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7
에피타이저 (3)
바할드가 시발점이었다.
바할드를 필두로 맥도웰과 알렌 또한 자신의 등짝에 난 흉터를 검으로 도려냈다.
그리고 그렇게 도려낸 세 장의 살갗을 한데 모아 불에 태웠다.
단순히 살덩이를 불태우는 것이었으나 자신의 살갗을 태운 세 사람은 타들어 가는 살덩이로부터 지독한 악취를 느꼈다.
이윽고 살덩이 전부가 재가 되자 세 사람은 성녀의 치유술로 도려낸 환부를 치료했다.
다행이라면 아문 상처 위에는 증오해 마지않던 아서스의 흔적이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이에 세 사람은 다시 갑옷을 입었다.
그리고 세 사람을 대표해 바할드가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총사령관님. 모두에게 추태를 보였습니다.”
“아닙니다. 좀 전의 행동으로 세 분께선 모두의 귀감이 될 만한 일을 해 주셨습니다. 여러분들의 선택에 존경심을 표합니다.”
“감사합니다.”
사과를 끝으로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헨리가 말했다.
“그럼 이제 갈 곳이 정해졌군요. 아서스가 저흴 리자르크 언덕으로 초대했으니까요.”
“리자르크 언덕이라면 대륙의 서쪽 끝에 있는 곳일진대…… 그런 곳을 텔레포트도 없이 도보로 이동하라니, 놈은 대체 무슨 꿍꿍이일까요?”
의문을 제기한 것은 로어였다.
로어의 의문에 헨리가 답했다.
“아마 내 예상이 맞는다면 놈은 지금 이 상황 자체를 즐기고 있는 거겠지. 그리고 지난 한 달간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자신의 유희를 위해 특별한 무대를 마련한 것일지도 모르고.”
“지독한 악취미군요.”
“어쨌든 지금으로썬 좋든 싫든 놈의 장단에 놀아나 주는 수밖에 없어. 그리고 녀석의 말마따나 놈의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우리가 이곳을 비웠을 때 여기에 남은 이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게 될 테니.”
간단하지만 영악한 방법이었다.
헨리가 비록 복수를 꿈꿔 오긴 하였으나 무고한 이들의 생명을 무시해 가면서까지 복수를 벌이진 않을 것이란 걸 아서스는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서스는 남은 이들의 목숨을 인질로 잡은 것이다.
이어서 스탠이 말했다.
“그런데…… 왜 하필 리자르크 언덕일까요?”
리자르크 언덕.
북서쪽 끝자락에 위치한 리자르크 언덕은 동남쪽 끝자락쯤에 위치한 무슈의 위치로 미루어 보았을 때 무슈와 가장 대척점에 있는 곳이었다.
이에 헨리는 생각했다.
‘내가 아는 리자르크 언덕은 특별한 점이 없는 곳이다. 그럼에도 리자르크 언덕으로 초대한 것은 단순한 악취미겠지.’
적어도 헨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서스에게 헨리는 단순히 유희를 만족시켜 줄 특별한 장난감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헨리가 말했다.
“단순한 악취미겠지. 녀석에게 우리들의 고행은 단순한 오락거리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거리가 늘어날수록 놈이 즐길 수 있는 시간도 길어지잖아?”
“그게 사실이라면 정말로 악취미가 맞겠군요.”
“됐어. 아까도 말했지만 우린 녀석의 장단에 맞춰 주다가 놈의 목덜미에 칼을 꽂는다. 그러니 지금 당장 리자르크 언덕으로 출발해야 해.”
“예!”
헨리의 명령에 7현자를 비롯한 모두가 대답했다.
그리고 즉시 떠날 채비가 이루어졌다.
망설임은 없었다.
전날 연합군은 이미 모든 상황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해 두두었다. 그렇기에 지금 내놓는 방법도 그 수많은 대비책들 중 하나였다.
그래도 제법 나쁘지 않은 방향으로 일이 풀렸다고 생각했다.
만에 하나 한 달 만에 나타난 아서스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연합군에게 곧바로 총공세를 펼쳤다면, 그것이야말로 헨리에게 있어 가장 최악의 상황이 되었을 테니까.
‘차라리 놈의 장단에 맞춰 주며 차근차근 꼬리를 밟는 게 지금으로썬 나을지도.’
아직 확인하지 못한 것들이 수두룩했다.
이를 테면 헤라볼라로부터 받은 신물의 힘도 시험해 보지 못했으니 말이다.
원정대는 즉각적으로 꾸려졌다.
원정대에는 일부러 일반병들을 포함시키지 않았다.
