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2
네프람 (1)
쿠구구-!
우물은 계속해서 뽑혀져 나왔다, 마치 신화 속에 나오는 신들의 바늘처럼.
그러나 우물이 정말로 신화 속의 바늘이 아닌 이상, 그 끝은 정해져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우물의 밑바닥이 모습을 드러냈다.
“길기도 하다.”
헨리는 허공에 떠오른 길쭉한 우물과 우물에 붙은 넝쿨, 그리고 우물에 뿌리를 내리고 자란 식물들을 보았다.
장관이었다.
우물이 그 끝을 드러내자 헨리는 이어서 우물을 향해 오른쪽 손바닥을 펼쳤다.
그리고 마력을 끌어올려 주먹을 꽉 쥔 후, 그것을 옆으로 비틀었다.
콰드득-!
꺾기.
그것은 마력을 힘줄 삼아 우물을 꺾는, 격투에서나 볼 수 있는 일종의 관절기를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그 간단한 행위가 가지는 힘은 우물이 허공으로 떠오른 것만큼 또 다른 경이로움을 보여 주었다.
쿠드드득-!
마력 꺾기에 의해 여러 방향으로 몸체가 뒤틀려진 우물은 곧 몸체를 구성하고 있던 석편들이 부서지며 ‘진짜 속살’을 드러냈다.
그리고 헨리는 부서진 속살들을 허공에 펼쳐 어둠 속에 가려져 있던 ‘우물의 비밀’을 응시했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
어둠 속에 가려져 있던 우물의 진짜 속살들.
그 속살에는 마치 살갗 위에 새겨진 문신처럼, 무수한 양의 ‘신어’들이 적혀져 있었다.
‘신어라…… 확실히 신을 섬기는 교단은 다들 이 언어를 사용하는 모양이로군.’
신어.
마계어, 환어, 그리고 흑마술의 언어라고도 불리는 이 문자는 종교인들 사이에선 ‘신어’라고 불렸다.
뜻은 간단했다.
신성한 언어, 혹은 신의 언어.
신성국에 갔을 때도 이와 비슷한 언어를 본 적이 있다.
‘그때는 왜 관심이 없었는지…….’
모를 때는 보이지 않다가 알고 나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헨리에겐 그것이 바로 신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전생의 헨리는 신앙심도 없었을뿐더러 마법 수련에만 몰두하느라 정신이 없었으니까.
이윽고 헨리는 곱게 펼쳐진 우물의 석편들을 향해 손뼉을 쳤다.
파사삭!
가루가 되어 부서지는 우물.
현재 헨리에게 저 많은 양의 신어들을 해석하고 추리할 능력은 없다.
하지만 저것들이 한데 모여 특수한 장치를 이루고 있었으니, 네프람 교단과 접촉하기 위해선 저것들을 부숴야 마땅했다.
두근-!
그리고 우물을 부순 순간.
허공에 떠오른 우물을 기점으로 심장박동 소리 비슷한 것이 귓전을 스쳐 지나가며, 주위의 풍경이 일렁였다.
사아아-!
그리고 가을바람이 낙엽을 긁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우물이 부서짐으로써 우물이 지탱하고 있던 결계가 무너짐과 동시에 결계가 ‘감추고 있던 것’들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저기 숨어 있었군.’
결계가 감추고 있던 것.
그것은 우물이 뽑혀져 나간 구멍 아래로 나 있는 한 줄기의 계단이었다.
계단을 본 헨리는 생각했다.
‘이렇게까지 난리를 피웠는데도 직접 나오실 생각은 없다?’
감이 둔한 건지 아니면 배짱 장사를 하자는 건지, 헨리는 이러한 반응이 퍽 재미있게 느껴졌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 장단에 한 번 몸소 놀아나 주기로 마음먹었다.
드르르륵-!
헨리가 계단으로 걸어 들어가자 우물 구멍이 있던 자리에 흙들이 메꾸어졌다.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스럽게 풀숲이 뒤덮였다.
* * *
아래로 뻗어진 계단은 몹시 길었다.
헨리는 꽤 길어 보이는 그 계단을 정직하게 내려갈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허공을 유영할 수 있는 마법, 플라이를 시전한 다음 고속으로 낙하했다.
쉬익-!
스팡!
멈출 줄 모르는 질주 끝에 헨리는 곧 바닥을 발견했다.
헨리는 마치 물속의 물고기를 낚아채는 매처럼, 능숙하게 바닥을 튕겨 착지했다.
주위는 어두웠다.
어이가 없었다.
이 정도 난리를 피웠으면 놀라 뛰쳐나온 신도라든가 교단에서 숨겨 둔 괴물 몇 마리쯤은 모습을 드러낼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끝없는 계단을 내려왔음에도 불구하고 손님을 반겨 주는 게 고작해야 어둠이라니?
