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7
아포칼립스 (1)
아서스는 화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러고는 어이가 없는지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
한 명이 아니었다.
드라칸을 필두로 대다수의 사도들이 원정대에게 차례대로 격파되고 있었다.
그 어이없고도 처참한 결과에, 아서스는 더 이상 여흥을 즐길 수가 없었다.
공기가 차게 식으며 무겁게 내려앉았다.
허공에는 여전히 킹턴이 묶여 있었으며, 그 옆에는 로난이 잔뜩 긴장한 얼굴을 하고서 아서스의 어깨 너머로 화면을 보고 있었다.
화면에는 때마침 페일로와 평화교의 신도들이 비춰졌다.
쏟아지는 맹신자들.
그리고 맹신자들을 이용한 엄청난 기세의 압박.
누가 봐도 페일로의 승리가 확실해지는 듯 보였다.
그리고 그 승리를 굳히려는 듯 때마침 아난다가 죽어 백골이 되었다.
이어서 로거도 죽었으며 페일로는 이제 성녀 앞에 서서 따귀를 때리기 위해 로거를 죽였던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그런데 그 순간, 화면에 시선을 두고 있던 아서스와 로난의 얼굴에 놀라움이 피어올랐다.
‘여신?’
황금빛으로 물든 성녀의 전신.
그것은 여신의 강림을 뜻하는 신성한 광휘였다.
물론 여신의 강림을 실제로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누구 하나 설명해 주지 않아도 그것이 여신의 강림이라는 것은 자연의 이치처럼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이에 밝아졌던 아서스의 얼굴이 다시금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그 기세 좋던 페일로는 단숨에 숨통이 끊어져 버렸고, 성녀를 통해 강림한 여신은 페일로의 목숨을 거둔 후 화면을 보고 있는 아서스와 똑바로 눈을 맞추었다.
그러고는 무어라 말을 건넸다.
물론 로난은 듣지 못했다.
하지만 여신의 말이 끝날 때쯤, 아서스는 조용히 자신이 앉아 있던 의자의 팔 거치대를 손아귀 힘만으로 으스러뜨려 버렸다.
“후우…….”
좀처럼 화내는 일이 없던 아서스가 뜨거운 날숨을 토해 내며 분노를 표했다.
이에 로난은 더더욱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식사를 마친 배부른 사자도 무서운 법인데 화가 난 사자는 더욱 더 무서울 테니까.
“으으읍!”
그것은 킹턴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서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기분이 나빠졌어.”
딱!
아서스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허공 높이 묶여 있던 킹턴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딱!
킹턴이 바닥으로 떨어지자 아서스는 한 번 더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두 사람 앞에, 사라졌던 각자의 검이 다시금 나타났다.
“이렇게까지 재미없는 내기는 처음이군. 역시 나를 제외한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 자체가 시간 낭비였어.”
사라졌던 검이 다시 나타나자 검의 주인들은 조심스럽게 그것들을 살폈다.
그 모습을 본 아서스가 말했다.
“흥이 식었다. 그러니 내기도 없었던 걸로 하지.”
“뭐……?”
“대신 새로운 게임을 하겠다. 지금부터 너희 둘은 서로를 죽여라. 그렇지 않으면 둘 다 죽이겠다.”
간단한 룰의 게임이었다.
그리고 게임의 룰은 온전히 아서스의 기분으로만 기획된 억지 그 자체였다.
하지만 로난이 그에 대해 반문하기도 전에 곁에서 날카로운 칼날이 순식간에 치고 들어왔다.
킹턴이었다.
슈웅-!
날카로운 기세가 로난의 왼쪽 뺨을 스치며 생채기를 만들었다.
가까스로 칼날을 피한 로난이 몸을 굴려 자신의 검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서둘러 방어 자세를 취한 후 킹턴에게 따져 물었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지?”
“닥쳐라!”
쩌렁쩌렁!
킹턴은 오러를 담아 소리쳤다.
킹턴의 목소리가 협곡의 메아리처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그런 후 킹턴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상기된 얼굴을 하고서 말을 이어 나갔다.
“내게 선택권은 없다……! 그리고 그건 네놈 또한 마찬가지지! 그러니 검을 들어라, 로난!”
“너……!”
로난은 무엇인가를 말하려다 이내 그만두기로 했다.
상기된 킹턴의 얼굴에서 살고자 하는 욕망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사를 앞에 둔 사람에게 논리 따윈 통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기에 로난은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기로 했다.
“알았다.”
지잉.
대답과 함께 로난은 들어 올린 칼날을 기점으로 전신에 오러를 틔워 냈다.
곧 두 명의 기사의 전신에 커다란 푸른 불꽃이 일었다가 잠잠하게 가라앉았다.
그 광경을 본 아서스가 말했다.
“훨씬 낫네.”
연이은 사도들의 패배로 흥이 깨져 버렸다.
