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1
교황 (2)
성녀와 헨리를 제외한 세 사람은 샬카의 바늘이 지금 무엇을 뜻하는지 전혀 알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성녀와 헨리만큼은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이건……?”
바늘의 결과에 의아한 나머지 성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나 헨리가 재빨리 탁자 밑에서 발로 성녀의 다리를 툭 건드렸다.
이상함을 눈치챘지만 재빠르게 입을 닫는 성녀.
이에 헨리가 말했다.
“교황님께선 밤에 신력이 더 충만하신 모양이로군요.”
“아아, 그런 의미였습니까?”
“예, 로거 님과 아난다 님도 한번 테스트해 보시죠.”
빈약한 거짓말이었지만 헨리는 시선을 돌리기 위해 얼른 로거와 아난다에게도 샬카를 권했다.
그러나 로거와 아난다가 샬카를 들었을 땐 샬카의 바늘 모두가 태양을 가리켰다.
‘뭐지?’
성녀를 포함한 세 사람은 모두 태양을 가리켰는데 이중에서 여신의 신력이 가장 충만해야 할 교황만이 달을 가리켰다.
‘헤라리온의 말대로라면 교황도 태양을 가리켜야 할 텐데?’
이상해도 너무 이상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교황을 추궁하기엔 때가 별로 좋지 못했다.
‘화제를 돌려야겠어.’
의구심이 드는 현상이었지만 그렇다고 확실하게 추궁하기엔 애매한 상황.
그러니 헨리는 얼른 화제를 전환시키기로 했다.
본래 목표로 하던 이야기로 말이다.
“……아무튼 그런 연유로 아서스에 대항할 만한 새로운 신위를 찾아볼 생각입니다만, 저는 그 신위에 대한 실마리로 종교 대전 때 종적을 감춘 다른 거대 종교들을 택하기로 했습니다.”
“다른 거대 종교라……?”
헨리의 언급에, 교황은 종교 대전 이후로 모습을 감춘 패잔병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동시에 비릿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렇게는 안 되지!’
로스 보르기아 1세.
그는 옛적부터 섬겨 오던 신위를 버리고 아서스를 새로운 종교로 받아들이면서 영원에 가까운 젊음을 약속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젊음을 영위하고 싶다면 당연히 아서스 또한 자신과 함께 공존해야만 했다.
그것이 바로 교황이 변절자가 된 이유였으니까.
그런고로 교황은 헨리가 말하는 거대 종교들의 행방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알려 주지 않기로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입을 닫는 것은 의심을 살 수도 있으므로 적당한 먹이를 던져 줄 생각이었다.
아니, 이 기회에 헨리를 없애 버리기로 했다.
“좋습니다. 대신 지금부터 말씀드릴 이야기는 여기 계신 분들도 모르는 극비 사항이니 대마법사님을 제외한 다른 분들은 잠시 자리를 비켜 주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교황의 요청에 성녀는 헨리와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두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세 사람이 방을 나서자 교황이 말했다.
“흠흠, 대마법사님. 그러니까 대마법사님께선 지금 아서스의 신력에 대항할 만한 신위를 찾고 계신다…… 이 말씀이시지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대륙의 동부에 은거해 있는 ‘네프람’이라는 교단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네프람이요?”
네프람.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예, 네프람은 종교 전쟁에 참여하진 않았으나 교단에서 섬기는 신위 자체는 아주 막강한 신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륙 정벌처럼 저희들이 종교 정벌을 나섰을 때 꽤나 애를 먹었던 교단들 중 하나이지요.”
‘네프람, 네프람이라…….’
헨리는 몇 번이나 네프람이라는 이름을 곱씹어 보았지만 좀처럼 입에 달라붙지 않는 게 전생의 기억에도 없는 종교였다.
‘종교 대전 이전에 처리한 교단이라면 성녀도 모르겠군. 결국 직접 확인해 보는 수밖엔 없는 건가?’
게다가 종교 대전 이전에 숙청된 종교라고 하니 성녀에게 다시 재확인을 받는 것도 불가능해 보였다.
그렇다면 결국 헨리 스스로 직접 확인해 보는 수밖엔 없었다.
헨리가 말했다.
