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서클 마법사의 환생-314화 (314/522)

# 314

위대한 원정대 (16)

“네놈!”

페일로가 내뱉은 악마의 속삭임과도 같은 비아냥거림에 로거는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눈을 번쩍 뜬 로거.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아이리네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외쳤다.

“로거 님!”

우뚝.

성녀는 다급했다.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에는 분노와 우울함…… 아니, 그 모든 것들을 아우르는 짙은 애절함이 녹아 있었다.

그런 목소리를 하고서, 성녀가 힘겹게 말을 이어 나갔다.

“참으셔야 합니다……!”

“하지만!”

“아난다 님의!”

“……!”

“아난다 님의 희생을……! 이대로 수포로 만드실 생각이십니까?”

“크윽……!”

로거는 마음이 찢어지는 듯했다.

의무와 의리.

그 두 가지 사이에서 이도 저도 취할 수 없는 자신의 위치가 너무나도 개탄스럽게 느껴졌다.

부들거리는 로거를 보며 페일로가 쿡쿡 웃으며 말했다.

“큭큭, 좋은 자세네요. 그래도 수도승의 희생정신은 잘 봤습니다. 보기 드문 진귀한 광경이었어요. 그래서 말인데, 그 답례로 수도승의 잔해만큼은 돌려주도록 하죠.”

말을 마친 페일로가 개미처럼 몰려든 맹신자들에게로 손짓했다.

그러자 여전히 아난다에게로 몰려든 맹신자들 사이로, 핏물이 덕지덕지 묻은 백골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갈기갈기 찢긴 승복과 그가 애용하던 무구들이 백골에 걸려 딸려 나왔다.

그러나 찢어진 옷깃을 제외한 나머지 것들은 결국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다시 맹신자들이 득실거리는 바닥으로 추락해 버렸다.

털썩!

페일로는 들어 올린 아난다의 유해를 결계 안으로 던져 넣었다.

유해가 결계에 막히지는 않았다.

그 행위 자체에는 위해를 가하려는 의도가 없었으니까.

성녀는 여전히 두 눈을 꼭 감은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앞에 묵직한 유골 더미가 던져졌다.

바닥에 떨어진 아난다의 무게가 느껴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녀는 차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으흑흑흑흑……!”

그것은 로거 또한 마찬가지였다.

로거는 치켜뜬 눈을 다시 감은 후, 어떻게든 현자가 자신들을 데리러 올 때까지 성녀를 보좌하며 버텨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 광경을 본 페일로가 말했다.

“이런, 평화교의 신도들은 동료의 유해가 코앞에 있어도 거들떠도 보지 않는군요. 실망했습니다. 이렇게까지 잔인하고 인정이 없을 줄은 몰랐어요.”

여전히 비아냥거리는 페일로.

페일로의 비아냥거림에 로거는 모아 쥔 두 손을 부르르 떨 수밖에 없었다.

“기껏 여러분들을 생각해서 유해를 구해다 드렸는데 이런 식으로 무시하실 줄이야……. 그럼 여러분들에게 이 유해는 필요 없는 것으로 알고 제가 직접 처리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잘 분쇄해서 근처에 뿌리면 유용한 거름이 되겠어요.”

그 말이 방아쇠가 되었다.

도를 넘은 페일로의 조롱에 로거는 결국 분노를 참지 못하고 모은 두 손을 내리며 감은 눈을 번쩍 떴다.

그런데 로거가 두 눈을 뜬 순간, 로거의 눈앞에 웃는 낯짝으로 얼굴을 들이밀고 있는 페일로가 있었다.

“안녕하세요?”

“으아아아!”

부웅!

분명히 멀찍이 떨어져 있는 줄로만 알았던 페일로가 바로 눈앞에서 웃고 있었다.

이에 인내심의 한계를 넘겨 버린 로거가 내려놓은 무기를 들고서 있는 힘껏 페일로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텁!

