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0
위대한 원정대 (12)
완전한 소드 마스터의 경지를 이룩하게 되면서, 헤라리온은 라의 신력을 보다 더 많이 개화할 수 있게 되었다.
헨리의 예상대로였다.
죽은 자기 아비만큼은 아니지만 한 달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터득해 낸 힘치곤 굉장한 양의 신력이었다.
물론 그 양을 직접적으로 측정해 보진 않았으나 일전에 칸느와의 전투에서 칸느를 단박에 말려 죽였으니 헤라리온이 가진 신력은 최소 반지 다섯 개분의 양은 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러한 신력을 바탕으로 헤라리온은 다시 한번 또 다른 사도인 글러트니의 행동에 치명적인 제동을 걸었다.
“서두르세요!”
헤라리온의 외침에 잠자코 대기하고 있던 바할드를 포함해 알렌과 워커, 그리고 다음 마법의 발사를 준비하던 현자들까지 모두가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들의 힘이 모래에 휘감긴 글러트니에게 작렬했을 때, 글러트니는 다시 한번 끔찍한 비명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키에에에에!”
글러트니의 입에서 더 이상 인간의 소리는 없었다.
놈이 내뱉은 비명은 그야말로 상처 입은 짐승의 처절함이었다.
그리고 글러트니가 고통에 찬 비명을 울부짖자 모두가 깨달았다.
제아무리 아서스의 신력을 넘겨받은 사도라 할지라도 무적은 아니라고 말이다.
“이…… 빌어먹을…… 놈들이!”
소용돌이치던 모래는 끊임없이 위로 치솟았다.
애초부터 헤라리온이 사용한 기술은 모래 소용돌이나 모래 파도 따위를 일으키는 힘이 아닌 한 채의 모래성을 세우는 것이었으니까.
이는 단순한 건축 기술 같은 게 아니었다.
사막이 아닌 땅에 하나의 모래성이 지어지기까지, 헤라리온의 신력을 머금은 모래들은 끊임없이 방해꾼을 굴복시키고 그것을 모래성의 재료로 삼으려 할 테니까.
공격은 계속됐다.
어차피 신력을 머금고 있는 것은 헤라리온의 모래뿐이니 나머지 사람들은 혼신을 다해 놈을 두드리는 것밖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글러트니의 몸에는 이들이 내던진 힘에 의해 순차적으로 데미지가 누적되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대원들의 총공세를 견디지 못한 글러트니가 쇳소리 같은 비명을 내지르며 짐승 같은 아가리를 찢어 벌리기 시작했다.
“……!”
“저, 저럴 수가!”
끓는 기름보다 더 뜨거운 것이 바로 헤라리온의 신력을 머금은 모래들이었다.
그런데 글러트니는 그 뜨거운 모래들을 닥치는 대로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본 알렌이 나지막이 감탄했다.
“미친놈……!”
달궈진 것들은 무엇을 해도 참 다루기가 어렵다.
그도 그럴 것이 그것들은 달궈진 것들이니까.
그렇기 때문에 그것들은 굳이 손을 대지 않고 근접해 있는 것만으로도 늘 위험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글러트니는 그런 달궈진 모래에 그렇게나 고통스러워했으면서도 허기진 짐승처럼 모래들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살이 익는 고통보다도 이대로 모래에 파묻혀 죽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그리고 죽음을 통해 아서스가 자신에게 실망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더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글러트니는 끊임없이 모래를 집어삼켰다.
여기 있는 모래들을 모두 삼키진 못해도, 잠깐이라도 탈출할 수 있는 찰나의 틈만 만들어진다면, 글러트니는 달궈진 모래를 배가 터질 때까지 삼킬 자신이 있었다.
그 지독한 광경에 공격을 퍼붓던 대원들이 일순간 공격을 멈추었다.
그런데 그 순간.
“모두 비켜!”
쩌렁쩌렁한 외침이 들린 것은 뒤편이었다.
그리고 소리가 사방으로 채 퍼지기도 전에, 화살보다 더 빠른 속도의 무엇인가가 거대한 풍압을 일으키며 대원들을 스쳐 지나갔다.
콰직!
스쳐 지나간 풍압의 끝에는 묵직한 파괴음만이 있었다.
그리고 그 파괴음을 연주한 작자는, 다름 아닌 맥도웰이었다.
“죽어라! 이 빌어먹을 괴물 놈아!”
음속의 맥도웰.
그가 쓰라린 명치의 고통을 딛고서 벌려진 글러트니의 아가리 속에 자신의 칼날을 박아 넣은 것이다.
“키아아아!”
입 안쪽을 관통당한 글러트니가 지독한 고통에 울부짖었다.
