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7
방랑하는 신 (3)
몇 차례의 질의응답을 통해 알게 된 것들은 생각보다 더 쓸데없는 정보들뿐이었다.
예를 들어 가가는 드물게 무리를 짓지 않는 리자드맨이라든가, 생존 능력에 특화되어 운 좋게 최하급 마족으로 진화할 수 있었다든가 하는 것들 말이다.
그래도 정보들이 영 쓸모없는 것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마계를 방랑하는 동안 필수적으로 알아야 할 지식들.
이를 테면 마계의 시간 축은 어떻게 돌아가는지, 마계의 땅덩어리는 어떤 식으로 생겨 먹었는지, 그리고 현재 위치는 어딘지에 대해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진짜배기 정보는 꼬리에 꼬리를 문 질문들 속에서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튀어나왔다.
“……그러니까, 여긴 브릴린테의 영역이고 브릴린테의 영역은 마계에서 가장 큰 지배지 중에 하나다?”
-그렇습니다.
가가는 대답하는 내내 헨리의 눈치를 봤다.
헨리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나쁘지 않은 태도였다.
공포는 여러모로 쓸모가 있었으니까.
가가의 대답을 들은 헨리가 잠시 생각했다.
이 땅을 지배하고 있던 마족의 이름은 다름 아닌 브릴린테.
그리고 브릴린테는 헨리가 한 방에 쓰러뜨린 마왕 후보였다.
그렇다면 왕좌의 주인이 사라진 지금, 이곳은 곧 무법 지대가 될 것이 분명했다.
‘귀찮아지겠네.’
가가의 말에 의하면, 마계의 주민들은 모두들 영역 지배에 대한 욕구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자신의 영역이 넓어질수록 자신의 영토를 빼앗기 위해 다른 강자들이 자신에게 도전하러 올 테니까.
그러니 이들에게 있어 영역의 지배는, 곧 더 강한 상대를 만나 승리를 쟁취하고 그로 인해 한 단계 더 성장하고 싶은 진화의 욕구에서 비롯된 아주 자연스러운 행위인 셈이었다.
헨리가 말했다.
“좋아, 그럼 이동하자.”
-어, 어디를 말씀이십니까?
“어디긴, 여기가 브릴린테의 영역이라면서? 근데 집주인이 사라졌으니 곧 빈집을 노리는 놈들이 몰려올 터, 그전에 자리를 떠야 하지 않겠어?”
-예에? 브릴린테가 사라지다니요? 그는 마신님께서 점지해 주신 가장 유력한 마왕 후보인데 대체 그가 어디로 사라졌다는 말씀이십니까?
“죽였어.”
-예?
“내가 죽였다고.”
-그, 그게 무슨……?
헨리는 진실을 이야기했으나 가가는 진실을 알아듣지 못 했다.
가가의 되물음에 헨리가 다시 한 번 반복해서 대꾸해 주었다.
“내가 죽였다고. 그놈이 다짜고짜 날 이곳으로 납치해 오길래 일단 싸웠는데 그 싸움에서 죽였어.”
-미, 믿을 수 없습니다!
“믿든 말든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넌 길 안내나 해. 쓸데없는 싸움은 내 쪽에서도 거절이거든.”
가가의 눈빛에 여러 감정들이 교차됐다.
불신과 신뢰.
두 가지 눈빛이 마구잡이로 교차되고 있을 때 헨리가 가가를 다시금 닦달했다.
“아, 뭐 해! 빨랑빨랑 안 움직이고?”
-아, 알겠습니다!
그러나 불신이든 신뢰든, 가가는 자신이 내린 판단에 대해 어떠한 발언권도 가질 수가 없었다.
발언권을 가져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해 봤자 어차피 이 남자는 관심을 주지 않을 것이며 오직 그의 욕심대로 자신을 이용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가는 이를 역이용하기로 했다.
발언권을 가질 순 없지만 적어도 길 안내를 맡게 된 이상, 이 남자의 행보만큼은 자신이 정할 수 있었으니까.
‘좋아, 네놈의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그분을 만나게 되면 알게 될 테지.’
