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3
새로운 탄생 (1)
제국군의 막사.
그곳에는 더할 나위없는 무거운 침묵만이 감돌고 있었다.
군단장들은 흩어져 있었다.
헨리의 말이 사실이라면 킹턴은 총사령관의 자격이 무의미해 지는 것이었고, 페이실링과 세인트 홀 또한 더 이상 제국과 관계를 맺을 이유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은 병사들에게 전염병처럼 퍼져 나가 때아닌 유언비어들을 생성해 내고 있었다.
“제기랄……!”
막사로 돌아온 킹턴은 아서스의 배신에 치를 떨었다.
안전한 동아줄이라고 생각하여 있는 힘껏 움켜쥐었건만 그것은 썩은 줄만도 못한 신기루 같은 것이었다.
책상을 부수고 의자를 부쉈다.
그렇게 해도 분이 풀리지 않자 킹턴은 부관을 시켜 술을 가지고 오게 했다.
이윽고 새 책상과 새 의자, 그리고 술이 담긴 드럼통들이 대거 들어 왔다.
벌컥, 벌컥, 벌컥!
술이 들어오자마자 킹턴은 드럼통 하나를 집어 들어 숨도 쉬지 않고 비워 냈다.
그리고 독한 양주 한 드럼통을 모두 비운 후에야 입을 닦고서 침대 위에 몸을 던졌다.
“망할 놈 같으니……!”
취기가 돌기 시작하자 그제야 좀 진정이 되는 듯싶었다.
하지만 머리는 여전히 뜨거웠다.
킹턴은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 망국보다도 못한 이 시국을 어떻게 펼쳐나가야 되는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황제가 도망쳤다. 아이니아 제국은 왕족이라 부를 만한 놈들도 없고 귀족들 또한 아직까지 제대로 된 서열이 잡히지 않았다. 행정 체계는 또 어떠한가?’
독한 술을 한 드럼통이나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킹턴은 제법 냉철하게 상황을 분석했다.
그 증거로, 보통의 무관이라면 황제가 도망친 것을 기회삼아 자신이 황권을 차지하려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킹턴은 그러지 않았다.
그의 신중하고 안정적인 성격이, 현재의 황권은 독이 든 성배라고 말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의 황권은 독이 든 성배다. 만약 내가 황권을 잡는다고 한들 아랫놈들이 따를지도 의문이고, 급하게 세워진 제국의 황제가 또다시 바뀐다면 제아무리 정책이 좋다고 한들 민심을 잃을 터!’
골치 아픈 문제였다.
그런데 그때였다.
“총사령관님, 제방에서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손님?”
“예, 대마법사 헨리 모리스와 연합군의 군단장들이 찾아왔습니다.”
“뭣이?”
부관의 알림에 킹턴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그것은 세인트 홀과 페이실링의 군단장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제국군의 군단장들 모두가 즉시 수뇌부 막사로 모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실실 눈웃음을 흘리고 있는 헨리가 군단장들보다 먼저 와 앉아 있었다.
“안녕들하십니까?”
“네놈!”
헨리와 장군들을 본 킹턴이 다짜고짜 호통부터 날렸다.
원래대로라면 한 드럼통 따위로 취하지 않을 주량이었지만, 헨리의 얼굴을 보자 현기증이 일며 술기운이 핑 돌았기 때문이다.
이에 뒤늦게 합류한 성녀와 로거, 그리고 아난다가 호통치는 킹턴을 잡아다 끌었다.
“놔라, 이놈들아! 지금 감히 누구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이냐!”
“킹턴 님, 벌써부터 약주를 한잔 걸치신 모양이로군요.”
킹턴의 행패에, 성녀가 가만히 킹턴의 육체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빛 한 줌이 화하게 일더니 벌게진 킹턴의 피부를 원래대로 되돌려 놓았다.
마법사들이 마력의 순환으로 숙취를 해소하는 것처럼 성법으로 술기운을 제거한 것이다.
이윽고 술기운이 사라진 킹턴이 부끄러움에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이어서 알렌과 마실라, 그리고 워커 또한 모습을 보였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책사 마실라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대마법사님?”
마실라는 책사답게 꽤나 침착한 어조로 헨리에게 방문의 목적을 물었다.
이에 헨리는 여전히 방긋거리는 얼굴로 모두에게 말했다.
“싸울 이유가 사라졌는데 여전히 경계들을 하시는군요. 그러지 마시고 편히 마주 앉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저는 지금 여러분께 한 가지 제안을 드리고자 찾아온 것입니다.”
“제안……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아무리 싸울 명분이 사라졌다고는 하나, 불과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칼을 겨누던 사이였다.
그런 사이에서 단순히 명분이 사라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웃는 낯짝으로 교섭을 요청한 걸 보니, 그저 뻔뻔하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이에 마실라를 포함한 제국군 간부 모두가 말을 아꼈다.
그 모습을 보던 맥도웰이 답답한 듯 대신 외쳤다.
