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3
네프람 (2)
광명이 한차례 번쩍인 후, 헨리는 눈앞에 칠흑 같은 어둠이 펼쳐진 것을 볼 수 있었다.
‘어둠?’
눈앞은 말 그대로 캄캄했다.
마치 태양이 사라진 것처럼 말이다.
그 순간, 낯선 목소리가 체스트 속을 가득 메웠다.
-네놈은 누구지?
들려온 목소리는 마치 동굴 속에서 울리는 메아리처럼 체스트 속을 울려 댔다.
이에 헨리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체스트 안을 둘러보았다.
눈에 보이는 건 없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어이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다름 아닌 헨리의 권속, 클레버가 만든 체스트의 내부.
즉, 그 누가 개개인의 권속을 장악하여 이렇듯 목소리를 전한단 말인가?
‘마법? 아냐, 마법이라기엔 느껴지는 힘이 불투명해.’
헨리는 대답 대신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 상대의 힘을 파악하려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좀처럼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녀석으로부터 느껴지는 힘이 마력을 닮긴 했지만 자세히 곱씹어 보면 마력과는 미묘하게 달랐기 때문이다.
이윽고 대답을 미룰 수 없었던 헨리가 대답 대신 역으로 질문을 던졌다.
“네놈이 네프람이냐?”
-건방진 놈이구나. 질문은 분명히 내가 했을 텐데? 만약 한 번만 더 내 심기를 건드린다면 그땐 정말…….
“죽여.”
-……뭐?
“자신 있으면 어디 한번 죽여 보라고.”
헨리는 끝끝내 상대방의 힘을 파악할 수 없었다.
하지만 힘의 출처를 파악하지 못했다고 해서 놈의 힘이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놈이 만약 교황의 말마따나 신력에 기반을 둔 네프람 교단의 일당이라면 그에 대항할 만한 수단 또한 어느 정도 갖추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놈이 네프람 교단이 아닌 헨리의 추측대로 ‘마기’와 관련된 힘을 지닌 자라면 그건 그것대로 두렵지 않았다.
마기라면 헨리도 지긋지긋하게 상대해 보았으니까.
그러니 지금 헨리가 선보이는 행동은 말 그대로 배짱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죽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 제왕급에 해당하는 ‘배짱’말이다.
-…….
한참의 침묵.
이에 헨리가 물었다.
“클레버.”
-예, 마스터.
“어떻게 된 거야? 놈한테 사로잡히기라도 한 거야?”
-아닙니다. 좀 전의 목소리는 사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분명히 저는 그 어떤 힘도 빼앗기지 않은 것 같은데 갑자기 목소리가 들려온 터라…….
“그래?”
우려와는 달리 클레버를 사로잡았다거나 조종한 것은 아닌 듯했다.
침묵은 한동안 이어졌다.
그리고…….
드드드드-!
헨리는 품속에서 진동중인, 그러니까 여전히 바늘을 회전시키고 있는 샬카를 꺼내 들었다.
샬카의 바늘은 여전히 미친 듯이 회전하고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헨리는 마치 고장 난 시계처럼 폭주하는 샬카를 다시 아공간에 집어넣은 후 김빠진 얼굴을 하고서 마법을 캐스팅했다.
목표는 칠흑 같이 어두운 외부.
더 이상 대답이 없는 상대를 기다려 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7서클급에 해당하는 대규모 지진 마법, ‘성난 거인의 춤사위’가 완성되어 헨리의 손아귀에서 발동 명령을 대기하고 있었다.
이윽고 헨리가 말했다.
“클레버, 준비해.”
-예, 마스터.
우웅!
체스트로부터 바깥과 연결되는 조그마한 틈이 개방되었다.
그리고 헨리는 돌멩이를 던지듯 압축된 지진 마법을 그 사이로 던져 넣었다.
꽈르르릉!
그러자 천둥번개를 연상케 하는 엄청난 크기의 굉음이 체스트 바깥에서 요동쳤다.
성난 거인의 춤사위.
마치 분노한 거인이 춤을 추는 것 같다고 하여 붙어진 7서클급의 대규모 지진 마법.
효과는 굉장했다.
체스트로부터 쏘아진 마법은 체스트 바깥의 지하를 채웠던 엘라곤의 물들을 가르며 사방팔방으로 엄청난 균열을 일으켰다.
그리고 동시에 걷잡을 수 없는 파괴와 혼돈을 야기해 지하 내부에 속한 모든 것들을 파괴했다.
그리고 헨리는 이 모든 사태를 방관하듯, 체스트 속에서 팔짱을 낀 채 부서지고 있는 외부 상황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다.
