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2
지각의 대가 (8)
“케, 케일 경!”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헤라리온이 소리를 질렀다.
이에 코룬의 육체를 뒤집어 쓴 헥터가 근처에서 당황해하던 병사의 칼날을 뽑아 들어 주위를 경계했고 소집된 무장들 또한 사위를 경계했다.
이이잉-!
“위!”
같은 소리가 또다시 귓전을 때렸다.
이에 헥터가 몸을 날려 헤라리온을 덮쳤다.
콰지직!
헤라리온의 자리에 떨어진 길쭉한 창.
헥터는 분노에 찬 눈빛으로 헤라리온의 자리에 떨어진 창을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창이나 화살 따위가 아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분석할 겨를도 없이 헥터는 얼른 사태 수습을 위한 소리를 내질렀다.
“다들 건물 안으로 피해!”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헥터의 목소리.
헥터의 판단은 현명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저 정체불명의 무기는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었으니까.
이이잉-!
기분 나쁜 이명이 다시 귓전을 때렸다.
헥터는 헤라리온의 뒷덜미를 붙잡고 서둘러 야외 회의장 근처에 붙은 튼튼한 지붕 밑으로 내던졌다.
그리고 헤라리온을 지붕 밑으로 내던지자마자 하늘로부터 무수한 양의 가시들이 쏟아져 내렸다.
콰직! 콰직! 콰드드득!
“커헉!”
“컥!”
“커억!”
그리고 가시에 관통당한 이들 모두는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케일이 그랬던 것처럼 선 채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
살아남은 이들은 헤라리온과 헥터, 그리고 이름 모를 무장 몇 명뿐이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굳이 이 상황에서 잘못을 꼽으라면 헤라리온이 소집령을 내린 곳이 야외 회의장이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적진의 한복판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전쟁터 또한 아니었다.
이곳은 헤라리온이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자국 왕궁의 내부’였다.
그런데 그런 곳에서 이렇게 공개적인 방법으로 암살을 펼치다니?
그 경험 많은 헥터마저 새파랗게 질릴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헥터의 지시대로 맞은편 지붕 아래로 피신한 몇 명의 무장들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하고서 헤라리온과 헥터를 바라보았다.
“저, 전하! 전하께서도 혹시 들리십니까?”
“들리다니 무얼?”
“이, 이 목소리 말입니다! 이 목소리가, 아, 아 안돼……!”
쿠드드득!
“……!”
무장들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들을 하고서 헤라리온에게 알 수 없는 소리들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곧 그 헛소리의 자초지종을 들을 새도 없이 천장으로부터 날카로운 무엇인가가 떨어져 무장들을 꼬챙이 꿰듯 관통해 버렸다.
“이, 이런!”
그것은 좀 전에 보았던 하늘에서 떨어진 것들이었다.
단단한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지붕 아래라고 안심했지만, 그것은 순전히 헥터만의 잘못된 착각이었다.
새하얗고 길쭉한, 그리고 회오리치듯 배배 꼬여 있는 창은, 아니 창이라기엔 그 양식 자체가 어긋난 그것은 창이 아니라 오히려 아주아주 길쭉한 가시에 더 가까운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바늘이 천 자락을 관통하듯 너무나도 쉽게 천장을 뚫고서 사람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다시 긴박하게 바뀌었다.
이에 넋이 나간 헤라리온을, 헥터는 헤라리온의 멱살을 쥐고서 숨 가쁘게 달리기 시작했다.
콰직! 콰직! 콰지직!
가시는 하늘에서 끊임없이 떨어졌다.
떨어진 가시들은 무엇 하나 가릴 것 없이 왕궁 내부에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가시는 마치 도망치는 헤라리온과 헥터를 뒤쫓는 듯했다.
헥터는 헤라리온을 데리고 야외 회장보다 훨씬 두꺼운 천장의 실내 아래로 몸을 던졌다.
콰드드득!
그러자 가시들도 이 지붕만큼은 뚫지 못하겠는지 두꺼운 실내의 천장을 고슴도치로 만드는 것에서 그쳤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헥터는 화가 났다.
분명히 안전한 줄로만 알았던 왕궁에서 영문도 모른 채 눈앞에서 끔찍한 대학살이 일어났다.
헤라리온은 여전히 큰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해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헥터는 그런 헤라리온의 뺨을 수차례나 때리면서 헤라리온의 정신을 흔들어 일깨웠다.