헨리를 어이없게 하기엔 충분했다.
“라이트.”
딱!
그래서 헨리는 손가락을 튕겼다.
주인이 손님을 위해 불을 밝혀 주지 않는다면 손님이 직접 불을 밝히는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런데 헨리가 손을 튕긴 직후, 제법 긴 침묵이 주위를 맴돌았다.
‘음?’
딱-!
딱딱-!
딱!
…….
침묵하는 어둠.
무엇인가 잘못됐다.
분명히 손가락을 튕기면 헨리의 서클로부터 마력이 방출돼 주위를 순식간에 밝혀야만 했다.
그런데 7서클에 달하는 대마법사인 헨리가 마법을 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불빛은커녕, 마력조차 응집되지 않았다.
‘이게 무슨?’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쉬이익!
후웅!
바람을 가르는 소리에 헨리는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젖혔다.
그러자 얼굴로부터 느껴지는 분명한 풍압.
그것은 분명히 검을 휘두를 때 생기는 바람, ‘검풍’이었다.
“검?”
떨그럭, 떨그럭!
헨리가 외마디의 반문을 제기하자, 그 순간 헨리의 주위로부터 숱한 기척이 느껴졌다.
‘이런!’
“꽤애액!”
그리고 사방으로부터 가득 느껴지는 기운.
그것은 살기였다.
그것도 엄청나게 지독한, 그리고 상당히 텁텁한 느낌의 살기 말이다.
헥터 또한 이를 느꼈는지, 헨리의 품속에서 뛰쳐나오며 앙칼진 목소리로 높게 소리쳤다.
쉬익! 쉬익!
창, 칼, 그리고 화살까지.
굉장한 살기를 동반한 날붙이들이 사방으로부터 헨리를 공격해 들어왔다.
그리고 헨리는 그러한 공격들을 오로지 감각만으로 회피하며 가까스로 적정거리를 유지했다.
다급한 마음에 헨리가 외쳤다.
“클레버! 엘라곤!”
-예, 마스터!
-뀨뀨뀨!
콰광!
헨리의 외침과 함께 소환되는 두 명의 권속.
그리고 전신에 오러를 두른 푸른 앵무새가 허공으로 비상했다.
수와아아!
클레버는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거대한 무의 소용돌이를 생성해 냈다.
그것은 체스트를 응용한 기술이었다.
마치 블랙홀을 연상케 하는, 클레버만의 독자적인 기술이었다.
-뀨뀨뀨!
콰드드득!
동시에 날카로운 얼음 기둥들이 사방으로 솟구쳐 나타났다.
엘라곤의 강화된 아이스 웨이브였다.
그리고 그 순간, 사방으로 뻗어진 엘라곤의 얼음 기둥들로부터 헥터의 푸른 오러가 반사돼 비추어지더니 사위가 푸른 광명들로 번쩍였다.
“……!”
푸른 광명이 지하를 가득 메웠을 때, 헨리는 그제야 자신을 공격하던 것들의 존재를 구경할 수 있었다.
지독한 살기를 내뿜던 것들, 그것은 다름 아닌 ‘스켈레톤’들이었다.
‘스켈레톤? 흑마술의 부산물 같은 놈들이 왜 여기에? ……설마!’
지독하고 텁텁한 살기라고 생각했던 기운.
그것은 살기 따위가 아니었다.
마물의 숲에서나 느낄 수 있는 짙은 농도의 ‘마기’였다.
고위급 마족이 아닌 이상, 스켈레톤을 다룰 수 있는 자들은 그 존재가 극히 한정되어 있었다.
바로 흑마술을 고도로 발전시켜 온 존재들, ‘네크로멘서’들이었다.
‘교황, 이 빌어먹을 새끼가 대체 나한테 뭘 소개시켜 준 거야?’
헨리는 경악했다.
그도 그럴 것이 번쩍이는 푸른 광명 사이로 보이는 수많은 양의 해골병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등장한 스켈레톤들은 얼음 기둥에 파괴되거나 클레버의 체스트에 빨려 들어가는 등 쉴 틈 없이 공격당했다.
그러나 아무리 빨아들이고 부서지고 파괴되어도 해골병들의 숫자는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딱! 딱! 딱! 짝-!
시간이 지체될수록, 헨리는 인상을 찌푸리며 끊임없이 손가락을 튕기고 손뼉을 쳤다.
그러나 그 어떤 행위를 해 보아도 체내의 마력은 응집되지 않았다.
결국 헨리는 수인을 맺는 걸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무언가 마력의 응집을 방해하고 있다!’
