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4
지각의 대가 (10)
“전하! 크으윽!”
심판의 창은 한 번 떨어진 곳에는 다시 떨어지지 않았다.
거슬렁거의 이번 공격은, 순전히 쥐새끼처럼 숨어 있는 헤라리온을 잡기 위한 칼춤이었으니까.
거슬렁거의 작전은 훌륭하게 먹혀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쏘아진 심판의 창에 비람의 팔뚝이 꿰뚫려 너덜거리게 되었고 그 탓에 더 이상 환술 결계를 유지할 수가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비람의 부상으로 결국 환술 결계가 해제되었다.
그러나 결계가 해제되기도 전에 숱한 비명이 사위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결계가 해제될 때쯤, 자신의 두 다리로 땅을 짚고 서 있는 이는 손에 꼽을 정도로 극히 적었다.
“거기였나?”
대부분의 이들이 죽거나 빈사 상태가 되었다.
쉰 명에 달하던 샤하트라의 어린 마법사들을 비롯해 제사장들과 시녀, 그리고 근위병들까지.
심지어 왕비와 대비까지 거슬렁거의 창을 피하지 못했다.
“전하! 전하! 정신 차리십시오!”
비람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고작해야 창날에 팔뚝이 꿰뚫린 정도였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비교적 거동이 자유로운 비람은 왕비와 함께 등짝이 꿰뚫린 자신의 왕에게 다가가 그가 잠들지 못하도록 흔들어 깨웠다.
“비……람…….”
상처가 깊었다.
헤라리온의 목구멍에 핏물이 들끓었다.
“전하! 전하! 정신 차리십시오!”
이대로 헤라리온이 죽게 된다면 칸 왕가의 명맥도 이대로 끝나고 만다.
그도 그럴 것이 헤라리온에겐 아직 자식이 없었으니까.
헤라리온은 지독한 추위를 느꼈다.
분명히 뙤약볕이 내리쬐는 샤하트라의 밝은 오후였음에도 말이다.
‘이렇게 끝이라니…….’
헤라리온은 죽은 셀렌의 시체를 꼬옥 끌어안았다.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를, 간신히 쥐이는 손아귀에 집중했다.
주변의 소리가 점점 더 희미하게 들려왔다.
자신을 흔들어 깨우는 비람의 목소리도, 귓가에 이는 사막의 바람 소리도 점점 더 희미해져만 갔다.
허무했다.
이대로 죽음을 맞이하면 돌아가신 선조들과 어떻게 얼굴을 맞대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시시하군.”
거슬렁거는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러고는 들판의 개미떼를 보듯 한없이 차갑고 무미건조한 시선으로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전하, 전하아!”
비람은 지척까지 다가온 거슬렁거를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 것보다는 지금이라도 당장 숨이 끊어질 듯한 전하의 위독함이 더 중했으니까.
이에 거슬렁거는 불쾌함을 느꼈다.
제아무리 슬플지언정 지척까지 다가온 자신에게 일말의 관심도 주지 않으니 무시당하는 느낌이 들어 괘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슬렁거는 누구처럼 무력으로 자신의 감정을 금방 표현하지 않았다.
드라칸에게 전수받은 지식 중에는 당장의 무력보다 몇 마디의 말이 더 큰 고통을 줄 수 있다는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거슬렁거가 말했다.
“한심하군.”
멈칫.
거슬렁거의 말에 비람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이것이 정녕 너희들이 모시는 신의 힘인가?”
거슬렁거는 너희들이 모시는 신, 즉 라를 언급했다.
그러고는 종교인들에겐 결코 해선 안 될 신성모독을 스스럼없이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것이 저들의 자존심에 가장 큰 흠집을 낼 수 있는 어휘임을 알기 때문이다.
이에 비람의 손끝이 미약하게 떨었다.
그러나 거슬렁거는 신성모독을 멈추지 않았다.
“내가 모시는 유일신, 아서스 님께선 일부러 나에게 이곳을 맡기셨지. 이곳에는 세상에 존재해선 안 될 쓰레기 신과 그 신을 믿는 멍청이들이 있기에.”
“네놈!”
지독한 신성모독에 비람은 더 이상 참지 못했다.
그리고 고개를 홱 돌리고서 시뻘개진 눈과 함께 거슬렁거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거슬렁거가 말했다.
“그대가 바로 대제사장, 비람이로군.”
거슬렁거는 비람의 몸으로부터 막대한 신력을 느꼈다.
그 신력은 헤라리온과 비견될 만큼 아주 거대한 것이었다.
거슬렸다.
단순히 신력의 농도만 놓고 보자면 어쩌면 자신보다 더 큰 신력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거슬렁거의 입꼬리가 잔인하게 치솟았다.
“걱정하지 마라, 비람. 라의 신도들은 내가 다시 잘 가르쳐 위대하신 아서스 님의 신도로 만들어 놓을 테니.”
“네이노오옴!”
분노가 한계점을 뛰어넘은 비람은 남은 한 손을 들어 올려 거슬렁거의 목을 쥐었다.
그리고 아흔의 노인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완력으로 거슬렁거의 목을 졸랐다.