꾀 많은 여우가 호랑이를 잡기 위해선 그에 준하는 다른 동물을 데려오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가가는 브릴린테에 준하는 다른 마족을 이용해 헨리를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그 마족이 가가의 뜻대로 움직여 줄지는 미지수였지만, 헨리가 정말로 브릴린테를 죽인 자라면 분명히 ‘그’도 반응을 보일 거라고 가가는 확신했다.
모든 마족들은 자신의 영역에 침범한 침입자의 존재를 대번에 알아차리기 마련이니까.
결심을 마친 가가가 음흉한 속내를 품은 채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이동 중에 헨리가 말했다.
“느려.”
-예?
“헤이스트.”
지리를 모르니 도보로 이동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시가 바쁜 와중에 한가하게 산보나 하면서 브릴린테의 영역을 벗어날 생각도 없었다.
그래서 헨리는 가가와 자신에게 8서클 등급의 헤이스트를 시전했다.
같은 시동어였지만 부여된 마법은 천지차이의 등급.
걸음을 옮기던 두 사람의 배경이 순식간에 일그러지며 거대한 돌개바람을 만들어 냈다.
-으아아아아아!
가가의 목소리가 공기 중으로 옅게 퍼지며 순식간에 사라졌다.
분명히 평소와 같은 뜀박질인데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엄청난 속도로 이동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이한 현상이었다.
그래서 가가는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런 가가를 보며 헨리가 점잖게 핀잔을 주었다.
“정신 차리고 안내나 똑바로 해.”
-예에에에에엣!
생각보다 그의 영역에 빨리 도착할 듯했다.
* * *
가니스엘.
천계에서 능천사들을 아우르던 대천사장이었으나 잘못된 선택으로 마계로 추방된 비운의 천족.
처음에 마계로 추방되었던 가니스엘은 마계와 상반되는 천족 특유의 성스러운 기운 때문에 끊임없이 마물들과 싸워야만 했다.
그러나 가니스엘은 살고자 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 자신을 내다 버린 천계를 부숴 버리고 싶었다.
그래서 많은 것들을 버렸다.
태어날 때부터 가진 천족의 것들을 버리고 마계의 것들을 받아들였다.
이곳의 질서와 법칙, 그리고 정의.
그리고 자신이 다시 만들어 가져야 할 신념과 목표, 그리고 힘의 질서들을 말이다.
이념을 바꾸고 나니 가니스엘은 더 이상 마계가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추방당한 천계보다 훨씬 더 편안함을 느꼈다.
이곳에선 자신의 철학을 숨기지 않아도 됐고, 스스로의 가치관을 정립시키고자 한다면 힘으로써 증명해 내면 됐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마계는 천계보다 훨씬 더 살기 좋은 곳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자신이 천족으로 태어난 건 신의 장난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그때부터 가니스엘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언젠간 마계 전체를 아우르는 대마왕이 되어 수많은 마족과 마물들로 이루어진 대군을 이끌고 자신을 내다 버린 천계를 공격하는, 그런 행복한 그림을 말이다.
그리고 가니스엘은 마침내, 마계 서열 2위라는 그 어떤 마족조차 쉽게 이루지 못할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관문은 단 하나.
새로운 마왕 후보로 군림한 브릴린테를 죽이고 그 자리를 자신이 꿰차는 것.
마신의 점지?
그런 건 다 거짓부렁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은 단 한 번도 마신에게 선택받은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자리까지 스스로 혼자 올라오지 않았던가?
그래서 가니스엘은 자신이 있었다.
무식하게 힘만 센 브릴린테 따위,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숨통을 끊어 놓겠다고 말이다.
준비는 확실했다.
타고난 천성이 천족이기에 절대로 익히지 못했을 흑마술은 물론, 천계였다면 사술(邪術)이라 홀대받았을 뛰어난 전략들, 출신 성분의 이유로 끝끝내 자신을 따르지 않은 마족들을 대신해 자신의 전력을 보충해 줄 마계의 신기(新器)들까지 모두 말이다.
준비는 모두 끝났다.
이제 남은 것은 자신의 앞길을 방해하는 저 가련한 브릴린테의 숨통을 끊는 것뿐!
비로소 가니스엘이 준비를 마친 순간이었다.
‘이 느낌은!’
