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6
방랑하는 신 (2)
“철의 장마.”
시동어를 외치자 장대비 굵기의 바늘이 헨리를 중심으로 팽이처럼 쏟아졌다.
쏟아지는 바늘들의 위력은 굉장했다.
언뜻 보면 단순한 바늘처럼 보이는 그것은 바늘 끝에 닿은 모든 것들을 기마병들의 그것처럼 단숨에 꿰뚫어 냈으니까.
쿠웅!
철의 장마가 그치자 묵직한 소리들이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장마에 벌집이 된 마물들이 쓰러지는 소리였다.
헨리는 몸을 부유시켜 쓰러진 마물들을 헤아려 보았다.
‘쉰, 아니 백 정도인가.’
척 보기에도 쉰은 훨씬 넘어 보였다.
저들의 정체는 다름 아닌 게헨나로, 마물의 숲에선 9급 구역에서나 보일 법한 녀석들이었다.
하지만 마계에서 활동하는 진짜배기 게한나들은 숲에서 본 반푼이들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들이었다.
그야말로 오리지널 종자들.
월등한 신체 능력과 훨씬 더 발달된 지능, 최소가 그림 패러리스들을 연상케 하는 놈들이었다.
마계는 그런 곳이었다.
숲에선 강적이라 불릴 것들이 이곳에선 조무래기 취급을 받는, ‘진짜 마물’들이 득실대는 곳.
헨리는 그런 곳에 갇혀 버린 것이었다.
‘쯧, 쓸 만한 단서는 안 보이고 죄 쓸모없는 놈들만 꼬이는군.’
벌써 몇 시간째 마물들만 상대하던 차라 슬슬 질리는 감이 없잖아 있었다.
사실 놈들을 상대하는 것 자체에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헨리는 차기 마왕으로 거론되던 녀석까지 한 방에 쓰러뜨린 존재였으니까.
하지만 전투보다 헨리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끝을 알 수 없는 방랑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헨리가 허공으로 자신의 몸을 부유시켰다.
원래라면 지상에서 휴식을 취하려 했건만 바닥에 발만 붙이면 마물 놈들이 귀신같이 알아채고 득달같이 달려오니 공중에서 휴식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헨리는 바람으로 만든 의자 위에 몸을 뉘였다.
그런 다음 복잡해진 생각들을 다시 한번 정리했다.
벌써 몇 번이나 생각을 정리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클레버가 소화기에 접어들면서 이 척박한 땅에 달리 도움받을 이가 없으니 외로이 혼자서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혼자 생각을 정리해 봐도 마땅한 대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물론 완전히 대안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헨리는 고민 끝에 정말 방법이 없을 때나 실행해야 할 비장의 수를 떠올릴 순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비장의 수였다.
달리 말하자면 가급적 꺼내 들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
그렇기에 헨리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전에 어서 빨리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쐐애애액!
귓전을 찢어발기는 매서운 파공성.
헨리는 본능적으로 몸을 비틀었다.
비튼 몸체 사이로 길쭉한 무엇인가가 빠르게 헨리를 스쳐 지나갔다.
기습이었다.
덕분에 헨리는 결국 짜증이 폭발하고 말았다.
그렇잖아도 머릿속이 복잡한데, 겨우 가진 휴식 시간마저 방해를 받았으니까.
헨리가 순식간에 살기를 띄웠다.
그리고 자신에게 기습을 감행한 어리석은 존재의 위치를 재빨리 파악해 냈다.
암살자는 한 놈이었다.
놈은 나름대로 기척을 지웠다고 생각하고 바위 뒤에 몸을 숨긴 걸 테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헨리가 기척을 파악하는데 사용하는 건 ‘눈’이 아니었다.
헨리가 말했다.
“네 선택에 대한 대가를 치르리라.”
경고처럼 내뱉은 말이 눈앞에서 어둠으로 짠 실타래처럼 휘감겼다.
그것은 경고가 아니었다.
분노가 잔뜩 담긴 언령이었다.
가급적이면 효율성 때문에 사용하지 않는 것이 언령이었지만, 때때로 사람들은 묵은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비효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헨리에겐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헨리가 내뱉은 분노의 언령이 곧 여러 개의 갈퀴가 되어 놈에게로 뻗어졌다.
뻗어진 갈퀴는 이내 놈의 육체를 꿰뚫었다.
-키아아악!