그러나 페일로는 허무하리만치 가볍게 로거가 휘두른 무기를 손으로 받아 냈다.

있는 힘껏 휘두른 분노의 일격이었다.

그러나 그런 일격을 페일로는 아이가 휘두른 나뭇가지처럼 가볍게 받아 낸 것이다.

그리고 로거의 얼굴에 더욱 더 가까이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고서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인간은 나약하네요. 이런 거짓말에 속아 넘어갈 줄은 몰랐는데……. 유해는 없습니다. 맹신자들이 수도승의 백골까지 모두 씹어 먹어 버렸거든요.”

“뭐라고……!”

“그나저나 참 이상하네요. 어차피 버텨 봐야 달라질 게 없을 텐데……. 혹시 뭔가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겁니까?”

“닥쳐라!”

로거는 페일로의 손에 붙잡힌 무기를 지팡이삼아 순식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곧장 팔라딘의 무장을 펼쳤다.

“로거 님!”

“눈 뜨지 마십시오, 성녀님!”

소란스러워진 사태에 성녀가 다급히 로거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로거는 이제 더 이상 성녀의 말을 따를 수가 없었다.

페일로가 아무런 제약 없이 수호 성법을 통과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부터 더 이상 멍청하게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쾅!

로거가 자신의 검과 방패를 맞부딪히며 신력을 폭발시켰다.

그러자 그의 전신에 새하얀 광휘가 휘몰아치며 로거의 남은 신력이 불타올랐다.

“죽어라, 이단자여!”

신력을 폭발시킨 로거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페일로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콰아앙!

인간에게 부딪힌 거라곤 전혀 짐작되지 않는 소리가 페일로로부터 울려 퍼졌다.

그리고 페일로는 결계 밖으로 저 멀리 튕겨져 나갔다.

페일로가 결계 밖으로 튕겨져 나갔을 때, 로거가 여전히 기도를 오리고 있는 성녀에게 말했다.

“성녀님, 여신님의 가르침을 어기게 될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로거 님!”

“당신을 모실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부디 평화교의 미래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안 돼에!”

작별인사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리고 로거는 눈빛을 바꾸었다.

신자들을 감싸 안던 따뜻한 눈빛이 아닌, 종교 대전의 이단자들과 마왕의 부하들을 때려잡던 괴물이었던 그 시절의 ‘팔라딘’의 눈빛으로 말이다.

후웅!

저만치 튕겨져 나갔던 페일로가 천천히 공중으로 부유했다.

그런 다음 한쪽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 안으며 킥킥 웃었다.

“역시 우매합니다, 고작해야 말장난이었을 뿐인데 이렇게까지 반응해 주다니. 이 정도면 다른 사도들에 비해 최고의 쇼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 같군요.”

“쇼……?”

“잊고 계셨습니까? 이 모든 건 위대하신 아서스 님의 여흥을 위해 시작된 일이라는 걸. 그러니 저는 여러분이라는 도구를 잘 활용해 아서스 님께 최대한의 즐거움을 선사해 드릴 의무가 있습니다.”

로거는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저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꼴이라니?

로거는 저 형상이야말로 사람의 탈을 뒤집어 쓴 악마라고 생각했다.

“……신이시여, 저에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용기와 악을 물리칠 수 있는 강인한 힘을 주시옵소서.”

이젠 욕지거리도 나오지 않았다.

로거는 잠자코 마지막 기도를 올렸다.

팔라딘의 마지막 기도.

그 기도가 여신에게 닿는 순간, 로거는 마물의 숲에서 뿜어냈던 광휘를 다시 한번 뿜어낼 수 있게 되었다.

“신이시여, 모든 죄는 제가 짊어지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로거는 결심하고야 말았다.

이 말도 안 되는 싸움을 멈추기 위해선 아니,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어 현자가 올 확률을 드높이려면 더 이상 맹신자들을 가만히 두어선 안 된다고 말이다.

