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8
방랑하는 신 (4)
시간이 지나며 가니스엘은 눈을 떴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일부러 돌진 부위에 최대치의 기운을 주입해 몸을 날린 것인데, 어찌 된 영문인지 뻗어 버린 건 자신이었다.
그래서 한동안의 기절 끝에 겨우 눈을 떴다.
그런데 눈을 뜬 직후, 가니스엘은 자신의 몸이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무슨?’
심지어 말도 나오지 않았다.
흐릿해지는 시야가 선명해질수록 전신을 속박하는 힘도 더욱 더 뚜렷하게 느껴졌다.
그때였다.
“이제 정신이 좀 드나 보네.”
낯선 목소리.
가니스엘은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가니스엘은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인간?’
눈앞에 보이는 것은 분명한 인간이었다.
그것도 상당히 젊은.
가니스엘은 눈앞에 보이는 것이 환각 따위가 아니란 것을 깨닫자마자 황급히 전신에 힘을 끌어 올렸다.
화가 났기 때문이다.
‘한낱 인간 따위가 감히 나에게!’
그것이 분노의 이유였다.
가니스엘이 대천사장이었던 시절, 천신에게서 부여받은 임무 때문에 몇 차례 정도 인간계로 강림해 본 적 있었다.
그때 본 인간들은 그야말로 최악의 생명체였다.
나약한 주제에 오만했으며 탐욕스럽기까지 했다.
그래서 가니스엘의 기억 속에 남은 인간은 죄다 벌레만도 못한 존재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벌레가 지금 자신을 속박하고 기만하고 있었다.
가니스엘이 전신에서 마기를 끌어 올렸다.
후우웅!
가니스엘의 전신으로부터 세상 모든 생명체를 말려 죽일 듯한 지독한 마기가 내뿜어졌다.
뿜어지는 마기는 거대한 풍압을 만들었고, 코앞에서 지켜보는 헨리의 머리카락을 휘날리게 했다.
덩달아 흙먼지도 휘날렸다.
이에 헨리가 말했다.
“쓸데없이 활력 넘치네, 이놈.”
거슬렸다.
휘날리는 흙먼지가 얼굴에 튀었기 때문이다.
이에 헨리는 손을 들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자 휘몰아치던 흙먼지와 마기가 가니스엘에게로 다시 되돌아 와 종잇장 접히듯이 꾸깃꾸깃 접혔다.
헨리가 가니스엘의 기운을 역류시킨 것이다.
그러나 접힌 것은 마기뿐만이 아닌 것 같았다.
뿜어내던 분노 또한 접힌 마기와 함께 가슴 속 깊이 빨려들어 갔다.
헨리는 쥐었던 주먹을 다시 폈다.
그러자 가니스엘이 거칠게 숨을 토해 냈다.
“프학! 허억, 허억, 허억……!”
분노의 마기가 역류하며 숨통을 조인 탓이었다.
거칠게 숨을 토해 내는 가니스엘을 헨리가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가니스엘의 숨이 진정되어갈 때쯤 헨리가 말했다.
“옆에 도마뱀 보이지?”
헨리가 가리킨 곳 끝에는 입에 거품을 문채 기절해 있는 가가가 있었다.
“저놈은 내 하나뿐인 길잡이였어. 근데 네놈 때문에 저 꼴이 됐다. 그러니 저놈 대신 네가 일해야겠지?”
소개가 간단했던 만큼 인수인계 또한 간단하게 끝내려고 했다.
가가에게 필요한 정보는 이미 확보했지만, 헨리는 그보다 더 많은 정보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척 보기에도 이놈이 가가보다 더 강해 보였다.
그렇다면 굳이 가가를 데리고 다닐 필요가 없었다.
헨리의 말을 알아들은 가니스엘이 분노하며 다시금 마기를 내뿜으려 했다.
좀 전엔 방심해서 제압당한 것이라는 자기 합리화하에 말이다.
그러나 가니스엘이 다시금 마기를 내뿜으려 하자 헨리가 무미건조하게 뿌리던 시선에 살기를 담았다.
그 순간.
움찔!
헨리가 살기를 내뿜은 순간, 가니스엘은 자기도 모르게 위축되고 말았다.
멀리서 느꼈던 거대한 존재감은 착각이 아니었다.
그 존재감의 느낌은 눈앞의 인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믿을 수가 없었다.
‘한낱 인간이 대체 어떻게?’
자신의 기습을 막아 낸 건 어떻게 요행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 자신 앞에서 이렇게 무지막지한 존재감이라니?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던 중 가니스엘이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공포와 두려움은 상상력이 만들어 낸다.