“아, 거참, 답답들 하네. 싸울 이유가 사라져서 괜찮은 제안을 하러 왔다니까 뭘 그리 꾸물대고 있어? 안 앉을 거야? 우리 그냥 돌아가?”
“아, 아닙니다! 저희는 그저 이 상황이 좀 어색한지라…….”
“어색은 개뿔, 서로 칼을 겨눌 땐 안 어색하고 테이블 앞에선 내외하냐?”
맥도웰의 다그침에 결국 모두가 자리에 앉았다.
테이블은 원탁이었다.
원탁에 둘러앉은 각 군의 간부들.
이야기의 서두를 꺼낸 것은 이번에도 역시 헨리였다.
“농담을 나눌 분위기는 아닌 것 같으니 본론부터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보시다시피 아서스가 황궁에서 도망쳤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저를 포함해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밖에 모르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만?”
“뭐, 어쨌든 황제가 도망친 것이지 제국이 와해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물론 이대로 가만히 두었다간 황제가 도망친 사실이 금방 들통날 테지만요. 그래서 말인데, 여러분들의 의견을 여쭙기 위해 제가 이곳에 찾아온 것입니다.”
“저희의 의견을 물을 것이 있습니까? 설마, 저희들 중에 차기 황제를 뽑자는 건 아니겠지요?”
차기 황제.
모두가 생각했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던 말.
그런 단어가 마실라의 입에서 떨어졌다.
“맞습니다.”
“……!”
“무, 무슨!”
“허, 허허허……!”
그러나 우물쭈물하던 누구와는 달리, 헨리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마실라의 물음에 긍정했다.
그리고 설명이 이어졌다.
“뭐, 엄밀히 말하자면 차기 황제의 문제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어찌 됐든 지금 당장 제국에는 제국을 굴릴 만한 얼굴 마담이 필요한 실정이 아닙니까?”
“그렇긴…… 하죠.”
“이대로 놔뒀다간 휘하의 귀족들이 너도 나도 영지를 영토삼아 독립을 하겠다고 나설 것이 뻔합니다. 그러니 황권을 교체할 만한 힘이 있을 때 교체해 두는 편이 저는 낫다고 생각합니다.”
말 그대로였다.
걱정만 잔뜩 내세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결국 머리가 잘린 닭은 시들시들 앓다가 죽어 버린다.
그러니 그전에 새 머리를 교체하든 잘린 닭의 목구멍으로 먹이를 넣어 주든 마땅한 대책을 세우자는 이야기였다.
이에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킹턴이 더 이상 듣지 못하겠다는 듯이 꽥하고 소리를 질렀다.
“네놈! 황권 교체가 무슨 애들 장난처럼 쉬운 문제인 줄 아느냐!”
“아닙니까?”
“뭐, 뭣!”
“아서스는 그리하지 않았습니까? 마치 애들 장난인 것처럼 네 편이 어떻고 내 편이 어떻고 하며 편을 갈라 제국을 뒤엎을 계획을 세웠지요. 제가 먼저 황궁을 뒤집지 않았다면 어차피 아서스가 했을 일입니다. 그리고 그런 편 가르기에 동참한 사람들 중에 하나가 바로 킹턴 님이 아니십니까?”
“그, 그건……!”
어차피 원하는 바도 뚜렷했고 아서스도 사라졌다.
게다가 서로에게 칼을 겨눌 이유가 사라졌다고는 하나 그렇다고 그 사람을 배려해 줄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헨리는 가타부타 쓸데없는 말들을 줄이기 위해, 가장 효율적인 화법인 돌직구를 던졌다.
이에 킹턴의 말문이 턱하고 막혔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본 헨리는 웃으면서 말했다.
“무엇을 걱정하시든, 앞으로 아서스가 이 나라에 할 짓을 생각하면 분명히 약과에 속합니다. 그러니 쓸데없는 걱정일랑 마시고 제국의 모든 무력이 한데 모인 지금, 이 자리에서 차기 황제를 뽑는 것이 저는 옳다고 생각합니다.”
제국은 만들어져 있고 그 제국을 주무를 수 있는 자리는 비어 있다.
그렇다고 공평함을 위해 황좌라는 자리 자체를 없앨 수도 없다.
그러기엔 황좌가 가지는 매력이 너무나도 달콤했으니까.
그래서 헨리는 황좌가 가지는 달콤함을 좀 덜어 내고 오로지 담백하게 이용해 먹을 생각이었다.
‘옛말에 이런 말이 있지, 환경이 그 사람을 만든다고. 제아무리 마음씨 좋은 현자라 할지라도 주변 환경이 황좌쯤 되면 사람은 어떻게 변할지 몰라.’
말인즉슨,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헨리는 아이니아 제국의 황좌를 그 누구에게도 넘겨줄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앉는 것도 싫었다.
실버 잭슨이 무능해서 그렇지, 원래 황제라는 자리는 생각보다 꽤나 많은 일을 해야 하는 귀찮은 자리였기 때문이다.
