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서클 마법사의 환생-331화 (331/522)

# 331

지옥의 구원자 (2)

“헨리……?”

이셀란이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에 헨리가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대꾸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일이 너무 바쁜 나머지 이곳을 미처 신경 쓰지 못했어요.”

헨리는 곁눈질로 주변 상황을 살폈다.

초상집 같은 분위기, 성벽 아래 널브러진 맹신자들의 시체, 그리고 그것과 뒤섞여 있는 죽은 병사들의 잔해.

맹신자들의 마수가 여기까지 미쳤던 것이다.

“네가 여길 어떻게……?”

마치 꿈을 꾸는 듯한 표정으로, 이셀란은 반쯤 입을 벌려 보였다.

그리고 끊임없이 놀랐다.

대체 이 시각에, 헨리가 무슨 수로 이 타이밍에 나타나 자신을 위로한단 말인가?

헨리가 대답했다.

“글쎄요, 자세한 이야기는 장소를 옮겨서 나누는 게 어떨까요?”

아무래도 긴 밤이 될 듯싶었다.

* * *

이셀란의 방으로 장소를 옮긴 두 사람은 꽤 오랜 시간에 걸쳐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론 헨리가 대부분 말했고 이셀란은 거의 듣기만 했다.

술 한 잔 없이 이어진 대화는 약 두어 시간에 걸쳐 끝이 났다.

헨리의 말이 끝나 갈 때쯤, 이셀란은 다른 의미로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네가 마법의 신이 되서 내 목소리를 듣고 이곳까지 온 거라고?”

“그렇죠.”

“…….”

뉴크가 죽은 직후, 그 타이밍에 헨리가 나타날 수 있었던 이유.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닌 헨리가 이셀란의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뉴크가 성벽 아래로 떨어졌을 때, 이셀란 마법 같은 기적의 힘을 다루지 못한 자신의 능력을 원망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원망은 기도가 아니었다.

하지만 일전에 만난 라를 통해 헨리는 ‘불완전한 마법의 신’에 대해 좀 더 본질적으로 고찰했다.

고찰은 공부가 되었고, 그것은 곧 깨달음이 됐다.

덕분에 헨리는 자신에 대한 믿음뿐만 아니라 자신이 가깝게 여기는 이들의 목소리 또한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공교롭게도 불완전한 신이 누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권능들 중 하나였다.

‘운이 좋았어. 덕분에 이셀란의 목소리를 들었으니까.’

기도의 범위를 확장한 후 헨리가 처음 이셀란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헨리는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당장 처리해야 될 것들이 눈앞에 넘치다 보니 보급으로 생을 연명하고 있던 칼리번 요새의 존재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이유 때문에 이 새벽에 이셀란을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헨리가 신의 권능으로 들은 이셀란의 목소리에는, 멀리 있는 헨리조차도 느껴질 만큼 아주 처절하고 짙은 절망이 어려 있었기 때문이다.

절망.

사람들은 누구나 절망이라는 감정을 한번쯤은 겪어 본다.

그렇기에 내면에 절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없다.

하지만 여태껏 헨리가 보아 온 이셀란은 정말로 절망이 어울리지 않는 사내였다.

늘 쾌활하고 자신감과 활력이 넘쳤다.

또한 강한 리더십과 그에 걸맞은 능력까지 갖추고 있으니,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그런 사내였다.

그런 이셀란에게 절망이라니?

그렇기 때문에 헨리는 모든 일들을 제쳐 두고 한걸음에 달려온 것이다.

혹시라도 절망의 구렁텅이 속에 빠져 있을지도 모를 이셀란을 구해 내기 위해서.

헨리의 대답을 들은 이셀란이 양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그러고는 벌어진 손틈 사이로 중얼거렸다.

“갑자기 나타나선 믿기 힘든 말들만 골라서 하는군…….”

확실히 헨리가 나열한 정보들은 하나같이 믿기 힘든 것들 뿐이었다.

자신이 요새에서 마물들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사이 악신에 의해 인류가 멸망할 뻔했고, 그러한 사태를 헨리가 신이 되어 막아 냈다고 하니 말이다.

그러나 언뜻 들어도 허무맹랑하기 짝이 없는 말들이었지만 우습게도 그것들은 모두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말들이 거짓이나 과장 하나 보태지 않은 명백한 사실임을 알았기에, 이셀란은 허탈하게나마 웃음을 터뜨릴 수 있었다.

“하, 하하하…….”

“왜 웃으세요?”

이셀란이 웃음을 터뜨리자 헨리가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마른세수를 하던 이셀란이 양 무릎에 팔뚝을 올린 후 헨리에게 느끼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크크크…… 너 같으면 웃음이 안 나오겠냐? 당장 오늘 밤만 해도 요새의 존망을 장담하지 못했는데 그런 지옥 속에서 한 줄기의 빛과 같은 구원자가 나타났는데.”