그러나 팔 한 짝을 날려먹은 아흔의 노인이 낼 수 있는 완력이란, 어린아이만큼이나 나약한 것이었다.
게다가 압도적으로 거대한 신장 차이 때문에, 비람의 팔은 간신히 거슬렁거의 목에 닿아 있을 뿐이었다.
거슬렁거는 그의 모든 것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그런데 그 순간.
“큭!”
갑작스레 강하게 죄이는 목.
눈앞에는 분명히 비람의 손밖에 없는데 갑자기 어디서 이런 완력이 생겨난 것일까?
그러나 거슬렁거는 곧 완력의 비밀을 알아챌 수가 있었다.
‘그런 거였나?’
완력의 정체는 환술이었다.
비람은 자신이 가진 마지막 힘을 쥐어짜 내 분노와 함께 거슬렁거의 정신에 자신의 환술을 우겨넣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비람의 신력이 거슬렁거보다 훨씬 더 뛰어나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거슬렁거 또한 아서스에게 신력을 나눔 받은 사도. 동시에 죽음의 문턱을 몇 번이나 넘나든 진화된 키메라였다.
거슬렁거는 머릿속에 신력을 집결시켰다.
제아무리 거대한 신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신력간의 싸움은 단순히 가진 신력의 양이 많고 적음으로 겨루는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다 죽어가는 노인네가 내뿜는 신력 따위는 그렇게 위협적인 것도 아니었다.
완력의 비밀이 환술임을 알고 나자 목 언저리의 고통이 천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비람의 환술이 모두 사라졌을 때, 거슬렁거는 비람을 한껏 비웃는 눈빛으로 다시금 그를 내려다보았다.
“네놈……!”
그러나 비람은 손아귀의 힘을 조금도 줄이지 않았다.
도리어 손가락이 부러질 듯이 거슬렁거의 목을 조였다.
이에 거슬렁거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추하군.”
장단은 여기까지면 충분했다.
거슬렁거는 눈앞의 추한 노인을 치우기 위해 한쪽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힘껏 아래로 내리그어 비람의 목을 베어 내기 위해 손날에 힘을 주었다.
“먼저 가서 주군을 보필할 준비나 해 둬라, 대제사장.”
“네이노오옴!”
비람의 고함과 함께, 거슬렁거의 손날이 휘둘렸다.
푸슈슉!
허공에 흩뿌려지는 핏물.
큼지막한 살덩이가 핏물과 함께 공중으로 치솟았다가 모래더미 위로 떨어졌다.
핏물과 함께 모래에 절여진 살덩이.
그것은 거슬렁거의 것이었다.
“……!”
멀쩡하게 붙어 있는 비람의 목, 그와는 상반된 처지로 바닥을 나뒹구는 자신의 손.
거슬렁거의 눈이 큼지막하게 확장되었다.
“말은 바로 하지. 먼저 가서 길을 닦아야 할 사람은 비람이 아니라 네놈인 것 같은데?”
“……!”
거슬렁거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비람의 시선 또한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틀어졌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헨리였다.
“대마법사님……!”
헨리를 발견한 비람은 그제야 긴장이 와르르 무너지며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고 비람이 자리에 주저앉은 순간 헨리가 재빨리 마법을 시전했다.
“바람 거인의 주먹.”
텅!
고위급 바람 마법.
이에 거슬렁거의 육신이 저만치 날아가 위태로운 상태의 건물과 함께 무너졌다.
멀리 날아가 건물의 잔해에 고꾸라지는 거슬렁거.
커다란 덩치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망신살이었다.
“괜찮으십니까, 대제사장님?”
“헤, 헨리 님……!”
헨리는 자리에 주저앉은 비람의 상태를 살폈다.
그리고 비람은 그런 헨리의 등장에 그만 참아 왔던 눈물을 왈칵 터뜨리며 자신의 슬픔을 고했다.
“전하께서, 전하께서……!”
비람의 제보에 헨리는 고개를 돌려 근처에 쓰러져 있는 헤라리온을 보았다.
그리고 그와 포개져 있는 셀렌까지도.
이에 헨리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헤라리온을 살폈다.
헤라리온의 눈은 감겨 있었다.
그의 몸에는 정말 많은 양의 피가 흘러 바닥이 축축해질 정도였다.
‘설마?’
헨리는 서둘러 헤라리온의 상태를 살폈다.
그리고 헨리는, 아직 헤라리온이 죽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살아 있어!’
셀렌은 죽었다.
하지만 헤라리온은 살아 있다, 그리고 비람까지도.
이에 헨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무던한 목소리로 말했다.
“클레버.”
-예, 마스터.
“지금 당장 이곳의 생존자 전부를 체스트 속으로 옮겨라. 그리고 책임지고 그들을 보살펴라.”
-알겠습니다.
파아앗-!
헨리의 명령에 클레버가 능력을 개방시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헨리는 외쳤다.
“착검, 착갑.”
지이잉-!
전신을 감싸기 시작하는 헨리의 보구들.
헨리의 몸에 보구들이 둘리는 순간, 헨리의 주위로 빛의 파도가 몰아쳤다.
