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5
방랑하는 신 (1)
“돌아가자.”
-예, 마스터.
본의 아니게 강림에 실패한 마왕까지 죽여 버렸다.
헨리가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골칫덩어리로 여겨지던 마왕을 처리하였으니 이 이야기를 안주 삼아 이셀란과 축배를 나눌 생각이었다.
헨리는 한낱 대형 마물에서 마왕으로 신분이 바뀐 브릴린테의 사체를 보며 잠깐 동안 상념에 잠겼다.
브릴린테는 과거에 쓰러뜨렸던 마왕에 비해 터무니없이 약해 빠졌다.
그래서 더더욱 아쉬웠다.
과거에 골든과 함께 쓰러뜨렸던 그놈도 이놈처럼 나약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놈도 이놈처럼 약해 빠졌더라면 그런 비극은 일어나지도 않았겠지.’
과거에 쓰러뜨렸던 마왕의 이름은 ‘빌바르크’.
브릴린테와는 달리 정점에 달한 흑마법과 모든 마족들을 아우르는 지배력, 그리고 상상을 초월하는 강인한 육체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며칠 밤낮에 걸친 혈투 끝에 놈을 쓰러뜨렸지만 놈은 죽기 직전 골든에게 강력한 저주를 걸었다.
그 어떤 사제도 풀 수 없는 강력한 죽음의 저주를 말이다.
그 결과, 골든은 황제로 즉위한지 얼마 되지 않아 병을 얻어 죽고 말았다.
그리고 골든의 죽음은,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나게 된 것에 대한 근본적인 시발점이 되었다.
헨리의 눈빛에 과거의 슬픔이 어렸다.
그러나 눈물을 흘리거나 하진 않았다.
과거는 과거였고 현재는 현재였으니까.
헨리가 클레버에게 말했다.
“클레버.”
-예, 마스터.
“이거, 감당할 수 있어?”
헨리는 턱짓으로 발밑에 깔린 브릴린테의 사체를 가리켰다.
그러자 클레버의 눈동자가 조그맣게 떨리기 시작하더니 눈동자만큼이나 떨리는 목소리로 헨리에게 되물었다.
-……진심이십니까?
“그럼 농담이라고 해 주랴?”
-아, 아닙니다! 마스터의 깊은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헨리는 클레버에게 브릴린테의 사체를 권했다.
기왕에 얻은 마왕의 사체다.
브릴린테가 마왕으로서 가진 것이 없으니 죽어 남긴 육체라도 전리품으로 삼고자 했다.
헨리에겐 그저 쓸모없는 고깃덩이에 불과했지만 적어도 클레버에게만큼은 세상에 둘도 없는 보물일 테니까.
감동에 젖은 클레버가 일전에 보여 주었던 슬라임 형태로 육체를 변화시켰다.
그리고 누가 뺏어먹을세라 급하게 죽은 마왕의 육체를 탐하기 시작했다.
“잘도 먹네.”
클레버가 포식을 진행하는 동안 헨리는 귀환을 준비하기로 했다.
인류 최초로 발을 디딘 마계라 그런지 신기한 점도 많았고 궁금한 점도 많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기 오래 머무를 순 없었다.
헨리에겐 아직 해야 할 일들이 많았으니까.
그렇기에 이번만큼은 본능과도 같은 마법사의 지적 호기심을 억누르기로 했다.
‘당연히 좌표는 외워 갈 테지만.’
물론 공과 사를 구분한다고 해서 쉽게 마계를 포기할 헨리는 아니었다.
언젠가, 모든 일들이 해결되고 인간계에 평화가 도래하고 나면 헨리는 그때서야 마음껏 마계 탐사에 나설 작정이었다.
그래서 아쉬운 대로 우선은 나중에 다시 이곳으로 올 수 있게끔 텔레포트 전용 좌표 값을 계산해 두기로 했다.
‘쉽네.’
생각보다 계산은 쉬웠다.
늘 하던 대로 계산식을 적용해 보니 좌표 값을 금방 구할 수 있었다.
계산을 마친 헨리는 클레버를 바라보았다.
클레버를 본 헨리가 말했다.
“……벌써 다 먹은 거냐?”
-구렇숩니다.
발음이 어눌했다.
마치 배가 터질 때까지 음식물을 밀어 넣고도 양 볼 가득 음식을 입에 문 미련한 햄스터를 보는 것만 같았다.
그만큼 마왕의 육체가 거대하단 뜻이겠지.
헨리는 익숙하단 듯이 으레 물었다.
“휴식은 얼마나 필요하지?”
