에 헨리도 능청스럽게 되받아쳤다.
“소꿉놀이를 벗어나지 못한 철부지 폭군보다야 낫지.”
되받아치는 독설에 마신은 더 이상의 힐난은 의미가 없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본론을 이야기했다.
-어린 신이여, 그대는 이미 신의 자격을 갖추었다. 그러니 이제 쓸데없는 고집은 그만 부리고 순리를 받아들여라.
“뭐야, 너도 그 소리냐?”
아이러니하게도 마신은 라와 같은 말을 했다.
신이 되었으니 이제 그만 인간 세상의 유희를 그만 두고 완전한 신이 되라는 권유를 말이다.
하지만 권유자가 바뀌었다고 해서 뜻을 꺾을 헨리가 아니었다.
화두를 바꾸려는 마신을 대신해 헨리가 다시 본론을 꺼내 들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이나 하지그래? 날 새로운 마왕으로 인정하고 차원의 힘을 넘겨주든가, 아니면 내가 언급한 문제들의 근본적인 문제들을 해결해 주든가.”
헨리의 태도는 완강했다.
아니, 완강하다기보다는 문제를 해결해 줄 장본인이 나타났으니 그 기회를 절대로 놓칠 생각이 없었다.
헨리가 다시 한번 으름장을 놓자 마신이 묘한 눈빛으로 헨리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무엇이 됐든 후회하게 될 거다.
“인생이란 후회로 가득한 법이지. 그리고 후회를 해도 내가 할 테니 잔말 말고 네가 싸질러 놓은 똥이나 치우시지그래.”
헨리의 거친 비아냥에 마신은 잠시 헨리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이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분의 뜻은…… 정말이지 이해할 수가 없군.
“뭐?”
-네 요구를 들어주도록 하겠다. 차원을 다룰 수 있는 힘, 그 권능을 너에게 주겠다.
파앗!
일순간, 마신의 붉은 눈동자가 번뜩였다.
그러자 헨리의 머릿속에 차원을 다루는 법에 대한 지식들이 해일처럼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방대한 정보들이었다.
헨리는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지식의 홍수에 현기증이 일기 시작했다.
그사이에 마신은 권능의 부여를 끝마쳤다.
번뜩이던 안광이 잦아들었고 권능의 부여를 마친 마신은 얼마간 현기증에 시달리는 헨리를 바라보았다.
“크으윽……!”
현기증은 두통과 함께 뒤엉켜 결국 헨리를 무릎 꿇게 만들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지독했으면 치유 마법도 통하지 않았다.
마신은 그런 헨리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
헨리를 지켜보던 마신의 동공이 일순간 확장됐다.
‘설마 처음부터 이러실 목적으로?’
놀란 눈초리로 헨리를 바라보던 마신은 이내 미간을 찌푸리며 한 줌의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마신이 사라졌다.
권능의 부여도 끝났다.
그런데도 헨리의 현기증은 멎질 않았다.
도리어 시간이 지날수록 머리가 쪼개질 듯한 고통이 배가됐다.
‘아파, 아프다고!’
너무 고통스러운 나머지 어떠한 생각도 들지 않았다.
유발되는 현기증 속에, 여전히 차원의 힘을 다루는 정보들이 소용돌이치며 헨리의 머릿속을 어지럽게 헤집어 놓았다.
“크헉!”
그 순간, 헨리의 입에서 각혈이 뿜어졌다.
전신에 열이 났고 식은땀이 흘렀다.
헨리는 무릎을 꿇다 못해 점점 더 앞으로 몸이 고꾸라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
두근-
극심한 고통 속에서 신음 이외에 한 가지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두근-
심장의 박동 소리.
가슴이 타들어 갈 듯이 뜨거웠다.
그러나 그 뜨거움은 전소(全燒)를 위한 뜨거움이 아니었다.
무엇인가가 만들어질 때 일어나는 잉태의 뜨거움이었다.
마치 대장간의 풀무질처럼, 타들어 갈듯이 뜨거운 심장 위에 새로운 고리가 그려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