날카로운 비명.
온종일 비명만 들었더니 이젠 이명이 생길 지경이다.
하지만 분노를 달래 줄 만한 위로곡들 중 적군의 비명만큼 제격인 게 없다.
헨리는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갈퀴에 끌려 나오는 암살자를 보았다.
전신 곳곳에 갈퀴가 박혀 피가 흘렀고 놈이 질질 끌려올 때마다 피로 그린 흔적들이 꼬리처럼 길게 늘어졌다.
암살자의 신장이 제법 컸다.
하지만 전신에 거적때기를 뒤집어쓰고 있어 몸뚱이를 비롯한 얼굴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 그 건방진 낯짝이나 한번 보자.”
놈을 잡아채긴 하였으나 아직 죽이진 않았으니 화가 풀리지 않았다.
헨리가 손가락을 튀겨 갈퀴를 조종했다.
그러자 갈퀴 하나가 들려 올려가며 무참하게 거적때기를 찢어발겼다.
부우욱!
천 찢어지는 소리가 들리며 암살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암살자의 얼굴을 본 헨리가 미간을 찌푸렸다.
‘리자드맨?’
오크나 고블린처럼 집단을 이루되 습한 곳에서 살아가는 게 특징인 마물이었다.
헨리는 간만에 마주친 리자드맨을 보고서 순수하게 감탄했다.
마치 동물원의 사자를 구경하듯, 딱 그 정도의 감탄이었다.
그리고 다시 손가락을 튀겼다.
짧게 감탄한 만큼 흥미도 금방 식었기 때문이다.
거적을 찢었던 갈퀴가 심판대의 기요틴처럼 들려 올라갔다.
그러고는 리자드맨의 두 눈을 향해 휘둘리려던 순간.
-자, 잠깐!
멈칫!
흑색 갈퀴가 리자드맨의 동공 앞에서 멈춰 섰다.
만약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리자드맨은 꼼짝없이 애꾸눈이 되었을 것이다.
갈퀴를 멈추게 한 것은 헨리였다.
헨리는 멈춘 갈퀴를 뒤로 물렸다.
그런 다음 지상으로 내려와 리자드맨 앞에 섰다.
이에 리자드맨의 안색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단순한 사냥감인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배고픈 위장을 채우기 위해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주특기인 투창술을 사용했다.
타이밍은 완벽했다.
놈의 등을 등지고 기척까지 완벽하게 지웠으니까.
준비를 마친 리자드맨은 온힘을 창끝에 끌어모아 있는 힘껏 던졌다.
그런데 놈은 피했고 은신한 자신의 위치까지 순식간에 찾아냈다.
또한 놈과 눈을 마주치자마자 멀리서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무시무시한 존재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놈이 자신에게 한 걸음씩 다가올수록 살아 있는 공포가 자신의 목을 옥죄여 오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헨리가 리자드맨의 코앞까지 다가온 순간.
-그, 그만!
숨이 턱밑까지 차오른 리자드맨이 간절하게 외쳤다.
씨익.
그러나 리자드맨의 외침을 들은 헨리는 씨익 하고 미소가 지어졌다.
리자드맨이 두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움츠러들었다.
그 모습을 본 헨리가 띄운 미소를 그대로 둔 채 리자드맨에게 말했다.
“너.”
-……?
“방금 마계어 했지?”
-……예?
“대답 안 해?”
-네, 네! 해, 했습니다!
마계어가 무엇인진 모르겠지만 죄여 오는 공포에 그렇다고 답했다.
그리고 리자드맨의 대답을 들은 헨리가 더더욱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어 보였다.
‘이런 변수가 있을 줄은 몰랐네.’
비명과 함께 내지른 단말마의 외침.
원래라면 단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을 마계어였겠지만 이젠 상황이 달랐다.
불완전하긴 해도 이제 헨리의 신분은 인간이 아닌 ‘신’이었다.
또한 예전부터 마계어와 환어, 그리고 신어가 같은 언어임을 쭉 의심해 왔고, 그 세 가지 모두가 같은 언어임을 입증해 냈다.
그렇기에 헨리는 똑똑히 듣고 만 것이다.
리자드맨이 내뱉는 분명한 마계어를 말이다.
대답을 들은 헨리가 한동안 히죽거리자 리자드맨은 다른 의미로 공포를 느꼈다.