“추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교황님, 다소 실례되는 말씀이긴 하나 저에게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은 관계로 네프람을 비롯해 후보가 될 만한 다른 종교들도 모두 추천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으음, 그 부분은 좀 예민한 문제인 터라……. 죄송합니다. 그래도 대마법사님 정도 되시는 분이라면 번거로우시더라도 네프람을 확인한 후에 다시 저를 찾아 주시는 것도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더 이상은 알려 주지 않을 테니 알려 준 곳이나 확인해 보고 오란 소리였다.
이에 헨리는 더 이상 부탁하지 않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네프람에 대한 정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헨리의 요청에 교황은 곧 지도를 펼쳤고 네프람 교단이 위치해 있을 만한 장소를 짚어 주었다.
그리고 그들이 가진 특징과 역사 등을 간략하게 알려 주었다.
“네프람의 신자들은 저희들이 대부분 제거하여 이제 그 명맥만 겨우 잇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대마법사님께서 목표로 하시는 신위의 탈환은 그리 어렵지 않으실 겁니다.”
“그렇군요.”
“아 참, 그리고 그들은 ‘순환’을 주요 교리로 삼는 자들입니다.”
“순환이요?”
“예, 생명의 탄생과 죽음 같은 순환 말이죠.”
교황은 네프람에 대해 소개하면서 평화교가 가진 과거의 영광에 대한 자랑도 빼먹지 않았다.
물론 헨리는 그런 자랑들을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렸지만.
이윽고 네프람에 대한 설명이 모두 끝났다.
헨리는 그 자리에서 교황이 짚어 준 장소의 좌표 계산까지 모두 끝마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헨리가 말했다.
“부디 네프람이 제가 찾던 그런 신위였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그랬으면 좋겠군요. 여신님의 이름으로 행운을 빌겠습니다, 대마법사님.”
우웅!
밝은 광명 속으로 헨리가 사라지기 전까지 교황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리고 헨리가 사라진 직후, 교황이 중얼거렸다.
“후후, 행운은 무슨! 네가 아무리 대마법사라 할지라도 네프람 놈들 앞에선 속수무책일 테지. 그리고…….”
교황은 두 손을 모아 마른세수하듯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러자 페일로에게 전해 받은 아서스의 권능에 의해 교황의 얼굴이 다시금 주름 한 점 없는 젊은 얼굴로 변형되었다.
“아이리네 이년이, 오냐오냐 해 줬더니 감히 내 뒤통수를 치려 들어? 아무래도 페일로 님께 보고 드려 빠른 시일 내에 손봐 줘야겠어.”
교황은 미소 지었다.
아서스에게 일러바칠 좋은 구실이 생겼다는 생각에 말이다.
* * *
우웅!
“꽤애액! 꽤애액!”
빛무리가 허공을 흐트러뜨렸고 그 사이로 헨리와 앵무새가 모습을 드러냈다.
헨리가 광명 사이로 걸어 나오자마자 어깨 위에 앉아 있던 헥터가 목청껏 짖어댔다.
“×-신! ×-신!”
액무새 특유의 억양으로 욕설을 내뱉는 헥터.
심정은 충분히 이해했다.
헥터는 전후 사정을 모두 알고 있었고, 그 모든 것을 아는 상태에서 헨리가 교황에게 샬카에 대한 거짓말을 하는 것까지 보았으니까.
그렇기에 헥터는 교황 앞에서 욕설을 내뱉으려는 걸 가까스로 참았다.
지금 달고 있는 것은 새의 머리였지만 그 속에 든 것은 사람의 영혼이었으니까.
“잘 참았어, 헥터.”
헨리도 그런 사정을 아는지라 잘 인내해 준 헥터의 머리깃을 쓰다듬어 주었다.
“꽤액!”
탁-!
날개로 헨리의 손을 쳐 내는 헥터.
징그러우니 하지 말란 뜻이었다.
이에 헨리는 피식 미소 지으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나저나 동부라……. 동부도 참 오랜만이군.”
동부.
헨리가 죽고 다시 환생한 직후에 눈을 떴던 지역.
물론 그곳은 동부의 가장 끝자락에 위치한 곳이었지만 그래도 도착한 좌표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흐음, 어쩐담.’
헨리는 고민했다.
그동안은 바빠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으나 가만 생각해 보니 칼리번 요새에 입대한 이후 단 한 번도 고향과 연락을 취하지 않았던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본 주인에게 좀 미안하긴 하네.’