지진의 파괴는 마치 산불 같이 그 파괴력이 번져 나갔다.
균열이 더 많은 균열을 만들었고, 자그마한 파괴가 더 큰 파괴를 낳았다.
연쇄적인 파괴.
그것이 바로 지진 마법이 가지는 진정한 무서움이었다.
한참의 지진 끝에 헨리는 바깥에 가득 차 있던 엘라곤의 물들이 점점 어딘가로 빠져나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윽고 수면으로 다시 파괴된 지면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헨리는 혹시 모를 기습에 대비하여 전신에 매직 실드를 두텁게 두른 후 체스트 바깥으로 걸어 나왔다.
딱!
바깥으로 나온 헨리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이번에는 사방을 밝히는 수십 개의 라이트가 너무나도 쉽게 모습을 드러냈다.
환해진 주위.
헨리는 밝아진 주위를 둘러보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이곳 자체에 마력의 응집을 방해하던 결계가 있었나 보군.’
한바탕 지진을 일으키고 주위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나서야 마법의 사용이 가능해졌다.
그 말은 곧 특정 대상을 상대로 장치가 발동되던 것이 아닌, 장소 전체에 보호 장치가 발동되고 있었단 뜻이었다.
신발에 진흙이 묻어났다.
지진이 일어나면서 고여 있던 물이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헨리는 진흙과 뒤엉켜 있는 해골병들의 잔해를 보며 혀를 찼다.
‘설마 꼬리를 내뺀 건가?’
해골병들의 기세도 수그러들었고 마력의 응집을 방해하던 결계도 더 이상 발동되지 않는다.
그리고 헨리에게 겁을 주던 모종의 목소리 또한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헨리는 녀석이 완전히 꽁지를 내뺐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순간, 헨리는 멀지 않은 곳에서 전에 보지 못한 낯선 문짝 하나를 볼 수 있었다.
‘음?’
문짝에는 진흙들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아무래도 헨리가 일으킨 마법의 여파로 숨겨져 있던 문이 드러난 듯 보였다.
‘문이라……. 너무 대놓고 나타난 것 같은데?’
합리적인 의심.
문짝을 발견한 헨리는 잠깐 동안 고민하더니 이내 곧 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주문을 외웠다.
“강철의 고함.”
콰앙!
주문을 외우자마자 이윽고 커다란 강철덩이가 소환되어 맹렬한 기세로 문짝에 부딪혔다.
처참하게 일그러지는 문짝.
그러나 헨리의 공격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콰앙! 콰앙! 콰앙!
헨리가 손짓을 거듭할수록 소환된 강철덩이는 연이어 문짝을 두드렸다.
물론 칼을 뽑아 검기를 날려 손쉽게 문짝을 베어 낼 수도 있었지만 헨리는 일부러 그러지 않았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 이유로는 자신이 마검사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고, 두 번째로는 여태껏 마력의 응집을 방해받았기에 보란 듯이 마법의 위용을 보여 주고 싶었다.
그리고 잠시 뒤 강철덩이에 난타 당하던 문짝은 곧 처참한 몰골로 찢겨져 나갔다.
“캔슬.”
헨리가 손을 거두자 곧 강철덩이들이 모습을 감추었다.
그리고 헨리는 열린 문짝을 향해 라이트를 집어던져 내부를 살폈다.
화악!
비춰지는 문짝 너머의 풍경.
그곳에는 샤하트라 왕궁의 지하에서 보았던, 교단의 신전을 연상케 하는 구조물이 있었다.
신전이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헨리는 품속을 더듬어 샬카를 꺼내들었다.
잠잠해진 샬카.
샬카를 본 헨리가 피식 미소를 지었다.
씨익.
샬카에 달린 바늘은, 명백하게 달을 가리키고 있었다.
* * *
“꽤액! 꽤액!”
문짝 너머에 지어진 것은 신전이 맞았다.
그리고 내부가 신전임이 확인되자마자 성격 급한 헥터가 먼저 쇳소리를 내며 신전을 향해 날아들었다.
뒤를 따르는 헨리.
신전을 본 헨리가 말했다.
“아무래도 잘 찾아온 것 같네.”
지하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신전.
보통의 신전이라면 이렇게 깊은 지하 속에, 그것도 특수한 보호 결계들까지 둘러가며 신전을 감출 이유가 없다.
그러니 이곳은 즉, 뒤가 구리단 이야기였다.
헨리는 라이트에 의해 환하게 밝아진 신전의 주위를 둘러보았다.
넓은 공동이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가까이에 위치한 신전으로부터 지독한 농도의 마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마기라…….’