이것은 인간 대 인간이 벌이는 전쟁이 아닌, 마왕과 같은 특별한 존재를 심판하러 가는 일종의 징벌대였으니까.
그러니 딱딱한 군대보다는 별동대 같은 융통성 있는 모양새가 원정대에게 훨씬 더 잘 어울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연합원의 전부를 원정대에 포함시키지는 않았다.
제아무리 아서스가 자신의 말을 따르면 무슈를 공격하지 않는다고는 하였으나 항시 만약이란 게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헨리는 무슈에 검은 군대라고 불리는 초완족을 비롯하여 헤글러와 마실라, 그리고 열한 명의 부학파장들, 마지막으로 비람과 샤하트라 왕국군을 잔류시켰다.
마음 같아선 최상급 기사들 또한 몇 명 정도 잔류시키고 싶었으나 모두가 완강히 거부하는 바람에 어쩔 수가 없었다.
이로써 원정대는 헨리와 7현자를 포함한, 신성국의 성전사들과 성녀, 그리고 친위대와 헤라리온, 마지막으로 후슬러로 꾸려지게 되었다.
그야말로 소수 정예로 이루어진 대륙 최강의 원정대인 셈이었다.
“그럼 바로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자정이 지났을 무렵부터 최고 수준의 전시 경보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달리 채비를 할 것이 없었다.
게다가 인원까지 적었으니 모두들 튼튼한 군마 한 필씩에 몸을 올리면 준비는 끝났다.
물론 성녀와 마법사들은 기마술에 익숙지 않았으므로 별도로 제작된 특수 마차에 몸을 실었다.
마차는 이동학파장이자 평소 스피드광으로 불렸던 링키 블락이 만든 특제 마력 마차였다.
“문을 열어라!”
모든 준비가 끝나자 마침내 무슈의 성문이 개방되었다.
성문 앞에는 무슈의 주요 인사들을 포함해 무슈의 모든 장인들이 모여 곧 떠날 원정대를 축복해 주었다.
“부디, 별 탈 없이 돌아와 주길 바라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반드시 이 싸움의 종지부를 찍고 오겠습니다.”
떠나려는 원정대의 대장, 헨리에게 불카누스는 어울리지 않게 약한 소리를 했다.
아마도 노파심에 하는 말일 것이다.
이에 헨리는 불안해하는 불카누스를 위로해 준 뒤 곧바로 자신의 애마, 제이드를 박찼다.
“갑시다!”
-푸히히힝!
선두에 선 제이드의 울음소리가 높이 울려 퍼졌다.
마침내 리자르크 언덕으로 향하는 최후의 원정대가 그 기나긴 여정의 첫걸음을 떼었다.
* * *
-뀨뀨뀨!
원정대가 이동을 시작했다.
원정대가 무슈를 벗어나기 시작하면서 헨리는 엘라곤을 소환해 행동에 자유를 주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기에 감각이 예민한 엘라곤을 풀어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엘라곤도 사전에 교육받은 대로 자신이 맡은 역할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숙지하고 있었다.
이동은 엄청난 속도로 이루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마차에 탑승한 이들을 제외한 모두가 기마술에 일가견이 있을뿐더러 그들이 탄 군마 전체가 헨리와 성녀의 손을 거쳐 대륙 제일의 명마들로 재탄생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속도광으로 불리는 링키 블락의 가속 마법과 더불어 헨리의 가속 마법까지 더해지니, 원정대는 감히 보통의 기마대로는 결코 낼 수 없는 상식 밖의 속도로 지면을 박차고 있었다.
“눈앞에 무엇이 나타나든 주저하지 마십시오. 저희 원정대는 오직 일직선으로 달릴 테니까요.”
동선은 이미 정해져 있다.
무슈에서 리자르크 언덕까지.
이미 텔레포트를 위한 좌표까지 가지고 있는 마당에 도보로 이동하기 위한 지표쯤이야 식은 죽 먹기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헨리는 일부러 무슈에서 리자르크 언덕까지 최단 시간에 도착할 수 있는 루트를 설정해 선두에서 원정대를 리드했다.
물론 그 루트 안에는 일개 군마 따위로는 감히 건너지 못할 널찍한 호수나 깊은 강, 늪지대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말로는 오르기 힘든 험준한 절벽이나 산맥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직진, 그리고 또 직진.
헨리는 원정대가 직진으로 질주하는 내내 원정대의 질주를 방해하는 모든 요소들을 마법으로 건너뛸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블링크!’
번쩍!
최고 속도로 이동하는 원정대를, 질주에 방해가 되는 장애물들이 나타날 때마다 마법으로 적재적소에 이동시킨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적어도 보통의 마법사에겐 그러했다.
