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7
위대한 원정대 (9)
“네놈! 무슨 수작이냐!”
몸이 쪼개진 드라칸은 갑작스럽게 바뀐 시야에 비명에 가까운 고함을 내질렀다.
주위는 달빛 한 점 없는 숲속처럼 몹시 어두웠다.
그 순간, 드라칸의 눈앞에 동그란 빛이 번쩍이더니 헨리의 모습이 드러났다.
드라칸은 헨리와 시선을 마주쳤다.
드라칸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는 헨리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헨리는 영상의 저편에서 상반신만 남아 바닥에서 퍼덕이는 드라칸을 들여다보며 클레버에게 명령했다.
-시작해라, 클레버.
-예, 마스터.
우웅!
시작하라는 명령과 함께 칠흑처럼 어두운 클레버의 체스트 속에서 수천 개에 달하는 마법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룬어와 수식으로 가득찬 평범한 모습의 마법진들.
하지만 드라칸은 그 정돈된 평범한 속에 녹아 있는 ‘진짜 힘’을 알고 있기에 모골이 송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저, 저 많은 마법들이 전부……!’
8서클의 마법들이었다.
과거였다면 눈앞의 마법진들이 어떤 가치를 지녔는지 절대 몰랐겠지만, 7서클의 경지에 오른 지금은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드라칸은 고조된 긴장감에 의해 입안이 건조해졌다.
제아무리 죽은 스승이 만든 편안한 길을 통해 손쉽게 8서클의 경지를 이룩했다고는 하나, 어찌 됐든 헨리가 가진 경지는 진짜였으니까.
드라칸은 바짝 마른 입을 닫았다.
그리고 본능을 자극하는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애써 주먹을 꽉 쥐었고 세뇌를 하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난……! 난 내 힘을 믿는다! 그리고 이루어 낼 것이다……! 내 리본이 네놈보다 더 뛰어나다는 것을!”
피식.
그 말을 들은 헨리가 말했다.
“그러시든지.”
그 말을 끝으로 드라칸의 시야엔 헨리의 모습을 송출해 내던 화면이 사라지며 파괴의 광휘만이 참혹하게 빗발치기 시작했다.
* * *
“끝인가?”
헨리는 체스트 속에 미리 설치해 두었던 마법들이 대부분 발동되었음을 느꼈다.
이는 헨리가 준비한 수많은 대응책들 중 하나로 원래는 아서스에게 사용할 비책들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쉬움은 없었다.
막상 이 전략이 아서스에게 통할 거란 보장은 없었으니까.
그래서 일말의 고민도 없이 드라칸을 체스트 속으로 밀어넣고 비책을 발동시켰다.
헨리는 여전히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드라칸의 하반신을 바라보았다.
진화된 육체라더니, 상반신을 날려 먹고도 꿈틀거리는 걸 보고 있으려니 진화된 육체라기보다는 그저 몸체가 잘린 뱀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헨리는 드라칸의 남은 하반신을 그냥 태워 없애 버리려다 통째로 얼린 후 아공간 속에 집어넣었다.
그런 후 클레버를 호출했다.
“클레버.”
-예, 마스터.
“어떻게 됐지?”
-방금 막 사백 번째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쯧, 여러모로 지독하구만.”
클레버의 보고에 헨리는 고개를 내저었다.
오백여 명의 목숨을 가지고 있다더니 정말이었던 모양이다.
오백명의 목숨.
그 말은 언뜻 보면 불로불사의 비밀을 파헤친 것처럼 보였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불로불사의 영역은 아니었다.
단순히 남의 수명을 몸속에 수납해 놓고 그것으로 자신의 목숨을 연장시키는 것뿐이었으니까.
그리고 드라칸은 처음부터 리본의 비밀을 헨리에게 말하지 말았어야 했다.
