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서클 마법사의 환생-289화 (289/522)

# 289

부화 (3)

“…….”

로스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진 직후, 장내는 침묵에 휩싸였다.

교황의 변절도 엄청난 충격이긴 했으나 교황의 이러한 최후 또한 교단의 신자들에겐 여러모로 충격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헨리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헨리의 뒤편에 솟아 있던 웅장한 크기의 석탑과 바윗덩이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 위에 숨어 있던 세 사람이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헨리는 허공에 한 번 더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성녀를 포함한 세 사람은, 마치 바람으로 이루어진 돛단배를 타고 내려오듯 헨리 곁에 부드럽게 안착할 수 있었다.

헨리는 곁에 도착한 성녀를 위해, 말없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주었다.

괴물이 되어 죽은 교황의 시체를 바라보는 성녀.

성녀는 조용히 손을 모았다.

그리고 묵념했다.

그의 말로가 어떻든 간에, 그가 여태껏 이루어 놓은 업적들은 거짓이 아니었기에.

성녀의 그런 모습에, 멍하니 넋을 놓고 있던 성전사들 또한 부랴부랴 손을 모아 기도를 올렸다.

기도 후 성녀는 고개를 들었다.

그런 다음 헨리가 있는 쪽으로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대마법사님께 진심 어린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헨리는 성녀의 사죄와 감사 인사에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똑똑하군.’

성녀는 헨리에게 감사 인사만 올려도 됐다.

하지만 그녀가 헨리에게 사죄를 한다는 것은, 교황 다음으로 지위가 높은 그녀가 종단 전체를 대신해 헨리에게 폐를 끼쳤다는 걸 확실하게 인정하고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물론 이러한 뜻 이외에 진심에서 우러러 나오는 미안함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석탑 위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그녀는 자신과 함께 있던 늙은 워록의 존재를 인식하고 그에 대한 뒤처리를 위해 이렇듯 헨리에게 사과를 한 것도 있었다.

이에 헨리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고개를 드세요, 성녀님. 저는 응당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아닙니다. 어찌 됐든 저희 교단의 그릇된 선택으로 마법사님께 폐를 끼친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하마터면 교단이 해체될 뻔한 위기를 마법사님께서 구해 주셨으니 저희로선 백번 허리 숙여도 모자를 따름입니다.”

청산유수 같은 언변이었다.

그녀가 연신 허리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올리자 아난다와 로거 또한 황급히 그녀 곁에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으며 헨리에게 예를 갖추었다.

“성기사단장, 로거가 위대하신 대마법사님께 감사 인사를 올립니다.”

“몽크들의 지도자, 아난다가 위대하신 대마법사님께 감사 인사를 올립니다.”

교단 내 최고 권력자들 또한 헨리에게 무릎을 꿇으니 덕분에 보이지 않는 서열 또한 확실하게 정리되었다.

이에 헨리가 웃으면서 말했다.

“두 분께서도 일어나시지요. 그보다 분위기가 어수선한 것 같으니 얼른 이곳을 정리하고 수뇌부 회의를 갖는 것이 좋겠습니다. 변절자를 처리했다고는 하나 고작해야 변절자 한 명이지 않습니까? 저희는 아직 나눌 대화가 많으니까요.”

“배려, 감사드립니다.”

거슬렸던 종양을 도려냈으니 이제 남은 것은 아직 못 다 해결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뿐.

교황의 시체가 수거된 후, 즉각 수뇌부 회의가 열렸다.

* * *

테이블 앞에는 평화교 내 최고 권력자 세 사람을 비롯한 헨리와 헤라리온, 그리고 평화교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존재, 최상급 워록 후슬러가 있었다.

먼저 헨리가 말했다.

“성녀님께는 먼저 말씀을 드렸지만 여기 계신 이분은 일전에 교단에서 소탕을 진행했던 네프람 교단의 교주를 맡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교단이라면, 워록……!”

“으음……!”

워록이라는 말에 로거와 아난다가 짐짓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이에 후슬러가 잔뜩 움츠러들며 기가 죽었지만 헨리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도리어 로거와 아난다를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로거 님, 아난다 님.”

“예?”

“두 분께선 과거, 교황의 주도 하에 벌어졌던 네프람 교단 소탕 작전에 참가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예, 있습니다.”

“그럼 그때 왜 메시아와 여기 있는 후슬러를 살려 두신 겁니까?”

“예?”

“그건…….”

네프람 교단 소탕 작전.

종교 대전 이전에 행해졌던 일이었으니 그때는 이미 수십 년도 더 전에 행해진 일이었다.