신전의 바깥에는 분명히 엄청난 수의 해골병들이 포진되어 있었지만, 그것들이 내뿜는 마기도 지금 느껴지는 것만큼 지독하지는 않았다.
그러니 바꿔서 이야기하자면 아마도 이곳에서 느꼈던 마기의 대부분은 눈앞의 신전으로부터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착갑.”
지이잉.
전신에 둘러지는 새하얀 갑옷.
헨리는 더 이상 네프람 교단 놈들에게 기회를 줄 생각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시간을 낭비할 생각이 없었다.
신전 앞에 선 헨리.
헨리가 마력으로 목소리를 증폭시키며 말했다.
“네프람 교단은 들어라!”
쩌렁쩌렁.
공동 전체에 헨리의 목소리가 울렸다.
“지금 당장 내 눈앞에 누구든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이곳 전체를 날려버리겠다!”
쩌렁쩌렁.
여지껏 헨리가 행해온 행보를 보았다면 지금 헨리가 하는 말이 단순히 겁을 주기 위한 허풍이 아니란 것쯤은 잘 알 것이다.
공동 전체에 헨리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전은 잠잠했다.
이에 헨리가 한숨을 픽 내쉬며 말했다.
“기회는 충분히 줬다.”
머리 위로 손을 들어 올리는 헨리.
곧 헨리의 손바닥에 엄청난 압력의 바람이 응집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자, 잠시만 기다리시오!”
하마터면 응집되는 바람소리에 묻혀 목소리를 듣지 못할 뻔했다.
하지만 헨리의 청각은 생각보다 꽤나 발달한 편.
이에 헨리는 응집시키던 바람을 멈추고 소리가 난 쪽을 향해 고개를 틀었다.
그러자 그곳에는 신전 내부에서 허겁지겁 뛰쳐나오는 한 사람을 볼 수 있었다.
바람을 거두는 헨리.
자신에게 다가오는 남자를 향해 헨리가 말했다.
“멈춰라.”
헨리의 명령대로 자리에 멈춰 선 남자.
남자는 색이 바랜 갈색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리고 남자가 자리에 멈춰 서자마자 헨리는 즉시 손가락을 튕겼다.
딱!
“크윽!”
헨리가 손가락을 튕기자, 남자의 두 손이 뒤로 묶이더니 동시에 무릎이 바닥에 꿇려졌다.
그리고 머리에 쓰고 있던 후드가 뒤로 걷어졌다.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던 사람, 그는 로스 교황만큼이나 나이가 많아 보이는 노인이었다.
헨리가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넌 누구지?”
“제, 제 이름은 후슬러라고 합니다.”
“소속은?”
“네프람 교단입니다.”
“잘 찾아왔군.”
노인의 대답에서 원하는 대답이 튀어나왔다.
이에 헨리는 후슬러와 거리를 좁혀 무릎 꿇은 후슬러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리고 다시 손가락을 튕겼다.
딱!
뒤편으로 꺾였던 두 팔 중 한쪽 팔이 앞으로 뻗혔다.
헨리는 뻗어진 그의 손 위로 샬카를 얹었다.
여전히 달을 가리키고 있는 샬카.
달을 확인한 헨리는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샬카를 회수했다.
“나는 마법사다. 그리고 너희 네프람 교단에 볼일이 있어서 왔지. 교단의 신자는 네놈 하나뿐인가?”
“……그렇습니다.”
“좋아, 그럼 당연히 네가 교주겠네. 후슬러, 지금부터 너에게 질문을 할 건데 순순히 협조해 줬으면 좋겠어.”
헨리의 말에는 욕설이 없었지만 말 속에 담긴 뜻은 한없이 공포스러웠다.
이에 겁에 질린 후슬러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 저…… 마법사님, 물어보시는 것엔 반드시 협조하겠습니다만, 그전에 저에게도 질문할 수 있는 기회를 한번만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좋아. 물어봐.”
“혹시 이곳의 위치는 어떻게 알게 되신 겁니까?”
“교황이 알려줬다.”
“교황이요?”
“그래. 로스 보르기아 1세라고 하면 알아들을려나?”
“로, 로스! 그 작자가 감히……!”
“질문은 이것으로 끝. 이제 너에게 질문할 기회는 없다.”
어차피 후슬러의 전신은 헨리의 마력으로 통제당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만에 하나 암기를 휘둘러 헨리에게 해를 입히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
그런데 그 순간, 이를 부득 갈던 후슬러가 외쳤다.
“마신님을 위하여!”
콰득!
짤막한 외침 끝에 후슬러가 자신의 혀를 깨물었다.
그리고 그 순간, 후슬러의 전신으로부터 엄청난 양의 독 안개가 뿜어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