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7
부화 (1)
‘역시 마녀사냥이 가장 좋겠지.’
페일로로부터 새로운 은총을 전해 받은 로스 교황은 전신에 흐르는 아서스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강력한 힘, 그리고 치솟는 활력.
평화의 여신으로 불리는 아이린의 신력이 밋밋하게 느껴질 정도로 강렬한 중독성이 느껴지는 힘이었다.
그래서 더 욕심이 났다.
그리고 그 욕심을 채우기 위해선 아서스를 포함해 페일로의 마음에 들어야 한다는 것을 교황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교황은 그 계획의 첫걸음으로 성녀, 아이리네부터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나저나 무엇을 빌미로 삼아야 하나…….’
교단 내에서의 위치는 교황이 성녀보다 훨씬 더 높았다.
하지만 아흔에 가까운 교황보단 젊고 예쁜 성녀의 인기가 더 높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
게다가 성녀의 성품은 평소에도 익히 잘 알려져 있어 세인트 홀 내에서도 그 인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
그녀는 말 그대로 교단의 태양이었고 대륙을 따뜻하게 감싸 안는 빛이었기에.
그렇기 때문에 그런 태양을 떨어뜨리기 위해선 씻을 수 없는 오욕을 씌워 두 번 다신 떠오를 수 없게 날개를 자르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수로, 교황은 가장 흔하면서도 가장 확실한 방법인 마녀사냥을 택하기로 했다.
방법을 택한 교황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고민을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상급 사제 한 명이 다급한 얼굴을 하고서 교황의 집무실 문을 벌컥 열었다.
“교, 교황님! 큰일 났습니다! 지금 성내에서 인질극이 벌어졌습니다!”
“인질극이요?”
“그렇습니다! 그것도 성녀님께서 인질로 붙잡히셨습니다!”
“서, 성녀가 말입니까?”
문을 연 사제는 느닷없이 성녀가 인질이 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당황하는 교황.
어이가 없었다.
훤한 대낮에, 그것도 범죄라곤 전혀 일어나지 않는 교황청에서,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성녀를 인질로 붙잡는 놈이 나타나다니?
교황의 인생 동안 단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는 일이었다.
이에 교황이 소리쳤다.
“일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성전사들은 대체 무얼 하고 있었습니까!”
“그, 그것이……!”
“됐고! 성녀를 납치한 납치범은 대체 누구란 말입니까!”
“그, 그게…… 헤, 헨리 모리스입니다.”
“예?”
환한 대낮에 교황청에서 성녀를 납치하고 성전사들을 상대로 인질극을 벌이는 사람.
그는 다름 아닌 대마법사, 헨리 모리스였다.
* * *
“프로즌 필드.”
쩌저적!
헨리가 시동어와 함께 가볍게 허공을 손으로 그어 내자, 곧 엄청난 크기의 얼음들이 바다처럼 주위를 뒤덮었다.
그리고 그렇게 펼쳐진 프로즌 필드는 그 끝이 날카로워지며 헨리에게 접근하려던 수많은 성전사들에게 날을 세웠다.
“헨리 경! 지금 이게 무슨 짓입니까!”
인파가 북적였다.
모인 인파의 대부분이 교황청에서 출동한 성기사와 몽크 들이었다.
모두들 납치된 성녀를 구하기 위해 급히 출동한 것이었다.
하지만 모두들 선뜻 헨리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지금 헨리의 손아귀에 성녀가 인질로 붙잡혀 있었으니까.
“다시 한번 반복한다. 교황이 오기 전까지 모두들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성녀의 목숨은 보장하지 못한다.”
헨리는 펼쳐진 프로즌 필드의 중심에 거대한 석탑을 뽑아 올려 그 위에서 농성을 벌였다.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는 곳에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는 것.
그것이 바로 농성의 기본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다수의 성전사들은 이러한 인질극에 익숙하지 못해 어떻게 대응할지 몰라 진땀을 빼고 있었다.
모든 것이 헨리의 계획대로였다.
“저 헨리 님…….”
“예?”
“정말…… 정말 확신이 있으셔서 이러시는 거 맞으시죠?”
“물론입니다. 저만 믿으세요, 전하.”
진땀을 흘리는 것은 성전사들뿐만이 아니었다.