준비를 마친 순간, 가니스엘은 느꼈다.
자신의 영역 끝자락에 등장한, 거대한 존재의 침입을 말이다.
침입자가 내뿜는 존재감은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가니스엘에게 이만한 존재감으로 위협 신호를 보낼 수 있는 존재는 마계에서도 단 한 명뿐이었다.
‘브릴린테, 네놈이 기어코!’
그간 단 한 번도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지도 자신에게 먼저 싸움을 걸어 온 적도 없던 브릴린테였다.
그런 브릴린테가 이제야 비로소 생각을 고쳐먹고 선제공격을 감행한 것이라고 가니스엘은 생각했다.
입꼬리가 절로 솟았다.
한시라도 빨리 준비한 전력을 몽땅 보여 주고 싶었는데 때마침 토끼가 호랑이 굴속으로 들어온 격이었다.
‘내 친히 마중 나가 주마!’
결심을 마친 가니스엘이 자신이 만든 왕좌에서 일어났다.
그런 다음 대천사장의 상징이었던 네 쌍의 거대한 날개를 펼쳤다.
순백의 상징이었던 네 쌍의 날개는 어느새 짙디짙은 흑색으로 뒤바뀌어 있었다.
칠흑 같은 날개의 색은 곧 가니스엘의 정의가 바뀌었음을 뜻했다.
펄럭!
가니스엘이 한 번의 날갯짓을 하자 거대한 풍압이 일며 발밑에 거대한 크레이터가 생겨났다.
고작 한 번의 날갯짓이었다.
그럼에도 이만한 크기의 크레이터를 만들어 낸다는 것은 지금 가니스엘이 가진 힘의 크기가 절정을 이루고 있다는 뜻이었다.
슈아아아!
가니스엘은 매처럼 비상했다.
그리고 보랏빛 은하수를 반짝여 줄 하나의 별이 된 직후, 유성처럼 아래로 낙하했다.
목표 지점은 단연코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브릴린테의 머리 위!
이만하면 화끈한 환영식이라고 생각해서 행한 행동이었다.
높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가니스엘의 전신에 붉디붉은 불꽃이 일었다.
날카로운 파공성.
그리고 그와 함께 휘감기는 불꽃.
가니스엘의 시야가 휘감긴 불꽃에 의해 온통 주황빛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목표 지점에 도달한 그 순간, 거대한 파공성만큼이나 강렬한 충돌 음이 사방의 온 지축을 뒤흔들었다.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었다.
그리고 누군가가 쓰러졌다.
털썩!
쓰러진 이는 다름 아닌 가가.
가가는 입에 새하얀 게거품을 물고 바닥에 쓰러졌다.
쓰러진 가가의 다리 사이로 노란 물이 고였다.
기절하면서 거품을 문 것도 모자라 실례까지 저지른 모양이었다.
헨리는 미간을 찌푸렸다.
언제 어디서 가가 같은 놈이 또다시 암살을 감행할지 몰라 매직 실드를 둘러 두었다.
그런데 그 실드에 웬 놈이 날아와 흙먼지를 일으켰다.
‘이번엔 또 누구야?’
다행히 실드에 조금도 금이 가지 않은 걸로 보아 가가 같은 잔챙이 조무래기인 듯했다.
헨리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다음 이번엔 어떤 놈이 자신을 암살하려 들었는지 낯짝이나 한 번 확인해 보고자 흙먼지를 거두어들였다.
딱!
손가락을 튀기자 바람이 일며 자욱한 흙먼지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시야가 갰다.
그리고 헨리는, 쓰러진 가가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으로부터 볼썽사납게 쓰러져 있는 의문의 암살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날개?”
암살자라고 생각되는 놈의 등에는 네 쌍의 날개가 붙어 있었다.
그러나 날개를 떠나서 놈은 기절해 있었다.
황당했다.
이놈은 대체 정체가 뭐기에 자기가 먼저 기습해 놓고 이렇게 당당하게 기절해 있단 말인가?
‘쯧쯧, 확실해 이놈도 분명히 최하급 마족 나부랭이일 거야.’
헨리는 기절한 가니스엘을 보며 확신했다.
이놈은 분명히 가가와 같은 허섭스레기일 것이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