자신의 오만함에 취해 약점을 드러낸 꼴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물론 현재의 드라칸이라면 지금 체스트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마법 지옥이라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 내고 자력으로 탈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아서스에게서 받은 신력을 이용한다든지 하는 방법으로 말이다.
하지만 헨리는 드라칸이 아서스의 신력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놈은 마법사니까.’
마법사.
같은 인간이면서도 마법을 익혔다는 이유로 마법사들은 참 고지식하고 자존심에 연연하는 족속들이 되어 버렸다.
아마도 자신은 범인들과는 달리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해서 그럴 것이다.
헨리는 드라칸의 눈동자에서 지독한 열등감과 인정에 대한 욕구를 보았다.
그 두 가지도 결국은 베베 꼬인 자존심, 즉 자신은 특별하다고 생각되는 착각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드라칸은 죽었으면 죽었지, 절대로 아서스의 신력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었다.
적어도 헨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찌 됐든 녀석 또한 헨리의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는 마탑에서 수학했던 마도사였으니까.
‘그럼 이제 백 번, 아니지 매직 애로우 때 열 번 정도 죽었다고 시인했으니 이제 아흔 번만 더 죽으면 되겠군.’
헨리는 놈이 가진 목숨을 모두 소진할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려 주기로 했다.
* * *
체스트를 가득 메웠던 8서클의 마법진 무더기를 보고 드라칸은 겁을 먹었다.
겁을 먹은 이유는 간단했다.
8서클쯤 되는 마법이 주는 고통은 매직 애로우나 매직 스피어와는 차원이 다른 고통들이었으니까.
물론 숱한 인체 실험을 자행해 온 마법사가 고작 고통 앞에 겁을 먹는다는 게 좀 의아하긴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타인의 고통이었으니 상관없다는 게 드라칸의 지론이었다.
두려움에 마른침을 삼킨 드라칸은 이를 악물었다.
그는 자신이 만든 마법, 리본을 믿었다.
리본은 타인의 생명력을 이용해 영생을 누릴 수 있게 해 주는 마법.
그렇기 때문에 제아무리 극악한 고통의 8서클 마법이라곤 해도 언젠간 그 폭풍 또한 멎을 터, 그래서 드라칸은 그 사실 하나만 믿고서 어떻게든 저 끔찍한 마법 폭풍을 견뎌 내기로 했다.
처참하고 끔찍한 고통이었다.
매직 애로우나 매직 스피어와는 차원이 다른 고통이었다.
단순히 살점을 뚫고 부여된 속성을 통해 2차 통증을 유발하는 두 마법과는 달리 8서클의 마법들은 그야말로 뿌리 깊은 고통의 근간, 그 자체였으니까.
드라칸은 몇 번이나 기절했다가 고통에 의해 다시금 정신을 차렸다.
그 와중에도 리본은 성실하게 제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다.
리본의 임무는 죽음에 임박한 술자의 육체를 탈피해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렇게 몇 번이나 다시 죽고 부활했을까?
드라칸이 죽음과 부활의 횟수를 헤아리는 걸 포기한 건 대략 백여 번의 죽음이 이루어진 직후였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헨리의 마법은 체스트 속을 가득 메우고 있었고, 마법 폭풍은 끊임없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목숨이 이제 쉰 명분도 채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쯤, 드라칸은 그제야 무엇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대체 왜!’
끝나야 할 마법 폭풍이 도무지 끝나지 않고 있었다.
이쯤이면 분명히 끝나고도 남아야 할 마법 폭풍일 텐데, 헨리의 마법 폭풍은 좀처럼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더 거세지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당연한 결과였다.
7서클 마법사의 마력은 언젠간 바닥을 드러내는 그릇 속의 물과도 같았지만 8서클부턴 아니었기 때문이다.
8서클 마법사에게 있어 마력은 공기와도 같은 것.
그야말로 퍼내도, 퍼내도 절대 마르지 않는 바다와도 같은 것이었기에 어쩌면 헨리가 마음만 먹는다면 평생 동안 8서클의 마법 폭풍을 유지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그 사실을 모르는 드라칸은 끝나지 않는 마법 폭풍을 보며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죽음이 한 발짝 더더욱 가까워졌다.