석탑 위에는 헨리와 성녀를 제외하고도 헤라리온과 후슬러가 헨리의 뒤에서 벌벌 떨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심정은 성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신이시여, 부디 제가 선택한 길이 옳은 길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소서……!’
불안한 마음에 아이리네는 여신에게 다시 한번 기도를 올렸다.
헨리의 제안을 듣고 스스로 인질을 자처한 것이긴 했지만, 그래도 불안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안에 떠는 세 사람과는 달리 헨리는 매우 평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 드디어 오는군요.”
그때였다.
헨리는 저 멀리서 성난 교황이 성큼성큼 걸어오는 것을 확인하고 일행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먼발치에서 그 광경을 보는 세 사람.
과연, 헨리의 말대로 교황의 얼굴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곧 프로즌 필드의 인근까지 온 교황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마법사님! 지금 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와우, 노인네가 목청도 좋으셔라.”
과연 교황은 교황이었다.
교황은 아흔 살이 넘은 늙은 노인네였음에도 불구하고 성전사들 못지않은 성량을 보여 주었다.
그렇게 한바탕 고함을 치며 헨리의 작태를 따지던 교황은 곁에서 자신의 눈치를 보는 로거와 아난다를 신경질적으로 나무랐다.
“일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당신들은 대체 무얼 하고 있었습니까! 당신들이 그러고도 성녀를 지키는 성전사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죄송합니다, 교황님.”
고개를 푹 숙이는 두 사람.
좀처럼 기세를 꺾지 않는 두 사람인데, 교황씩이나 되는 인물이 그들을 다그치자 두 사람이라고 별도리는 없었다.
그 광경을 본 헨리가 클클 웃었다.
“살다 살다 이런 광경도 다 보게 되는군요. 그럼 이번 인질극의 진짜 주인공도 나타났으니 쇼를 한번 시작해 볼까요?”
꿀꺽.
헨리는 연극을 진행하는 사회자처럼 여유로운 표정으로 쇼의 진행을 알렸다.
이에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 세 사람.
이미 물은 엎질러졌고 이제 남은 것은 헨리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이어서 헨리가 말했다.
“쇼를 시작하기 전에, 전하. 어떻습니까? 전하께서 보시기엔 교황으로부터 야누스와 비슷한 기운의 신력이 느껴지십니까?”
“그, 글쎄요…… 석탑의 높이가 너무 높기도 하고 주변에 여신님의 신력들이 넘쳐 나다 보니 좀처럼 느껴지지가 않습니다.”
“흠, 그럼 역시 시작은 이것이겠군요.”
이번 인질극에서 헤라리온의 역할은 명확하다.
하지만 주어진 역할을 능히 수행해 내기 위해선 아무래도 약간의 도움이 필요한 듯싶었다.
그래서 헨리는 쇼를 진행하기 위해 가장 먼저 품속에서 샬카를 꺼내 들었다.
그런 다음 허공에 샬카를 띄운 후 분노한 교황에게 그것을 이동시켜 주었다.
얼떨결에 샬카를 집어 드는 교황.
이에 헨리가 마법을 시전했다.
‘시력 강화.’
지잉.
교황이 샬카를 집어 들자마자, 헨리는 헤라리온과 성녀의 시력을 마법으로 강화시켜 주었다.
그러자 높이가 꽤나 높은 석탑 꼭대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교황의 손에 쥐여진 샬카의 바늘이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
“달?”
“역시 이번에도……!”
씨익.
헨리와 성녀는 그때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그때 본 것은 헛것 따위가 아닌 진짜였다.
그리고 뒤늦게 달을 가리키고 있는 샬카를 본 헤라리온이 말했다.
“어떻게 교황님께서 달을……?”
“제가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교황이 좀 수상하다고. 녀석은 분명히 워록과 내통하며 그들의 힘을 취했을 겁니다. 물론 정작 네프람 교단의 교주는 그 사실을 모르는 것 같지만…… 가면이야 벗겨 보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후슬러는 로스 교황이 워록의 힘을 절대 취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헨리의 생각은 달랐다.
그가 워록의 힘을 취하지 않는 이상, 그의 신력이 달을 가리키는 샬카의 현상을 도무지 설명할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진실을 알고자 복잡한 트릭을 사용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가 워록의 힘을 취했든 취하지 않았든, 교황은 이미 불에 태워 죽여도 모자를 명백한 범죄자였고 헨리는 단지 정공법으로 그의 가면을 벗겨 내고 싶을 뿐이었다.