“하긴 부사령관님…… 아니지, 이젠 사령관님이죠? 사령관님 입장에선 그럴 만도 하겠네요.”

“그래 그런 셈이지……. 아니, 잠깐만? 이놈 이거, 생각해 보니까 엄청 괘씸한 놈이었네?”

“예? 괘씸하다니요?”

“그렇잖아! 네가 평소에 날 조금이라도 신경 쓰고 있었다면 며칠은 더 일찍 왔을 거 아냐! 그럼 오늘 내 병사들은 개죽음 당하지 않았을 테고!”

“그, 그건…….”

“망할 놈……! 예나 지금이나 뺀질거리기만 하지.”

“아니, 구원자한테 그렇게 막말해도 되는 겁니까?”

“그래서, 뭐? 내가 막말하면 다시 돌아가기라도 할 테냐?”

“……못 말리겠네요, 정말.”

간만에 주고받는 농담에, 이셀란은 진심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속이 후련했다.

아니, 후련하면서도 한편으론 아쉬웠다.

하지만 단언컨대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가장 행복하다고 이셀란은 장담할 수 있었다.

이셀란은 한바탕 호쾌하게 웃어 보인 뒤 그제야 못다 물은 질문들을 건네기 시작했다.

“좋아, 그건 그렇고…… 로난 그놈은 지금 뭐 하고 있냐?”

이셀란이 로난의 안부를 물었다.

이에 헨리는 올렸던 입꼬리를 내리고 조금 숙연해진 목소리로 천천히 대답을 내뱉었다.

“로난은…… 안타깝게도 아서스에게 붙어먹은 킹턴의 손에 죽었습니다.”

“……그렇군.”

헨리의 기억이 맞다면, 자신이 만난 이들 중 로난의 안부를 가장 먼저 물어봐 준 사람은 바로 이셀란이었다.

로난의 비보를 접한 이셀란이 씁쓸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셀란이 말했다.

“쯧, 마음 같아선 녀석을 추모하는 술이라도 한 잔 올리고 싶지만…… 녀석에 대한 위로는 모든 일들이 정리되고 난 뒤에 아주 성대하게 해 주자고.”

“좋은 생각이십니다.”

“좋아! 그럼 일단 눈부터 좀 붙이자. 네놈 덕분에 긴장이 완전히 풀려 버렸거든.”

“좋은 생각이네요. 그럼 일단 한숨 주무세요. 시간이 되면 제가 깨워 드리겠습니다.”

“넌 어디서 자고?”

“전 필요 없습니다.”

“뭐?”

“신이 되고 난 후로 느낀 건데, 단순한 기분 탓일 수도 있겠지만 별로 피곤하지가 않더라고요. 아, 배고픔도요!”

“신은…… 신이라는 건가?”

“뭐, 그럴 지도 모르죠. 아무튼 오늘 밤은 저에게 요새를 맡기시고 편안히 주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요새를 맡긴다.’라……. 말이 참 웃기군. 과거의 너를 생각하면 그저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구먼.”

“하지만 미래의 저를 생각하면 그저 경외심밖에 들지 않을 겁니다. 잡담은 여기까지 하고 이제 그만 편히 주무세요.”

“나도 그러고 싶다. 하지만 선잠이 습관처럼 몸에 배서 내가 푹 자고 싶다고 잘 수 있는 게…….”

“슬립.”

털썩.

길어지는 대화에 헨리는 이셀란에게 수면 마법을 걸었다.

생각 외로 마법이 잘 통했다.

이 또한 헨리라는 존재가 한낱 인간이 아닌 신의 경지에 올랐기에 가능한 일일 수도 있었다.

헨리는 의자에 기대 쓰러진 이셀란을 들어 올린 후 근처의 침대에 눕혔다.

그런 다음 곤히 잠든 이셀란에게 나직이 말했다.

“잠에서 깨어나면 걱정하던 일의 대부분이 해결돼 있을 겁니다. 제 이름을 걸고 약속드리죠.”

헨리는 잠든 이셀란에게 자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했다.

자신의 이름을 건 맹세.

인간이 자신의 이름을 걸땐 그것은 단순히 명예를 거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헨리는 불완전하긴 하지만 이젠 어엿한 한 명의 신이 되었다.

그러니 그런 헨리가 자신의 이름을 걸었다는 건, 신이 자신의 존재를 걸고 맹세한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인간의 명예와는 차원이 다른 맹세!

맹세를 마친 헨리가 이셀란의 방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 * *

헨리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요새의 가장 높은 곳이었다.