-좀 오뤠 걸릴 거 같숩니다.
“쉬어.”
-감솨합뉘다, 마스터.
역시나 어눌한 발음과 함께, 클레버는 감사 인사를 전한 뒤 모습을 감추었다.
이로써 귀환 준비는 모두 끝마친 셈이었다.
헨리는 클레버를 역소환시킨 후, 눈을 감고 앞으로 세 걸음을 걸었다.
습관처럼 굳어진 무영창 텔레포트를 사용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의아하게도 세 걸음을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풍경이 그대로였다.
“음?”
이상했다.
혹여나 실수를 범했는가 싶어 다시 한 번 걸음과 함께 마법을 영창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주변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이럴 리가 없는데?’
사실 헨리가 마법의 영창을 실패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헨리가 극도로 싫어하는 것들 중 하나가 바로, 알고 있는 마법의 영창을 계산 실수 따위로 날려 먹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헨리의 미간이 좁혀졌다.
대체 왜?
마계라고 해서 마력이 응집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마력의 흐름이라든지 체내로 마력을 흡수하는 행위 등, 마력과 관련된 모든 행위가 통용됨을 이미 일찍이 확인했다.
그런데 왜 하필 텔레포트만 발동되지 않는 건지 헨리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에 헨리는 잠깐 동안 상념에 잠겼다.
그리고 즉시 마법 하나를 영창했다.
“블링크.”
슈슉!
시야에 닿는 곳, 혹은 가까운 거리로 순간 이동을 할 수 있게 해 주는 간단한 이동 마법.
헨리는 시선이 닿은 곳으로 순식간에 이동하는 것에 성공했다.
그렇다면 이동 마법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는 뜻.
그런데 텔레포트는 왜?
순간, 헨리의 머릿속에 한 가지 가설이 떠올랐다.
‘설마, 완전히 다른 차원이라서?’
일전에 마계의 틈을 닫지 못했던 이유는 마계의 틈이 다른 차원과 연결된 차원 단위의 문제이기 때문이었다.
8서클의 경지를 이루긴 했지만 아직 헨리는 차원 단위의 문제를 해결할 만큼의 힘은 없었으니까.
물론 마계로 납치되기 직전, 준비해 두었던 마법에 신력을 더하니 차원의 틈을 닫는 것에 성공할 뻔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헨리는 시도의 결과도 확인해 보지 못한 채 이곳으로 납치되었으니 결과적으론 마법의 성공 유무를 알지 못했다.
헨리는 고개를 들었다.
하늘에는 여전히 보랏빛 은하수가 우주를 닮은 검은 하늘 속에서 아름답게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헨리는 지금이 낮인지 밤이지 알 턱이 없었다.
마계의 모든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헨리는 시선을 옮겼다.
시선을 옮겨 헨리가 찾으려는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을 이리로 옮겨 놓은 ‘마계의 틈’이었다.
좀 전까진 브릴린테와의 결투라든지 텔레포트의 좌표 값 계산, 클레버의 포식 등으로 인해 미처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다.
막연히 여느 때처럼 텔레포트 한 번이면 익숙하게 원래 살던 곳으로 되돌아 갈 수 있을 줄 알았으니까.
그러나 텔레포트를 사용할 수 없게 되자 헨리는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할 수 있었다.
귀환의 불가.
바꿔서 이야기하자면 영원히 마계에 표류하는 신세가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생각이 이쯤 미치자 헨리는 피가 차게 식는 듯했다.
‘방법을 찾아야 해.’
학자의 관점에선 환영해 마지않을 일이었다.
미지의 영역이라고 불리는 마계에 오랫동안 잔존해 있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헨리는 학자임과 동시에 마법사, 그리고 모두를 책임져야 하는 막중한 사명감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마계에 고립되는 일만큼은 막아야만 했다.
그러나 상황이 좋지 않았다.
헨리는 마계에 대한 지식이 없었고 유일한 도우미인 클레버는 현재 소화기에 접어들었다.
헨리는 고심 끝에 우선은 이동하기로 했다.
자리에서 머리만 싸매고 있는다고 해서 일이 해결되지 않을 것을 알았으니까.
그렇게 미지의 영역에서 방랑이 시작되었다.
* * *
헨리가 칼리번 요새로 떠난 이후, 무슈에 남은 이들은 헨리의 의견대로 인류의 새로운 출발을 위한 계획들을 논의했다.
아니, 사실 논제는 이미 제출되었고 그에 따른 세부적인 계획들만 실행하면 됐다.
