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서클 마법사의 환생-321화 (321/522)

# 321

아포칼립스 (5)

-헨리 모리스.

희미해져 가는 의식 사이로, 헨리는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 목소리는 성녀도 아서스의 것도 아닌 전혀 낯선 존재의 것이었다.

그리고 몹시 기이하게도, 그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헨리는 왠지 모를 굉장한 편안함을 느꼈다.

‘이건……?’

전신에 따뜻한 기운이 번졌다.

마치 온천 속에 들어갈 때 느끼는 그런 종류의 따스함이었다.

따스함은 곧 긴장을 녹이고 고통을 잊게 해 주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헨리는 몸 전체를 감싸 안는 따뜻함에 적응하며 천천히 눈을 떴다.

마치 달콤한 잠에서 깨어나듯이 말이다.

그러나 헨리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눈앞에는 아서스도 성녀도 없었다.

아니, 주변의 풍경은 리자르크 언덕의 그것이 아니었다.

새하얗기 그지없는 풍경.

헨리는 상체를 일으켜 주변을 살폈다.

그러자 헨리의 귓전에 일전에 들은 적이 없던 낯선 목소리가 또다시 헨리의 이름을 불렀다.

-헨리 모리스.

이번에는 동굴의 메아리 같은 목소리가 아니었다.

헨리는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정확하게 고개를 틀었다.

그러자 그곳에는, 새하얀 바탕에 금색 실로 수놓은, 정갈하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법의를 입은 묘령의 여인이 헨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깜짝 놀란 헨리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자리에서 일어나며 헨리는 다시 한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몸이……?’

분명히 아서스에 의해서 발목의 인대가 끊어졌다.

그런데 지금 헨리의 몸에는 그 어떤 상처도 없었다.

더불어 넝마가 되었던 갑옷마저 말끔하게 수리되어 있었다.

짐짓 놀란 표정으로 자신의 전신을 훑어보던 헨리는, 곧 시선을 옮겨 묘령의 여인을 응시했다.

여인과 시선을 맞추자, 여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반가워요, 헨리 모리스. 내 이름은…… 아니, 사람들은 나를 아이린이라고 부른답니다.

‘아이린!’

대륙에서 가장 많은 신도를 거느렸던 평화교의 주신이자 사랑과 평화를 수호하는 여신이었다.

아니, 그러한 사실들을 떠나 헨리는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야누스와 만난 이후 실제 신과 대면하는 것은 실로 오래간만이었기 때문이다.

놀란 얼굴을 한 헨리를 보며 여신이 말했다.

-바깥의 일은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지금 우리가 있는 이 공간은 제가 당신을 위해 특별히 마련한 곳이니까요.

“저를…… 위해서요?”

-그래요. 오직 당신을 위해서 말이죠. 더불어 그대가 이 공간에 있는 동안, 바깥세상의 시간은 굉장히 느리게 흘러가고 있답니다.

“…….”

시간을 다루는 것은 8서클을 이룬 헨리조차도 어찌하지 못하는 영역이다.

하지만 여신은 그러한 행위를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담담히 말하고 있었다.

여신이 말했다.

-물론 바깥세상의 시간을 영원히 느리게 흘러가게 둘 순 없습니다. 당신은 해야 할 일이 있고 나는 그런 당신에게 부탁을 하러 온 입장이니까요.

“부탁……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헨리 모리스, 당신에게 꼭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여신씩이나 되는 자가 일개 인간에게 명령도 아닌 부탁을 한다니, 헨리의 사고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여신은 진심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진심을, 헨리 또한 이미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여신이 말했다.

-이미 예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저를 대신해서, 아니 우리 모두를 대신해서 아서스의 폭주를 막아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갑작스러운 여신의 강림과 더불어 부탁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어쩌면 헨리는 그때부터 어렴풋이 예상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막상 예상했던 문제가 직접 여신의 입을 통해 언급되자, 헨리는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그건…….”

헨리는 차마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지금은 여신의 비호 덕분에 잠깐이지만 현실을 잊고 있었다.

