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8
부화 (2)
잠깐의 적막.
헨리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는 화형으로도 모자란 중죄였다.
하지만 상대는 신성국 내에서도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교황.
그래서 헨리의 말이 제법 논리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모두의 시선이 교황의 입으로 몰렸다.
고개를 숙이는 교황.
그리고 이어서 교황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런데.
“……!”
“……!”
교황이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들어 올렸을 때, 모두의 눈동자에 경악이 들어찼다.
미소 짓는 교황.
고개를 들어 올린 교황의 얼굴은 더 이상 주름이 자글자글한 아흔 먹은 노인네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놀랐어?”
마치 마법을 부린 것처럼, 교황의 얼굴은 순식간에 미청년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교황은 꽤나 익숙하다는 듯한 말투로 여유롭게 주위 사람들에게 안부를 물었다.
이를 본 헨리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하, 하하하!”
“왜 웃는 거지?”
“안 웃을 수가 있나? 로스 보르기아, 넌 정말 대단한 놈이야. 이런 상황에서 그런 여유라니.”
헨리의 감탄에 로스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이러한 상황이 뭐 어때서? 누가 들으면 나한테 큰일이라도 난 줄 알겠는데?”
여유롭게 헨리의 말을 되받아치는 교황.
그는 지금 단순히 객기를 부리는 게 아니었다.
정말 일말의 두려움도 없는 상태에서 나오는 교황 특유의 여유로움이었다.
“교, 교황님! 아, 아니……!”
당황으로 말을 잊었던 로거가 황급히 교황을 불렀지만 이내 자신의 말꼬리를 흐렸다.
눈앞의 사내는 더 이상 자신이 알던 교황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뜻 교황에게 다가설 수가 없었다.
그 모습을 본 헨리가 말했다.
“젊음이라…… 확실히 늙은 노인네가 갖고 싶어 할 만한 것이긴 하지. 하지만 여신을 버리고 마신을 신위로 삼은 건 명백한 네 실수다, 로스.”
“마신?”
헨리의 지적에 교황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러고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한쪽 손가락을 턱에 갖다 붙이며 말했다.
“이해할 수 없군……. 아까부터 워록이니 마신이니 하는데 내 신위는 그런 더러운 놈들 따위가 아니야.”
“뭐라고?”
“보여 주마. 내가 모시는 분의 진정한 힘을.”
말을 마친 로스는 눈을 감았다.
그러자 로스의 전신으로부터 보랏빛 기운이 일렁이며 검붉은 가스가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쿠드득- 쿠드득!
징그러운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그리고 징그러운 소리가 지속될수록 로스는 걸치고 있던 교의를 찢어 내고 자신의 근육과 뼈를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설마?’
근육과 뼈의 재구성.
보통의 생물이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키메라들의 전형적인 특성이었다.
불길함을 예측한 헨리가 소리쳤다.
“다들 정신 차리고 수호 성법을 전개하세요!”
“네, 넷!”
마력으로 증폭된 헨리의 고함에 넋 놓고 그 광경을 구경하던 성전사들은 그제야 수호 성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교황청 내에 신성한 빛무리가 엄습했다.
그리고 신성한 빛무리 사이로 헨리 또한 마법을 시전했다.
쿠구구구!
뇌신의 분노.
7서클의 강력한 벼락 마법이었다.
헨리가 마법을 시전하자 순식간에 먹구름이 하늘에 결집되었다.
그리고…….
꽈르릉!
변형 중인 로스의 머리 위로 거대한 벼락이 떨어졌다.
떨어진 벼락은 주위 사람의 귀를 멀게 할 만큼 엄청난 소리와 지상으로 작렬했다.
하지만 굉음과 광명이 사라지고 다시 로스의 모습이 드러났을 때, 로스는 여전히 멀쩡한 모습으로 근육과 뼈를 재구성하고 있었다.
씨익.
“……!”
벼락이 떨어진 직후, 헨리는 로스와 시선이 마주쳤다.
로스는 웃고 있었다.
겨우 그 정도 화력으로 자신에게 해를 입히려고 했냐는, 가소로운 웃음이 잔뜩 담긴 조소를 헨리에게 쏘아 보냈다.
“착검.”
조롱받은 헨리는 곧장 검을 뽑았다.
그리고 바닥에 발을 굴렀다.
쾅!
지면에 박찬 충격이 역으로 뿜어지며 마법 무장이 솟구쳐 헨리의 전신을 감싸 안았다.
그리고 신속하게 가속 주문을 외운 후 콜소드를 붙잡고 로스를 향해 고속으로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콰짓!
바위가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며 헨리의 검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투명 결계였다.
‘결계?’
