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서클 마법사의 환생-313화 (313/522)

# 313

위대한 원정대 (15)

파사삭!

용광로에 낙엽이 전소되듯, 두 검격에 집어삼켜진 나르바는 딱 그러한 소리를 냈다.

굉장한 폭발이었다.

맞닿은 두 개의 빛은 말 그대로 파괴의 화신 그 자체를 토해 내었지만, 멀찍이서 그 광경을 보고 있던 후슬러는 그 파괴의 여파로부터 왠지 모를 따스함을 느꼈다.

‘여러모로 대단한 사람이야.’

후슬러가 반에게 알려 준, 일반인이 사도를 타격할 수 있는 방법.

그것은 스스로의 생명력을 불태워 그 에너지를 양분 삼아 적을 타격하는 방법이었다.

이것은 워록들이 부리는 저주 마술의 일종으로, 본래는 단기간에 생명력을 불태워 최대치의 공격력을 이끌어 내는 광전사의 마술이기도 했다.

하지만 뛰어난 워록이었던 후슬러는, 광전사의 마술을 응용해 반이 짙은 분노를 풀어낼 수 있게 멋진 도움을 줄 수 있었다.

그렇기에 반이 뿜어낸 붉은 빛의 오러는 자신의 생명력을 녹여 쏘아 낸 문자 그대로 ‘혼신의 일격’인 셈이었다.

곧 광휘가 사그라들었다.

사방으로 빗발치는 광휘가 잦아들고 나자 후슬러는 잿더미조차 남지 않은 나르바의 빈자리를 볼 수 있었다.

헥터가 말했다.

-휘유, 이 몸으로 뭘 먹지 못한다는 게 좀 아쉽긴 해도 역시 파워 하나는 끝내주는구먼.

흡사 거대한 괴물이 긁어 놓기라도 한듯, 세 사람의 눈앞에 한 쌍의 거대한 검흔이 교차되어 있었다.

말 그대로 파괴의 발자취인 셈이었다.

그리고 헥터가 짧은 소감문을 내뱉은 직후였다.

털썩!

“반 님!”

혼신의 일격을 쏘아 보낸 반이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쓰러진 반에게로 후슬러가 가장 먼저 달라붙었고 뒤를 이어 헥터가 다가왔다.

쓰러진 반에게 헥터가 물었다.

“뭐야, 너? 설마 이대로 죽는 건 아니지?”

헥터는 생명을 불태워 검격을 쏘아 보낸 반의 사정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반에게 실없는 농담을 던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쓰러진 반이 숨을 헐떡이며 한쪽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중지를 추켜올렸다.

“그럼 그렇지.”

치켜든 중지를 본 헥터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농담에 뻔뻔하게 대꾸해 주는 걸 보니 앞으로 수십 년은 끄떡없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 * *

-키아아아!

짐승의 울음을 닮았지만 결코 짐승이 내는 소리가 아니었다.

수천에 달하는 맹신자들이 눈앞의 세 사람을 잡아먹기 위해 달려드는 소리였다.

그것은 흡사 지옥 한복판에 떨어진 어느 불쌍한 모험가들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었다.

북부에 펼쳐진 광활한 평야.

그 중심에는 몇 사람이나 겨우 들어갈 법한 크기의 수호 성법과 그 안에서 고전하고 있는 평화교의 세 신도들이 있었다.

“제기랄……!”

로거와 아난다는 드물게 욕지거리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성녀를 보호하기 위해 임명된 두 사람은 눈앞의 수천의 위협들을 보고도 함부로 주먹을 내뻗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페일로가 점이 되어 사라지기 전에 내뱉었던 말이 그들의 행동에 제약을 걸어 버렸기 때문이다.

“아 참! 그리고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 거지만 이곳으로 소집한 맹신자들은 전부 한때 평화교의 독실한 신자들이었던 사람들입니다?”

페일로는 이미 사라져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지만 그가 남기고 간 말만큼은 여전히 귓가에 남아 생생하게 맴돌았다.

그래서 한탄스러웠다.

‘놈이 만약 마지막에 그런 말만 내뱉지 않았더라면 그 어떤 죄책감도 없이 눈앞의 맹신자들을 해치워 버릴 텐데…….’ 하고 말이다.

“조금만! 조금만 더 버티세요! 조금만 더 버티시면 현자님들이 저흴 데리러 오실 거예요!”

처음에 맹신자들이 등장했을 때 로거와 아난다는 성녀를 지키기 위해 각자의 무장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페일로의 말을 들은 성녀가 그들의 행동을 저지했다.