아니, 요새의 가장 높은 곳보다 좀 더 높은 곳, 하늘이었다.

헨리는 요새가 자신의 발아래에 놓일 때까지 떠올랐다.

마침내 정문과 후문 전체가 보일 때까지 높아졌을 때 그제야 비상하는 것을 멈추었다.

“상은 똑같이 받아야 공평하지. 고생은 이셀란 혼자서 한 게 아니니까.”

헨리가 요새의 가장 높은 곳으로 도약한 이유.

그것은 바로 이셀란에게 그랬던 것처럼 요새를 지키던 병사 모두에게 편안한 숙면을 선물하기 위함이었다.

딱!

결심을 마친 헨리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헨리의 전신으로부터 은빛 광명들이, 반딧불이의 그것처럼 바람을 타고 요새 전역에 흩뿌려졌다.

요새 전체에 고요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동시에, 왠지 모르게 날 선 기운들이 사라진 듯했다.

-키에에에에!

-쿠아아아아!

그때였다.

요새가 침묵에 빠지자마자, 헨리는 정문과 후문으로부터 갖가지 기괴한 울음소리를 더 선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맹신자들과 숲의 마물들이 내는 울음소리였다.

울음소리를 들은 헨리가 말했다.

“엘라곤.”

-뀨뀨!

“보이는 족족 얼려 버려.”

-뀨우우우!

헨리는 엘라곤에 후문 쪽을 향해 턱짓했다.

그러자 엘라곤이 이마에 경례 제스처를 취해 보인 후 허공을 비행해 후문까지 단숨에 날아갔다.

헨리로선 최선의 대처법이었다.

맹신자가 아무리 위협적이라고 한들, 아직 그들을 원래대로 되돌릴 방법을 찾지 못한 상태에서 그들 모두를 죽이기엔 그 수가 너무나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헨리는 요새로 몰려드는 맹신자 전체를 엘라곤을 통해 얼려 버릴 작정이었다.

마나라면 이젠 차고 넘치다 못해 영원히 마르지 않을 정도가 되었으니까.

멀어지는 엘라곤을 보며 헨리는 생각했다.

‘엘라곤 저 녀석, 어째 키가 좀 더 커진 것 같은데?’

헨리의 성장은 곧 엘라곤의 성장.

엘라곤은 꾸준히 자라고 있었다.

헨리는 시선을 돌려 정문 쪽에 있는 마물의 숲을 보았다.

‘후문 쪽은 얼추 해결된 것 같고, 남은 건 마물의 숲인데……. 으음, 저긴 뭔가 좀 이상하단 말이지.’

맹신자들은 아서스의 작품이니 사시사철 울음소리가 들려도 이상할 게 없었다.

하지만 마물의 숲은?

후슬러가 모시던 교단의 메시아를 죽였으니 새로운 마왕이 강림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물들의 폭주가 이어지고 있다는 건 헨리가 모르는 무슨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었다.

‘오랜만에 거길 좀 가 봐야겠어.’

헨리는 가볍게 허공을 걸었다.

그러자 헨리의 인영이 순식간에 사라지더니, 곧이어 마물의 숲 입구에 모습을 드러냈다.

숲의 입구이자 숲에서 가장 안전한 구역이라고 알려진 9급 구역에 말이다.

‘마음 같아선 곧바로 본진을 휘젓고 싶다마는…… 사태가 사태이니만큼 차근차근 모조리 짓밟으며 전진해 주마.’

헨리의 실력이라면 목표로 하는 1급 구역까지 단숨에 이동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헨리는 그러지 않았다.

물론 그 이유에는 1급 구역까지 걸어가는 동안 혹시라도 이상 징후에 대한 자그마한 단서라도 포착되지 않을까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이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여태껏 놈들에게 시달렸을 요새의 병사들을 위해 소소하게나마 복수를 해 주기 위함이었다.

결심을 마친 헨리가 앞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손끝으로부터 화염의 줄기가 뻗어져 나오더니 곧 뱀이 자신의 꼬리를 물듯 동그랗고 거대한 고리가 만들어졌다.

고리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처음 만들어진 화염 속성의 고리를 비롯하여 닿기만 해도 얼어붙을 정도로 차가운 물, 베일 듯한 바람, 모든 걸 새카맣게 태워 내는 번개 등 갖가지 속성들의 고리 또한 줄지어서 만들어졌다.

헨리는 그것을 전차의 바퀴를 닮았다 하여 가볍게 ‘파괴 전차’라고 이름 짓기로 했다.

전차에 탑승한 헨리가 말했다.

“쇼 타임이다, 이 개자식들아.”

마물의 숲에 멸망의 소용돌이가 도래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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