헨리에겐 단순히 기쁨의 미소였지만 겁에 질린 리자드맨에겐 다른 모습으로 비추어졌기 때문이다.
예컨대 살육을 즐기는 미치광이의 모습 같은 그런 것 말이다.
그러나 리자드맨의 속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헨리가 태연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좋아, 내 말에 대답하는 걸 보니 내 말도 얼추 알아듣는 것 같고……. 이름.”
-예, 예?
“이름 없어? 지금 네 이름을 묻잖아.”
-제, 제 이름은 날카로운 비늘창입니다!
“날카로운 비늘창? 이름이 뭐가 그래? 미늘창도 아니고 비늘창이라니.”
-아, 그게…… 제가 직접 지은 이름인지라…… 죄송합니다.
“쯧쯧, 작명 센스하고는……. 그런 의미에서 네 이름은 부르기 쉽게 앞으로 가가로 하자.”
-예, 가가라니요?
“왜, 싫어?”
갑작스레 자신의 이름을 개명하려 들자 날카로운 비늘창이 기겁을 했다.
이에 헨리가 나직이 살기를 풀었다.
날카로운 비늘창의 얼굴이 또다시 잿빛이 됐다.
날카로운 비늘창이 감당하기에 헨리의 살기는 너무 버거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날카로운 비늘창이 입에 거품을 물며 말했다.
-아, 아닙니다! 아, 앞으로 제 이름은 가, 가가……! 그러니 이, 이것 좀!
“좋아, 진즉에 그래야지.”
긍정적인 대답에 헨리는 금방 살기를 거두었다.
죽다 살아난 가가.
숨을 헐떡이는 가가에게 헨리가 물었다.
“좋아, 가가. 이제 그럼 네가 머무르고 있는 곳으로 안내해.”
-제가 머무르는 곳 말입니까?
“그래.”
-저, 그건 좀…….
“음?”
엄포를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가가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이에 헨리가 반문했다.
“왜 그러지?”
-송구하오나…… 전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뭐?”
-저에겐 돌아갈 집도, 동료도 없습니다. 전 마족이 되고 난 이후부터 쭉 혼자였습니다.
집단생활은 리자드맨이 가진 큰 특징 중 하나였다.
그러나 헨리가 놀란 것은 돌아갈 곳이 없는 가가의 처지가 아니었다.
단순 마물인 줄로만 알았던 가가의 신분이 실은 마족이라는 것이었다.
‘마족이라니…….’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하지만 단순한 울음이 아닌 마계어를 구사하는 걸 보니 가가의 말이 맞는 듯했다.
‘그래서 스스로 이름을 지은 거였나?’
종(種)의 이름이 아닌 스스로가 지은 이름.
마물과 마족을 구분하는 가장 큰 차이점이었다.
헨리는 가가의 자기소개에 잠시간 놀랐다.
그러나 이내 놀란 눈동자를 추스르고 미소를 지었다.
오히려 잘됐다.
가가에게 사는 곳을 물은 이유는 가가의 거주지에 있을 다른 상급 리자드맨에게 마계의 정보를 얻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멀리 갈 필요도 없이 가가가 마족이라고 하니 가가가 가진 마계의 지식만 추려 내면 될 터였다.
헨리가 말했다.
“잘됐네, 덕분에 멀리 갈 필요가 없어졌어. 좋아, 가가. 그럼 지금부터 내가 하는 질문들에 대해 성심성의껏 답변할 수 있도록.”
다른 리자드맨에서 가가로 목표가 바뀌자 가가를 바라보는 헨리의 눈빛 또한 바뀌었다.
헨리의 번뜩이는 눈빛에, 가가가 다시금 몸을 오들오들 떨었다.
그러나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 살기가 없으니 숨통은 트였다.
질문을 받기 전, 가가가 헨리에게 물었다.
-저, 근데…….
“왜?”
-송구하오나…… 당신은 대체 누구십니까?
“나?”
헨리의 신분을 묻는 가가의 질문에 헨리가 스스로를 가리켜 보였다.
그리고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신.”
-예에?
헨리의 대답에 가가의 얼굴에 다시 한번 공포가 어렸다.
그것은 헨리가 신이라서 느끼는 공포가 아니었다.
스스로를 신이라고 소개하는 웬 강력한 미친놈에게 잘못 걸린, 자신의 암울한 미래가 보여 공포를 느낀 것이었다.
가가는 눈앞이 캄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