그래서 로거는 자신이 직접 기꺼이 십자가를 짊어지기로 했다.

로거에게 신성한 광휘가 뿜어졌다.

그리고 광휘가 멎어들 때쯤, 로거의 전신에는 새하얀 백색 바탕에 금으로 수놓아진 무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리석은 저를 용서하소서.”

기도를 마친 로거는 전보다 훨씬 거대해진, 이제 더 이상 한손 검이 아닌 양손 검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을 자신의 검을 들고서 전방을 향해 크게 휘둘렀다.

촤아아!

휘두른 궤적으로부터 거대한 검압이 뿜어졌다.

그리고 뿜어진 검압과 함께 빛의 장막이 파도처럼 휘몰아쳤다.

-키에에에!

빛의 파도는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주위의 모든 것들을 집어삼켰다.

그리고 빛의 파도가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두 눈이 하얗게 뒤집어진 맹신자들이 경기를 일으키며 바닥에 쓰러졌다.

이것은 로거가 팔라딘으로서 보여 줄 수 있는 최종 형태의 힘이었다.

그리고 여신 또한 이번만큼은 그의 의지를 존중하는 듯, 그가 맹신자들을 쓰러뜨리는 것에 대해 아낌없이 힘을 지원해 주었다.

“호오?”

그 광경을 본 페일로가 입술을 동그랗게 오므리며 흥미롭다는 듯이 지켜보았다.

로거의 공격에는 거침이 없었다.

죽은 전우를 대신해 자신이 십자가를 짊어지기로 한 이상, 그는 신을 보좌하는 어린 양이 아닌 악귀와 맞서 싸우는 고독한 전사가 되기로 마음먹었으니까.

로거를 기점으로 다시 한번 빛의 파도가 뿜어졌다.

“흐음, 내가 개입할 필요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제 착각이었군요.”

고작 몇 번의 칼질이었다.

빛의 파도는 삽시간에 맹신자들을 휘감아 무너뜨렸다.

그리고 그렇게 쓰러지는 맹신자들을 보며 페일로는 그제야 로거의 힘을 인정해 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젠 단순히 지켜보는 것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이 싸움에 개입하기로 했다.

그래야지만 아서스에게 더 큰 즐거움을 선사할 수 있을 테니까.

-키아아아!

-캬오오오!

식욕과 신앙을 제외한 모든 감정들을 절개당한 맹신자들에게 공포나 두려움 따윈 없었다.

그들은 곁의 동포가 쓰러지든 말든 전혀 아랑곳 하지 않고 계속해서 로거에게 달려들었다.

제아무리 두텁게 팔라딘의 무장을 걸쳤다고는 하나 맹신자들에겐 그저 탐스럽기 그지없는 한 덩이의 먹잇감에 불과했으니까.

로거는 검을 휘두를 때마다 죄책감을 덜 수 있었다.

빛의 파도가 그들을 덮칠 때마다 가슴 속 깊이 쌓여 있던 울분이 조금이나마 해소되는 것 같아 위안이 되었다.

마침내 마지막 맹신자가 쓰러졌다.

주위에는 이제 로거와 아이리네를 노리는 짐승의 속성을 지닌 인간 따위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크르르르…….

-키아아아…….

쓰러진 맹신자들은 어떻게든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어 했지만, 평화의 여신 아이린이 그것을 윤허하지 않았다.

로거는 쓰러진 맹신자들 사이에서 천천히 고개를 들어 검을 치켜들었다.

검이 가리킨 곳의 끝에는 상황을 지켜보던 페일로가 있었다.

페일로가 지상으로 착지하며 말했다.

“대단하군요. 살기 위해서라면 종단의 규율도 어길 수 있는 게 팔라딘의 마음가짐이라는 겁니까?”

문답무용.

로거는 악마의 말장난에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여신이 내려 준 성스러운 칼날을 다시 한번 활시위처럼 당겼다.