흑마술에 손만 대지 않았더라면 자신의 인생을 살았을 육체의 본 주인에게, 헨리는 알게 모르게 미안함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의 헨리는 한스 준남작에게 부성애를 느끼진 않았지만, 육체의 본 주인을 아들로 두었던 한스 준남작은 오랫동안 소식이 끊겼을 가문의 적자에게 적잖은 섭섭함을 느꼈을 것이기 때문이다.
‘네프람 교단을 찾고 나면 고향에나 한번 들러야겠군.’
마음 같아선 바쁜 시국이었으니 조금도 신경 쓰지 않을 일이었겠지만…….
그냥 마음이 그랬다.
말 그대로 키메라가 대륙 전체에 판을 치는 세상에서 운 좋게 복수할 기회를 얻은 곳이 고향이기도 하니 본 주인에 대한 예의를 생각해서라도 모리스 영지에 한번 들러 볼 생각이었다.
‘그럼 슬슬 움직여 볼까?’
타닥, 팡!
헨리는 바닥에 발을 굴려 마법 무장을 개시했다.
전신에 솟구치는 힘.
네프람 교단의 흔적을 찾는 요령은 교황에게 충분히 들었다.
그러니 이제 남은 일은 속도를 내어 그들을 추적하는 것만 남았다.
* * *
“여기군.”
헨리는 교황으로부터 전해 받은 좌표를 기점으로 네프람 교단이 사용한다는 우물 앞에 도착했다.
‘숙청한 이후에도 끊임없이 감시를 하다니, 여러모로 참 지독한 놈들이야.’
학살에 가까운 숙청 작업을 거치고도 혹시 모를 후세의 번영을 방지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교단을 감시한다.
사랑과 평화가 주된 교리인 평화교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방식이었다.
물론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
어딜 가든 그 바닥만의 생리와 사정은 항상 있는 법이니까.
그래서 헨리는 이러한 행위 자체를 단순히 평화교의 어두운 그림자라고 여길 뿐이었다.
우물에는 그 흔한 두레박이나 두레박을 끌어올리기 위한 도르레 따위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얼마나 오랫동안 싹을 틔웠을지 모를 울창한 넝쿨들이 가득 있을 뿐이었다.
헨리는 우물로 다가가 우물 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어둡다.
제아무리 따사로운 햇볕이 드는 오후라 할지라도 깊숙이 파고든 우물의 속살까지 모두 비추기란 어려운 법이었으니까.
그래서 헨리는 우물 속으로 라이트를 생성해 던져 넣었다.
퐁-!
청아한 소리와 함께 우물 속의 어둠을 비춰 주는 광휘 한 줌.
그런데 무언가 좀 이상했다.
‘음?’
우물 속으로 떨어진 라이트는 한동안 우물의 저편을 보여 주는 듯했다.
하지만 어느 구간을 지날 때쯤, 라이트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사라져?’
보통의 우물이라면 고인 물이 보여야 할 테고 마른 우물이라면 흙더미라도 보여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우물은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헨리의 라이트를 집어삼켰다.
다시 어둠이 이는 우물 속.
잠깐의 고민 끝에 헨리는 자신이 제대로 찾아왔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럼 그렇지.’
다른 곳도 아니고 그 너구리 같은 영감이 예의 주시했던 교단이었다.
그러니 평범한 방법으로 교단에 드나들 수 있을 거라곤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입구부터 이런 특수한 장치가 있는 우물이라니, 이런 사실만으로도 헨리를 미소 짓게 만드는 데에는 충분했다.
“그럼 어디, 숙청당한 후엔 어떤 살림을 차리고 사는지 한번 구경이나 해 볼까?”
두려움은 없었다.
왜냐면 헨리는 이 우물 속으로 직접 들어갈 생각이 없었으니까.
헨리는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났다.
그런 다음 전신에 에메랄드 빛 마력을 틔워 낸 다음 두 손을 합장했다.
그리고 짧은 주문과 함께 바닥에 손을 붙이며 말했다.
“리버스 그래비티!”
쿠구구구-!
진동하는 대지.
그리고 곧 대지 전체에 균열이 일더니 땅 속에서 석탑이 솟구치듯 엄청난 크기의 ‘우물’이 지상으로 솟구치기 시작했다.
바닥에서 손을 뗀 후 먼지를 털어 내는 헨리.
헨리는 네프람 교단의 대문을 열지 않았다.
대신 대문 자체를 뽑아 없애 주인이 튀어나오게끔 만들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