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2
The New God (1)
라.
여신은 분명히 그를 ‘라’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헨리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라……라면, 사막의 그?’
갑작스러운 라의 등장에, 뜨겁게 달아올랐던 헨리의 피가 차갑게 식는 듯했다.
헨리가 멀뚱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자 매가 한껏 인상을 찡그리며 다시 한번 헨리를 다그쳤다.
-뭘 쳐다봐, 이 멍청한 놈아!
매의 머리를 가진 라는 상상했던 것과는 달리 매우 걸쭉한 입담을 가진 신이었다.
라는 사막의 전사들을 연상케 하는 구릿빛 근육을 앞세워 헨리가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헨리를 지나쳐 여신에게 따져 묻듯 그녀를 다그쳤다.
-아이린, 지금 스무 고개라도 하자는 거야, 뭐야? 알기 쉽게 설명해 줘도 모자랄 판에 신탁 내리듯이 뜬구름 잡는 이야기나 하고 있고 말이야! 지금이 고상한 척이나 하고 있을 때냐고!
-많이 흥분하셨습니다, 라 님.
-흥분은 개뿔!
라는 꽤나 격정적으로 손짓해 가며 그녀를 나무랐다.
그리고 충분히 역정을 냈다고 생각했는지 이번에는 고개를 홱 돌려 헨리를 쳐다보았다.
라가 고개를 돌리자 헨리가 긴장하기 시작했다.
라가 말했다.
-이런 놈이 마법의 신이라니……. 이봐, 신입. 내 소개는 아이린한테 들었을 테니 생략하도록 하고, 지금부턴 내가 설명하도록 할 테니 잘 듣도록 해.
“……알겠습니다.”
그 넘치는 패기에, 헨리는 선뜻 그러겠다고 답했다.
라의 설명이 이어졌다.
-네가 인간에서 신이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것은 내가 너에게 내 신체(信體)의 일부를 너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신체라면, 그 달걀을 닮은 씨앗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내 살점이지. 난 그것을 헤드자온에게 주었고 헤드자온은 헤라리온에게, 헤라리온은 너에게 전달했다. 그리고 그것을 받은 넌 8서클이라는 유일무이한 존재로 거듭나면서 최소한의 자격을 갖추게 되었다. 그 증거로 내 살점이 너의 몸에 스며들어 새로운 신이 될 수 있는 ‘싹’을 틔워 냈으니까.
헨리는 라의 말을 들으며 천천히 나름대로의 정리를 했다.
라의 설명이 계속 됐다.
-모든 신들은 처음 신이 되었을 때 있으나 마나한 신력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래서 대부분의 어린 신들은 자신이 신인지조차 깨닫지 못하고 죽는 경우가 허다하지. 그러니 너 또한 인간에서 신이 되었다고는 하나, 있으나 마나한 신력 때문에 신도 아닌 반쪽짜리 대리자인 아서스에게 죽을 뻔한 것이고.
“반쪽짜리 대리자라면…… 아서스는 신의 영역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놈은 말 그대로 야누스 놈의 꼭두각시에 불과해. 그래서 대륙의 대부분을 집어삼켰으면서도 고작 그 정도 신력밖에 가지지 못한 것이고. 그게 신이 아닌 인간이 가지는 한계지. 하지만 넌 다르다. 넌 인간이 아닌 신이 됐다. 그러니 너에 대한 믿음, 즉 짙은 신앙심만 있다면 얼마든지 아서스 같은 놈 따윈 한 방에 해치울 수 있다는 말이다.
라는 인간과 신이 가질 수 있는 힘의 차이에 대해 설명했다.
라의 설명을 듣던 헨리는 생각의 정리 끝에 라에게 물었다.
“그럼 같은 대리자인 헤라리온은 왜 아서스를 상대할 수 없었죠? 아이린 님의 대리자인 성녀는 또 어떻고요? 처음부터 두 사람을 앞세워 아서스를 제압했으면 일이 이렇게까지 커지진 않았을 것 아닙니까?”
-아니, 그건 불가능하다.
“왜죠?”
-우선 사랑과 평화의 여신인 아이린은 타인을 함부로 해칠 수 없어. 그녀는 사랑과 평화에 대한 믿음 속에서 태어난 존재이기 때문에 지키고 베푸는 것 이외엔 아무것도 할 수가 없게 돼 있다.
“그럼 라 님은요?”
-난 야누스와 대적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존재이긴 하지. 하지만 놈을 저지하기 위해 나섰을 땐 이미 너무 늦은 뒤였다. 놈은 잠깐 사이에 말도 안 되는 방법으로 신도들을 늘렸고, 그 끔찍한 방법으로 늘린 신도들 덕분에 이젠 나보다도 훨씬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됐거든. 그리고 결정적으로…… 내 유일한 대리자였던 헤라리온은 아서스에 비해 신력을 담는 그릇이 너무 작았어.
“그런……!”