“정신 차려! 네가 지금 넋이 나가면 어쩌자는 거야!”
“하, 하지만……!”
“정신 차려라, 헤라리온! 너는 왕이다! 네가 넋을 놓으면 모두가 죽어!”
헥터의 호통은 꽤 큰 효과를 발휘했다.
덕분에 뒤늦게나마 정신을 차린 헤라리온은 그제야 급박하게 돌아가는 사태 속으로 이성을 밀어 넣었다.
‘눈! 사막의 눈이 필요하다!’
정신을 차린 헤라리온은 뒤늦게나마 사고(思考)했다.
어디서 누가 쏘아 보내는 공격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목표가 왕궁이라는 것이고, 헤라리온의 예감이 틀리지 않다면 놈은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헤라리온은 사막 전체를 관장할 수 있는 힘, ‘사막의 눈’을 발동시켰다.
화아악!
라의 힘이 전신에 퍼졌다.
그동안 숱한 전투를 거쳐 오면서, 헤라리온은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성장했다.
그러므로 과거보다 훨씬 더 신력이 성장한 상태.
“지금 뭐 하는 거야?”
“쉿!”
그러나 헥터는 헤라리온이 지금 무슨 행동을 취하고 있는 건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헤라리온에게 지금 하고 있는 행위에 대해 물으려던 찰나, 헤라리온이 검지를 들어 올려 헥터의 입을 막았다.
정신이 집중되고 헤라리온의 머릿속에 샤하트라 사막 전체가 펼쳐졌다.
그리고 수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수상한 인영이 포착됐다.
정신을 더 집중했다.
집중된 정신은 흐릿한 인영을 더욱 더 세밀하게 묘사해 주었다.
그것은 사람이었다.
그는 처음 보는 형식의, 어떠한 집단의 제복을 입고 있었고 여유롭게 팔짱까지 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안녕?”
남자는 고개를 돌려, 헤라리온과 눈을 마주치며 인사를 건넸다.
“……!”
이에 헤라리온은 너무 놀란 나머지 사막의 눈을 해제하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
그런 헤라리온을, 헥터는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그러나 쿵쾅거리는 심장과 전신에 돋는 소름을 헤라리온은 무어라 표현할 수가 없었다.
“……날 봤어?”
“뭐?”
“나랑 눈이 마주쳤다고……?”
남자의 시선은 정확히 자신의 눈을 향해 있었다.
마치 옆에 있는 사람이 불러 그에 응하듯이 말이다.
이는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헤라리온이 사용한 힘은 라의 권능으로 불리우는 신의 권능이었다.
신의 권능을 통해 지켜본 것을 대체 무슨 수로 알아차리고 자신과 눈을 마주친다는 것인가?
헤라리온은 여태껏 단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기이한 상황에, 자신들의 신하들이 죽어 나갔을 때보다 더한 겁을 집어먹었다.
“뭐야, 무슨 일이야? 너 왜 그래?”
그리고 그러한 사정을, 헥터가 알 리가 없었다.
헥터의 눈에 비친 헤라리온은 그저 눈을 감았다가 뗀 것뿐이었으니까.
“헤라리온!”
결국 참다못한 헥터가 소리를 질렀다.
이에 헤라리온이 다시 겁에 질린 목소리로 헥터에게 말했다.
“누, 눈을 마주쳤습니다.”
“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알아듣게 설명해.”
“수도 바깥에 누가 있습니다. 그놈이 지금 이리로 우리들을 공격하고 있는 건데, 그놈과 방금 눈이 마주쳤습니다……!”
“뭐?”
헥터는 헤라리온의 겁에 질린 말들로부터 헤라리온이 신력을 사용하고 있었음을 유추했다.
그리고 자신들을 공격하고 있는 존재가 수도 바깥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급박한 상황에서 헥터의 머리는 더욱더 빠르게 회전했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현명하게 타개할 수 있을지, 헥터의 머리는 어떻게든 대책을 강구해 내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헤라리온.”
“예, 예?”
“좀 전에 그거, 다시 할 수 있지?”
“조, 좀 전의 그것이라면……?”
“눈 마주쳤다며.”
“아…… 아!”
헥터의 의도를 알아챈 헤라리온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떨리는 손을, 헤라리온은 주먹을 꽉 쥐었다.
이렇게라도 해야 떨림이 줄어들 것만 같아서였다.
