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1
슬픈 다짐 (3)
헤라리온의 입에서 거절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이에 헨리는 침묵을 유지했다.
물론 헤라리온이 거절할 것이란 건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제아무리 공공의 적을 위해서라지만 목숨처럼 여기는 존재를, 그것도 신을 기만하는 행위를 그 어떤 종교인이 받아들이겠는가?
그러므로 헨리는 별로 충격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침묵은 유지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지금 유지하는 침묵은 일종의 협상의 기술일 뿐이었다.
헨리의 침묵에, 헤라리온이 곧 고개를 숙이며 먼저 사죄를 표했다.
“죄송합니다, 대마법사님. 무턱대고 마법사님의 제안을 거절한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제가 마법사님의 제안을 거절할 수밖에 없는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유.
헤라리온 정도 되는 자가 헨리에게 같잖은 핑계를 댈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헨리는 헤라리온이 말하는 이유를 한 번 들어 보기로 했다.
“이유가 무엇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신의 뜻이 그렇습니다.”
“신의 뜻이요?”
“예, 마법사님의 말씀대로 신력을 가진 자를 상대하기엔 더 강한 신력만큼 좋은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복수하기 이전에 저희는 신을 진심으로 모시는 종교인들입니다. 그런 저희가 개개인의 욕심을 위해 신께서 주신 권능을 이용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행위입니다.”
“양심의 문제인가요?”
“아닙니다. 믿음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거짓된 믿음은 신께서도 모두 알고 계십니다.”
예컨대, 그러한 꼼수는 신에게 적발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였다.
설명을 들은 헨리는 다시금 침묵을 유지하며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으음, 나름대로 머리를 쥐어짜낸 해결책이라고 생각했는데 쓸모가 없게 되어 버렸군요. 그럼 왜 성녀님께선 진즉에 이러한 말씀을 해 주시지 않으셨을까요?”
“성녀님도 감히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녀님께서 모시는 신은 평화와 사랑의 여신, 어쩌면 평화의 여신 아이린께선 마법사님의 사정을 가엾게 여기시고 기회를 주실 지도…….”
신마다 성향이 다르다.
아이린은 라보다 좀 더 자애로울지도 모르니 평화교에 부탁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헤라리온이 하고 싶은 말이었다.
그리고 헨리는 헤라리온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정확히 이해했다.
“아쉽군요.”
말 그대로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야누스는 사막의 밤을 관장하는 신.
그런 신과 대척되는 신위라면 단연코 라뿐인데 라께선 헨리의 사정을 이해해 주지 않는다고 하니 그저 아쉬울 따름이었다.
헨리는 팔짱을 낀 채 다시 고민에 잠겼다.
이렇게 되면 차선책으로 생각했던 두 번째 계책을 실행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때, 팔짱을 끼고 생각을 정리하는 헨리에게 헤라리온이 짐짓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마법사님.”
“예? 아닙니다. 저 또한 한 가지 의견을 말했을 뿐이지 그것이 무조건 성사될 거라곤 생각하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도움이 되어 드리지 못한 건 사실이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말인데…… 마법사님, 저에게 다른 묘책이 있습니다.”
“묘책이요?”
“예, 필요하신 것이 신력과 그에 준하는 신의 권능이라면 굳이 라를 믿지 않아도 그것들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있긴 합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이에 헨리가 끼고 있던 팔짱을 풀고 원탁 앞으로 몸을 끌어당겼다.
“그게 무엇입니까?”
“신물을 소지하는 것입니다.”
“신물이요?”
“그렇습니다.”
신물.
종교에 따라 그것은 성물이라고 불리기도 하며 신물의 정의는 신의 기운이 깃든, 즉 신력이 깃들어 있는 사물을 뜻했다.
예컨대, 헤라리온이 가지고 있는 라의 증표와 야누스의 증표가 그러한 것이었다.
“마법사님, 지금부터 마법사님께 말씀드릴 것은 그 누구에게도 발설한 적이 없는, 오직 샤하트라의 왕에게만 전해져 내려오는 왕가의 비밀입니다.”
“……그러한 비밀을 제게 말씀해 주셔도 괜찮겠습니까?”