이 자리에서 차기 황제를 뽑는다고 하자 모두들 다시 우물쭈물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이에 답답함을 느낀 맥도웰이 대뜸 의견을 제출했다.
“그냥 네가 하는 게 어때?”
“저 말씀이십니까?”
“그래, 솔직히 말해서 욕망덩어리인 킹턴 저놈에게 시키겠냐, 아니면 잇속을 채우기 위해 정치적인 선택을 한 평화교에게 맡기겠냐? 그것도 아니면 이익 앞에서 의가 갈리는 용병들에게 맡길 생각은 아니겠지?”
가감없는 날것 그대로의 지적이었다.
이에 성녀와 로거, 아난다가 울컥했지만, 사실상 맞는 말이라서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더욱 억울했다.
그러나 마실라는 달랐다.
“용병들이 어때서요?”
“뭐?”
“이익 앞에서 의가 갈리는 건 비단 용병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그렇지 않나요? 특히 정치 놀음하는 인간들이 그런 쪽으론 이골이 난 걸로 알고 있는데요?”
마실라는 성심성의껏 맥도웰의 말을 반박했다. 그리고…….
“그래서 말인데, 저는 차라리 알렌을 추천합니다. 알렌은 페이실링의 수장이 된 이후, 단 한 번도 용병왕의 자리에서 내려온 적이 없었을 뿐만이 아니라, 동시에 페이실링의 관리자직 또한 훌륭히 소화해 냈습니다. 왕의 덕목이 별것입니까? 자기관리에 철저하고 아랫사람 관리에 능하며, 동시에 인망까지 넉넉하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실라는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었다.
마치 어느 모임의 장을 뽑는 자리에서 지인을 추천하는, 아니 자기 자식을 추천하는 극성 부모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녀의 말 속에는 논리가 있었고 근거가 있었다.
이에 헨리는 재미있다는 듯이 알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모두의 시선이 알렌에게로 몰렸다.
“어, 어?”
그러자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는 듯, 팔짱을 끼고 경청하던 알렌은 짐짓 당황한 표정으로 쏟아지는 시선에 움츠러들었다.
그런 알렌을, 헨리는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며 물었다.
“어떻습니까, 알렌 님? 마실라 님께서 저렇게 열심히 추천하시는데, 당사자인 알렌 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저, 저는…….”
말끝을 흐리는 알렌.
모두의 이목이 다시금 몰렸다.
그리고 알렌이 대꾸했다.
“저는 황좌에 관심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알렌!”
“가만히 있어, 마실라! 이야기가 재미있어서 가만히 듣고 있었는데 황제는 무슨 황제야, 내가! 난 싫어, 그런 자리. 그리고 지금 페이실링에서 내가 해야 하는 업무의 대부분도 실은 네가 대신 해 주고 있잖아?”
“그건……!”
“그렇군요. 그럼 이야기가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 온 건가요?”
헨리의 빠른 정리.
그러나 맥도웰이 딴지를 걸었다.
“원점은 무슨 놈의 원점? 그냥 네가 하라니까? 대륙 유일의 7서클 대마법사에, 와해될 뻔했던 동맹국들을 한데 모아 제국군에 맞선 리더십까지 갖추고 있고, 대공의 수제자였으니 정통성도 갖추고 있잖아.”
맥도웰은 다시 한 번 의견을 내놓으면서 자신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그리고 헨리는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사실, 성질이 급한 맥도웰이 저러한 반응을 보여 줄 것이란 걸 미리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맥도웰이 탁자 위의 사람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다들 이의 있어? 사실 헨리가 아니었다면 아서스를 내쫓지도 못했을 거 아냐? 아니, 그 전에 아서스 그놈이 키메라나 다루는 더러운 놈이란 것도 평생 동안 몰랐을 테고.”
“그건 그렇지만…….”
“그럼 됐네. 사실상 마법사들도 헨리가 다 데리고 있는 마당에 헨리가 황제가 안 되면 누가 될 거야? 설마, 다들 마법사들을 포기할 생각은 아니지?”
헨리는 가진 게 많았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마법사들.
헨리가 나쁜 마음을 먹고 마법사들을 독점하고 통제하기 시작한다면, 마법사들에 의해 시중에 유통되던 마도구들은 더 이상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공격적이었지만 제법 날카로운 논리였다.
그리고 그런 논리를 근거로 든 맥도웰의 의견에 모두들 이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이에 헨리가 말했다.
“하하, 죄송합니다, 형님. 안타깝지만 저도 황좌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뭐얏?”
“대신!”
헨리는 화들짝 놀라는 맥도웰의 반응을 단칼에 잘랐다.
그리고…….
“추천할 만한 인재는 있습니다. 야욕이 없고 일을 잘하며 오랫동안 저를 도와 온 친구가 하나 있거든요.”
“그게 누군데?”
“텐입니다.”
“뭐어?”
헨리의 발언에 회장은 다시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