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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서클 마법사의 환생-275화 (275/522)

# 275

뜻밖의 조력자 (4)

“후우, 역시……!”

허허벌판이 된 왕궁 앞에서, 헤라리온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수도 칸의 하나뿐인 왕궁.

그것은 샤하트라를 대표하는 상징과도 같은 곳이었다.

그런데 이제 더 이상 그 상징은 쑥대밭이 되어 온데간데없다.

헤라리온은 폐허가 되어 바닥에 널브러진 왕궁의 잔해를 손으로 들어 올렸다.

“…….”

칸의 눈에 다녀오면서 헤라리온은 조부인 헤드자온을 만나고 여러모로 심신을 회복한 듯했다.

그래서 폐허가 된 왕궁의 잔해를 보고 이전과 같은 충격을 받진 않았지만 그래도 씁쓸한 기분이 드는 건 어찌할 수 없었다.

헨리가 물었다.

“전하, 혹시 찾으시는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예, 그리고 찾아야 할 건 물건뿐만이 아닙니다. 왕궁의 잔해 아래에 깔린 수많은 시신들을 찾아 수습해 주어야 하는데…… 왕이란 자가 변변한 장례도 치러 주지 못 할 것을 생각하니 이들을 볼 낯짝이 없습니다.”

왕궁이 궤멸되면서 헤라리온은 가진 것의 대부분을 잃었다.

그 탓에 가벼운 장례조차 해 주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들자 헤라리온은 그들에게 진심으로 미안했다.

그리고 부끄러워했다.

고개 숙인 헤라리온은 자리에서 일어나 폐허가 된 왕궁을 향해 합장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전하?”

낯선 목소리.

헨리는 고개를 돌려 그곳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곳엔 볼살이 움푹 꺼진 웬 노인 한 명이 얼빠진 표정을 하고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인은 마치 꿈을 꾸는 듯한 얼굴이었다.

“자넨……?”

“저, 전하? 살아 계셨습니까?”

노인의 침묵은 헤라리온의 알은체에 비로소 끝났다.

그리고 헤라리온이 알은체를 해 보이자마자 노인은 눈물을 흘리며 헤라리온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흑흑, 전하! 정말, 정말 다행입니다! 정말로……!”

노인은 눈물을 펑펑 쏟으며 오열했다.

노인의 이름은 롬웰.

왕궁에 사막소금을 공급하는 왕궁 전속 소금꾼이었다.

롬웰은 운이 좋았다.

사도 거슬렁거가 왕궁을 휩쓸던 날, 소금을 채집하기 위해 왕궁을 벗어나 있었으니까.

굉음을 들은 롬웰이 뒤늦게 왕궁을 찾았지만 그때는 이미 왕궁이 폐허가 되고 수많은 시체들이 산을 이룬 뒤였다.

헤라리온은 우는 롬웰을 일으켜 세웠다.

롬웰은 온몸이 흙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두 손 가득히 상처가 가득했다.

그의 손에는 조악하게나마 그것을 지혈하기 위해 낡은 붕대들이 군데군데 감겨져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왕궁에 그 사달이 일어난 후, 어떻게든 헤라리온의 시신만큼은 찾아내기 위해 며칠 밤낮을 이곳을 헤집고 다녔기 때문이다.

사정을 전해 들은 헤라리온은 롬웰의 갸륵한 정성에 눈물을 왈칵 쏟아 냈다.

“고맙네, 정말 고마워……!”

피투성이가 된 롬웰의 두 손을 맞잡은 헤라리온은 왕의 체통 따위는 진즉에 잊어버린 채 아이처럼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왕이 눈물을 흘리자 소금꾼 또한 덩달아 울었다.

헨리는 멀리서 두 사람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골든이 죽었을 때가 생각나는군.’

유라시아 제국의 초대 황제, 골든 잭슨 에드워드 1세.

그가 죽었을 때 온 대륙이 울었다.

하지만 2세가 죽었을 땐 그 누구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아비와 자식의 평판이 극과 극을 달렸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미루어 보았을 때 헤라리온은 성공한 왕이었다.

한낱 소금꾼에게까지 진심 어린 충의를 받고 있었으니까.

한참이나 눈물을 흘리던 롬웰이 말했다.

“전하, 전하께 보여 드릴게 있습니다.”

롬웰이 두 사람을 데리고 간 곳에는 약소하게 만들어진 수많은 무덤들이 있었다.

왕궁이 쑥대밭이 된 이후, 롬웰이 시체들을 찾을 때마다 약소하게나마 장례를 치러 주었던 것이다.

“이건…….”