그리고 헥터의 의도를 이해한 헤라리온은 다시 눈을 감고 사막의 눈을 사용했다.
머릿속에 그려지는 샤하트라 전체.
그러나 좀 전에 보았던 남자는 그 자리에 없었다.
헤라리온은 신력을 집중했다.
집중하고 또 집중해서 사라진 남자의 이질적인 기운을 추적하려고 애를 썼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작스레 코앞에서 그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졌다.
“날 찾는 건가?”
“이런!”
후웅!
허공을 가르는 파공음.
남자는 헥터와 헤라리온의 눈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일부러 말을 건넸다.
이에 헥터가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렀으나 남자는 가볍게 뒷걸음질 치는 것으로 헥터의 일격을 사뿐히 회피했다.
“네놈이군, 아서스가 보낸 선물이란 게!”
기습에 실패한 헥터는 분노한 얼굴을 하고서 눈앞의 남자에게 날카로운 살기를 표출했다.
이에 남자가 대수롭잖다는 듯이 대꾸했다.
“그렇다. 내가 바로 아서스 님이 너희들에게 보낸 선물이다. 내 이름은 거슬렁거. 이곳에 아서스 님의 가르침을 전파하러 온 아서스 님의 위대한 아홉 사도 중에 한 명이다.”
‘사도!’
사도라는 말에 헤라리온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
사도.
그것은 오직 신만이 가질 수 있는 존재들로, 신의 율법을 전파하기 위해 신이 직접 선택한 신성한 선지자들을 뜻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아서스 그놈이 기어코!’
다른 사람들이라면 모르겠지만, 헤라리온은 또렷이 느낄 수 있었다.
거슬렁거의 전신으로부터 느껴지는 야누스의 힘을 말이다.
그것은 죽음에 관한 힘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진즉에 죽었어야 할 존재가 야누스의 힘을 빌려 죽지 않고 끝끝내 살아남아 새로운 존재로 거듭난, 아주 복잡한 사정을 가진 힘이었다.
이에 헥터가 전신에 오러를 씌워 내며 말했다.
“사도인지 나발인지는 모르겠고, 네놈이 행한 죗값은 똑똑히 치르게 해 주마.”
“죄? 나에게 대체 무슨 죄가 있다는 거지? 나에게 명령을 내리고 나를 통제할 수 있는 분들은 오직 아서스 님과 드라칸 님, 두 분뿐이다. 그리고 난 그분들의 명령을 어기지 않았는데 대체 무슨 명목으로 나에게 죗값을 물리겠다는 건지 도통 모르겠군.”
“미친 새끼.”
사도의 궤변에 헥터는 짧게 욕설을 뱉었다.
그리고 앞으로 한 발자국 내뻗었다.
쾅!
그러자 큼지막한 소리가 나며 헥터의 발아래에 거미줄 같은 균열이 일었다.
그리고 동시에 헥터의 전신으로부터 푸르른 오러로 이루어진 거대한 갑옷이 소환되었다.
‘처음부터 전력을 다한다!’
그것의 정체는 다름 아닌 왕국의 수호자.
헥터가 발락을 상대할 때 사용했던 헥터의 단 하나뿐인 결전기였다.
그리고 헥터의 결전기를 본 거슬렁거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우매한 놈 같으니.”
거슬렁거가 허공에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거슬렁거의 주위에 많은 수의 새하얀 가시들이, 빈 형상에 색채를 채우듯 허공에 모습을 드러냈다.
거슬렁거는 그것을 심판의 창이라고 불렀다.
거슬렁거가 말했다.
“드라칸 님께서 말씀하시길, 야만인들을 가르치려면 어느 정도의 폭력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지.”
이이잉-!
거슬렁거의 말에 심판의 창들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최소가 수백여 개였다.
그리고 그러한 숫자의 창들이 거세게 회전하며 위협적인 회전음을 냈다.
그러나 헥터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헥터가 말했다.
“헤라리온.”
“예, 예!”
“도망쳐라. 그리고 헨리에게 도움을 요청해.”
“헥터 님……!”
“어서!”
콰앙!
말을 마친 헥터는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딛으며 거센 기운과 함께 거슬렁거에게 돌진했다.
그러나 거슬렁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저 짧게 고개를 까딱거릴 뿐이었다.
이이잉!
왕국의 수호자와 심판의 창.
창과 방패가 곧 격렬하게 맞부딪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