-아서스는 보통의 인간이 아니다. 그건 그 누구보다도 네가 더 잘 알 텐데? 그리고 놈이 가진 성향은, 야누스가 추구하는 방향과 너무나도 잘 맞아떨어졌지. 덕분에 아서스는 과거의 내 대리자였던 헤라볼라만큼이나 뛰어난 대리자로 거듭날 수 있었고 놈은 현재 고작해야 인간 대리자인 주제에 반신에 가까운 신력을 손에 넣게 되었다.
“그럼 이제 겨우 싹을 틔운 저는 대체 무슨 방법으로 놈과 맞서야 한다는 것입니까?”
-그건 아이린이 말한 대로다. 너는 신력의 싹을 틔워 신이 되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싹을 성장시키는데 필요한 양분인 마법에 대한 믿음을 등한시하지 않았느냐?
“제가 마법을 믿지 않았다니요?”
-양심도 없는 놈! 가슴에 손을 얹고 잘 생각해 봐라. 거듭된 패배와 동료들의 죽음을 지켜보며, 네놈은 네놈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마법에 더 이상 기대를 걸지 않았지. 그게 얼마나 큰 실수인지 모르겠느냐? 마법의 신인 네놈조차도 마법을 믿지 않는데, 다른 놈들이 널 믿어 봤자 무얼 하겠느냔 말이다!
라는 헨리의 잘못을 요목 조목 짚어 내며 헨리를 벼락같이 꾸짖었다.
그리고 헨리는, 그제야 어느 순간부터 무기력함에 빠져 모든 것을 포기하려 했던 과거의 자신을 떠올릴 수 있었다.
-정신 차려라, 마법의 신! 넌 최초의 마법의 신이다! 네가 바로 모든 마법사들의 신인데 마법사들의 신이 마법을 믿지 못한다면 네놈의 존재는 대체 무어란 말이냐?
‘마법의……신……!’
마법의 신.
그리고 모든 마법사들의 신.
헨리는 그 말들을 곱씹었다.
헨리는 그동안 대마법사나 대현자 등, 수많은 별호들로 불리며 마법사를 비롯한 대륙의 모든 이들에게 최고의 마법사라고 칭송되어 왔다.
그중에는 ‘마법의 신’ 같은 우스갯소리와도 같은 칭송도 있다.
하지만 헨리는 알지 못했다.
그런 우스갯소리처럼 던진 말들이 하나둘씩 모여 현재의 결과를 만들어 냈다는 사실을 말이다.
헨리는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멍한 표정으로 마법의 신이라는 말을 중얼거렸다.
-너에겐 아직 충분한 승산이 있다. 아직 인류는 멸망하지 않았고, 무슈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모든 이들이 너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도 너는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냐? 귀를 기울여라, 헨리!
라의 격려 어린 다그침에, 헨리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대륙의 끝과 끝에 떨어져 있는 그들의 목소리를, 대체 무슨 수로 들으라는 건지 헨리는 전혀 감을 잡지는 못했지만.
이 모든 것들의 근간이 믿음이라면, 헨리는 기꺼이 그 믿음이란 것을 활용해 보기로 했다.
그래서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 그들의 목소리와 믿음이 들린다고 ‘믿었다’.
헨리는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자 잔잔한 수면 위에 돌을 던지듯, 조그마한 메아리 같은 소리들이 저 깊은 곳 어디에서부터인가 조금씩 들려오는 듯했다.
-집중해라, 헨리. 신이 되었으면 그에 걸맞게 행동해라. 너는 대리자 같은 인간 따위가 아닌 무려 ‘신’이라는 존재가 되었다. 그러니 네가 가진 신력의 그릇은, 기껏해야 신의 대리자밖에 안 되는 아서스와는 달리,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무한한 것임을 항상 명심해야만 한다, 헨리.
라는 진심을 다해 조언해 주었다.
그것은 이제 막 싹을 틔워 낸 어린 신을 위한 선배 신의 조언이었다.
그리고 이젠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 막을 수 없을 만큼 커져 버린 야누스에 대한 저지와, 아서스가 불러일으켜 올 대륙의 최후를 막기 위한 모두의 바람이기도 했다.
헨리는 더욱 더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자 메아리치듯 웅얼거리던 소리들이 차츰차츰 들려오기 시작했다.
-대마법사님, 부디, 이 악몽 같은 현실에 종지부를 찍어 주세요.
-헨리, 너만 믿는다.
-헨리 님, 제발 아서스를 죽여 주세요.
-헨리!
헨리를 부르는 다양한 호칭과 그 뒤를 잇는 부탁들이 귓전에 아른거렸다.
들리는 목소리들은 각기 다른 말들을 내뱉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뜻은 모두가 같았다.
아서스에 대한 죽음.
그리고 그런 아서스를, 반드시 헨리가 쓰러뜨릴 수 있을 것이라는 강렬한 믿음이 있었다.
고오오오……!