글러트니는 현재, 자신을 집어삼킨 달궈진 모래로부터 고통을 덜어 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온몸에 신력을 분출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 네 개의 반지를 소지한 맥도웰이 칼날을 들이밀었으니 입 안쪽에 신력을 배분할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글러트니에겐 최악의 상황이었다.
이윽고 짐승을 닮은 괴물의 울음이 사방으로 번져 나갔다.
날카로운 울음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고통에 의한 구슬픈 울음이 아닌 뜻대로 일을 이루지 못한 여느 욕심 많은 악마의 패악질처럼 들렸다.
맥도웰은 검을 역수로 쥔 후 벌려진 아가리의 양 끝에 두 발을 단단히 고정시켰다.
그런 다음 자신이 가진 오러의 전부를 칼끝에 불어넣음과 동시에 살의를 가득 담아 불어넣은 오러를 한순간에 폭발시켜 냈다.
투쾅!
응집된 기운이 한꺼번에 터져 나가니 기이한 소리가 났다.
그러나 기이한 소리와는 반대로 그 소리 끝에 뿜어진 폭발은 엄청난 양의 에너지 덩어리였다.
번쩍!
뿜어진 오러가 일순간에 폭발하며 글러트니의 몸체를 성난 복어처럼 부풀려 냈다.
글러트니의 육체가 터지지 않은 게 용할 정도였다.
그리고 폭발한 오러에 의해 글러트니의 몸이 거대하게 부풀어 오르자 글러트니를 감싸고 있던 모래 또한 사방으로 튀여 나갔다.
“……끝이다!”
발을 디딘 글러트니의 아가리로부터 힘이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맥도웰은 방심하지 않고 역수로 쥔 검을 다시 제대로 잡았다.
그런 다음 생기를 잃은 놈의 눈동자를 무시한 채 글러트니의 축 늘어진 목덜미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서걱!
힘없이 잘려나가는 글러트니의 목덜미.
핏물은 튀지 않았다.
내장에서 폭발한 오러와 몸 전체를 감싸고 있는 달궈진 모래 덕분에 내장 가득히 고여 있던 핏물이 모두 말라 버렸으니까.
맥도웰이 잘린 글러트니의 머리를 승기처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맥도웰은 더 이상, 놈에게서 받은 등짝의 상처를 수치로 여기지 않기로 했다.
헨리 없이 얻어 낸 원정대의 첫 승리였다.
* * *
대륙의 어딘가.
아이리네와 로거, 그리고 아난다는 페일로의 말을 끝으로 어딘가로 이동되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여느 낯선 평야였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아난다였다.
“아무래도…… 옮겨진 건 우리뿐인 듯하군요.”
십이사도를 포함해 원정대원 그 누구도 그들의 곁에 없었다.
그렇다면 함께 옮겨진 것은 세 사람뿐이라는 말.
십이사도를 포함해 대원들과 떨어진 건 아쉽게 됐지만, 그래도 두 사람이라도 함께 있으니 다행이라고 아이리네는 생각했다.
이어서 바닥의 토지를 확인한 로거가 말했다.
“땅이 얼어 있습니다. 아무래도 기후와 토지의 질로 미루어 보았을 때, 이곳은 대륙의 북부 쪽인 듯싶습니다.”
“대륙의 북부…… 꽤 멀리도 보내졌군요.”
리자르크 언덕을 향하던 중이었으니 원래 있던 장소에서 미루어 보았을 때 대륙의 북방이라면 거리가 꽤 되는 곳이었다.
하지만 성녀를 포함한 세 사람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그들의 품속에는 현재 자신들의 위치를 알리는 아티팩트, 로그 스톤이 있었으니까.
로그 스톤을 꺼내 든 로거가 말했다.
“역시 대마법사님이십니다. 하마터면 꼼짝없이 북방의 미아가 될 뻔했습니다.”
“다행히 로그 스톤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는 것 같네요. 그럼 조금 있으면 현자님들께서 저희를 데리러 올 테니 그때까지만 좀 주의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일전의 대규모 전쟁과 교황이 죽은 이후로 아이리네는 부쩍 능동적으로 상황을 이끌어 나가는 기질이 생겼다.
물론 그것이 나쁜 기질은 아니었다.
도리어 로거와 아난다에겐 긍정적인 신호였다.
탐욕스러운 변절자였던 교황이 죽었으니 이제 그녀가 차기 교황이 되어 길을 잃은 평화교를 이끌어 나가야만 했으니까.
그런데 그때였다.
“후후, 조금만 주의한다라……. 그것 참 팔자 좋은 말이로군요.”
세 사람은 낯선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니, 사실 따지고 보면 낯선 목소리는 아니었다.
조금 전까지 이 목소리의 주인공이 하던 말을 듣고 있었으니까.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페일로였다.
