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4
위대한 원정대 (6)
“사도!”
반응은 화끈했다.
다들 이어지는 공허한 침묵에 사실상 반쯤 포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정말로 기다리던 사도들이, 그것도 제 발로 나타나 주었으니 반응이 화끈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특히 화끈하게 살기를 내뿜는 맥도웰이 가장 열광적으로 반응했다.
‘다행히 체면치레는 했네.’
하마터면 대원들 앞에서 처음으로 망신살을 뻗칠 뻔했다.
그리고 헨리의 계획대로 일이 이루어졌으니 7현자들은 다시 한번 위대한 대마법사의 지혜에 감탄했다.
흙먼지가 걷히며 사도들이 모습을 드러냈고 열광적으로 반응하던 대원들은 이내 입을 다물고 말없이 전투태세에 돌입했다.
두 집단 사이에 침묵의 긴장감이 흘렀다.
모습을 드러낸 다섯 사도 중 페이실링에서 용병들을 대학살했던 시온이 노란 머리칼을 뒤로 쓸어넘기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건방진 놈들, 감히 아서스 님께 직접 제안을 드릴 생각을 하다니. 주제도 모르고 건방을 떠는구나.”
“넌……!”
시온을 발견한 알렌의 눈동자가 눈에 띄게 확장되었다.
그리고 눈동자가 확장된 것은 알렌뿐만이 아니었다.
바할드와 맥도웰 또한 자신들에게 굴욕을 주었던 사도들을 보며 매서운 살기를 뿜어냈다.
그 광경을 본 시온이 말했다.
“음? 너 아직 살아 있었네? 역시 이단 놈들이야. 생명력 하난 바퀴벌레처럼 끝내준다니까? 뭐, 그 덕분에 몸뚱이는 잘 썼지만.”
몸에 흉터를 새기는 시늉을 하며 시온은 쿡쿡 하고 웃었다.
이에 알렌의 분노는 순식간에 한계점을 돌파했다.
그래서 곧장 허리의 바실리포를 뽑으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헨리가 손가락을 튕겨 알렌의 바실리포를 검 집에 단단히 고정시켰다.
헨리가 말했다.
“진정하세요, 알렌 님. 상대는 다섯입니다. 무턱대고 덤벼들었다간 계획해 둔 것들이 허사로 돌아갑니다.”
“크으윽……!”
그 때문이었을까?
평소였다면 성격대로 폭발해 나갔을 맥도웰도 무턱대고 검을 뽑지 않고 이를 악물고 인내했다.
하지만 그의 인내심으로는 버티기가 그리 녹록해 보이지만은 않았다.
그런데 그 순간, 시온의 어깨를 잡아끌며 신성국에서 교황을 구워삶았던 페일로가 앞으로 걸어 나오며 말했다.
“반갑습니다. 제 이름은 페일로입니다.”
페일로는 마치 사도들의 리더인 양 정중하게 행동했다.
이어서 페일로가 헨리에게 물었다.
“근데…… 듣자하니 당신이 제 수하를 처리했다던데, 그 사실이 맞습니까?”
“수하?”
페일로가 헨리에게 물었다.
하지만 헨리는 페일로를 처음 보았고 그가 말하는 수하가 누군지조차 몰랐다.
이에 페일로가 말을 정정하며 다시 말했다.
“아, 수하라고 하면 모를 수도 있겠군요. 제 수하의 이름은 로스 보르기아였습니다. 신성국에서 교황의 자리를 맡고 있던 자였습니다.”
“뭐?”
“교황이라고?”
페일로가 덤덤한 표정으로 자신의 수하에 대해 언급하자, 도리어 화들짝 놀란 것은 아이리네와 로거, 그리고 아난다였다.
세 사람의 얼굴에 복잡한 심경이 스쳤다.
이에 세 사람을 대신해 비교적 차분한 상태인 헨리가 대답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지?”