하지만 헨리가 아는 현실은 여전히 시궁창이었다.

아니, 시궁창을 넘어 오히려 ‘나락’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렇게 나락으로 떨어진 원인에는 제아무리 힘을 키워도 도무지 닿을 수 없는 아서스의 막강한 신력에 있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지며 헨리의 안색이 탁해졌다.

여신이 자신에게 아서스를 막아 달라고 부탁한다는 건 이미 앞뒤 상황을 모두 알고 있다는 이야기일 터.

그렇다면 여신도 분명히 보았을 것이다.

반신이 되어 버린 아서스의 손에 자신의 수많은 소중한 이들이 죽어 나간 것을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신은 자신에게 아서스의 저지를 부탁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헨리는 갑자기 분노가 솟구쳤다.

아서스는 고작해야 반신이지만 그녀는 자그마치 여신이 아닌가?

근본부터가 다른 그녀는 왜 직접 나서지 않고 고통 속에 핍박받는 일개 인간에게 그런 거대한 재앙의 해결을 떠넘기려 하는지 헨리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헨리는 울분과 함께 분노를 토해 내고 싶었다.

하지만 단순히 감정을 쏟아 낸다고 해서 일이 해결될 게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었다.

‘빌어처먹을 이성!’

마법사들이 가진 특유의 냉철함이 원망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생각 끝에 헨리가 말했다.

“혹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하지만 그 전에 아실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죽은 헤라리온과는 달리 조금의 신력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신력이 없다는 게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간결하지만 허를 찌르는 질문이었다.

이에 여신이 답했다.

-아닙니다. 당신은 신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단지 본인이 아직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뿐입니다.

“제가 신력을요?”

-그렇습니다.

신력을 가지고 있다니?

아닌 밤중에 홍두깨였다.

이에 헨리는 불현듯 무엇인가가 떠올라 급히 품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헤드자온으로부터 받은 반지더미를 꺼내 들어 여신에게 내밀었다.

“설마 이것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까? 이건 고작해야 신물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미 이 신물들을 가지고 아서스에게 대항해 봤지만 여신님께서도 보셨을 것 아닙니까? 아서스 그놈에겐 턱도 없다는 사실을요.”

헤드자온의 반지.

이것 외엔 헨리가 신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에 대한 근거를 내세울 만한 게 없었다.

이에 여신이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헨리 모리스, 제가 말하는 신력은 다른 신의 것을 빌린 것이 아닌 오직 당신만이 가진 ‘당신의 신력’입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아는 신력은 신의 힘을 뜻하는 말인 줄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신님, 저는 마법사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여태껏 그 어떤 신도 믿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 또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단순히 신을 믿지 않을 뿐이지, 오래 전부터 맹목적으로 믿어 온 것이 있지 않습니까?

“제가 믿어 온 것이요? 제가 오래 전부터 맹목적으로 믿어 온 것이라면…….”

헨리는 여신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오래 전부터 유일하게 헨리가 믿어 온 것. 그것은 사람이나 생물, 혹은 신 따위가 아니었다.

장고 끝에 헨리의 얼굴에 깨달음이 어렸다.

“……설마?”

헨리의 깨달음에, 아이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끄덕임에 헨리는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오래 전부터 헨리가 맹목적으로 믿어 온 것.

그것은 다름 아닌 ‘마법’이었다.

헨리는 불현듯, 입버릇처럼 마탑의 제자들에게 말해 주었던 말들을 떠올랐다.

‘세상에 마법으로 할 수 없는 일은 없다. 우리가 아직 할 수 없는 영역의 일들은 단지 우리의 식견이 좁아 그에 대한 마법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였다.

헨리는 오직 마법에 대한 믿음 하나로 8서클이라는 미지의 영역을 개척해 냈다.

이에 헨리는 너무 놀란 나머지 손끝이 떨리기 시작했다.