지금은 비록 저런 흉측한 존재가 되어 버렸지만 과거에는 평화교의 신자였던 자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서스에 의해 강제로 저런 맹신자가 됐다고 해서 저들에게 위해를 가할 수 없다는 게 성녀의 판단이었다.

물론 그 판단은 철없는 성녀님의 치기 어린 이상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 누구보다도 현재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들이 위협받고 있는 이러한 상황을 떠나, 장차 평화교를 이끌어 갈 제대로 된 지도자라면 교황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이익을 위해 눈앞의 것에 급급해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성녀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 속에서도 자신이 끄집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신심을 발휘해 어떻게든 그 누구도 피해를 입지 않고 이 상황을 해결하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그렇게 내린 결론이 바로 로그 스톤을 쫓아 자신들을 데리러 올 현자들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키아아아아!

-쿠에에에에!

신력을 아끼기 위해 최대한 좁은 범위의 수호 성법을 펼치고 결계의 두께를 강화시켰다.

원래대로라면 지금의 상황 같은 물리력은 절대로 막아 낼 수 없었으나, 맹신자들이 아서스에게 타락되었다는 점 때문에 맹신자들을 상대로도 수호 성법이 효과를 발휘했다.

그래서 세 사람 모두 신력을 모아 함께 수호 성법을 전개한 것이다.

‘신이시여……! 부디 저흴 가엾이 여겨 이 시련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도와주소서.’

결계의 중심에서 가부좌를 튼 아난다가 비 오듯이 땀을 흘렸다.

벌써 몇십 분째 이러한 버티기식 수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젠 정말로 한계였다.

제아무리 아이리네가 여신의 선택을 받은 희대의 성녀이며 로거와 아난다가 역대급 성전사라고는 하지만…….

수천 명에 달하는, 그것도 괴물처럼 변해 버린 맹신자들의 총공세를 견뎌 내기엔 다소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쩌적-!

‘……!’

사방을 가득 메우는 맹신자들의 울음소리 속에서 아이리네는 똑똑히 들었다.

결계의 어딘가에서부터 조그맣게 균열이 일어나는 소리를 말이다.

이에 성녀는 모은 두 손에 더욱더 힘을 주며 간절하게 기도했다.

그녀가 지금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여신의 기도를 통해 수호 성법을 강화하는 것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제아무리 그녀의 신앙심이 두텁다 해도 시간이 지날수록 신앙심이 구제해 줄 수 있는 한계는 몹시 뚜렷하게 다가왔다.

쩌저적……!

조그맣게 일어난 작은 균열을 계기로, 신력이 가장 미약하게 미치는 결계의 가장 먼 곳으로부터 전보다 좀 더 큰 균열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번에 일어난 균열의 소리는, 아이리네뿐만이 아니라 로거와 아난다까지 모두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로거와 아난다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두 사람도 깨닫고 만 것이다.

이젠 정말로 수호 성법의 한계가 왔다는 것을 말이다.

맹신자들의 울음소리 속에서 잠깐의 침묵이 이어졌다.

그리고 침묵 끝에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다름 아닌 아난다였다.

“로거.”

나지막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아난다의 목소리에 로거의 눈빛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로거의 머릿속에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아난다! 너, 지금 설마……!”

“그만.”

아난다의 생각을 읽은 로거가 아난다의 선택을 틀어막기 위해 다급한 목소리로 먼저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러한 로거의 말을 아난다가 한마디로 일축시켜 냈다.

아난다는 이미 한참 전에 결심한 듯싶었다.

그리고 그의 결심을 로거는 고스란히 느껴 버리고 말았다.

결심을 마친 아난다는 음울했던 표정을 풀었다.

그리고선 어린 수도승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줄 때나 짓는, 그런 종류의 미소를 얼굴에 띠어 보였다.

아난다가 말했다.

“로거, 성녀님을 잘 부탁하마.”

“…….”

아난다.

그는 평화교의 가장 큰 수도승임과 동시에 성녀를 지키기 위해 싸워 온 가장 크고 튼튼한 방패였다.

그리고 지금, 장차 평화교를 이끌어 나갈 성녀가 위험에 처한 이 순간, 아난다는 자신이 맡은 소명을 다하기 위해 필사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흑흑흑…….”

두 눈을 감고 두 손을 꼭 모은 성녀 아이리네.

그녀는 수호 성법을 유지하기 위해 조금도 자세를 흐트릴 수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아난다의 작별 인사를 듣고도 여전히 두 눈을 꼭 감은 채, 그저 눈물만 흘릴 수밖에 없었다.