“그냥 칭찬해 드리고 싶은 것뿐입니다. 아서스 님의 은총을 충분히 받은 제 수하의 정체를 손쉽게 간파한 것도 모자라서 없애기까지 하셨으니, 그 실력만큼은 분명 칭찬받아 마땅한 것이지요. 게다가 지금 이렇게 당신이 원하는 대로 저희들을 한데 불러 모으는 것까지 성공하지 않았습니까?”
페일로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도 그럴 것이 페일로는 자기네 패거리를 제외한 모든 존재를 열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어서 페일로가 말했다.
“그러니 자랑스럽게 생각하세요. 저희 같은 사도가 아닌 이상 아서스 님께 그런 식으로 부탁을 드리고 그 부탁이 이루어진 사례는 극히 드문 것이니까요. 하지만 말입니다, 헨리 씨, 당신들은 그만 선을 넘고 말았어요.”
“선을 넘었다고?”
“예, 당신들은 너무 오만했습니다. 앞서 죽어 나간 사도들은 우리들 중에서도 약해 빠진 존재들. 겨우 그런 놈들을 해치우고 저희들을 한꺼번에 해치우겠다고 소란을 피우다니, 그건 너무 오만하지 않습니까?”
페일로는 웃는 얼굴로 원정대원들의 오만함을 지적했다.
이에 헨리가 헛웃음을 터뜨리며 담담히 맞받아쳤다.
“웃기는군. 좀 전에 잿더미가 된 녀석은 분명히 자기 입으로 자신은 사도들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드는 힘을 가졌다고 했는데?”
“그건 그녀의 기준일 뿐이죠. 누구든지 넘치는 자기애쯤은 가지고 있잖아요? 그녀는 딱 그런 부류였던 겁니다. 주제도 모르고 스스로의 가치를 과대평가하는, 그리고 당신들의 잘못은 오만함뿐만이 아닙니다.”
“잘못이 또 있다고?”
“물론입니다. 그 잘못은 바로 감히 아서스 님께서 정하신 일을 함부로 거스르려고 한 것. 그것이 당신들이 저지른 가장 큰 잘못입니다.”
“뭐라고?”
“그러니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 누구도 아서스 님께 건방지게 제안 같은 걸 할 순 없습니다. 그러니 무슨 일이든지 절대로 당신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페일로는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헨리의 ‘진짜 잘못’을 지적했다.
그러고 나서 가볍게 손뼉을 쳤다.
짝!
번쩍!
페일로가 손뼉을 친 순간, 헨리는 순간적으로 어둠을 보았다.
실명에 가까운 어둠.
어둠이 헨리를 휘감았다.
* * *
헨리가 다시 시야를 되찾았을 때, 헨리는 아일라를 쓰러뜨렸던 골짜기가 아닌, 전혀 처음 보는 낯선 장소에서 눈을 뜨게 되었다.
‘이게 무슨!’
헨리는 당황했지만 급히 정신을 차리고 텔레포트를 사용하기 위해 수인을 맺으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낯선 힘이 헨리의 행동을 저지하려 들었다.
“그만.”
묘하게 기분 나쁜 목소리였다.
그리고 강제로 헨리의 행동을 억제시키려는 것으로 보아 목소리의 주인공은 분명히 ‘마법사’라고 생각했다.
이에 헨리는 목소리가 들린 방향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그러자 그곳엔 새하얀 백발을 한 여느 미소년이, 암석에 걸터앉은 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넌!’
녀석의 정체는 다름 아닌 드라칸이었다.
드라칸 로티크.
그는 헨리를 제외하고 대륙 최초로 자력으로 7서클의 경지를 이룬 마탑 출신의 마법사이자, 지금은 아서스의 오른팔이나 다름없는 존재.
드라칸과 시선을 맞춘 헨리는 금세 분노가 치밀었다. 그리고 그 분노를 원동력 삼아 자신의 몸을 억제하고 있던 ‘무형의 강제력’을 깨부수었다.
와장창!