“전하, 그리고 여기에 왕비님과 대비님께서 묻혀 계십니다.”

“……!”

롬웰은 왕비와 대비의 무덤을 따로 마련했다.

가진 것은 없었지만 그래도 왕족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로써 말이다.

두 사람의 무덤 사이에는 무덤 하나가 더 들어갈 수 있을 만한 자리가 있었다.

아무래도 그곳이 바로 헤라리온의 자리인 듯싶었다.

“세, 셀렌……!”

왕비의 무덤을 본 헤라리온은, 다시 한번 자리에서 무너졌다.

그러한 헤라리온을 롬웰이 곁에서 부축했다.

헤라리온은 대성통곡했다.

롬웰을 만나면서 충분히 눈물을 흘린 줄로만 알았건만, 그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헤라리온은 오열했다.

마침내 바닥에 고꾸라지는 헤라리온.

헤라리온의 오열을 본 헨리는 그가 슬픔을 모두 게워 낼 수 있도록 멀찍이 떨어져 있어 주기로 했다.

* * *

가족을 그 누구보다도 끔찍이 아꼈던 왕은, 속에 담아 두었던 울분을 모두 토해 내기까지 너무나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 슬픔은 마치 마르지 않는 우물 같아서 영원할 것만 같았지만, 칸의 눈에 다녀온 헤라리온은 전보단 부쩍 단단해져 있었다.

헤라리온은 슬픔을 모두 게워 내지 않았다.

대신 가슴 속에 울분을 묻어 두고 묻은 울분을 분노와 증오로 승화시켜 다시 한번 이를 갈았다.

헤라리온의 손이 떨렸다.

마치 분노의 화신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헤라리온의 떨림이 멈추었을 때, 곁에서 왕을 지켜보던 소금꾼이 말했다.

“전하, 전하께서 가지신 슬픔은 저 같은 놈 따위가 감히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은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괜찮다. 그러니 그대는 편하게 말하도록 하라.”

“감사합니다, 전하. 다름이 아니오라 왕궁이 궤멸되면서 칸에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칸에 문제가?”

“예. 그것은 다름이 아니옵고 사막의 마물들이 심상찮은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막의 마물들이 갑자기 왜…… 설마!”

롬웰의 이야기에, 헤라리온은 반쯤 뜨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헤라리온은 롬웰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이유는 간단했다.

왕궁이 궤멸된 이후 사막 마물들이 심상찮은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건, 그것은 곧 마물들이 도시를 침공할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뿔싸! 내가 그 생각을 못 했구나!’

대륙에 마물들이 나타나는 곳은 생각보다 극히 드물다.

예컨대, 삼대사선을 제외한 보통의 지역에선 인적이 닿지 않은 아주 깊은 산맥이라든가, 고원, 혹은 샤하트라와 같이 폐쇄된 지역들이 대표적인 곳이었다.

게다가 샤하트라에는 두 종류의 마물들이 서식하는데, 하나는 바로 샤하트라 산맥의 마물이고 나머지 한 종류는 바로 사막에 서식하는 샤하트라 사막의 마물이다.

물론 산맥에 비해 사막 마물들의 개체 수는 극히 적었다.

하지만 산맥에 비해 적을 뿐이지 사막에도 마물들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광활한 사막의 경우, 산맥에 비해 상대적으로 덩치가 크고 생존에 특화된 마물들이 더욱더 득실거렸다.

아무래도 산맥보다 사막이 더 살아남기에는 힘든 법이니까.

‘마물들의 출입을 통제하던 환술 결계가 왕궁에 있었는데 그 왕궁이 궤멸되었으니 마물들이 당장 쳐들어와도 이상하지 않을 터!’

오히려 여태껏 아무런 피해가 없다는 게 기적일 정도였다.

“롬웰, 내가 없는 동안 마물들의 침공이 있었나?”

“아직까진 없었습니다만, 하지만 근래 들어 큰 놈, 작은 놈 할 것 없이 수도의 장벽 근처까지 기웃거리는 게…… 아무래도 결계에 이상이 생겼다는 걸 어렴풋이 눈치챈 것 같습니다.”

“다른 지역들은 어떻게 됐지? 왕궁이 궤멸되기 전에 분명히 서신을 보냈는데?”

“서신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다른 도시에서 보내 준 병력의 일부가 지금 칸을 지키고 있긴 합니다. 하지만 왕궁이 궤멸됐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최소한의 병력을 제외하곤 모두가 철수하였습니다.”

최소한의 병력을 제외한 철수.

어찌 보면 배신감이 들 수도 있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수뇌부가 궤멸되었다.