그리고 드라칸은 그제야 ‘진심으로’ 초조해졌다.
저장해 둔 여분의 목숨이 카운트다운처럼 사라질 때마다 전신의 피가 마르고 입안이 바짝 말랐다.
하지만 이대로 결과에 승복하고 아서스에게서 받은 신력을 사용한다면, 그리고 그렇게 탈출한 힘으로 헨리를 죽여 버리고 만다면…….
드라칸은 평생 동안 헨리를 뛰어넘지 못했다는 지독한 자기혐오에 빠질 것이다.
죽음의 카운트다운은 어느새 서른의 영역까지 치고 들어왔다.
해초에 난파되어 가라앉고 있는 뱃속에 있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런 고민을 하는 와중에도 뼈를 깎고 살을 자르는 고통은 끊임없이 전신을 자극했다.
그야말로 절망의 아비규환이었다.
시간은 계속해서 흘렀다.
그리고 드라칸이 고민하는 사이, 남은 목숨의 갯수가 어느덧 두 자릿수에서 한 자릿수로 진입했다.
10.
9.
8.
7.
…….
마법이 죽음을 수놓고 리본이 새 생명을 틔울 때마다 모골이 송연해지는 끔찍한 카운트다운 또한 함께 동반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목숨의 개수가 다섯 개 미만이 되었을 때, 드라칸은 결국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명예롭게 죽든지, 아니면 목숨을 보존하고 죽을 때까지 자기혐오와 싸울 것인지.
콰드득!
마침내 드라칸의 목숨이 하나 밖에 남지 않았을 때, 드라칸은 결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굳은 결심과 함께 굳건한 목소리로 처절하게 외쳤다.
“나는!”
번쩍!
드라칸이 첫마디를 뱉었을 때, 눈부신 광명이 다시 한번 드라칸의 시야를 엄습했다.
* * *
마취에서 덜 깬 사람처럼, 드라칸은 여전히 전신을 짓누르는 8서클 마법의 지독한 고통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시야와 더불어 더 이상 전신을 찢어 놓는 고통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야 제대로 두 눈을 뜰 수 있었다.
이곳은 바깥이었다.
그리고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본 것은 여느 낯선 이의 ‘발’이었다.
‘발……?’
고급스러운 원단으로 만들어진 부츠는 두 발을 감싸고 있었다.
그리고 발을 기점으로 발목과 정강이, 무릎을 지나 그 위까지 시선을 올리고 싶었지만 목 근육이 더 이상 움직이질 않았다.
여전히 전신에 고통의 잔재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꽤나 익숙하고 기분 나쁜 목소리가 드라칸의 멍한 정신을 비집고 들어와 귓전을 때렸다.
“그래도 마법사란 거냐?”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헨리였다.
헨리는 팔짱을 낀 채 비릿한 미소와 함께 드라칸을 내려다보았다.
드라칸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드라칸은 지금 그토록 자랑하던 진화된 육체의 대부분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드라칸의 척추가 하반신이었던 뱀 꼬리 대신 길게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누군가 발라 먹고 버린 생선 구이를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 그 끝에는 날개가 뜯겨져 나간 볼품없는 등짝과 군데군데 구멍이 가득한 목 근육, 그리고 불에 타 머리카락이 사라진 창백한 머리만이 남아 있었다.
그 흉측한 몰골을 보며, 헨리는 눈살을 찌푸림과 동시에 미소 지었다.
드라칸이 말했다.
“네……놈!”
“인정하지. 보통의 인간이었다면 이 꼴이 되고 나면 절대 말할 수도…… 아니, 숨조차 쉴 수 없었을 거야. 너는 훌륭한 고깃덩이로 진화했어, 드라칸.”