몸을 억제하던 구속으로부터 해방되는 순간, 헨리는 유리가 깨지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마력 구속이 맞았군.”
헨리의 예상대로 자신의 몸을 구속하려 든 것은 다름 아닌 마법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별로 현명하지 못한 선택이었다.
헨리가 아는 드라칸의 경지는 고작해야 7서클.
제아무리 자력으로 7서클의 경지를 이루었다고는 하나, 8서클의 입장에선 어떻게 보아도 고작해야 ‘하위 등급의 7서클’이었기 때문이다.
헨리가 드라칸의 마력을 비웃으며 말했다.
“나를 상대로 마법을 사용하려 하다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배짱이 두둑한데?”
“하하, 그만한 배짱을 가졌으니 7서클이라는 위대한 경지를 이룬 것이 아니겠습니까?”
“고작해야 7서클 주제에 감히 8서클 앞에서 경지의 위대함을 논한다라……. 7서클치곤 머리 회전이 영 꽝인 모양이로군. 아니면 아직 듣지 못한 건가? 지금 네 눈앞에 있는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 말이야.”
“알고 있습니다. 저는 이제야 7서클에 도달했는데 당신은 벌써 8서클이라는 위대한 경지를 이룩하셨다는 것을요. 그래서 개인적으로 영광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드라칸은 진심이었다.
어찌 됐든 드라칸도 헨리가 세운 마탑 출신이었으니까.
그리고 지금까지도 마찬가지였지만 드라칸은 여전히 죽은 헨리, 즉 전생의 헨리에 대한 깊은 존경심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당신이 죽은 대마법사님의 숨겨진 제자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제가 얼마나 기뻐했는지 당신은 모를 겁니다.”
“나의 존재를 네가 왜 기뻐하는데?”
“그건 지금부터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헨리의 물음에 암석에 걸터앉아 있던 드라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라칸이 말했다.
“대마법사님께선 분명히 현명하고 어진 분이셨습니다. 하지만 그분도 결국엔 사람인지라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시더군요.”
‘저건 또 무슨 소리야? 내가 주변의 시선을 의식했다니?’
황당무계한 개소리였지만 어찌 됐든 일단은 들어 보기로 했다.
드라칸의 고백이 계속됐다.
“그 결과, 대마법사님께선 결국 마법을 발전시킬 수 있는 다양한 방법에 대해 ‘제한’을 두고 마셨습니다. 이는 호기심을 바탕으로 성장하는 마법사들에게 있어 매우 치명적인 타격이었습니다. 마치 죄악에 가까운…… 것을 선택해 버리신 겁니다.”
그러나 헨리의 인내심은 금방 바닥을 드러냈다.
몇 번이고 곱씹어 봐도 좀 전의 말은 지나친 헛소리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아서였다.
이에 헨리가 물었다.
“잠깐, 그게 무슨 소리지? 내가, 아니…… 스승님께서 대체 무슨 시선을 의식해서 어떤 제한을 두셨다는 거야?”
“하긴, 꽤나 오래 전의 일이니 나이가 어린 당신은 모를 수도 있겠군요.”
드라칸의 발언에 헨리는 ‘내가 너보다 훨씬 더 오래 살았다!’라고 욕설을 퍼부어 주고 싶었으나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간신히 그 말을 집어삼켰다.
드라칸이 말했다.
“과거에 대마법사님께선 인체 실험을 비롯한 각종 흑마술에 대한 연구를 금지시키고 대륙 전역에 퍼져 있는 흑마술사들을 소탕하라는 지시를 내리셨죠. 그리고 관련 서적들을 모두 불태우라고 지시한 적이 있으셨습니다.”
“그런데? 그게 왜?”
“휴, 역시 그 스승님의 그 제자로군요.”
“뭐라고?”
“그건!”
말도 안 되는 걸로 트집을 잡고 있으니 헨리는 당연히 발끈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헨리가 발끈하며 드라칸의 말에 대한 반박을 내놓으려는 순간, 드라칸은 오히려 자신의 목소리를 드높이며 헨리의 말을 가로막았다.
