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1
위대한 원정대 (13)
“네가 반이지?”
키가 작은 미소년은 싱그러운 웃음과 함께 한쪽 손을 들어 올리며 반에게 인사했다.
천진무구한 웃음이었다.
만약 그가 사도라는 사실을 몰랐다면 어느 귀족가의 자제라고 해도 믿었을 정도로 말이다.
이에 반이 검을 뽑아 들며 말했다.
“내장은 끔찍한 괴물이면서 겉모습은 어린아이라니, 악취미로군.”
“악취미라니? 나름대로 고심해서 고른 외형인데 말이야. 그나저나 옆에 있는 그 녀석이 ‘워록’인지 뭔지 하는 그놈이지?”
150cm 정도 되어 보이는 키를 가진 미소년의 정체는 다름 아닌 나르바였다.
나르바는 반의 빈정거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미소를 유지하며 후슬러에게 인사를 건넸다.
“반가워. 워록은 처음 봐서 좀 신기하던 차였거든. 근데…… 워록들은 원래 다 너처럼 겁쟁이야?”
“그, 그건……!”
“사실인가 보네. 다 늙어 가지고 벌벌 떨긴. 걱정하지 마. 넌 일종의 덤 같은 존재니까.”
“덤?”
나르바의 말에 반이 의문을 붙였다.
이에 나르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 덤! 너희들 설마 아서스 님께서 아무런 뜻도 없이 무작위로 너흴 갈라놓은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알아듣게 설명해라, 괴물.”
“말귀가 어둡네. 칼잡이라서 그런가? 너희들이 이곳에 온 건 내가 너희들을 선택했기 때문이야. 물론 처음에는 반, 너 하나만을 원했지만 어차피 한 명이나 두 명이나 똑같을 것 같아서 워록도 구경할 겸, 저놈도 같이 보내 달라고 부탁드렸지.”
나르바의 말대로였다.
이곳은 위치도 모를 대륙의 어느 곳으로 그 나르바조차도 정확한 위치를 몰랐다.
그러나 그런 장소에 두 사람을 보내 달라고 한 건 다름 아닌 나르바의 의지.
그리고 나르바가 하고 많은 대원들 중에 굳이 반을 선택한 이유는 꽤나 심플했다.
“너, 네가 바로 ‘앙켈만의 수호자’라면서?”
물음과 함께 가늘게 휘어지는 나르바의 두 눈.
그 눈웃음을 본 반은 순간 전신의 피가 차갑게 식는 듯했다.
불길한 예감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리고 차갑게 식어가는 반의 표정을 본 나르바가 초승달처럼 휜 눈웃음과 함께 말했다.
“내가 그랬어, 앙켈만.”
“이 개자식이!”
쾅!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나르바가 반을 선택한 이유.
그것은 단순히 자신의 흥미를 위해서였다.
앙켈만을 그렇게 만든 범인이 눈앞에서 죄를 자백하자 반은 순간 이성의 끈을 놓고 말았다.
반은 분노를 원동력 삼아 순식간에 앞으로 치고 나갔다.
그리고 맥도웰이 그랬던 것처럼 허리에 찬 장도를 일순간 뿜어냈다.
챙캉!
날카로운 파쇄 음과 더불어 금속 마찰로 인한 불꽃이 튀었다.
그러나 분명히 진심을 다한 일격이었으나 나르바는 오직 검지 하나만을 들어 올려 반의 일격을 가볍게 막아 냈다.
“반응을 보니 맞는 것 같네. 근데 실망인걸? 고작 이 정도 실력으로 앙켈만의 수호자라니…… 아, 이런 실력이라서 내가 올 것도 몰랐던 건가?”
“으아아아아!”
아이의 모습을 한 나르바는 더 이상 귀족가의 자제처럼 보이지 않았다.
소악마.
그의 모습은 이제 지옥에서 사냥을 나온 소악마 그 자체였다.
이성을 잃은 반이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이에 나르바는 손을 내리고 뒷짐을 졌다.
수비는 하지 않았다.
대신 그가 휘두르는 검무 전부를 온몸으로 막아 냈다.
캉캉캉캉캉!
반의 검무는 지독한 장마처럼 쉴 새 없이 쏟아졌다.
나르바의 전신에 금속 마찰로 인한 파란 불꽃들이 튀었다.
기이한 광경이었다.
반은 분명히 오러를 듬뿍 담아 검을 휘두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거대한 쇳덩이를 두드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니, 쇳덩이를 두드리는 기분을 넘어서 마치 악몽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흐아아아!”
비명에 가까운 기합이 커질수록, 반은 더 빠르고 더 세게 검을 휘둘렀다.
눈앞에 앙켈만을 궤멸시킨, 빌어먹을 범인에게 어떻게든 단죄를 내리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검을 휘두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반은 눈앞의 소악마에게 농락당하고 있다는 더러운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반의 검무를 받아 주던 나르바가 손을 뻗으며 말했다.