헨리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리본이 가지는 부활의 속성 이외에도 바퀴벌레 같은 질긴 생명력을 가질 수 있게 해 준 드라칸의 새로운 육체에 대해서 말이다.
이에 드라칸이 무어라 말을 잇기 위해 입술을 달싹였다.
“넌……!”
“쉿. 그래도 감동했어. 난 사실 네가 마지막에 자존심이고 뭐고 다 내려놓을 줄 알았거든. 그러니 너의 마법사 정신만큼은 높이 사도록 할게. 비록 그 정신이 몹시 비뚤어졌다는 게 문제였지만.”
“…….”
드라칸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죽어 가는 몸뚱이 속에서 얼마동안 침묵했다.
그리고 그 침묵 끝에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크큭, 크크크큭…….”
꺼져가는 불씨처럼, 드라칸은 쇳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마저도 바람이 빠져가는 풍선처럼 힘이 없었다.
헨리는 잠자코 드라칸의 웃음을 경청했다.
웃음이 끝난 뒤 드라칸이 말했다.
“나의 패배다, 헨리.”
“당연한 소릴 하는군.”
“크크큭, 그래…… 헨리 모리스, 네가 이겼다. 하지만 너는 고작해야 나 하나만을 쓰러뜨렸을 뿐이다.”
“당연하지. 지금 나랑 싸운 건 너밖에 없는데.”
“크큭, 우습군. 애초에 네가 나에게 올 수 있었던 건 내가 아서스 님께 부탁드렸기 때문……. 하지만 너를 제외한 다른 놈들은 어떨까?”
“죽어 가는 놈이 폐활량도 좋네. 빙빙 돌리지 말고 그냥 본론을 말하는 게 어때?”
“넌 지금 착각하고 있다……! 네가 나를 이길 수 있었던 건 내가 아서스 님께 받은 신력을 조금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 하지만 네놈들은, 아니! 뿔뿔이 흩어진 네놈의 동료들은 어떨까? 고작해야 반지 하나짜리 신력으로 우리들을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드라칸은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다.
하지만 패배한 것은 자신뿐이지 다른 사도들을 비롯한 아서스가 패배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드라칸은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명예로운 죽음을 택하기로 했다.
드라칸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전부를 이룩했고, 비록 실패하긴 했지만 평생의 숙원이었던 일까지 모두 치러 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드라칸은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명예롭게 죽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패배를 인정하고 죽음에 한 발짝 가까워졌음에도 불구하고 드라칸은 자신의 패배가 진짜 패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싸움은 자신의 숙원을 해소하기 위한 사적인 싸움이 아닌, 자신이 모시는 군주, 반신 아서스를 위해 시작한 싸움이었으니까.
이에 헨리가 말했다.
“난 또 뭐라고……. 근데 이게 유언이라면 좀 실망인데? 죽어 가면서 한다는 말이 고작해야 그거냐?”
“뭐라고……?”
“쯧쯧, 이게 바로 너와 나의 차이라는 것이다. 애초에 신력도 없는 현자들을 내가 왜 데리고 왔다고 생각하지?”
“그게 무슨…… 네놈, 설마!”
“쯧, 뭘 깨달았는지는 몰라도 이제 그만 죽어라. 네놈과는 더 이상 대화할 가치가 없으니.”
서걱!
헨리는 콜소드를 휘둘러 드라칸의 숨통을 완전히 끊었다.
축 늘어지는 드라칸의 몸.
그의 말로는 인간 마법사가 아닌 흉악한 괴물 그 자체였다.
검을 역소환하며 헨리가 말했다.
“그나저나 다들 일러 준 대로 잘 하고들 있으려나? 걱정이 좀 되긴 하네.”
드라칸의 시체를 완전히 전소시킨 헨리는 흩어진 동료들을 찾기 위해 텔레포트를 사용했다.
헨리가 앞으로 몇 발자국의 걸음을 내딛자 헨리의 모습이 허공 속으로 순식간에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