이에 아난다가 그녀를 위로했다.

“울지 마십시오, 성녀님. 저는 제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하지만, 하지만! 으흐흐흑흑……!”

“부디, 대마법사님을 도와 아서스를 쓰러뜨리고 반드시 대륙의 평화를 되찾아 주십시오.”

인사를 마친 아난다는 틀었던 가부좌를 풀었다.

그런 다음 꼭 감았던 두 눈을 천천히 뜬 후, 눈앞에서 성벽을 두드리는 수천의 맹신자들을 보았다.

-캬오오오!

맹신자들은 자신의 손톱이 부러지고 치아가 떨어져 나가도 전혀 개의치 않아 했다.

그 모습은 마치 지옥의 악귀를 연상케 할 만큼 끔찍한 것이었다.

하지만 아난다는 그들 모두를 가엾은 눈동자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을 향해 합장하며 기도했다.

“여신님. 부디 이들을 미워하지 말고 가엾게 여기소서.”

아난다는 눈앞의 맹신자들을 미워하지 않았다.

이들 또한 아서스에 의해 희생된 그저 불쌍한 사람들일 뿐이었으니까.

그래서 아난다는 이들을 미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성녀의 뜻을 받들어 조금도 이들에게 해를 입히지 않기로 했다.

아난다가 합장하며 조용히 읊조렸다.

“신이시여, 부디 저의 믿음이 틀리지 않도록 모두를 구원해 주소서.”

화악!

아난다의 기도가 끝나자 아난다의 전신에 새하얀 빛이 스며들었다.

스며든 빛은 곧 아난다의 전신을 맑은 개울물처럼 감싸 안았고, 보이지 않는 투명한 막을 만들어 냈다.

마침내 준비는 끝났다.

준비를 마친 아난다는 기도하는 두 사람을 등진 후, 천천히 결계 밖으로 걸어 나갔다.

-캬오오오!

아난다가 결계 밖으로 걸음을 내딛자, 아난다로부터 가장 가까이에 있던 맹신자가 자신의 아가리를 들이밀며 아난다를 향해 몸을 내던졌다.

파캉!

그러나 몸을 내던진 맹신자는 마치 성벽에 튕겨 나간 화살처럼 저만치 멀리 떨어져 나갔다.

결계를 나선 아난다는 두 손을 모았다.

그리고 두 눈을 감고 천천히 한 발자국씩 앞으로 나아갔다.

-캬오!

-캬아아!

도무지 열리지 않던 결계 안에서 그토록 갈망하던 먹잇감 하나가 제 발로 걸어 나왔다.

이는 맹신자들에게 있어 좋은 기회였다.

그래서 매섭게 결계를 두드리던 맹신자들 전부가 결계 밖으로 걸어 나온 아난다로 목표를 바꾸었다.

-캬아아악!

-카오오!

그러나 첫 번째 맹신자가 그랬던 것처럼 아난다에게 달려들던 맹신자 전부가 강풍에 휘말린 것처럼 저만치 멀리 떨어져 나갔다.

물론 맹신자들이 저만치 밀려났다고 해서 굶주린 맹신자들의 식욕을 꺾어 놓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캬아아아악!

아난다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 합장했으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아이리네와 로거가 있는 곳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황금빛 발자국들이 새겨져 있었다.

마치 어느 신의 성스러운 발자취를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아이리네와 로거는 아난다가 남긴 성스러운 발자취를 볼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여전히 두 눈을 감은 채 기도하고 있던 데다가 아난다가 시선을 끌어 준 사이 잠시나마 체력을 보존하며 모자란 신력을 서둘러 회복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리네만큼은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의 방패로서 활약해 준 평화교의 가장 큰 방패, 아난다가 자신으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음을.

그리고 결계를 두드리는 맹신자의 수가 줄어들수록, 아난다로부터 느껴지는 여신의 기운 또한 점점 더 희미해져 가고 있음을 말이다.

“흐흑, 흐흐흑……!”

그래서 아이리네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물속에서 퍼져 나가는 한 방울의 잉크처럼, 점점 더 희미해져 가는 아난다의 생기가 느껴지자 아이리네는 미안한 마음과 함께 지독한 죄책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바람 앞의 촛불 같던 아난다의 생기가 완전히 사라진 순간이었다.

“하하, 이로써 한 명이 탈락했군요.”

아이리네와 로거의 귓전에 절대로 듣고 싶지 않은 이의 비웃음이 악몽처럼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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