드라칸이 악을 뱉듯 말했다.
“그건! 분명한 죄악이었습니다. 단지 서클이 더 높다는 이유로 다른 마법사들의 발전을 침해하고 성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무고한 마법사들을 죽인 그것은! 분명히 잘못된 선택이셨습니다.”
‘저거 완전 미친놈이었잖아?’
헨리는 그제야 드라칸의 눈동자에 번들거리는 미쳐 돌아가는 광기를 볼 수 있었다.
드라칸은 정상이 아니었다.
녀석은 7서클로 각성하면서 육체만 새롭게 재구성되었을 뿐, 정신은 더더욱 자기가 만든 세상에 틀어 박혀 외부와 소통하려 하지 않았다.
드라칸이 말했다.
“그때부터 마탑은 분명한 암흑기였습니다. 하지만 그때, 오직 아서스 님만이 제 뜻을 헤아려 주시고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빌어먹을, 계속 들으면 내 귀가 썩어 버릴 것 같아. 이 이상은 더 못 들어 주겠어.”
말 그대로였다.
뒷얘기는 뻔했다.
드라칸은 아서스의 후원 하에 인체 실험을 했을 것이고 그렇게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아서스가 원하고자 하는 것을 만들어 주었을 것이다.
이를 테면 ‘키메라’ 같은 것들 말이다.
헨리는 곧바로 두 손을 모아 합장했다.
파지직!
헨리의 양손 주변에 푸른 스파크가 튀었다.
이어서 헨리는 곧바로 바닥에 양손을 붙였다.
“닐바람의 가시!”
파지지직!
손을 붙인 바닥을 기점으로 강렬하게 튀어 오르는 푸른 벼락들이 지층을 뚫고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목표는 오직 하나, 드라칸이었다.
파지지짓! 콰광!
푸른 벼락은 마치 서로의 몸을 기둥 삼아 뱀처럼 꼬아 나갔으며 드라칸이 서 있던 암석까지 모든 것들을 파괴하며 전진했다.
그리고 마침내 식인식물처럼 드라칸을 집어삼켰을 때, 짐승이 벼락을 맞았을 때나 나는 지독한 탄내가 사방을 가득 메웠다.
그러나 귓전을 때린 날카로운 소리에 비해 되돌아오는 메아리는 한없이 평온했다.
“제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후우웅!
드라칸은 바람을 일으켜 탄내와 흙먼지를 거두어들였다.
그러자 자욱한 연기 사이로 조금도 타격을 입지 않은, 멀쩡한 모습의 드라칸이 미간을 찌푸린 채 서 있었다.
“당신이 죽은 대마법사님과 같은 8서클의 경지를 이룩했다고는 하지만 저는 그것이 온전한 당신의 힘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가짜입니다. 당신은 스승님께서 닦아 놓은 길을 조금도 고생하지 않고 편안하게 밟아 왔을 테니까요.”
드라칸은 미간을 찌푸린 채 헨리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그런 눈총을 받으며 헨리 또한 와락 인상을 구기며 소리쳤다.
“그건 또 무슨 개소리야? 내가 고생을 안 했다니!”
그러나 헨리의 반문 따위는 드라칸의 귀에 조금도 전해지지 않았다.
아니, 애초부터 드라칸은 헨리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드라칸이 말했다.
“대마법사님의 수제자로써 8서클의 경지를 이룩해 주셔서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러니 지금부터 저는 전력을 다해 당신을 쓰러뜨리고 죽은 대마법사의 뒤를 잇는 ‘진짜 대마법사’의 자리에 올라서 보이겠습니다.”
드라칸의 독백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리고 독백을 마친 드라칸은 본격적으로 전신에 마력을 끌어 올리기 시작했다.
드라칸의 전신에 붉은 빛이 감도는 아우라가 샘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