그러니 더 이상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그리고 대신 사기를 끌어 올릴 만한 자기 최면을 시작했다.
‘브릴린테는 이것보다 훨씬 더 강했다!’
그리고 자신은 그런 브릴린테에게 도전하던 사내!
제아무리 인간의 범주를 뛰어넘은 존재감이라지만 브릴린테와 비교할 바는 못 되었다.
그래서 가니스엘은 굴복하지 않기로 했다.
자신은 마계 서열 2위이기 이전에 무패의 신화를 자랑하던 천계의 대천사장 가니스엘이었으니까.
‘이놈 봐라?’
잠시 주춤했던 마기가 다시 폭주하려 들자 헨리는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꽤나 고집이 강한 놈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앞의 이놈이 어떤 존재든 간에 확실한 것 한 가지는 가가보단 쓸 만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헨리가 뿌리던 살기를 거두며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좋아, 그럼 이제부터 네가 새로운 가가다.”
‘뭐?’
“그리고 새 가가가 되기 이전에 네 오만함을 반성해라.”
결심을 마친 헨리는 가니스엘에게 새로운 신분과 이름을 내려 주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교육을 시작하려 했다.
이놈이 아무리 가가보다 쓸모가 많다고 한들 주인의 말을 듣지 않는 사냥개는 들개와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딱 숨만 붙여 놓기로 했다.
사나운 들개가 온순한 사냥개가 될 수 있도록.
“착검.”
외침과 함께 허공으로부터 콜소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가니스엘은 여전히 허공에 박제된 듯 꼼짝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기세만큼은 밀리고 싶지 않아 어떻게든 발버둥 치며 가진 마기를 뿜어댔다.
허나 헨리 눈엔 그저 가소로울 따름이었다.
검을 소환한 헨리는 이내 곧 에메랄드 빛 오러를 검에 둘렀다.
찬란하게 빛나는 녹색 빛 오러 블레이드.
신력은 일부러 담지 않았다.
닭 잡는 데에는 닭 잡는 칼을 써야 하고 소 잡는 데에는 소 잡는 칼을 써야 하는 법이니까.
헨리는 뽑아 낸 오러 블레이드를 치켜들고 발버둥 치는 가니스엘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검이 깨끗한 일자를 그렸다.
그리고 바닥에 세 개의 날개가 떨어졌다.
‘크아아아아!’
입을 벌리며 괴로워하는 가니스엘.
침묵 마법을 걸어 놓았기에 그 모습은 마치 소리 없는 아우성이었다.
그러나 헨리는 알지 못했다.
천족에게 날개란 목숨과도 같은 것. 그리고 힘의 원천이기도 했다.
헨리는 괴로움에 발버둥 치는 가니스엘을 한동안 지켜보았다.
그러나 가니스엘의 기세는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도리어 피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노려보았다.
그래서 한 번 더 검을 휘둘렀다.
좀 전엔 오른쪽 날개 세 개를 잘랐으니 이번엔 그 균형을 맞춰 주려 했다.
그런데 헨리가 검을 치켜든 그 순간.
‘아, 안 돼!’
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가니스엘이 필사적으로 입술을 뻐끔거렸다.
제발 그것만은 참아 달라고.
그러나 헨리는 알고 있었다.
애매한 공포는 애초에 심어 주지 않는 게 낫다는 것을.
필사적으로 발버둥치는 가니스엘에게 헨리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돼.”
서걱! 후두둑-!
검이 휘둘리고 왼쪽 날개 세 짝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가니스엘은 다시 한번 소리 없는 아우성을 내질렀다.
“조용해서 좋네.”
일찍이 침묵 마법을 걸어 두어 비명을 질러도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고문하기에 딱 좋았다.
헨리는 잘라 낸 날개들을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그런 다음 손가락을 튀겨 허공에 박제해 두었던 가니스엘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크흐흑……!”
침묵 마법을 해제해 준 것은 덤이었다.
헨리가 가니스엘에게 시전한 모든 마법들을 캔슬시키자 상처 입은 가니스엘이 바닥에서 꿈틀거리며 신음했다.
고통스러웠다.
힘의 원천이라고 불렸던 대천사장의 날개였다.
가니스엘은 이 날개 덕분에 마계 서열 2위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 마주친 인간 한 명에 의해 목숨과도 같은 날개들이 무려 여섯 개나 잘려 나갔다.
가니스엘이 이를 악물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헨리를 보았다.
헨리는 여전히 미소 짓고 있었다.
그러나 가니스엘의 눈에 비친 헨리의 미소는, 어느 미치광이 도살자의 잔인한 웃음처럼 보였다.