“지겨워.”
퍼엉!
공기가 폭발하는 소리가 짧게 들렸다.
뻗은 나르바의 손에서부터 시작된 소리였다.
충격은 반의 복부를 목표로 삼아 거칠게 팽창했다.
그 팽창을 견디지 못한 반은 볼품없는 모양새로 후슬러가 있는 곳까지 멀찍이 튕겨져 나갔다.
“크으윽……!”
전신에 오러를 둘렀음에도 불구하고 갈비뼈가 부러질 것처럼 아팠다.
반은 짙은 신음을 토해 내며 검을 지팡이 삼아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러나 반의 눈빛만큼은 금방이라도 나르바의 숨통을 끊어 낼 듯이 매서운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제기랄……!’
분했다.
분하고, 분했고 또 분했다.
지난 날, 단 하루도 빼먹지 않고 매일 같이 단련해 왔는데 땅꼬마 같은 놈에게 제대로 된 한 방조차 먹일 수 없는 것이 너무나도 분했다.
온갖 생각들이 분노의 파도에 휩쓸려 머릿속을 잠식해 들어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을 움직일 수 없는 것은, 지금 같은 상황에서 무의미하게 몸을 놀려 봤자 오히려 목숨만 축낼 뿐이라는 사실을 반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뜨겁게 끓어올랐던 감정이 무기력함에 의해 차갑게 식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꽤나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놈에게 조금이라도 공격이 먹혀들었다면, 반은 그 일말의 가능성을 보고 굶주린 아귀처럼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달려들었을 테니까.
나르바가 말했다.
“어째 눈빛만 보면 수호자다운데 말이지. 근데 어쩌냐, 반지 하나로는 날 죽이긴커녕 생채기 하나 낼 수 없을 텐데.”
나르바는 백옥 같은 자신의 뺨을 어루만지며 반의 모자란 신력을 조롱했다.
신력!
문제는 신력이었다.
반은 신력이라는 불가항력 때문에 또다시 침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결국 또 신력 문제인가……!’
기술이나 오러의 문제라면 어떻게든 다른 비책을 찾아보려고 애를 쓰겠지만, 문제가 신력에 있다면 그것은 완전히 다른 영역의 골칫거리다.
“후…….”
반이 길게 한숨을 토해 냈다.
그러자 화병처럼 쌓여 있던 울분이 날숨을 통해 바깥으로 뿜어졌다.
뜨거운 숨이었다.
더불어 반은 냉철한 이성을 찾기 위해 더더욱 머리를 식혔다.
그리고 마침내 평정심을 유지할 만큼 분노를 삭여 내고 나서야 곁에서 떨고 있는 후슬러가 시야에 들어왔다.
후슬러를 본 반이 말했다.
“후슬러 님.”
“예, 예?”
“그 녀석을 불러 주십시오.”
“그, 그분을 지금요? 괜찮으시겠습니까?”
“지금은 방법이 없습니다.”
반은 품속의 로그 스톤을 만지작거렸다.
자신의 로그 스톤을 나누어 받은 현자가 언제 이곳에 도착할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만약 나르바가 제대로 마음만 먹는다면 자신과 후슬러는 현자가 도착하기도 전에 개죽음을 당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을 대비해서 녀석을 준비한 거기도 하니까.’
헤라볼라에게서 받은 반지는 열 개뿐이다.
그렇기에 원정대가 가질 수 있는 신력에는 한계가 있다.
원정대가 반지를 나누어 가질수록 신력 또한 나누어지니 개개인의 무력 또한 약화된다.
그렇기 때문에 원정대는 반지를 제외한 다른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 대책 중에 하나가 바로 워록, 후슬러의 합류였다.
“뭘 그리들 속닥거려? 뭐 좋은 비책이라도 있어?”
나르바는 이미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
워록에 대해선 이미 드라칸에게 들었으나 그다지 위협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좀 전의 경합으로 반 또한 자신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일은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을 자신의 우상, 아서스를 위해 최고의 볼거리를 제공해 주는 것뿐.
아서스를 기쁘게 할 생각에 나르바는 벌써부터 흥에 달아올랐다.
“그래도 너는 ‘하즈’라는 놈보다 두 번쯤은 더 꿈틀거려 줬으면 좋겠어.”
빠득!
나르바는 어떤 말을 하면 상대가 흥분할지 몹시 잘 알고 있는 듯했다.
반은 나르바의 도발에 하마터면 다시금 이성을 잃을 뻔했다.
그러나 참았다.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서.
당장의 분노 때문에 일을 그르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은 진심으로 나르바를 증오했다.
그래서 어떻게든 참고 인내하여 확실하게 분노의 근간을 해치우고 싶었다.
이윽고 준비를 마친 후슬러가 말했다.
“반 님, 그럼 이제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DurlRkwl dlfrdj wntls ehrwk dufjqns tkfkdgkqslek dkvdmfheh wkf qnxkrgody!”