“지금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얼떨결에 샬카를 받아든 교황이 신경질적으로 그것을 바닥에 내던졌다.
그리고 두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교황의 신력을 확인시켜 준 헨리는 그제야 석탑을 밟고 허공으로 도약했다.
“페더 폴.”
슈우우욱.
천천히 낙하하는 헨리.
아래로 떨어지며 헨리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석탑보다 훨씬 더 거대한 바윗덩이 하나가 석탑 위에 소환되었다.
바윗덩이를 소환한 이유는 간단했다.
지금 나에게 해를 입히면 언제든지 바위를 떨어뜨려 인질들을 죽이겠다는 일종의 보험이었다.
물론 헨리는 바위를 떨어뜨릴 생각이 추호도 없었지만 그래도 이정도 쇼맨십이면 수많은 성전사들을 겁박하기엔 충분할 것이라 여겼다.
교황 앞에 선 헨리가 웃는 낯으로 말했다.
“다시 보게 되어 반갑습니다, 교황님. 근데 어째…… 교황님께선 제가 다시 돌아온 게 그다지 반갑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니, 그보다 지금 이게 무슨……!”
“쉿.”
웬만하면 교황의 말을 끝까지 들어 주려고 했다.
하지만 막상 눈앞에서 교활한 너구리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조금도 그 목소리를 들어 주기가 싫어졌다.
그래서 말허리를 잘랐다.
교황의 말을 막은 헨리가 말을 이어 나갔다.
“뻔뻔하신 건 예전부터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이 정도 연기력이면 교황이 아니라 아주 유명한 연극배우가 되셨을 수도 있겠어요.”
“지금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겁니까!”
과연 능구렁이 같은 영감이었다.
헨리가 대놓고 비아냥거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황은 여전히 자신의 페이스를 잃지 않고 뻔뻔스러운 낯짝을 연기했다.
이에 헨리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메시아.”
“……!”
“제가 죽였습니다.”
‘메시아’라는 단어가 언급된 순간, 헨리는 보았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아흔 노인의 눈주름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는 걸.
그리고 그러한 떨림은, 헨리에게 다시 한번 커다란 확신을 안겨 주었다.
비릿하게 미소를 지어 보이는 헨리.
헨리가 말했다.
“연기는 이쯤하고 솔직하게 부는 게 어때? 이미 다 알고 왔어. 네놈은 교황 따위가 아니라 네프람 교단과 내통하던 워록이라는 사실을 말이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그만. 부정해 봐야 소용없어. 네가 쓴 가면을 벗기기 위해 일부러 성녀와 인질극을 벌였고, 너의 신력을 확인하기 위해 샤하트라 왕가의 보물까지 가지고 온 거니까.”
“보물? 보물이라니?”
“저기 있네. 네가 내던진 보물.”
헨리는 손가락으로 바닥에 떨어진 샬카를 가리켜 보였다.
이에 교황이 솥뚜껑처럼 커진 눈을 하고서 말했다.
“저건 분명히 네놈이……!”
“당연히 거짓말이지. 저건 신력의 성향을 알려 주는 일종의 나침반이야. 그리고 그때, 너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태양을 가리켰지.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 너는 테이블에 있던 사람들과 다른 성향의 신력을 가졌다는 이야기야.”
헨리의 말에는 거침이 없었다.
그리고 헨리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자리에 모인 성전사들은 그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알만 굴릴 뿐이었다.
단 두 사람.
로거와 아난다, 두 사람만을 제외하고 말이다.
“지금이라도 순순히 자백하는 게 어때? 혹시라도 네가 거짓말을 할까 봐 일부러 증인도 데리고 왔거든. 기억하지? 네프람 교단에는 메시아만 남아 있던 게 아니란 걸.”
“서, 설마!”
“그래, 지금 저 탑 위에는 너와 내통하던 워록이 있다. 지금 이 자리에 그를 불러서 너와의 관계에 대해 한번 말해 보라고 할까? 그게 아니면…….”
헨리는 빙긋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을 이었다.
“지금 여기 모두가 보는 앞에서 여신의 성법을 한번 펼쳐 봐.”
외통수.
아서스의 은총을 받고 아서스를 새로운 신위로 섬기기 시작한 이상, 교황은 더 이상 아이린의 신력을 사용할 수 없다.
교황의 얼굴이 거무죽죽하게 변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