하지만 이것들이 실행되기 위해선 세상을 점령하고 있는 맹신자들에 대한 문제부터 처리해야만 했다.
모든 일들에는 순서란 게 있으니까.
-쿠아아아!
설탑.
그곳에서 때 아닌 비명이 울려 퍼졌다.
비명의 주인은 다름 아닌 맹신자들이었다.
맹신자들은 설탑 지하에 마련된 감옥에 갇혀 있었다.
감옥 안에 수감된 맹신자들을 보며 로어가 말했다.
“다시 생각해도 참 아이러니한 일이군.”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부탑주님.”
“그렇긴 하지만…… 쯧쯧, 아서스 그놈이 참 거대한 족적을 남기고 갔어.”
로어는 다시 한번 죽은 아서스를 욕할 수밖에 없었다.
아서스가 개인의 욕심을 위해 대륙에 남긴 상처는 그야말로 씻을 수 없는 것.
하물며 그에 대한 해결책도 내놓지 않고 죽어 버렸으니 생존자들에겐 더할 나위 없는 저주였다.
저주.
그것은 저주가 맞았다.
신력을 터득해 마법의 신이 된 헨리나 그에 준하는 신력을 가진 성녀의 신력이, 맹신자들에겐 아무런 소용이 없었으니까.
그래서 마법사들이 모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들의 탄생 배경에는 야누스의 ‘죽음의 박탈’ 같은 권능이 일부 끼어 있긴 했다.
하지만 조금 끼어 있는 그깟 권능보단 드라칸의 금기를 어긴 어둠의 인간학이 맹신자 탄생의 주된 요소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헨리는 마법사들에게 말했다.
마법 때문에 맹신자가 탄생하였으니 마법으로 다시 되돌려 놓아야 한다고.
그러므로 맹신자에 대한 문제 해결은 오롯이 마법사들의 몫이 되었다.
-키아아아!
금방이라도 로어를 잡아먹을 듯이 달려드는 맹신자 한 명.
눈앞에 갇혀 있는 맹신자들은 단순히 죽이지 않기 위해 감옥에 억류해 놓은 것이 아니었다.
저들은 실험체였다.
드라칸이 끝없는 인체 실험으로 괴물들을 만들었으니 그 괴물들을 다시 없애기 위해선 그 괴물들을 파헤쳐 볼 수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이유가 합당하다고 해도, 평생을 금기시했던 인체 실험을 진행하기엔 여러모로 거부감이 들었다.
그래서 로어가 한숨을 내쉰 것이다.
로어가 말했다.
“아가스는?”
“그게…… 아직 마음의 준비를 끝마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 재촉할 필요는 없겠지.”
아가스 드루이드.
탑의 일곱 현자 중 생물학의 정점에 달한 자.
그리고 그의 성을 이은 휴마니아 드루이드.
생물학 중에서도 인간학만을 공부해 온 부학파장의 이름이었다.
처음 인체 실험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 두 사람의 반대가 극심했다.
인간학의 길을 걷는 마법사들은 인간을 이롭게 하기 위해 인간학이라는 학문을 택한 자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도 인류애가 넘쳤고 인륜을 중요시했다.
그런 그들에게 인체 실험이라니, 아무리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라지만 극심한 거부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맹신자들을 원래대로 되돌려 놓는 연구를 진행하기 위해선 인간학에 대한 지식이 해박한 두 사람의 도움이 그 누구보다도 절실했다.
-키에에에…….
울음 아닌 울음을 내뱉는 맹신자들을 보며 로어가 말했다.
“내 능력이 모자라다는 게 그저 아쉬울 따름이구만.”
“그리 생각하지 마시지요, 부탑주님. 마법의 신께서도 해결하지 못한 일입니다. 그러니 너무 괘념치 않는 게 정신 건강에 이롭습니다.”
“허허, 그렇기야 하겠지만…… 참 아쉽군.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되돌리고 싶을 정도야.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인체 실험은 물론이고, 아니 애초에 만악의 근원을 없애 버릴 테지.”
“하하, 꿈만 같군요. 하지만 시간은…… 아니, 시간과 관련된 마법은 8서클을 이룩하신 대마법사님조차 도달하지 못한 영역이니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자네는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로군. 하긴, 그게 현실적인 반응이긴 하지. 하지만 난 여전히 믿고 있네. 이 세상에 마법으로 해내지 못할 일은 없다고 말이야.”
“그 말씀엔 저도 동감입니다.”
끔찍한 현실 앞에서, 두 마법사는 행복한 상상들을 나누었다.
생각만 해도 미소가 지어지는 그런 상상들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