화아아!

쏘아 보낸 빛의 파도 중 가장 거대한 해일이 페일로를 향해 덮쳐졌다.

파도는 아귀처럼 입을 벌린 후 페일로를 집어삼켰다.

그리고 사방으로 빛의 잔재가 퍼져나간 직후!

“……!”

파도의 중심 속에 전신에 보랏빛 예기를 띤 페일로가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정돈을 유지하고 있었다.

씨익.

미소 짓는 페일로.

사방으로 흩어지는 빛의 잔재들을 본 페일로가 어깨를 털어 내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따뜻하네요.”

“네놈……!”

“마음 같아선 당신과 함께 격렬한 춤사위라도 벌여 주고 싶지만 그러기엔 당신의 힘이 너무나도 미약합니다. 그러니…….”

말을 잇던 페일로의 모습이 일순간 사라졌다.

로거의 눈동자가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흔적은커녕 아무런 기운조차 느낄 수가 없었다.

그 순간 로거의 머릿속에 불길한 예감이 스쳐 지나갔다.

‘설마 성녀님을!’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

불길한 예감이 떠오른 로거는 황급히 성녀가 있는 방향을 몸을 틀었다.

그러나 로거가 뒤편으로 몸을 돌린 그 순간, 형용할 수 없는 뜨거움이 로거의 가슴팍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콰드득!

로거의 가슴팍에서 끔찍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차가웠다.

그리고 그 차가움의 근원에는 정직하게 뻗어진 페일로의 팔뚝이 있었다.

정확히 명치가 관통됐다.

“당신이라면 바로 성녀를 떠올릴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더 실망스럽군요. 이런 와중에도 눈이나 감고 있는 성녀를 걱정하다니.”

“……커허억!”

순백의 갑옷 위로 붉디붉은 선혈이 흘러 갑옷을 적셨다.

페일로가 한 번 더 팔을 비틀며 말했다.

“그것이 당신의 실수입니다. 그러니 부디 다음 생에선 올바른 신을 모실 것을 충고해 드리는 바입니다.”

끝으로 페일로는 관통한 손을 휘저어 로거의 심장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움켜쥔 심장을 단숨에 터뜨렸다.

콰작!

로거의 입과 가슴팍에서 분수 같은 피가 솟구쳤다.

“이런…… 옷이 더러워졌네요.”

정돈함을 추구하는 페일로는 자신에게 튄 로거의 혈흔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마치 오물이라도 묻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심장이 터진 로거는 곧 무릎을 꿇으며 쓰러졌다.

그리고 전신을 감싸고 있던 찬란한 광체 또한 순식간에 사그라들고 말았다.

비참하고, 허무한…….

그런 말로였다.

페일로가 로거의 피가 잔뜩 묻은 손아귀를 털어 내며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여전히 눈을 감고 기도를 올리고 있는 성녀에게로 다가갔다.

“이제 그만 눈을 뜨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몰락한 종단의 성녀님.”

한결같은 페일로의 태도.

페일로의 머릿속에는 이미 어떻게 하면 성녀를 이용해 아서스 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을 지에 대한 수십 가지 능욕법이 가득 들어찬 상태였다.

“신이시여…… 흐흐흑……!”

코앞으로 다가온 페일로를 느끼며, 성녀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성녀는 눈을 뜨지 못했다.

아니, 뜨고 싶지 않았다.

눈을 뜨면 펼쳐질, 절대로 믿고 싶지 않을 생지옥이 현실이 되어 다가올 것을 알기에.

그녀는 어떻게든 자신이 만든 어둠 속으로 숨고 싶었다.

성녀의 기도를 들은 페일로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로거의 심장을 터뜨렸던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런 다음 짤막한 경고와 함께 팔을 휘둘렀다.

“갑니다.”

짜아악!

성녀의 뺨으로부터 단순하지만 굉장한 소리의 따귀가 작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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