헨리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다독이며 왜 마력이 응집되지 않는지 차갑게 가라앉은 이성으로 추리를 시작했다.
그러나 주위엔 칠흑 같은 어둠과 해골병들만이 가득한 상황에서, 마력의 응집을 방해하는 요소를 찾아내기란 생각보다 쉬운 것이 아니었다.
심지어 어느 순간부터 헨리가 타고 내려왔던 계단조차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사라진 계단을 통해 헨리는 한 가지 사실을 유추할 수 있었다.
‘함정이다! 그것도 아주 완벽하게 설계된!’
마력이 통용되지 않고 바깥으로 향하는 출입구가 사라졌다.
심지어 마기가 가득한 해골병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그래서 헨리는 이 모든 게 처음부터 누군가를 겨냥하고 만들어진 함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함정에 당해 쉽게 죽어 줄 생각은 없었다.
비록 헨리 스스로는 마력을 응용하지 못했지만 헨리에겐 헨리의 수족이 되어 줄 수많은 권속들이 존재했으니까.
“엘라곤!”
-뀨뀨!
“이곳 전체를 물바다로 만들어 버려!”
-뀨뀨뀨~!
헨리의 명령에 엘라곤은 경쾌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즉시 헨리의 체내로부터 막대한 양의 마력을 끌어다가 엘라곤 스스로 정령술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콰과과과-!
마치 구멍 난 댐처럼, 엘라곤은 사방으로부터 거대한 물줄기들을 쏟아냈다.
이어서 헨리는 클레버에게 명령했다.
“클레버! 나와 헥터를 집어삼켜!”
-예, 마스터.
집어삼키라는 말.
그것은 진짜로 삼키라는 뜻이 아니었다.
베네딕을 상대했을 때처럼 헨리를 체스트 속으로 이동시키라는 뜻이었다.
명령을 받은 클레버는 곧 헨리와 헥터를 체스트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자신 또한 종적을 감추었다.
꼬르륵!
그리고 곧 클레버가 있던 자리에까지 엘라곤이 소환한 엄청난 양의 물들이 홍수처럼 가득 차올랐다.
* * *
“클레버, 시야 개방시켜.”
-예, 마스터.
한참 후, 헨리는 클레버의 체스트 속에서 바깥 상황을 살피기 위해 시야를 개방했다.
그러자 헨리의 눈앞에 물속에 떠다니는 무수한 양의 해골병들이 보였다.
‘해골병들이 물에 떠다닌다는 건 결국 공간 자체는 실재한다는 말인데…… 여긴 대체 정체가 뭐야?’
공간 자체는 환술이나 마법으로 이루어진 것 같진 않았다.
그러기엔 공간의 적재량이 너무나도 뚜렷했고, 헨리는 정말로 해골병의 창칼에 찔려 죽을 뻔하기도 했으니까.
헨리는 다시 손가락을 튕겨 보았다.
화악!
화사한 광휘의 구체가 헨리의 손바닥 위로 생성되었다.
말인즉슨, 클레버의 체스트 속에서는 헨리의 마력 응집을 방해하던 무언가가 사라졌단 뜻이었다.
“엘라곤과 클레버는 자유롭게 능력의 사용이 가능한데 나만 안 된다고……?”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자 헨리는 그제야 다시 차분하게 상황을 추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한참의 추리 끝에 헨리는 누군가 악의적으로 자신을 함정에 빠뜨린 것이 아닌, 애초부터 이곳을 수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일종의 보호 장치라고 추정했다.
‘그래, 그렇다면 이 난리를 피워도 주인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건 결국 둘 중 하나란 말이겠지.’
애초부터 이곳에는 주인이 없거나, 혹은 헨리가 엉뚱한 곳을 비집고 들어와 잘못 짚은 것이거나.
그러나 두 가지 중 무엇이 됐든 헨리가 반가워할 만한 결론은 없었다.
그러니 헨리는 이곳의 진짜 입구를 찾아냈을 때처럼 모든 것들을 부수기로 했다.
“클레버. 내가 신호하면 내 마법을 바깥으로 내보내라.”
-예, 마스터.
헨리는 엘라곤을 역소환시켰다.
그런 다음, 마력의 응집을 방해받지 않는 클레버의 체스트 속에서 대규모 단위의 초광역 마법을 사용해 바깥 공간 전체를 날려 버리기로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드드드득-!
품속이 진동했다.
헨리는 그것을 꺼냈다.
품속에서 진동하는 것.
다름 아닌 헤라리온이 헨리에게 주었던 샬카였다.
샬카의 바늘이 미친 듯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번쩍!
체스트 속에 개방된 시야로부터 엄청난 크기의 빛무리가 헨리의 시야를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