후슬러가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후슬러의 안광에 붉은 빛이 맴돌며 물에 잠긴 해초처럼 머리카락들이 천천히 부양되었다.
후슬러는 양손을 앞으로 펼쳐 계속해서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크윽!”
주문의 타깃은 다름 아닌 반이었다.
후슬러의 주문이 반의 몸에 닿았을 때, 반과 후슬러 사이에 다수의 붉은 실들이 거미줄처럼 늘어졌다.
붉은 실.
그것의 정체는 다름 아닌 피였다.
후슬러는 워록이다.
그가 기술을 사용하기 위해선 보다 확실한 에너지원, 즉 살아 있는 사람의 혈액이 필요했다.
“호오?”
나르바 또한 이 광경을 보았다.
그리고 잠시간 고민했다.
그리고 얼마간의 고민 끝에 녀석들에게 틈을 주지 않기로 했다.
“그렇겐 안 되지.”
파캉!
일순간 나르바의 신형이 사라졌다.
그리고 나르바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을 땐 어느새 반의 코앞까지 다가온 뒤였다.
나르바는 주먹을 말아 쥐고서 반의 얼굴을 향해 정직하게 내질렀다.
그러나 반사 신경이라면 반 또한 뒤지지 않는다.
반은 칼집에서 검을 조금만 빼낸 다음 내질러 오는 나르바의 주먹을 정면으로 막아 냈다.
콰아앙!
눈앞에서 굉장한 소리가 났다.
그리고 소리와 더불어 큼지막한 풍압까지 일었다.
나르바는 반의 칼집에 주먹을 붙인 채 허공에 정지해 있었다.
물리법칙 따윈 가볍게 무시해 버리는 모습이었다.
허공에서 정지한 나르바가 부들거리는 반의 코앞으로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다.
“무슨 꿍꿍이를 벌이시려고 이렇게까지 인내하실까?”
“닥……쳐라!”
“얼씨구?”
콰앙!
반의 욕설에 나르바는 허리를 비틀어 왼발로 궤적을 그렸다.
노린 것은 반의 옆구리.
그러나.
“……오?”
반은 주먹을 막았던 검을 회수해 옆구리로 들어온 발 차기까지 가까스로 수비하는데 성공했다.
“……쿨럭!”
그러나 성공한 것은 나르바의 발이 반의 몸에 닿지 않은 것뿐이지, 발 차기 안에 담긴 힘까지 모두 막아 낸 것은 아니었다.
반은 그 자리에서 피를 한 움큼 토해 냈다.
내상이 깊었다.
그도 그럴 것이 녀석의 발 차기는 평범한 무투 따위가 아니었으니까.
반의 두 눈에 실핏줄이 모두 터져 붉게 충혈되었고 전신에는 핏줄이 진하게 돋아났다.
“흐음…….”
나르바의 왼발은 여전히 반의 옆구리 언저리에 걸쳐 있었다.
나르바는 이번에도 허공에서 멈추어 서서 반의 뒤편을 살폈다.
나르바가 말했다.
“참 신기한 조합이야. 너희 인간들은 흑마술사들을 미워하지 않았나? 그런데 어째서 워록 따위와 협력하는 거지?”
“닥……쳐라……!”
“그렇지. 알 거 없지. 그럼 너도 더 이상 살 이유가 없겠네.”
나르바는 반의 건방짐이 선을 넘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놀이판을 벌이되, 반은 이제 그만 이 놀이판에서 퇴출시켜 버릴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이번에는 정말로 온 진심을 다해 반을 죽일 생각으로 주먹을 들어 올렸다.
나르바가 인사했다.
“이제 죽어라.”
후우웅!
짧은 거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굉장한 바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나르바의 주먹이 반의 머리 위로 작렬하는 순간, 그 엄청난 충격에 굉장한 흙먼지가 일었다.
“……음?”
나르바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무언가 이상했다.
뻗은 오른 주먹이 얼얼했기 때문이다.
원래대로라면 그럴 수가 없다.
반의 신력은 고작해야 반지 하나짜리에 불과했고, 자신은 그에 몇 배에 달하는 신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이 얼얼했다.
그 순간.
-장난은 여기까지다, 애송아.
나르바에게는 낯선 목소리.
자욱한 흙먼지 사이로 붉은 안광이 번뜩였다.
나르바는 코앞에서 살결이 얼어붙을 정도로 지독한 냉기가 뿜어지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그 냉기로부터 도무지 인간의 것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진한 엄청난 살기를 느꼈다.
“이런!”
살기를 감지한 나르바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이윽고 흙먼지가 걷혔다.
그리고 걷힌 흙먼지 사이로 나르바는 볼 수 있었다.
“……넌?”
-알은척하긴, 쥐뿔도 모르는 놈이.
걷힌 흙먼지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지독한 냉기와 붉은 안광의 소유자.
그의 정체는 다름 아닌, 후슬러에 의해 이 땅에 다시 태어난 데스나이트, ‘헥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