그리고 당시의 로거와 아난다는 지금처럼 교단 내에서 권력을 가진 신자가 아닌 한낱 일개 성전사일 뿐이었다.

그 말인즉슨 윗선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었단 이야기.

물론 당시의 두 사람은 메시아와 후슬러가 살아남았는지 조차 모르고 있었다.

메시아와 후슬러의 생존은 전적으로 교황이 비밀리에 진행했던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전에도 언급했다시피 평화교의 절대 규율들 중에는 흑마술사들을 반드시 단죄하라는 규율이 있었다.

그러니 결과적으로 두 사람은, 제아무리 윗선의 지시였고 메시아의 생존에 대해 몰랐더라도 교단의 절대 규율을 어기고 정치적으로 행동한 것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므로 다소 억지스럽긴 하지만 논리만 놓고 보자면 틀린 말도 아니란 이야기.

이에 로거와 아난다는 신음했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사람은 평소 완전무결할 정도로 고귀한 신앙심을 자랑하던 이들이었으니까.

‘이 정도면 됐겠지.’

신음하는 두 사람을 보며 헨리가 미소 지었다.

성녀의 사죄와 더불어 헨리가 먼저 두 사람의 잘못을 지적한 것.

자칫 잘못하면 감정이 상할 수도 있는 문제였음에도 불구하고 헨리가 먼저 이러한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간단했다.

그것은 네프람 교단의 대교주, 워록 후슬러를 공식적으로 살려 두기 위함이었다.

헨리의 말이 끝나자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았다.

하지만 이렇듯 불편해진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성녀는 절대로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이 또한 미리 헨리에게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헨리의 말마따나 당시의 두 사람이 아무런 힘이 없는 일개 성전사였다고 하더라도 규율을 어긴 것은 맞았으므로 교단 내 규율상 이에 대한 처벌을 피해 가기는 다소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로거와 아난다가 성녀의 눈치를 보았다.

교황이 사라진 이상, 이제 교단 내에서 가장 큰 권력을 쥐게 될 사람은 다름 아닌 성녀였기에.

그리고 살얼음 위를 걷는 듯한 이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후슬러 또한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도출되는 결론으로 자신의 생사가 결정될 테니까.

잠깐의 침묵.

로거와 아난다가 아무런 대답도 내놓지 못하자, 이에 헨리가 말했다.

“이해합니다.”

“예?”

“듣자하니 당시에 네프람 교단에 남아 있던 건 메시아뿐이라고 하더군요.”

“두 사람이…… 아니라요?”

“예, 메시아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메시아는 메시아로서의 능력은 출중할지 몰라도 생존력은 쥐약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교황은 평범한 사람이었던 후슬러를 납치해 메시아 곁에 두고 강제로 워록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오로지 메시아의 보필만을 위해서 말이죠.”

“……?”

두 사람의 얼굴에 어리둥절함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눈치 빠른 두 사람은 곧 헨리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후슬러는 워록이 아닙니다. 교황 때문에 멀쩡한 인생을 날려 먹은 불쌍한 사람일뿐이지요. 그런 후슬러에게 어찌 워록에게나 적용할 수 있는 법규를 적용시킬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후슬러?”

“그, 그렇습니다!”

곧잘 대답하는 후슬러.

후슬러의 대답에 로거 또한 즉시 눈빛을 바꾸고 후슬러에게 말했다.

“그, 그간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얼마나 상심이 크셨겠습니까?”

로거에 이어 아난다도 그를 위로했다.

두 사람의 위로에 헨리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물론 후슬러가 강제로 납치되어 어쩔 수 없이 워록이 되었다고는 하나, 지난 몇십 년간 메시아 곁에서 마신의 사상을 세뇌당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후슬러가 다시 보통의 사람이 되기 전까진 제가 직접 후슬러를 데리고 다니며 교화시키도록 하겠습니다.”

“헨리 님께서요?”

“마법사님께서 그런 수고스러운 일을 하실 필요는…….”

아난다가 의견을 제출했지만 곧 목소리가 잦아들 수밖에 없었다.

결국 결론은 헨리의 뜻으로 수렴되었다.

끝으로 헨리는 공식적으로 후슬러의 죄를 사하고 후슬러의 거동에 대한 제약과 후슬러에 대한 소유권까지 확실하게 쐐기를 박을 수 있었다.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니 후슬러에 대한 안건은 이것으로 끝난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에 헨리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다음 안건에 대해 말했다.

“그럼 이제 다른 안건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안건.