헨리는 검을 휘두름에 있어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 말인즉슨, 전력을 다했다는 이야기.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헨리의 검은 로스에게 닿지 못했다.
마치 눈덩이에 박힌 표창처럼, 그렇게 헨리는 허공에 멈추어 섰다.
헨리는 뒤로 몸을 빼내려고 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헨리는 옴짝달싹도 하지 못했다.
더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로스는, 변형 중인 육체에서 목만 쭈욱 늘어뜨려 헨리의 눈앞에 얼굴을 가져다 댔다.
기이하고 징그러운 모습이었다.
로스가 헨리의 이름을 불렀다.
“헨리.”
기분 나쁜 목소리.
이제 로스의 성대는 더 이상 만인이 우러러 보던 그 인자하던 교황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대신 물에 불은 썩은 고기처럼 심히 악취가 나는 듯한, 그런 불쾌함을 야기하는 목소리를 만들어 냈다.
로스가 말했다.
“대체 뭐가 대마법사라는 것이냐?”
로스는 뻗어 낸 목덜미의 끝에서 악몽의 그것처럼 이죽거렸다.
헨리는 투명 결계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발버둥 쳤다.
녀석에겐 오러도, 마력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메시아나 후슬러처럼 탁한 마기가 느껴지는 것도 아니었다.
‘이 녀석, 정말로?’
처음에 녀석이 마신이나 워록과의 관계를 부정했을 때, 헨리는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녀석이 키메라처럼 신체를 변형시킬 때쯤, 그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아서스!’
교황이 새로 받듣 신위는 마신 따위가 아닌 바로 아서스였다.
그래서 헨리는 더더욱 화가 났다.
‘대체 아서스 그놈이 뭐길래!’
화가 나고 속상했다.
종교 대전에서 승리하고 두 개의 제국까지 거쳐 간 대종교의 수장이, 대체 뭐가 아쉬워서 여태껏 쌓아 올린 명예를 포기하고 변절을 한단 말인가?
투명한 결계를 사이에 두고 로스는 끊임없이 헨리에게 이죽거렸다.
그리고 그러면서도 로스는 끊임없이 신체 변형을 진행했다.
“흥.”
퍼엉!
잠시 후, 이죽거림에 질림을 느낀 로스는 이내 곧 거대한 풍압을 터뜨리며 헨리를 저만치 멀리 밀어냈다.
자욱히 일어나는 흙먼지.
로스는 바람을 일으켜 흙먼지를 거두어 냈다.
그러자 흙먼지에 가려져 있던, 로스의 새롭게 변화된 육체가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다.
우드득, 우드득.
그것은 마치 마족의 신체를 닮아 있었다.
로스의 육체는 뼈와 근육으로 이루어진 갑옷처럼 매우 큼지막하고 정교해 보였으나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주기적인 맥동 또한 보여 주고 있었다.
“이것이…….”
로스는 자신의 두 손을 비롯해 진화된 자신의 육체를 살폈다.
키는 이미 2미터를 훌쩍 넘었으며 피부를 비롯한 외형의 곳곳이 마족들의 그것처럼 바뀌어 있었다.
전신에 힘이 흘러넘쳤다.
주위를 둘러보는 로스 보르기아.
흠칫!
로스가 고개를 돌려 시선을 뿌릴 때마다 로스를 지켜보던 수많은 성전사들이 겁을 먹고 한 발자국씩 뒤로 물러났다.
“우매한 어린 양들이로고…….”
그리고 로스는 뒷걸음질 치는 성전사들에게 그저 안타깝다는 듯이 동정어린 시선을 흩뿌릴 뿐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비켜.”
뭉친 인파 사이로,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그 사이를 비집고 고개를 내밀었다.
헨리였다.
헨리는 로스가 터뜨린 풍압에 의해 저만치 나가떨어졌으나 금방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헨리의 얼굴엔 짙은 분노가 어려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로스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호오, 그래도 대마법사라는 건가? 아니, 검까지 다룰 줄 아니 대마검사라고 불러야 하나?”
로스는 헨리의 투지를 조롱했다.
그러나 헨리의 귀에는 이미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로스에 대한 헨리의 분노는, 우물 아래의 지하 신전에서 후슬러로부터 진실을 들었을 때부터 시작되었을 만큼 아주 오래되고 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헨리는 성녀를 비롯한 헤라리온과 후슬러까지 대동하여 성국을 방문한 것이었다.
오로지 교황 하나만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그러나 교황은 헨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개자식이었다.
아니, 개자식이라는 말이 부족할 정도로 엄청난 희대의 개자식이었다.
헨리가 나직이 경고했다.
“로스 보르기아 1세. 너는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죗값을 치르게 해 주마.”
“하하, 거참 기대가 되는군.”