물론 른다나 시온의 차례가 아직 남아 있긴 했지만 좀 전에 여신이 한 말 때문에 더는 내기를 즐길 기분이 아니었다.
‘빌어먹을 년 같으니……. 신도의 대다수를 빼앗긴 주제에 이제 와서 그런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아?’
여신의 말을 곱씹을수록 아서스는 더욱 더 기분이 나빠졌다.
분명히 여신의 시선은 자신을 향하고 있었지만, 여신이 말을 건넨 상대는 자신이 모시는 진짜 신, ‘야누스’였기 때문이다.
실로 오래간만에 무시 받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아서스는 더 이상 승리도 없는 이 재미없는 장난을 서둘러 끝내기로 했다.
물론 약간의 분풀이도 할 겸해서.
콰앙!
생각이 여기까지 미쳤을 때쯤, 킹턴이 먼저 오러를 폭발시키며 로난을 향해 뛰어들었다.
그 모습을 본 아서스는 생각했다.
‘참 한결같은 녀석이로군.’
킹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국에서 제일가는 가문을 이끌었던 대가문주였지만, 이젠 나라가 멸망하고 가문까지 몰살당하여 킹턴이라는 이름과 검 한 자루밖에 남지 않은 사내였다.
그래도 실력만큼은 확실한 사내였다.
그가 비록 박쥐 같은 기회주의자라고 평가받지만, 그러한 성격도 다 그만한 실력이 밑받침되어야 드러낼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먼 과거, 실버 잭슨에게로 황권이 넘어갔을 때, 아서스가 가장 먼저 스카웃을 제의한 십검이기도 했다.
킹턴은 무서운 기세로 로난을 압박했다.
킹턴에게 두려울 것은 없었다.
제아무리 대다수의 사도들이 죽고 원정대가 연전연승을 이뤘다고는 하나 현재 자신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은 헨리가 아닌 아서스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헨리가 코앞에 있다고 한들, 사실 킹턴은 헨리가 아서스를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곤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드라칸을 포함한 아서스의 측근이 모두 죽은 이때, 어떻게든 아서스의 눈에 들어 처절하게나마 살아남고자 했다.
“죽어라!”
콰과과과과!
헨리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졌고 이제 더 이상 로난의 실력 키워 주기식 대련을 하지 않아도 되니 킹턴은 말 그대로 폭주했다.
더불어 여태껏 원정대원들에게 받았던 멸시와 모멸감을 이 기회에 모두 해소하고자 하는 사적인 감정도 뒤섞여 있었다.
그에 반해 로난은 침착하게 킹턴의 공격을 받아 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신마저 이성을 잃어버린다면 그야말로 큰일이었으니까.
게다가 검술이나 오러의 경도 자체는 지난 시간 동안 질리도록 수련해 킹턴과 비등하다고 할 수 있을 만큼 빠른 성장세를 이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킹턴을 얕볼 수 없는 이유는 다름 아닌 검사들의 극의라고 할 수 있는 ‘궁극기’때문이었다.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야만 한다.’
현자들의 텔레포트가 늦어지고 있다.
로난은 이곳의 위치가 리자르크 언덕이기 때문에 현자들이 늦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원정대라면, 아니 원정대를 이끄는 헨리라면 반드시 방해가 되는 모든 사도들을 처리하고 이곳으로 올 터.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면 조금 전까지 아서스가 보던 화면으로 대다수의 사도들이 죽어 나간 걸 두 눈으로 확인했다는 점이었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싸움을 길게 늘어뜨려 원정대가 이곳에 올 때까지 버텨야만 했다.
그것이 현 상황에서 로난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수였으니까.
캉! 카강!
그러나 킹턴에게 로난의 사정 따위가 중요할 리 없었다.
로난은 미친개처럼 득달같이 달려드는 킹턴을 커버함과 동시에 언제 어떻게 마음이 튈지 모르는 아서스의 기분까지 고려해서 싸워야만 했다.
‘제길!’
1분 1초가 천년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어떻게든 해내야만 했다.
마치 외줄에 걸쳐진 인생처럼, 로난은 그렇게 아군이라곤 단 한 명도 없는 외로운 전장에서 홀로 검을 휘둘렀다.
“그만.”
몇십 번에 달하는 합이 이루어진 직후였다.
두 사람의 싸움을 지켜보던 아서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설퍼.”
“……!”
“나를 속이려면 좀 더 그럴 듯하게 연기했어야지. 5분이다. 앞으로 5분을 줄 테니 그사이에 결판을 내지 않으면 두 사람 다 죽이겠다.”
‘제기랄, 역시 이런 눈속임 따위 역시 통하지 않는다는 건가?’
아서스의 간파에 로난은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이젠 정말로 어찌할 수가 없었다.
“각오해라.”
그리고 그러한 시간 제한은 매섭게 분노를 뿜어내고 있던 킹턴의 기세에 더 큰 불을 붙이고 말았다.