모두의 눈이 헨리의 입으로 집중되었다.

헨리가 말했다.

“다음 안건은…… 전 지금 종교 대전 때 패배하고 사라진 과거의 종교들을 찾고 있습니다.”

새로운 신위.

헨리는 아직 아서스에 대항할 만한 신위를 찾지 못했다.

* * *

“불카누스 님, 뭐 하십니까?”

“오, 자네 왔는가!”

교단에서 수뇌부 회의를 마친 헨리는 다시 무슈로 돌아왔다.

무슈로 돌아온 헨리가 가장 먼저 찾은 사람은 다름 아닌 불카누스.

헨리의 인사에 불카누스가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불카누스 님. 이번에도 방문하자마자 이런 말씀을 드리기가 좀 죄송하지만 불카누스 님께 드릴 부탁이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당연히 해야지! 그러니 아무 소리 말고 편하게 부탁하게. 이번에는 뭔가?”

“갑옷이 필요합니다.”

“갑옷?”

“예, 일전에 제가 흑금으로 만든 커다란 갑옷을 부탁드린 적이 있지 않습니까?”

“아, 그 갑옷 말인가? 사람이 착용할 수 있을지나 의문인 그거?”

“그렇습니다. 이번에도 그런 종류의 갑옷이 필요합니다.”

“허허, 대체 누구한테 입히려고 그런 갑옷을 제작하는 건가? 이번에도 조건은 저번과 동일하고?”

“아뇨. 이번엔 좀 다릅니다. 이번엔 저 말고도 다른 사람 한 명이 갑옷 제작에 투입될 예정인데……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과거, 워록들에게 붙잡혀 수십 년을 워록 밑에서 납치, 감금당해 강제로 워록이 된 ‘후슬러’라고 합니다.”

헨리는 뒤편에 세워 둔 후슬러를 불카누스에게 소개해 주었다.

그리고 후슬러의 사연을 들은 불카누스는 동그래진 눈으로 후슬러와 헨리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워록이라니? 헨리, 내가 아는 그 워록이 맞는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이분은 이미 평화교에서 워록에게 입은 피해를 인정받고 면죄부를 받았기 때문에 대륙에서 유일하게 양지에서 활동할 수 있는 워록입니다.”

“허허…… 그 평화교에게 면죄부를 받은 워록이라니…… 내 살다 살다 별 희한한 광경을 다 보는군그래.”

그러나 헨리의 소개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소개해 드릴 분이 한 분 더 있습니다.”

“설마 이번에도 워록인가?”

“아닙니다.”

“그럼?”

“바로 나야.”

불카누스의 물음에 헨리가 답하려는 순간, 헨리의 얼굴로부터 푸른 영체가 튀어나왔다.

헥터였다.

“이, 이게 무슨!”

깜짝 놀라 나자빠지는 불카누스.

그런 불카누스에게 헥터가 말했다.

“놀라긴. 일전에 만들어준 갑옷은 잘 입있어. 하지만 미안하게도 지난 번 전투에서 부숴 먹었지 뭐야……. 그래서 말인데, 이번엔 내가 직접 너에게 의뢰하려고 해.”

“헤, 헨리,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인가?”

조곤조곤 자신의 사정을 설명하는 헥터와는 달리, 귀신을 처음 본 불카누스의 얼굴이 시퍼렇게 물들었다.

하지만 헨리로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헨리는 헥터를, 후슬러가 가진 힘을 이용해 데스나이트로 만들기로 했으니까.

그리고 헥터 또한 이에 동의했다.

데스나이트라면, 헥터가 원하는 대로 힘을 끌어올려 사용할 수 있을 거라는 후슬러의 첨언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슬러는 데스나이트를 제작할 줄은 알았지만 데스나이트의 육체가 되어 줄 갑옷을 만들 줄은 몰랐다.

그래서 헨리는 고심 끝에 데스나이트의 영혼이 되어줄 헥터와 데스나이트 만들 후슬러, 그리고 데스나이트의 육체를 만들어 줄 대장장이까지 세 명을 한꺼번에 이번 프로젝트에 엮어 내기로 했다.

헨리가 자초지종을 설명한 후 어색하게나마 웃음을 지어보였다.

“하하…… 사정이 이렇습니다. 그러니 부디 폐가 되지 않는다면 불카누스 님께 이번 의뢰를 맡기고 싶습니다.”

“허, 허허허…… 내 살다 살다 데스나이트를 만들게 되다니…….”

얼얼한 표정이었지만 의뢰는 수락했다.

하지만 불카누스는,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혼잣말을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