“예, 저는 이미 많은 것들을 잃었습니다. 더불어 아서스를 처단할 만한 힘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점잔만 떨고 있는다면 누가 저의 증오를 풀어 줄 것이며, 죽은 이들의 넋을 달래 주겠습니까?”
대답을 늘어놓는 헤라리온의 눈동자에서, 헨리는 여러 가지 감정들을 읽었다.
복수심, 증오, 슬픔, 초연함, 허무함…… 등등.
그 눈빛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자의 눈빛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헨리는 헤라리온이 얼마나 큰 결심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이에 헨리가 가볍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큰 결심을 하셨습니다, 전하. 그리고 전하의 큰 결심에 제가 모두를 대표해서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아닙니다. 고작 이런 것으로 감사 인사를 받기엔 지금까지 받은, 그리고 미래에 받을 마법사님의 은혜가 너무나도 큽니다. 그럼 지금부터 그 누구에게도 발설한 적이 없는 저희 샤하트라 왕가의 비밀에 대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헤라리온이 운을 떼자 헨리는 경청했다.
그리고 헤라리온의 말이 끝날 무렵, 잠자코 헤라리온의 말을 듣던 헨리는 슬며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샤하트라 왕가의 비밀.
그리고 신물.
생각했던 것보다 쉽게 일을 해결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 * *
“이제 몸들은 괜찮나?”
불카누스는 헨리의 요청대로 시청의 집무실에서 손님들을 기다렸다.
여기서 말하는 손님들은, 헤라리온과의 독대를 위해 먼저 회장을 빠져나온 회의자들을 뜻했다.
회의에는 반과 맥도웰, 바할드, 그리고 알렌과 발락 정도만이 참여했는데, 그래서 불카누스를 찾아온 이들도 다섯이 전부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워커나 헥터, 로난이 죽은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모두 살아 있었고, 간밤에 성녀의 축복에 따라 컨디션을 최고조로 회복한 상태였다.
하지만 단순히 헨리가 주최하는 회의에 참석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해 각자 배정받은 숙소에서 대기하고 있을 뿐이었다.
“성녀님 덕분에 죽다 살아나긴 했습니다만…… 근데 헨리가 이곳으로 저흴 보낸 까닭을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불카누스의 물음에 먼저 답한 것은 맥도웰이었다.
그래도 몸이 나았다고, 간밤에 죽어 가던 때와는 달리 부쩍 활기를 되찾은 모양새였다.
이에 불카누스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허허, 무슈 최고의 대장장이를 찾아가라고 했으면 목적이야 뻔하지 않겠는가? 자네들, 지난번의 전투에서 가진 무구의 전부를 잃었다고 들었네만.”
수치스러웠지만 사실이었다.
사도들은 맥도웰과 바할드, 그리고 알렌의 갑옷을 찢고 그들의 살갗에 메시지를 남겼으니까.
또한 갑옷이 파괴되었는데 무기라고 성할 이유는 없었다.
불카누스의 물음에 세 사람이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낮추었다.
이에 함께 온 반이 말했다.
“저는 운 좋게도 화를 피해 괜찮습니다. 그러니 무구를 새로 제작해 주시려는 것이라면 이 친구들 것만 해 주시면 됩니다.”
“자네 이름이 아마 반이었던가?”
“그렇습니다.”
“그럼 말이 나온 김에 자네가 가진 무구들부터 한번 점검해 봐도 괜찮겠는가? 만약 자네 말대로 자네가 가진 무구들이 멀쩡하다면 자네는 무구들을 새로 맞출 필요가 없겠지.”
“알겠습니다.”
무슈 최고 대장장이의 요청에 반은 흔쾌히 수락했다.
이윽고 반은 허리에 찬 아공간 주머니에서 검과 갑옷들을 꺼내 불카누스에게 내밀었다.
반은 평소에 자신의 장비들을 스스로 손질해 왔다.
그도 그럴 것이 장비의 손질이야 말로 무의 첫걸음이라고 모든 기사들은 배워 왔기 때문이다.
이에 반의 검과 갑옷을 받아든 불카누스가 반의 무구들을 찬찬히 살폈다.
마치 감정사가 보석을 감정하듯 매우 섬세한 과정이었다.
이윽고 무구의 점검을 마친 불카누스가 말했다.