킹턴은 검을 바로 잡았다.
그리고 전신에 두른 오러를 불꽃처럼 틔워 내기 시작하더니, 이내 곧 하나의 형상으로 빚어냈다.
그 형상은 다름 아닌, ‘검’이었다.
“포람 더 엘사바르……!”
“잘 알고 있구나. 포람 더 엘사바르. 이것이 우리 가문의 검사들에게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가문 최강의 궁극기……! 양자 주제에 엘사바르에 죽을 수 있는 걸 영광으로 생각해라.”
말을 마친 킹턴은 오른손에는 기존의 검을, 왼손에는 궁극기인 엘사바르를 쥐었다.
이도류의 킹턴.
로난조차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모습이었다.
“간다.”
“제기랄!”
궁극기를 아직 터득하지 못한 로난은 서둘러 결전기를 뽑아 들었다.
그러나 제아무리 로난이 빠른 성장세를 이루었다고는 하나 결전기와 궁극기의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
서걱!
짙은 선혈이 무지개처럼 허공에 뿌려졌다.
* * *
광명이 번쩍였다.
그리고 번쩍인 광명 사이로, 전보다 다소 그 수가 줄어든 원정대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도착한 곳은 리자르크 언덕.
텔레포트를 사용하지 않고 도보로 직접 이동해 오라고 했던, 바로 그 아서스가 있는 곳이었다.
좌표는 로난의 로그 스톤을 사용했다.
그러나 원정대가 도착했을 때, 주위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뭐지?’
텅 빈 사방.
주위에 보이는 것은 심각한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푸른 초목이 가득한 언덕뿐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털썩!
‘음?’
눈앞에 무엇인가가 날아왔다.
아니, 정확히 묘사하자면 날아왔기보단 처박혔다는 게 옳은 표현일 것이다.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그리로 모였다.
처음엔 바닥에 돋아난 풍성한 잡초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거리를 좁혀 그것의 존재를 확인한 순간, 대원들 모두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로난의 머리’였기 때문이다.
“로, 로난!”
반이 서둘러 죽은 로난의 머리를 붙들고 로난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그런데 그 순간, 기분 나쁜 목소리가 원정대 전체에 엄습했다.
“딱 맞춰 왔군.”
아서스였다.
주변에는 분명히 아무것도 없었건만, 목소리의 등장에 고개를 틀자 그곳에는 그토록 증오해 마지않던 아서스가 있었다.
“반가워, 모두들.”
아서스는 여전히 뻔뻔하게, 그리고 여유가 넘치는 표정으로 모두를 대했다.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딱 그런 종류의 표정이었다.
이에 검을 다룰 줄 아는 대원 전체가 일시에 오러를 폭발시켜 냈다.
그리고 그것은 헨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네놈……!”
모두들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이를 갈았다.
그러나 그 누구도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아서스를 만났을 때 모두 어떻게 행동하기로 했는지 사전에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본 아서스가 말했다.
“그렇게 쳐다보고 있으니 꼭 잘 훈련된 강아지들 같군.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무 노려보진 말라고? 따지고 보면 너희는 내 부하 전원을 죽였고, 너흰 기껏해야 도움도 안 되는 칼잡이 하나를 잃은 셈이잖아?”
인륜 따윈 조금도 포함되지 않는 계산 방식에 모두가 치를 떨었다.
하지만 아서스는 진심이었다.
인사를 마친 아서스가 말했다.
“아무튼 꽤 먼 거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오느라 다들 수고 많았어. 근데 내가 말하지 않았나? 내가 있는 이곳, 리자르크 언덕에 올 땐 분명히 텔레포트를 사용하지 말라고 말이야.”
말과 함께 아서스가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푸히힝!
-키헤헹!
대원들이 타고 온 말들의 목이 일시에 잘려 나가며 분수 같은 피를 내뿜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잔대가리 굴리는 걸 참 좋아한단 말이야. 어때? 어차피 여기까지 온 이상 말은 더 이상 쓸모없잖아? 그리고 이것과는 별개로 내 명령을 어긴 것에 대한 대가는 치러야겠지?”
딱!
아서스가 엄지와 중지를 튕겼다.
그러자 아서스의 뒤편으로 하늘을 가득 메울 만큼 무수한 양의 화면들이 일시에 모습을 드러냈다.
“……!”
화면 속에는, 무슈를 포함한 아직 맹신자들에게 점거되지 않은 대륙의 남은 인류들이 비추어지고 있었다.
화면을 등진 아서스가 말했다.
“내가 말했지? 명령을 어기면 저놈들의 목숨은 없다고. 그리고 난 약속을 꽤나 잘 지키는 편이라서 말이야.”
-쿠아아아!
화면에서 맹신자들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던 맹신자들이 일제히 어딘가로 맹렬히 질주하기 시작했다.
“쇼타임이다, 헨리.”
인류 멸망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