로스는 전신으로부터 끓어 넘치는 아서스의 은총을 느꼈다.
그렇기 때문에 눈앞의 대마검사와 수천의 성전사들이 내뿜는 여신의 신력이 두렵지 않았다.
저들이 제아무리 강해 봤자 아서스가 내려 준 은총이 훨씬 더 강력할 테니까.
이것은 단순한 믿음에서 나오는 확신이 아니었다.
아서스에게 은총을 받은 사도들이 다른 지역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는 정보를 페일로에게 들었기에 확신하는 것이었다.
“그럼, 어디 한번 구경이나 해 보지.”
여유를 부리는 로스.
로스가 한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이에 헨리는 품속에서 목걸이 하나를 꺼내 들었다.
짤랑!
목걸이.
그것은 평범한 목걸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헤라볼라로부터 받은 신물이라 불리우는 10개의 반지를 실 한 줄에 엮어 낸 것이었다.
헨리는 그것을 꺼내 손으로 말아 쥐었다. 그런 다음 다시 콜소드를 들었다.
“전하.”
“예, 마법사님!”
헨리는 마법을 이용해 짤막하게 헤라리온을 불렀다.
이에 석탑 위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헤라리온이 두 손을 모아 합장했다.
그리고 신에게 올리는 축문을 외기 시작했다.
“Wlrmadms toqur, sksms dhsmfeh akrkadmf gksek……!”
축문의 내용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조상들의 영혼을 기릴 때, 즉 왕족의 제사를 지낼 때 외는 축문을 헤라리온이 외우기 시작하자 헨리가 손에 쥔 신물과 함께 라의 신력이 공명하기 시작했다.
헨리의 전신에 새하얀 아우라가 휘몰아쳤다.
헨리는 이어서 다시 한번 힘껏 발을 굴렀다.
쿵!
휘오오오!
발을 구르자마자, 에메랄드 빛 오러와 함께 새하얀 광명이 용오름 쳤다.
엄청난 크기의 토네이도였다.
이에 엄청난 속도의 강풍이 일대를 휩쓸기 시작했다.
자욱하게 일어난 흙먼지에 모두가 몸을 숙이고 고개를 숙였다.
오직 헨리와 로스.
단 두 사람만을 제외하고 말이다.
“어디서 조잡한 성물이라도 빌려 온 모양이로군. 하지만 그런 거짓된 신력으로 나에게 생채기나 낼 수 있을까?”
로스는 헨리가 무엇을 준비하는지 알아챘다.
그도 그럴 것이 로스의 종교인 경력은 대충 헤아려도 수십 년.
헨리의 전신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신력을 느끼지 못하면 그것이야말로 헛밥을 먹은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로스의 조롱을 헨리는 단호하게 부정했다.
“아니, 틀렸다.”
“뭐?”
“난 신물을 믿지 않아.”
대답과 함께 치켜든 검을 천천히 머리 위로 들어 올리는 헨리.
헨리가 이어서 말했다.
“나는 오직, 너를 베어 낼 나를 믿을 뿐이다.”
“하! 동화책에나 나올 법한 유치한 헛소리를 지껄여 대는구나. 대마법사의 수제자라더니, 순 음유시인 같은 몽상가일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와라! 현실이 얼마나 녹록치 않은지 내 직접 너에게 보여 주도록 하마!”
양팔을 펼쳐 가슴께를 내미는 로스.
그까짓 거짓된 신력 따위는 얼마든지 받아 주겠다는 로스의 기세등등한 허세였다.
이윽고 헨리가 들어 올린 콜소드에 용오름 치던 두 개의 기운이 하나의 찬란한 녹색 광휘가 되어 하나로 응집되었다.
헨리가 검을 휘둘렀다.
번쩍!
용오름이 폭발하며 성국 전체에 녹색 광휘가 지평선처럼 뻗어져 나갔다.
그리고…….
광명은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그러나 지속된 광명 끝에 다시 세상이 비추어 졌을 때, 고개를 웅크렸던 성전사들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어, 어떻게?”
오른쪽 쇄골부터 왼쪽 옆구리까지.
마치 날카로운 용암이 지나간 것처럼, 로스는 상체의 절반이 대각선으로 찢어져 있었다.
허공에 흩날리는 재 가루.
로스의 살갗이 타들어 가며 뿌려진, 육체의 재 가루들이었다.
“끝이다, 로스.”
서걱!
헨리는 이어서 다시 한번 검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헨리의 콜소드가 발광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헨리의 검은, 조금의 이물감도 없이 깨끗하게 사선을 그려 냈다.
투둑!
바닥에 떨어지는 로스의 머리.
그리고…….
파삭!
헨리의 품속의, 헤라볼라로부터 전해 받았던 달걀로부터 조그마한 균열이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