“좋은 검과 갑옷들을 가졌군. 하지만 너무 낡았어. 수백 번이나 보수를 하고 손질을 하긴 했지만 갑옷의 이음새도 그렇고 너무 많은 것들이 구식이야.”
비평과 칭찬이 섞인 감상평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반이 착용하고 있던 무구들은 최소가 수십 년은 된 것들이었으니까.
그리고 그것은 곧 반이 자신의 무구에 대해 가지는 애정의 증거이기도 했다.
불카누스가 말했다.
“반.”
“예, 불카누스 님.”
“자네는 훌륭한 무구들을 가졌네. 하지만 말 그대로 훌륭한 무구일 뿐이지, 아주 뛰어난 무구들은 아니야.”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무구들이 너무 오래되었네. 이것은 내 자만도 아니고 이것들을 만든 이에 대한 흉도 아니야. 단지 무구 곳곳에 녹아든 세월의 흔적들을 보니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지. 자네가 이것들에게 가진 애정 때문에 자네는 분명히 더 훌륭한 장비를 가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고 있지 않은가?”
지극히 대장장이다운 평가였다.
장비에 애정을 갖는 것도 좋았지만 때때로 그 애정은 미련이 되기도 하는 법이니까.
이에 불카누스가 뒷말을 덧붙였다.
“어떤가? 자네가 내게 기회만 준다면 내 불카누스의 이름을 걸고 자네에게 딱 어울리는 세상에 하나뿐인 무구들을 만들어 주겠네.”
불카누스는 대장장이가 손님에게 취할 수 있는 최고의 영업 멘트를 덧붙였다.
그리고 이것은 헨리가 불카누스에게 부탁한 것이기도 했다.
얼마가 됐든, 어떤 재료가 필요하든 간에 자신의 동료들에게 최고의 무구들을 선물할 수만 있다면 그 어떤 대가도 기꺼이 지불하겠다고 말이다.
참으로 대장장이의 혼을 자극하는 말이었다.
그래서 불카누스는 헨리의 요구에 맞춰 부탁받은 손님들에게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려고 했다.
불카누스의 제안에 반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애검, ‘글루아’.
앙켈만이 해상왕국 시절일 때 만들었던 검으로, 수십 년을 반의 손아귀에서 춤을 췄다.
그리고 글루아는 그동안 숱한 대장장이들과 반의 손을 거쳐 어떻게든 한 번 더 휘둘러지기 위해 날을 갈고 닦았다.
하지만 그래 봤자 글루아는 평범한 검에 불과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글루아를 만들었던 앙켈만의 장인은 무슈에 널린 보통의 장인보다도 못한 수준이었으니까.
하지만 반은 글루아가 자신이 정한 평생의 검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단 한 번도 불만을 품지 않고 글루아를 애정을 담아 갈고 닦아 온 것이다.
‘명장은 검을 탓하지 않는다.’라는 생각으로 말이다.
그래서 반은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앙켈만의 흔적인 글루아.
이것마저 포기한다면 이제 정말로 반에게 남는 앙켈만의 흔적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한참의 고민 끝에 반이 대답했다.
“……검은 됐습니다. 대신 방어구의 제작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알겠네.”
반의 뜻을 읽은 불카누스는 더 이상 권유하지 않았다.
대신 반에게 그한테 세상에서 가장 잘 어울리는 갑옷을 선물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반의 대답에 잠자코 대화를 듣던 발락이 말했다.
“그럼 나도 새 방어구만 부탁하지. 나한테 무기는 이 녀석이면 충분하거든.”
두스카인을 지켰던 발락 역시 아서스가 보낸 사도와 마주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과거에 벌어진 몇 차례의 전투에서 뿔투구를 비롯한 핏빛 갑옷의 대부분을 잃었다.
그래서 불카누스에게 방어구의 제작만을 부탁했다.
두 사람의 주문을 접수받은 불카누스가 남은 세 사람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이제 자네들 차례일세.”
불카누스의 물음에, 맥도웰과 바할드, 그리고 알렌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저마다 원하는 것들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회복과 장비의 보충.
그것은 아서스가 그들에게 준 한 달이라는 시간 속에서 복수를 향한 첫걸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