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7
지각의 대가 (3)
“그게 무슨 개 같은 소리야?”
녹초가 되어 바닥에 쓰러져 있던 반은 헨리의 말에 미간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아이의 거짓말을 추궁하는 어른 같은 표정을 짓고서 다시 한번 헨리에게 물었다.
“말해 봐, 헨리! 그게 무슨 소리냐니까?”
“좀 전에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저희가 이곳에서 키메라와 싸우는 동안 아서스가 앙켈만에 무슨 수를 쓴 것 같습니다.”
“근데 그 수 때문에 앙켈만은 지금 쑥대밭이 됐고?”
“예.”
“이런 씨……!”
좀비와 아서스, 그리고 도시 전체의 냉각.
놀란 것은 반뿐만이 아니었다.
헨리의 말을 듣고 있던 일행 모두가 놀란 토끼 눈을 하고서 반쯤 입을 벌렸다.
“으으……! 으아아아아!”
그리고 반은 끝끝내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선 채로 고함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분노에 찬 고함은 반의 핏대를 잔뜩 끌어올렸다.
“으아아아! 으아아아! 으아악!”
고함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이윽고 반은 허리에 찬 검을 휘둘렀다.
고함으로는 차마 삭힐 수 없는 분노를, 이렇게라도 해야 조금이나마 진정이 될 것 같아서였다.
반이 휘두르는 검으로부터 살의가 담긴 오러가 쭉쭉 뿜어져 나갔다.
그렇게 뻗어 나간 오러들은 금방 검격이 되어 샬롯 고원 가득히 쌓여 있는 키메라 시체들을 분쇄기처럼 갈아 내기 시작했다.
그 누구도 반을 말리지 않았다.
대신 반만큼이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진 맥도웰이 굳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놈이 말한 선물이란 게 이런 거였다니…….”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선물이었다.
그런데 그때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 눈치를 보던 헤라리온이 성녀 아이리네의 곁으로 다가가 조그마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저…… 성녀님?”
헤라리온이 성녀에게 말을 건네자 그를 지켜보던 아난다와 로거가 성녀 옆에 붙어 헤라리온을 경계했다.
이에 성녀가 그들을 밀어내며 헤라리온의 부름에 대꾸했다.
“죄송합니다, 이분들의 역할이 저를 지키시는 것이기에 결례를 범했습니다.”
“아닙니다,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무슨 일 때문에 저를 찾으시는 건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헤라리온 전하?”
성녀의 친절한 대꾸에 헤라리온은 그제야 용건을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용건을 언급하기 전, 헤라리온은 주변 눈치를 좀 더 살핀 후 아까보다 더욱 더 조심스러워진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저…… 다름이 아니고 성녀님께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저에게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제가 지금 이것을 묻는 것은, 혹시라도 저 혼자만의 착각일 수도 있어 성녀님께도 여쭙는 것입니다.”
“전하만의 착각이라……. 그럼 그게 전하만의 착각인지 아닌지는 한번 들어 보아야 알 수 있겠군요.”
성녀는 칸의 긴장을 부드럽게 풀어 주었다.
이에 헤라리온이 용기를 내 말을 잇기 시작했다.
“……성녀님, 키메라 군단이 저희를 덮치기 전에, 그러니까 아서스가 모습을 감출 때쯤 혹시 그에게서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하셨습니까?”
헤라리온의 물음에 성녀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그리고 그것은 로거와 아난다 또한 마찬가지였다.
세 사람은 서로 시선을 주고받고는 서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리네가 헤라리온만큼이나 조심스러워진 목소리로 모두를 대신해 답했다.
“……아무래도 이 이야기는 자리를 옮겨서 나누어야 할 것 같군요.”
“그러시죠.”
사뭇 진지해진 분위기.
이윽고 네 사람은 나머지 일행들에게 양해를 얻은 후 일행으로부터 조금 멀리 떨어진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자리를 옮긴 직후, 먼저 입을 연 것은 다름 아닌 아이리네였다.
“저도 전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긴 했는데……. 혹시 전하께선 아서스로부터 무슨 이상한 점을 느끼셨습니까?”
“저는…… 놈으로부터 분명히 ‘신력’을 느꼈습니다.”
“신력……!”
“역시!”
헤라리온의 입에서 신력이라는 단어가 흘러나오자 곁을 지키던 로거와 아난다의 입에서 깊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에 아이리네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역시 저만 느낀 것이 아니었군요. 그때는 상황이 상황인지라 말을 꺼내지 못한 것도 있었고 전하처럼 확신하지 못해 말을 하지 못한 것도 있었습니다만……. 전하와 저희들의 생각이 같으니 그것은 분명히 신력이 맞는 것 같습니다.”
“역시 저만 느낀 게 아니었군요.”
“물론입니다. 이래 봬도 저희 또한 교단 내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높은 신력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평화교의 신자들로부터 같은 의견을 얻자, 헤라리온의 얼굴이 더더욱 어두워졌다.