즉, 대부분의 제사장과 제사종 들의 죽음으로 인해 샤하트라 전체를 관장하던 왕국의 체계와 환술 장치 들에 문제가 생김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 또한 자신들의 도시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런 선택을 했을 게 분명했다.

롬웰의 보고에, 헤라리온은 그제야 잊고 있었던 각종 국정 문제들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부족한 인력도 인력이었지만 샤하트라는 생각보다 수많은 체계와 환술 들로 국민들의 목숨을 보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고 끝에 헤라리온이 말했다.

“헨리 님.”

“예, 전하.”

“염치없지만 한 번만 더 저를 도와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그리고 제게 염치없다는 말씀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흰 이미 한 배를 탄 운명이 아닙니까?”

지금 헤라리온이 기댈 수 있는 건 오직 헨리뿐이었다.

그리고 헨리 또한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흔쾌히 부탁을 수락했다.

“그럼…… 우선은 비람이 필요합니다.”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 같이 많았다.

하지만 그것들을 행하기 전, 헨리는 아직 희망이 남아 있는 샤하트라부터 살려 내기로 했다.

그래야만 헤라리온이 복수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을 테니까.

* * *

으적으적.

뼈와 고깃덩이를 짓이기는 소리.

그것은 무언가의 입에서 나는 소리였다.

샤하트라 산맥에서 내려온 마물들은 영역을 확장해 나갈수록 자신의 힘을 진화시켜 나갔다.

그것은 마물이라면 응당 가지고 있는 생리적인 현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마력을 가진 존재를 잡아먹으면 그 어떤 먹이보다 훌륭한 영양분이 공급되어 진화가 촉진되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산맥에서 최약체라 불리던 마물들은 이제는 어엿한 포식자가 되어 인근에 널린 생명체들의 씨앗을 말려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행보도 샬롯 고원에서 끝나고 말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샬롯 고원까지 영역을 확장해 나가던 포식자들이 고원에 군림하는 단 하나의 포식자에게 패배해 그놈에게 잡아먹혀 버렸기 때문이다.

-크허어어어!

고원의 포식자가 포효했다.

고원의 포식자, 그 괴물의 이름은 아무도 몰랐다.

아니 모르는 게 아니라, 아는 존재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게 그 누구도 이름을 지어 준 적이 없었고, 아직 이름을 지을 만한 존재에게 발견되지도 않았으니까.

놈은 죽은 키메라들의 사체들 사이에서 스스로 태어났다.

놈은 생존 본능과 식욕, 그리고 죽은 키메라들이 남긴 유전자들을 끌어 모아 스스로를 진화시켜 나갔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본능들을 토대로 자신이 살아갈 방향을 스스로 제시했다.

그렇기에 괴물은 먹고 또 먹었다.

자신의 앞길과 허기 채우기를 방해하는 자가 있다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죽였고, 입에 넣고 씹을 수 있는 것이라면 일단 먹고 보았다.

배가 부르면 토했다.

그만큼 녀석의 식욕은 무한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식욕에 근간을 둔 녀석의 힘은 허기를 채우기 위해, 즉 사냥을 위해서라면 상상을 초월하는 어마어마한 힘을 발산했다.

힘.

그 힘 때문에 진화를 거듭해 오던 산맥의 포식자들이 무릎을 꿇고 만 것이다.

으적으적.

-꾸르르륵.

괴물은 이제 막 쓰러뜨린 갑옷충들의 시체를 뜯어먹었다.

그리고 동시에 갑옷충 특유의 단단한 외피를 흡수해 자신의 몸을 변형시켜 나갔다.

-끄윽!

식사를 마친 괴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시에 진화도 끝마쳤다.

배가 고팠다.

포식과 동시에 진화가 이루어지다 보니 엄청난 양의 열량이 소모되었기 때문이다.

킁킁.

녀석은 개처럼 코를 치켜들어 냄새를 맡았다.

녀석의 후각은 이미 짐승의 수십 배를 추월한 만큼 뛰어난 것이었다.

근처에서 살아있는 생명체의 냄새가 났다.

쿵! 쿵! 쿵!

이제 녀석의 덩치는 4 미터 가까이 자라 있었다.

그러나 녀석은 자신의 덩치가 어떻든 간에 위장을 긁어 놓는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 생기가 느껴지는 방향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죽은 키메라 사이에서 태어난 새로운 종류의 키메라.

녀석의 몸에선 희미한 신력까지 느껴졌다.

어쩌면…….

지상 최악의 생명체가 될지도 모를 그 녀석은 아서스와 헨리도 모르게 조용히 스스로를 성장시켜 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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