귓가에 아른거리던 소리를 명확히 구분할 수 있게 되자, 헨리는 전신에서 아이린에게 보았던 황금빛 기운들이 자신의 몸에서 샘솟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라가 말했다.
-그래, 바로 그거다, 헨리!
“라 님…….”
-절대로 너에 대한 믿음을 잃어선 안 된다. 마법의 신인 네가 네 스스로를 믿지 못한다면. 그땐 더 이상 그 어떤 것도 너를 구원할 수 없게 된다. 세상의 구원은 네 손에 달려 있단 걸 명심해라, 헨리.
조언을 끝으로, 시야가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흐릿해지는 시야 사이로 라와 아이린의 모습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으며 헨리는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모두들.’
번쩍!
황금빛 광명이 눈앞에 번쩍였다.
그리고 헨리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헨리의 눈앞에는 자신의 가슴에 엎드려 흐느끼는 성녀가 있었다.
“흐흐흑…… 마법사님……!”
헨리는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절망 어린 현실의 무게처럼 무겁게만 느껴지던 눈꺼풀이 이젠 더 이상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깃털처럼 가볍게 느껴졌다.
그리고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손목과 발목에도 힘을 주어 보았다.
꿈틀.
잘려 나간 단면처럼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던 감각들이 이제는 완전히 제 것처럼 느껴졌다.
헨리는 들어 올린 눈꺼풀을 다시 반쯤 감았다.
그런 다음 전신 곳곳을 꿰뚫었던 창의 흔적들을 향해 감각을 더듬어 보았다.
시원하게 났던 바람구멍들이 모두 메꿔져 있었다.
현실에서 유리된 듯 붕 떠 있던 감각이 차츰차츰 현실과 동화되었다.
피부 결을 스치는 바람이 느껴졌다.
바닥을 적신 축축한 핏물들이 느껴졌다.
피비린내가 코를 찌르는 것이 느껴졌다.
헨리는 그 피비린내마저 몹시 반갑게 느껴졌다.
몸이 가벼웠다.
잠시나마 들어 올렸던 눈꺼풀마저 마치 다시 태어난 것처럼 몸이 가볍고 기분이 상쾌했다.
헨리는 반쯤 감았던 눈을 완전히 떴다.
그리고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흐느끼는 성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서 조그맣게 속삭였다.
“슬립.”
털썩.
가장 가벼운 등급의 수면 마법이 성녀에게 스며들며 그녀는 탈진하듯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서스가 말했다.
“호오…… 역시 성녀는 성녀인가? 정말로 새것처럼 다시 살려 놓을 줄이야……!”
아서스는 여전히 헨리를 장난감 정도로 취급했다.
이에 헨리는 쓰러진 성녀를 옆에 뉘이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에서 일어나 전신을 살펴보니, 꿈속에서 보았던 것과는 달리 걸친 갑옷들은 여전히 넝마처럼 마모되어 있었다.
이에 헨리가 조그맣게 속삭였다.
“착갑.”
지이잉.
여분의 콜아머는 얼마든지 있다.
헨리가 시동어를 외자, 마모된 갑옷들이 역소환되며 새로운 콜아머가 전신에 덧씌워졌다.
그 모습을 본 아서스가 큭큭거리며 웃었다.
“크큭, 그래! 재정비를 해야 다시 싸울 힘도 나겠지! 얼마든지 재정비해라. 그 정도는 얼마든지 기다려 줄 테니까 말이야.”
아서스가 비아냥거렸다.
하지만 헨리는 여전히 반응하지 않았다.
대신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귀를 기울였다.
귀를 기울이자, 헨리는 자기도 모르게 천천히 입꼬리가 올라갔다.
다시 눈을 떴다.
그러나 살며시 올라간 입꼬리는, 그대로 미소가 되어 굳어졌다.
헨리의 미소를 본 아서스가 의아하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웃어? 설마 너…… 미쳐 버리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그런 거라면 정말 실망인데.”
아서스는 진심으로 헨리의 안위를 걱정했다.
성녀의 치유술로 겨우 고쳐 낸 장난감이, 완전히 고쳐진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이에 헨리는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올린 후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검지를 길게 내뻗은 후, 성녀에게 그랬던 것처럼 조용히 읊조렸다.
“매직 미사일.”
우우웅-!
헨리가 시동어를 외자, 검지 끝에 황금빛 마력이 밀집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느 매직 미사일과 같이 평범한 빛줄기를 뿜어냈다.
피융!
한 줄기의 빛이 헨리의 검지를 벗어났다.
목적지는 아서스의 가슴.
아서스는 날아오는 매직 미사일을 보며 조금도 미동하지 않았다.
대신 여느 때와 같이 신력을 전개하여 마법을 흘려보낼 준비를 했다.
그리고 헨리의 매직 미사일이 아서스의 가슴팍에 닿는 그 순간.
“커헉!”
아서스의 입에서 짧은 신음과 함께 핏물이 뿜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