이윽고 잠깐의 침묵이 이어졌다.
그리고 침묵 끝에 아이리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전하, 혹시 전하께선 아서스의 신력에 대해 짚이시는 부분이라도 있으십니까?”
아이리네의 질문에 헤라리온은 잠시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개를 들어 올린 후 힙겹게 말을 이어나갔다.
“짚이는 것이 있긴 합니다만……. 제 입으로 직접 말씀드리기엔 워낙에 부끄러운 일인지라…….”
“괜찮습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제가 보아온 헤라리온 전하께선 신의 이름으로 절대 부끄러운 행동을 하실 분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괘념치 마시고 편하게 이야기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성녀의 배려에, 헤라리온은 한숨을 한 번 내쉰 후 나지막이 말을 잇기 시작했다.
“부끄럽지만…… 제가 생각하는 바가 맞는다면, 지금 아서스가 가지고 있는 신력은, 분명히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가 가지고 있던 신력이었습니다.”
“……예?”
“그, 그게 사실입니까?”
“어떻게 그런……!”
헤라리온의 대답에 로거와 아난다, 그리고 아이리네가 경악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로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도 없는 대답을 헤라리온으로부터 들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더 놀란 것은 로거였다.
“마, 맙소사……! 헤라리온 전하, 지금 전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는 건지는 알고나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물론입니다. 그리고 그 신력은 분명히 제가 모시던 신인 샤하트라의 밤과 죽음을 관장하는 어둠의 신, 야누스의 신력이 분명합니다.”
세 사람은 야누스가 어떤 신인지 몰랐다.
하지만 헤라리온이 샤하트라의 수장으로서 평화교의 교황만큼이나 강력한 신력의 소유자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신력의 소유자가 모시던 신이, 타인에게로 이양되었다는 것은 분명히 큰 문제였다.
더군다나 다른 신도 아니고 밤과 죽음을 관장하는 ‘어둠의 신’이다.
이름만 들어도 그 성향이 유추가 가능한데 그러한 힘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필이면 아서스의 손아귀에 들어갔다는 건 정말로 엄청난 문제였다.
이에 세 사람은 한동안 충격에 빠져 침묵을 유지했다.
그리고 긴 침묵 끝에 먼저 입을 연 것은 이번에도 역시 아이리네였다.
“전하, 그렇다면 야누스 신은…… 정확히 어떤 신인지 저희에게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아이리네의 질문에 헤라리온은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무거운 음성을 삼키며 천천히 말을 내뱉었다.
“야누스는…… 안타깝게도 잔인한 폭군의 성향을 가진 신입니다.”
“이런……!”
“허!”
헤라리온의 대답에, 다시금 헛웃음을 터뜨리는 로거와 아난다.
그러나 아이리네의 질문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전하, 그럼 혹시 지금부터 제가 감히 넘겨짚는 것이라면 바로 말씀해 주십시오. 혹시 전하께서 방금 전에 언급하신 ‘모시던 신’이었다는 말씀은, 현재는 그럼 전하께선 야누스 신을 모시지 않고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그리고 헤라리온은 낯빛을 붉히며 대답했다.
“정확히는 모시고 있지 않다는 게 아니라 모실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렸다는 게 맞는 표현일 것입니다. 부끄럽지만……. 저는 얼마 전에 야누스 신의 신위를 박탈당한 것 같거든요.”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신위를 박탈당하다니요?”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저희 샤하트라 왕가는 대대로 샤하트라를 통치하는 단 한 명, 왕만이 야누스를 모실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야누스 신은 저를 제외한 그 어떤 신도도 가질 수 없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한 방침이 생겨난 것은 야누스의 난폭한 성향 때문인가요?”
“그렇습니다. 본디 신력이라 함은 믿음에 의해 얻게 되는 것인데 혹시라도 악한 마음을 가진 신도가 야누스 신의 신력을 얻게 된다면, 그때는 정말로 큰일이 일어나니까요.”
“그럼 신위를 박탈당했다는 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저는 원래 정기적으로 야누스 신의 노여움을 다독이는 제사를 드리는데, 얼마 전의 제사에서 더 이상 야누스 신과 교접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그렇단 말씀은…… 신물 또한 효력을 잃었다는 말씀이십니까?”
“부끄럽게도…….”
“맙소사……!”
신물.
그것은 신의 은총이 깃든 강력한 물건을 뜻한다.
야누스의 경우엔 야누스의 증표라고 불리는 반지가 그랬다.
그리고 보통은 신물을 소지한 자가 그 신의 신도들 중 가장 강력한 신력을 가지게 됐다.
그러나 헤라리온은 얼마 전에 라의 힘을 통해 야누스의 증표가 평범한 반지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말 그대로 갑자기 신력이 사라진 것이었으니까.
그래서 신위를 잃었다고 추측한 것이고.