페일로는 여전히 정돈된 차림새로 세 사람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윽고 빠르게 페일로의 주변을 살피던 로거가 말했다.
“혼자뿐인가?”
“그럼요.”
“왜지?”
“왜라……. 꽤나 이상한 질문을 하는군요. 이유는 간단해요. 제가 원했으니까요.”
“네가 원했다고?”
“그럼요. 여러분들을 택한 것도 여러분들을 이곳 북방으로 한꺼번에 보낸 것도 다 제가 원해서 이루어진 일이랍니다.”
“……어이가 없군.”
페일로의 건방진 대답에 로거는 더 이상 들을 가치가 없다는 듯이 익숙한 모양새로 전신에 신력을 틔워 냈다.
그리고 그것은 아난다 또한 마찬가지였다.
거대한 덩치의 수도승은 전신에 신력을 내뿜으며 언제든지 성녀를 위협으로부터 지킬 방어 자세를 취했다.
그 모습을 본 페일로가 웃으면서 말했다.
“어떻게 한 치의 예상도 빗나가지 않고 똑같이 움직여 주는 건지 참 신기할 따름이군요.”
“뭐라고?”
“내가 왜 하고 많은 원정대원들 중 당신들을 선택했는지 궁금하지 않나요?”
물음과 함께 페일로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점점 더 높이 떠오르는 페일로.
그러나 페일로가 점점 더 높이 떠오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목소리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평화교. 알아보니 그 위세가 참 대단한 곳이더군요. 오죽했으면 이 땅의 모든 이들이 평화의 여신 아이린을 믿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말이죠, 지금은 그 사정이 바뀌었어요.”
팡!
말을 마친 페일로가 허공에서 한 번 바닥을 찼다.
그러자 공기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페일로가 이어서 말했다.
“이젠 대륙의 절반이 넘는 이들이 위대하신 아서스 님을 믿고 있답니다.”
두두두두…….
페일로의 말을 끝으로 대지가 울리기 시작했다.
엄청난 울림이었다.
이에 로거와 아난다가 각기 다른 방향으로 고개를 틀어 눈살을 찌푸렸다.
“저건……?”
검은 파도와도 같은 일렁임.
로거는 일전에도 저러한 파도를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시력이 허용하는 범위쯤에 검은 파도가 들이닥쳤을 때, 로거는 전신에 소름이 돋을 수밖에 없었다.
“서, 설마……!”
“그렇습니다.”
로거의 놀란 기색을 본 페일로가 한손으로 입을 가리며 쿡쿡 웃어 보였다.
그리고 로거의 혼잣말에 대답했다.
대지를 울리며 다가오는 이들.
저들의 정체는 다름 아닌 대륙 전역에 걸쳐 사도들에게 포교된, 아서스의 ‘맹신자’들이었다.
“서, 성녀님! 피하셔야 합니다!”
검은 파도의 정체를 알아챈 아난다가 놀란 표정으로 성녀에게 피신을 권했다.
그러나 아난다는 그 권유가 곧 소용없는 짓임을 깨달았다.
그녀를 피신시키기 위해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아난다는 아이리네의 뒤편에서도 엄청난 수의 맹신자들이 몰려오고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시, 신이시여…….”
그 광경을 본 아난다가 절망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에 페일로가 애써 참고 있던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하하! 그러길래 로스 교황을 그대로 두었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 아닙니까!”
“네 이놈!”
페일로의 비웃음에 화가 머리끝까지 난 로거가 팔라딘의 무장을 외쳤다.
새하얀 신력이 그의 몸을 감싸 안으며 성스러운 무구들을 덧입혀 주었다.
그 모습을 본 페일로가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호오, 그게 바로 팔라딘의 무장이란 거군요. 하지만 당신이 제아무리 역대급 재능을 가진 성전사라고 한들, 당신들은 고작해야 셋. 겨우 그런 숫자로 저 많은 맹신자들을 상대할 수나 있겠어요?”
페일로는 악마처럼 웃었다.
그리고 더더욱 세 사람으로부터 멀리 떨어지며 뒷말을 덧붙였다.
“아 참, 그리고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 거지만 이곳으로 소집한 맹신자들은 전부 한때 평화교의 독실한 신자들이었던 사람들입니다?”
“뭐라고?”
-키아아아!
끝으로 페일로는 점이 되어 사라졌다.
그리고 점이 되어 사라진 페일로와는 달리 파도처럼 보이던 맹신자들은 배고픔에 잔뜩 굶주린 아귀처럼 혹은 마물의 숲에서나 보았던 좀비 떼처럼 오직 본능만을 위한 침을 흘리며 세 사람에게로 맹렬히 돌진해 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