가니스엘의 모골이 송연해졌다.
‘이, 이놈은 미친놈이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고, 여섯 개나 되는 날개를 잡아 뜯긴 후에야 가니스엘은 그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후회하기엔 이미 늦었다.
날개를 세 쌍이나 뜯긴 이상, 자신은 약해졌으면 약해졌지 결코 이전과 같은 힘을 낼 순 없었다.
그러니 가니스엘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패배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리고 이젠 두 번 다시 브릴린테에게 도전할 수 없게 됐으며, 마계의 순리에 따라 서열 저 멀리 나가떨어져야 함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고개를 들었던 가니스엘이 다시 바닥에 고개를 처박았다. 그리고 흐느끼는 목소리로 답했다.
“내가…… 졌다…….”
“응?”
놈을 굴복시킴에 있어 헨리는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놈은 애초부터 단순히 가가의 대체제 정도로 여겼으니까.
그런데 헨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가니스엘은 훨씬 더 진지한 놈인 듯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으으음…….
푸닥거리가 너무 시끄러웠던 탓일까, 기절해 있던 가가가 깨어났다.
기절에서 깨어난 가가가 깨질 듯한 두통에 머리를 붙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헨리와 헨리 앞에 쓰러져 있는 존재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어, 어?
“빨리도 일어나네.”
물론 가가가 놀라건 말건, 헨리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가가는 그렇지 않았다.
가가는 헨리 앞에 쓰러져 있는 날개 꺾인 타천사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서, 서, 설마?
“응?”
텁!
찔리는 게 있었기에, 가가는 놀란 자신의 입을 황급히 두 손으로 막았다.
그리고 눈알을 열심히 굴리며 상황 파악에 나섰다.
‘설마 그 가니스엘 님께서 지셨다고?’
보이는 그대로였다.
자신이 기절한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좀 전에 거대한 충돌이 있었고 자신은 그로 인해 기절했다.
그리고 깨어나 보니 눈앞에 날개가 꺾인 가니스엘이 있으니, 그 충돌의 원인 또한 분명히 가니스엘의 것이리라.
그런데 그 가니스엘이 저 인간 남자에게 패배했다.
이건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놀란 자라눈을 하고서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는 가가를 보며 헨리는 수상함을 느꼈다.
냄새가 났다, 그것도 아주 수상한 냄새가.
이에 헨리가 말했다.
“너, 이리 좀 와 봐.”
-예, 옛? 저, 저 말씀이십니까?
“내가 두 번 말하게 하지 말라고 했지?”
-죄,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가가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놈에 대해 뭘 좀 아는 모양이다.
그래서 일단은 수상한 냄새에 대해선 모른 체하고 녀석에 대한 정보를 물었다.
가니스엘.
녀석은 옆 동네 최하급 마족도 그 사연을 자세하게 알 만큼 마계에선 나름대로 유명한 인사였다.
‘이놈이 그렇게나 대단한 놈이었다고?’
칼질 몇 번에 쓱쓱 잘려 나가기에 별 볼 일 없는 놈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이런 놈이 마계 서열 2위라니?
헨리는 가니스엘의 서열을 듣는 순간, 자신이 마계에 대한 환상이 너무 강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뭐…… 그래도 잘 됐네.’
다른 놈도 아니고 마계 서열 2위에 해당하는 놈이었다.
브릴린테가 마계의 틈을 통해 자신을 납치했으니, 2위 정도 되는 놈이면 다른 마족들보다 훨씬 더 많은 정보들을 가지고 있을 터.
생각이 여기까지 미친 헨리는 쓰러져 신음하는 가니스엘을 일으켜 세웠다.
멱살 잡히듯 마력으로 억지로 일으켜 세워진 가니스엘은 미소 짓는 헨리의 얼굴을 보았다.
그래서 확신했다.
드디어 자신을 끝내려는 것이라고.
가니스엘을 일으켜 세운 헨리가 말했다.
“브릴린테는 내가 죽였다.”
“……뭐?”
“브릴린테가 날 이곳으로 납치해 와서 내가 브릴린테를 죽였다고. 그러니 현재 마계 서열 1위는 바로 네놈이다.”
가니스엘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지금 이 인간이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거지?
그러나 헨리는 할 말을 이어 나갔다.
“너, 천계에 복수할 생각이지?”
“……!”
“그 복수, 내가 도와줄게. 대신 너도 날 좀 도와라. 내가 사정이 좀 있거든.”
갑작스러운 적군의 제안.
그 제안에 가니스엘은, 자기도 모르게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