아이리네가 이어서 질문했다.
“그럼 아서스에게서 야누스 신의 신력을 느끼셨다는 건 현재 야누스 신의 대리자가 아서스가 되었다는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추측은 그렇습니다. 아서스가 저희들에게 보여 주었던 그 힘…… 그 모든 것들이 야누스 신의 권능이었으니까요.”
“그럼 아서스는 대체 무슨 경위로 야누스의 신력을 얻을 수 있게 된 거죠?”
“그 부분이야말로 제가 정말로 궁금한 것입니다. 아무튼 제가 느낀 바는 그렇습니다. 잃어버린 줄로만 알았던 야누스의 신위가 왜 아서스에게서 느껴지는 건지……. 저는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대답을 마친 헤라리온의 표정이 더더욱 일그러졌다.
헤라리온의 얼굴엔 복잡한 감정들이 드리워져 있었다.
분노와 부끄러움, 그리고 수치스러움까지.
한때 신의 대리자였던 인물이, 모종의 이유로 남에게 그 신위를 빼앗겼으니 충분히 느낄 만한 감정이었다.
네 사람의 대화가 끝났다.
그들은 한동안 얼빠진 표정들을 하고서 자신이 보고들은 것들에 대해 충분히 생각할 만한 시간이 필요했다.
“당황……스럽네요.”
이러한 경우는 유라시아 대륙의 종교사에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일이었다.
그래서 아이리네는 진심으로 당황했다.
고개 숙이는 헤라리온.
한동안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이번에는 그 누구도 섣불리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이윽고 한참동안 고개를 숙이며 장고에 빠졌던 헤라리온이 다시 고개를 들며 말했다.
“경위는 알 수 없으나 제가 모시던 신이 아서스의 손에 들어갔으니 제 잘못이 아예 없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당장 이 사실을 모두에게 알린 뒤 마땅한 대책을 강구해야만 합니다.”
“물론 그것이 사실이라면 당연히 말씀드려야겠지만……. 설마, 좀 전에 대마법사님께서 말씀하신 앙켈만 사태에 만약 야누스 신의 힘이 간섭되어 있다면……!”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
아이리네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인간의 상상력이란, 행복할 때보다 최악의 상황일 때 더 빛을 발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아이리네의 의견에 모두가 소름이 돋았다.
야누스의 신력이 간섭된 앙켈만 사태.
만에 하나라도 아이리네의 예상이 맞는다면, 이것은 단순한 흑마술 놀음 따위가 아니었다.
그렇게 되면 제아무리 평화교의 교황이 와도 좀비가 된 시민들을 다시 원래대로 되돌릴 수 없다는 말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아난다가 말했다.
“아닙니다. 아직 모든 건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모든 것이 확실해지기 전까지 괜한 불안감을 조성하는 것은 그다지 좋지 못한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난다 말이 맞습니다. 꺼림칙한 예감이 들긴 하지만 우선은 마법사님과 함께 앙켈만에 가 봐야 확실하게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쁜 상상은 그만두기로 했다.
그리고 한시라도 빨리 추측이 아닌 사실 확인에 나서기로 했다.
괜한 추측은 때때로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키곤 하니까.
두 사람의 의견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네 명의 종교인들이 무거운 침묵을 삼켰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최악의 상황이 아니길 바라면서…….
* * *
네 사람이 자리를 비운 후에도 반의 분풀이는 계속됐다.
그리고 남은 이들은 헨리와 함께 헨리가 물고 온 소식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제기랄,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아서스…… 그 작자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수천의 키메라를 상대한 탓에 모두가 지쳐 있었다.
그런 와중에 맞닥뜨린 거대한 충격은 모두를 절망에 빠트리기엔 충분한 것이었다.
그런데 모두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중, 말을 아끼고 있던 로난이 고개를 들며 말했다.
“저…… 모두들 잠시만요.”
모두의 이목이 로난에게로 몰렸다.
이에 로난이 말했다.
“아서스는 분명히 선물을 보냈다고 했는데…… 만약 그 선물이 앙켈만 하나가 아니라면요?”
“뭐라고?”
“생각해 보면 그렇잖아요, 아서스는 지금 자신이 세운 제국까지 내던진 상황인데 굳이 앙켈만만 콕 짚어서 그런 난리를 피웠다는 건 좀 이상해서요.”
“……!”
간단한 추측, 그리고 잠시간 이어진 침묵.
그 잠깐의 침묵 속에서 모두의 전신에 등골이 서늘할 정도로 끔찍한 소름이 돋았다.
“서, 설마……!”
“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어! 지, 지금 당장 텔레포트를!”
모두가 녹초가 된 탓에 아서스의 의도를 추측하지 못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 등잔 밑이 어두웠던 것이다.
하지만 로난이 자신의 추측을 언급했다.
자리에 있는 모두에게 때 아닌 날벼락이 떨어졌다.
그리고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현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