아니, 마차에 탑승한 7인의 현자들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헨리는 할 수 있었다.
헨리에게 있어 마법이란 이젠 신체의 일부와도 같은 것.
그러니 조금만 신경을 쓰고 정신을 집중한다면, 원정대 전체를 블링크 마법으로 이동시키는 일 따위는 손가락을 구부리는 것만큼이나 몹시 쉬운 일이었다.
덕분에 모두들 때 아닌 진귀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과연 대공의 제자야. 아니, 어쩌면 대공을 뛰어넘을지도!’
특히 전생의 헨리와 함께 전장을 누볐던 자들은 그 감탄의 깊이가 남달랐다.
말들은 계속해서 질주했다.
무슈에서 리자르크 언덕까지 보통의 군마로 이동했다면 대략 한 달에 가까운 시간을 필요로 할 것이었다.
하지만 현재 속도라면 최소 세 배는 단축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첫 번째 마을이 보입니다!”
헨리가 설정한 루트에는 이동에 방해가 되는 장애물들뿐만 아니라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마을들 또한 더러 섞여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마을이 지금 곧 눈앞에 나타날 ‘라덴만’이란 이름을 가진 귀족의 영지였다.
라덴만은 대륙에서 손꼽히는 옥수수 재배지를 가진 영지였다.
그리고 곧 라덴만의 영토가 나타나자 추수를 앞둔 광활한 옥수수 밭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두두! 두두! 두두두!
원정대의 말발굽 소리는 옥수수 밭을 뒤흔들었다.
추수를 앞두고 끝이 노랗게 익어가는 광활한 옥수수 밭.
원정대는 그런 옥수수 밭을 짓밟으며 거침없이 앞으로 질주해 나갔다.
그런데 그 순간.
-키에에에에!
노랗게 익어가는 황금 옥수수 밭 사이로 전혀 반갑지 않은 쇳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목소리의 정체는, 다름 아닌 아서스의 사도들에게 사로잡히고 만 ‘맹신자’들이었다.
‘좀비!’
그러나 헨리는 그들이 맹신자인지 좀비인지 알 턱이 없었다.
그래서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마법으로 원정대를 감싸 안는 거대한 매직 실드를 전개했다.
-키에에에!
-키아아아!
고속으로 이동하는 원정대에 무형의 매직 실드가 둘러지자 그것은 흡사 맹렬하게 움직이는 파괴 전차와도 같았다.
파괴 전차는 옥수수 밭뿐만이 아니라 원정대를 향해 달려드는 맹신자들을 거침없이 튕겨 내고 곤죽을 냈다.
그러기를 한참…….
마침내 옥수수 밭의 절반가량을 지났을 무렵이었다.
-뀨뀨뀨!
공중에서 고속으로 비행하던 엘라곤이 갑작스레 냉동 광선을 내뿜어 원정대 앞을 가로막았다.
쩌적, 쩌저적!
뿜어진 냉동 광선은 충분한 거리를 두고 뿜어진 덕에 갑작스럽게 충돌하거나 하는 사고는 없었다.
이에 헨리가 제이드의 고삐를 잡아당기며 엘라곤에게 물었다.
“엘라곤, 무슨 일이야?”
-뀨뀨뀨!
헨리의 물음에 자신이 뿜어낸 냉동 광선의 위치를 가리키는 엘라곤.
엘라곤의 손짓에 모두의 시선이 빙상으로 향했다.
그러나 빙상 안에는 추수를 앞둔 애꿎은 라덴만의 옥수수들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저게 대체 어쨌다는…….”
그때였다.
콰아아앙!
헨리가 내뱉은 말을 모두 잇기도 전에 엘라곤이 얼린 빙상 전체가 강렬하게 폭발하며 빙상의 파편들이 사방으로 뿜어졌다.
티딩! 팅! 티디딩!
물론 원정대에는 아무런 피해가 없었다.
헨리가 앞전에 매직 실드를 미리 전개해 두었으니까.
하지만 좀 전에 일어난 폭발은 빙상을 폭파시킨 것뿐만이 아니라 일대의 옥수수 밭 전체에 거대한 불을 놓았다.
“이게 대체 무슨……!”
헨리는 전혀 아무런 낌새도 느끼지 못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대를 집어삼킬 만큼 거대한 폭발이 일어난 것이었다.
그때였다.
“이야, 꼬맹이가 눈치가 제법인데?”
“……!”
헨리와 연합원들이 시선이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옮겨졌다.
그러자 그곳에는, 아서스의 자랑스러운 아홉 사도들 중 하나이자 제방을 멸망시킨 장본인인 ‘리드카인’이 화염 속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