-물론 단순한 믿음만으로는 절대로 그 힘을 신격화시킬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진실한 믿음은 저를 포함한 다른 신들에게까지 인정을 받았고, 그 믿음을 인정하는 뜻에서 당신에게 자그마한 씨앗을 선물하였습니다.

“씨앗……이요?”

-그렇습니다. 당신은 이미 헤드자온으로부터 그 씨앗을 넘겨받았고 암탉처럼 소중히 품은 끝에 싹을 틔워 내지 않았습니까?

“헤드자온, 씨앗…… 설마 씨앗이라는 게?”

헨리의 되물음에 여신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헤라리온이 헤드자온으로부터 대신 받아 온 것.

그리고 분실했다고 생각해 스칼까지 동원하여 이 잡듯이 뒤졌지만 끝끝내 찾지 못한 것.

그것의 정체는 계란이나 진주 따위가 아닌 ‘신의 씨앗’이었다.

-신은 특별한 존재가 아닙니다. 신은 누구나 될 수 있는 것이죠. 하물며 말 못하는 짐승이나 식물, 형태가 없는 것들까지 모두 신이 되거나, 될 수 있는 자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인류 최초로 마법을 신격화하는데 성공한 마법 신의 근간이자, 마법의 신 그 자체이기도 합니다.

여신은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여신의 친절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헨리는 갑작스러운 정보의 파도로 인해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불과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반신의 경지에 오른 아서스에게 노리개처럼 조리돌림 당하며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었는데, 이제 와서 헨리가 마법의 신이라니?

갑작스러워도 너무 갑작스러웠고 황당해도 너무 황당했다.

장고 끝에 헨리가 말했다.

“그럼…… 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신님의 말마따나 제가 정말로 마법의 신이라면, 아니 마법의 신이라고 한다면, 저는 대체 왜 아서스에게 아무런 저항도 해 보지 못하고 이런 꼴을 당해야만 했던 것입니까?”

혼란스러움의 끝에는 또다시 분노가 찾아왔다.

이제 와서 마법의 신이니 뭐니 하는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미 헨리가 소중히 여기던 사람들은 대부분이 죽었고 대륙에 기거하는 인류의 절반이 아서스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그리고 8서클과 더불어 마검사의 경지로도 해낼 수 없는 일들을, 이제 와서 마법의 신이 됐다고 한들 모든 것을 전처럼 되돌려 놓을 순 없다고 생각했다.

분노와 허탈함이 뒤엉켜 자신에게 항변하는 헨리에게, 여신이 다독이듯 말했다.

-헨리 모리스. 당신은 먼저 스스로를 믿어야만 합니다. 당신이 마법의 신이 된 이상, 당신은 더 이상 보통의 인간이 아닙니다. 당신은 인간이 아닌 한 명의 신으로서 자신을 믿는 모든 것들에 대해 귀 기울일 줄도 알아야 하지만, 그전에 마법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리라 믿었던 과거처럼, 깨지지 않을 굳건한 믿음으로 스스로를 믿어야만 합니다.

믿음과 신앙, 그리고 신력.

이 세 가지의 연관성은 그동안 헤라리온이나 성녀에게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 왔던 것들이다.

그리고 여신은 다시 한번 그것들에 대해 강조했다.

그러나 헨리는 그러한 것들이 천편일률적인 교과서 같은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달아오른 분노 때문에 머리가 여전히 뜨거웠다.

그 탓에 감정에 휘둘렸다.

이성적인 사고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급기야 여신이 자신을 조롱하는 것은 아닐까, 혹은 이마저도 아서스가 자신에게 악몽 같은 환상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들이 어지럽게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그런데 그 순간.

-이 멍청한 놈 같으니!

뒤편에서 천둥 같은 호통이 떨어졌다.

덕분에 헨리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 정도로 깜짝 놀랐다.

헨리는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그곳에는, 인간의 머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 매의 머리가 달려 있는, 구릿빛 피부를 가진 장대한 기골의 남자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남자를 본 여신이 말했다.

-‘라’……께서 오셨군요.

그의 정체는 다름 아닌 사막을 수호하는 태양신, ‘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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