클레버의 능력이었다.
이윽고 빛의 파도가 부서진 왕궁을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가자, 헤라리온과 비람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콰득, 콰드득!
빛의 파도가 사라진 직후, 부서진 건물더미 속에 파묻혀 있던 거슬렁거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는 몹시 노한 음성으로 말했다.
“재미있는 짓을 하는군.”
우드득, 우드득!
목 관절을 꺾으며 무표정한 얼굴로 헨리를 쳐다보는 거슬렁거.
거슬렁거의 손은 어느새 재생되어 있었다.
그 손을 본 헨리가 비릿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너야말로 재미있는 놈이네. 그 손은…… 뭐, 트롤이냐?”
“네놈이 바로 헨리 모리스인가 보군. 신에게 감사드리지, 다른 사도들보다 내가 먼저 너를 죽일 수 있음을.”
“감사가 아니라 원망이겠지.”
츠팟!
대화가 끝난 직후, 잔해 더미 속의 거슬렁거가 사라졌다.
이에 헨리는 바닥에 원을 그리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츠캉!
헨리의 목덜미를 향해 거슬렁거의 손날이 정확히 날아들었다.
그러나 헨리는 기본적인 자세로 거슬렁거의 공격을 막았다.
그리고 곧장 바닥에 발을 굴렀다.
우웅!
리버스 그래비티.
단발성의 역중력 마법이 시전됐다.
“……!”
거슬렁거의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며 강제로 공중제비를 돌았다.
헨리는 허리 축을 회전시켜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동시에 남은 한손에 독금으로 이루어진 단검을 소환해 녀석의 허벅지에 꽂아 넣었다.
검 끝에 묵직한 살덩이의 감각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것은 살덩이라기보다는 아주 단단한 종이뭉치를 찌르는 느낌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헨리의 목적은 녀석의 살갗을 찢는 게 아니라 자신의 혈독을 놈의 몸속에 집어넣는 것이었으니까.
헨리는 검 끝으로 살갗을 베어 내자마자 허공에 검을 한 바퀴 돌려 검을 역수로 쥐었다.
‘샤프.’
검극을 더욱 더 예리하게 만들어 자세를 바로 잡으려는 거슬렁거의 손등에 그것을 꽂아 넣었다.
“네놈!”
손바닥이 관통된 거슬렁거는 허공에서 몸을 비틀어 헨리에게 주먹을 내리꽂으려고 했다.
그러나 녀석은 허공에 있었고, 헨리는 땅에 두 발을 붙이고 있었다.
그러니 움직임이 더 빠른 것은 당연히 헨리 쪽이었다.
헨리는 쉬지 않았다.
헨리는 다시 발을 구르며 역중력 마법을 시전했다.
우웅!
3서클 수준의 역중력 마법, 리버스 그래비티.
원래는 땅으로 떨어지는 것의 충격을 완화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만, 헨리는 리버스 그래비티를 자신의 검술에 섞어 하나의 검무로 엮어 냈다.
이에 거슬렁거는 다시 중심을 잃고, 다리가 하늘을 향해 치솟을 수밖에 없었다.
거슬렁거는 손짓으로 심판의 창을 소환하려 했다.
그러나 헨리의 손가락 튕기기처럼 손짓을 하려할 때쯤, 손끝의 감각이 마비되어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무슨……!’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임이 이루어지지 않자 거슬렁거는 당황했다.
그리고 잔뜩 당황한 표정을 지을 때쯤, 그는 허공의 여느 지점에서 헨리와 눈을 마주쳤다.
“아직이다.”
서슬 퍼런 경고.
헨리의 검무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콰앙!
거슬렁거를 전보다 훨씬 더 높이 띄워 낸 헨리는, 이윽고 한쪽 다리를 널찍이 벌리며 바닥에 오른쪽 다리를 고정시켰다.
그러자 헨리의 발아래에 거미줄 같은 균열이 일어나며 에메랄드 빛 아우라가 전신을 휘감았다.
마법 무장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헨리는 콜소드를 왼쪽 허리로 가져다 댄 후, 활시위를 당기는 팔뚝처럼 몸을 잔뜩 웅크렸다.
“끝이다.”
서걱!
잔뜩 당겨진 쇠심줄이 끊긴 것처럼, 헨리의 콜소드가 순식간에 허공을 갈랐다.
그리고 헨리의 콜소드가 궤적을 그린 순간, 칼끝으로부터 엄청난 검풍이 거슬렁거의 등을 관통했다.
후웅!
짧은, 하지만 몹시 큰 소리가 났다.
그리고 검풍이 왕궁의 끝자락에 다다를 무렵, 검풍의 끝에서부터 희미한 에메랄드 빛 오러가 부서지는 파도처럼 넓게 산개하며 허공에서 흩어졌다.
발도술.
그것은 맥도웰의 푸른 초승달을 흉내 낸, 헨리만의 초고속 발도술이었다.
쩌적- 쩌저적-!
명치를 기점으로, 거슬렁거의 상체와 하체가 두 쪽으로 잘려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